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 31절에서 37까지 입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증언이 참인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내가 하는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아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파격적인 선포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내가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표현하는 것임을 우리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도할 종종 사용하는 ‘여호와’라는 성호는 감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다가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반드시 쓰던 붓을 빨아 정결하게 뒤에야 다시 적기 시작했을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은 지극히 두렵고 떨리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이름을 부르는 대신 ‘아도나이’라고 발음하며 경외를 표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 사건은 그들에게 형용할 없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신이 어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느냐”라고 항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제에 대하여 논증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행하는 것이 없으며, 아들은 스스로 행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행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생명을 주시듯 아들도 생명을 주며, 심판하는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음을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아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본문 앞선 구절부터 계속해서 역설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언과 실존적 무게

여러분, ‘심판한다’는 말은 창세기 18 25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심을 나타낼 사용됩니다. 결국 우리를 심판하실 있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뿐이며 그분만이 심판권을 소유하고 계시는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가지신 심판권이 자신에게 이양되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선언의 결론이 너무나 자명했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죽여야 것인가, 그는 지금 참람하게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라는 분노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주장이 그리 엄청나게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구나’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유대 땅의 서른 청년이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선언입니다. 그는 육신을 입은 청년일 뿐인데, 오직 하나님만이 행사하실 있는 권한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와 여러분은 참으로 엄중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반대로 이것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종교적 사기꾼을 마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극단적인 선택지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고민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일종의 상징이나 의미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이에게 읽히기도 했는데, 주장의 요지는 성경의 기록이 사실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가치를 전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어머니의 생신 잔치에서 청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실제로 하지 않은 일을 마치 하신 것처럼 이야기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즐거워할 , 이야기가 끝난 뒤에 “정말로 어머니가 그렇게 하셨느냐”라고 따져 묻지 않습니다. 생신 잔치라는 목적에 맞게 모두가 기쁘게 지냈다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 또한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드러내기 위한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자 문학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현대에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성경의 엄중함

성경을 문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경직된 태도를 버리도록 돕는 측면이 있습니다. 성경을 마치 육법전서 읽듯 딱딱하게 대할 때가 있는데, 성경은 본래 풍부한 감성과 역사적 배경을 담고 있는 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라는 표현은, 마을 인구가 정확히 명인지 수학적으로 계수하여 그들 모두가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동네의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또한 성경은 지구가 돈다고 표현하지 않고 태양이 뜬다고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천동설을 믿는 비과학적인 책인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천동설과 관련한 갈등이 빚어진 것은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오해했기 때문이지, 사실 당대의 현명한 신앙인과 과학자들은 그러한 문제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계시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기록을 단순한 문학적 상징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있습니다. 여기에는 흔히 ‘오류(Fallacy)’라고 부르는 논리적 비약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생신 잔치에서 일어난 해학적인 일화와 성경의 기록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잔치 자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도 즐거울 있지만, 성경이 선포하는 주제는 죽음과 생명에 관한 것이기에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모든 주장이나 비유는 내용이 지닌 심각성에 따라 다루어져야 합니다. 잔치에서 흥을 돋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를 두고 사실 여부를 묻는 이는 없겠으나, 만약 즐거운 대화 중에 “우리 당숙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경위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없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나 비유, 혹은 과장으로 치부될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루시는 주제는 바로 우리의 생명과 죽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할 것이다”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며, 우리가 웃으며 넘길 있는 성질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만약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실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신 이상자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였거나, 아니면 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종교적인 사기꾼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결코 심심풀이로 논할 주제가 아니며, 문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만약 지난 2,000 동안 인류를 붙들었던 생사권의 메시지가 그저 예수님의 위대함을 부각하기 위한 허구였다면, 우리는 사도 요한의 무덤을 파헤쳐서라도 책임을 물어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심숙하게 대해야 마땅합니다.

 

참된 증거로서의 십자가와 자기 부인

옥스퍼드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던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 우리는 예수가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거나 중의 하나라는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가 다루는 주제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두고 과장법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생사가 달린 이야기를 그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기교로 기록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용납할 없습니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나 제자들을 정신 이상자 혹은 사기꾼이라 부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볼 그들은 결코 정신 이상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카르포스나 이레네우스가 남긴 수많은 기록에는 요한이 광기에 사로잡혔다는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말년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청년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선포한 역사적 실체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침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이는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그를 치려 만큼 심각한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여러분과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유대인들과 같은 진지한 태도를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문제에 대해 주님은 가지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역사이고, 셋째는 아버지의 증거이며, 마지막은 구약 성경의 증거입니다. 오늘은 그중 번째와 번째 증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31절에서 주님은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칭하는 자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보다 낮은 존재의 증거를 구걸하실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의 능력이나 신분, 권위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십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그분을 믿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라”고 하시기보다, “내가 하는 일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세를 증명하려 하셨다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능력을 과시하셨을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의 수종을 받음으로써 사탄의 기를 꺾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자신을 입증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이나 말씀의 지혜만으로는 우리를 온전히 구원할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권능을 휘두르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구원의 역사

