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47절 까지 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보이지 않는 진짜 기차와 우리의 시선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장난감을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장난감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당시 저희 동네 문방구 유리창 너머에는 조그마한 미니 기차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악하기 그지없는 장난감이었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무엇보다 갖고 싶은 보물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문방구를 찾아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그 기차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저것을 반드시 사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기차를 쳐다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아이에게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부모님께 간절히 조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외국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님께서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에 홍콩에 들러 선물을 사 오곤 하셨는데, 아버님께서는 기차 노래를 부르던 저를 위해 정말 커다란 ‘미제 기차 장난감’을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공항으로 마중을 나간 저에게 아버님께서는 기분을 맞춰 주시려 "네가 좋아하는 기차를 사 왔다"라고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는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제 머릿속에는 오직 동네 문방구 유리창 너머에 있던 그 작은 미니 기차 생각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아버님의 손을 놓고 문방구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그 미니 기차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버님께서 "그건 아주 조그만 것이고, 여기 훨씬 좋은 기차가 있단다"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가방에서 커다란 기차 장난감을 통째로 꺼내 제 옆에서 보여주셨지만, 저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직 문방구의 미니 기차만을 응시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곁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긴 눈에는 진정 소중한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느라 들리지 않는 복음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자신들을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건져줄 해방자를 고대하고 또 고대했습니다. 그들이 바랐던 메시아는 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자신들에게 영광과 기쁨, 나아가 부와 권세를 쥐여줄 정치적 승리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을 보았노라 말하며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행하는 일들은 유대인들이 원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눈앞에 계신 메시아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와 비슷한 형편일 때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 그분 자체보다는 우리의 관심이 다른 곳에 머물러 있을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병이 낫고, 어떻게 하면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인가에 온 마음을 쏟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너무나 쉽게 현혹된다는 점입니다. 심지어는 그런 기복적인 약속 앞에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일들이 오늘날에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그러한 미혹에 빠져드는 이유에 대해 성경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일을 우리 내면에서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영광과 기쁨을 허락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그 본질적인 역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늘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들리지조차 않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는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님의 선포가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도무지 읽히지 않는 것입니다.
기복주의 신앙과 부동산 중개업자가 된 예수님
성경을 읽을 때도 매일같이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와 같은 구절만 눈에 들어옵니다. 심지어 이 말씀을 받아들일 때조차, "영혼이 잘되어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돈도 잘 벌고 사업도 번창하는 복만 남았다"라는 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전인수격 해석을 해버립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영광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예수님을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저 그분의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데에만 급급하니, 그 유명한 산상수훈이나 팔복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결국 기복적인 시각의 틀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읽고서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복을 주셔서 실제로 부동산을 차지하게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명분 삼아 땅을 삽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땅값이 정말로 오르는 일이 생깁니다. 오십 배, 백 배로 뛰어올라 큰돈을 벌게 되면 어김없이 간증의 자리가 마련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땅을 샀더니 주께서 축복하셔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하셨다"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움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예수님을 순식간에 부동산 중개업자로 전락시키는 모습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진정한 축복과 우리 기도의 주소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만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그 영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수많은 진정한 축복 또한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참된 축복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는 이 세상이 던지는 온갖 유혹과 아픔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기도회를 열어 기도의 제목들을 나누어 보면, 대개 비슷한 제목들이 주를 이룹니다.
가장 많은 것은 단연 "자녀를 위한 기도"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제목입니다. 한국의 상황이라면 입시 문제나 청소년 비행, 혹은 가정의 여러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곤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또한 병이 낫기를 간구하며 기도의 자리에 모이기도 합니다. 이 역시 선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맙시다"라는 제목으로 모이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회개합시다"라는 기도 제목 또한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에도 그런 제목을 내걸고 기도회를 연다면 아마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가 오겠습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자"니요. 당장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어디서 돈벼락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형편인데, 그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니 누가 반가워하겠습니까? 사업하시는 분들께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드리면, "목사님, 우리더러 어쩌란 말씀입니까? 그럼 돈을 벌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라고 당장 반문하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뜻은 경제 활동을 멈추라거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제목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영광을 취하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고소와 율법의 함정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모세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45절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바란다는 것은 곧 그들이 율법을 바란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율법 준수가 곧 자신들의 구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유대인들이 그토록 율법을 신뢰하며 살았다면 그들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과연 누가 더 잘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성전 앞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거나 금식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며 큰 소리로 감사 기도를 드린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율법과 법규들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나는 당신보다 이만큼 더 열심을 내고 있다"라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누가 더 우월한가, 누가 더 율법에 충실한가"를 두고 소모적인 싸움을 벌인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러한 싸움에 휘말리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입술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누가 더 기도를 많이 하는가", "누가 더 봉사를 잘하는가",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는 왜 하지 않느냐" 하는 식의 비교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좀 더 고상한 모습으로 "누가 더 선하고 착하게 사는가, 나는 정직하게 사는데 당신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라며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태도는 결국 율법이라는 함정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 모르나 근본적인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람들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는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부인하려 해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칭찬과 명성을 얻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참 좋아서 정말 선하게 산다"라는 평가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비교를 통한 자기 의의 허망함
우리가 율법을 조금 더 잘 지키고, 남보다 조금 더 깨끗하게 살며, 거짓말을 덜 한다는 것이 사실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인지는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노라 자부하자 바울이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율법을 지키려거든 항상 모든 것을 다 지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너희 또한 똑같이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가 남들보다 조금 더 낫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고소'입니다. 모세가 고소한다는 말은 곧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진정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느냐? 그렇다면 이 율법을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켜내라.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너희를 고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살면서 흔히 "그래도 나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예수 믿는다고 말하면서 저 목사님이나 장로님, 혹은 저 집사님처럼은 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기본은 지킬 줄 안다"라며 스스로를 위안 삼을 때가 참 많습니다. "나는 그래도 이런 선행을 한다" 혹은 "나는 적어도 이런 악행은 저지르지 않는다"라는 기준을 세워 놓고 스스로 안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러한 태도를 가리켜 가장 무서운 죄라고 경고합니다.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의를 챙기려는 그 마음 말입니다.
바리새인의 감사와 세리의 통회
여러분,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기도했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이 유명한 비유는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기도 중 예수님께서 의롭다 칭하신 이는 뜻밖에도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이 드린 기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는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타인과 비교하여 얻은 도덕적 우월감을 감사의 제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라고 안도하는 마음이야말로 주님께서 경계하시는 가장 커다란 죄의 뿌리입니다. "나는 그래도 예수를 믿어 남보다 나은 형편이고, 제법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신앙인에게 가장 위험한 독소와 같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을 드리며 목회자의 권면에 순종하는 삶이,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쌓는 도구가 되어 본질적인 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평소 지니던 생각에 깊은 경종을 울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한다"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