예수님에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땅에 오신 목적이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결코 훌륭한 가르침으로 우리를 설득하거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보려다가 사회적 저항에 부딪혀 차선책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죽음을 택해 민중을 선동하겠다’는 식의 사고는 주님께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죽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주님의 죽음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죽고 다시 사시는 역사가 없다면, 그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가 만연하여 여러 주장이 제기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종교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들을 비하해서는 된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양보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은 그분이 진리를 전달하시는 독특한 방법이지, 단순히 가르침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흔히 구원의 길을 두고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단편적으로 결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르침이나 자비의 정신은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도 존재합니다. 가르침의 유사성 때문에 결국 모든 종교가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고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가르침만큼은 훌륭하다고 여겨 이를 따르려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인도의 간디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힌두교나 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고, 세상은 그를 성인 명으로 추앙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간디가 보여준 길이 인간이 따를 있는 진정한 구원의 길입니까? 인류 역사 속에 남보다 고결하고 뛰어난 이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조차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더 테레사 역시 자신을 완전한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담대히 선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을 존중할 수는 있으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어떤 뛰어난 가르침을 통해서도 주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할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완벽히 지키고 따라올 있는 인간은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가르침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 동안 신발과 옷이 해지지 않도록 인도하시고 직접 먹여 살리셨음에도, 인간은 끝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10 동안 하나님이 직접 생계를 책임져 주시는 기적을 체험한 셈인데, 그렇다면 목숨 다해 하나님을 따라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구약의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좇는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율법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선한 법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읽어보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킬 있는 가장 아름답고 선한 도리임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도리어 자신의 자랑으로 삼았고, 세리와 창기처럼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멸시했습니다. 이러한 위선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않았다 하나 형제를 욕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 자요, 죄를 남보다 적게 지었을지는 모르나 죄로 인해 우리 모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 가르침의 본질입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를 설득하거나 이해시켜서 깨끗하게 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말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것을 내가 알기에 말을 한다. 그러나 내가 죽고 다시 살아날 때에야 비로소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것이며, 그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초지일관된 태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사람의 평판에 기대지 않으셨고,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하거나 대중을 선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일은 제자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추종자가 주님을 따랐으나, 명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히 깨달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연약한 우리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스스로 증언하지 않는다" 하시면서도 세례 요한을 예로 드십니다. 본문 33절을 보면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하셨습니다. 요한이 진리를 증언했음에도 증언을 취하지 않으신다면서 굳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셨을까요? 그것은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오실 메시아를 선포하는 사명을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35절에서 그를 가리켜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부르셨습니다. 요한은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켜진 등불로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수행한 증언의 본질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의 증거보다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36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내가 하는 역사가 나를 증언하는 "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역사’란 단순한 기적이나 탁월한 가르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을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34절에서 모든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이라고 명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루시는 역사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일입니다. 권위나 능력, 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욕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종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매이지 않는 복음과 성도의 영광된 자유

성경은 주님만을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또한 동일한 부르심 앞에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권세를 포기하신 땅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이를 가리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인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은 길을 홀로 걷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성도에게 있어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쁨과 놀라운 이적을 경험했느냐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셨고, 진정한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신 분임을 부인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입으셨기에, 사도 바울 또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부인하며 “나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고백할 있었습니다. 바울의 삶을 보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빌립보서는 그가 감옥에 갇힌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럼에도 빌립보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조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도저히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감옥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무엇이 그리 기뻐서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칠 있겠습니까?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돕기 위해 성도들이 헌금을 모아 전달했을 때의 반응입니다. 바울은 성의를 보고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너희가 도움을 주든 주지 않든 상관없는 사람이다”라고 다소 냉정해 보일 만큼 단호하게 말합니다. 누군가를 지극정성으로 도와본 분들이라면 말이 얼마나 섭섭하게 들릴지 아실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 공궤했더니 “그것 없어도 있다”라고 답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이어 진의를 덧붙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목회자에게 대접할 목회자가 기뻐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그러한 방식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웅장해지는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일하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특하게 여기십니다. 자녀가 전교 일등을 했다는 결과보다, 과정을 통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을 깊이 알아갔다는 사실에 하나님은 진정으로 기뻐하십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얻고 칭송받는 자체보다, 삶의 자리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평안할 있었던 이유는 진정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록 감옥에 매여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확신이 그를 자유하게 했습니다.

 

환경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일하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타국 땅에서 저마다의 삶을 일구어 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으셨겠지만, 어떤 분은 여전히 삶의 무게에 비틀거리며 하루하루를 버거워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깊은 불경기 속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상황은 마치 감옥에 갇힌 바울처럼 사방이 막막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환경에 매여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약속은 어떤 고난에도 매이지 않으며,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하늘의 자유 또한 결코 구속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중단됨이 없으며,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결국 이루고야 마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처한 현실은 고단하고 눈물겨울지라도,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면, 그리고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승리할 것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감사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봅시다. 성공이라는 허상을 좇는 인생이 아니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면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참된 기쁨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가 삶에 개입하시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을지라도,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힘을 냅시다. 환경 앞에 굴복하거나 넘어지지 맙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그분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우리 주님은 결코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매이지 않는 주의 말씀이 여러분을 구원하셨으며, 구원의 풍성한 결실이 여러분의 생애를 통해 장엄하게 완성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크신 사랑을 허락하시나이까.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줄조차 모르는데,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환경에 매여 매일 넘어지는 자들처럼 보이나, 사도 바울은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우리를 증명하는 것은 세상의 힘과 권세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이 아닌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하셨듯이, 우리 또한 비록 상황에는 매여 있을지라도 결코 매이지 않는 주의 말씀을 붙들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사랑이 어떤 형편에도 매이지 않음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은총이 차고 넘치도록 매이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강한 손이 결코 매이지 않음을 찬양합니다. 눈앞의 환경은 기가 막힐지라도, 하나님의 손은 쉬지 않으시며 주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습니다. 확신이 있기에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귀하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신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성령님,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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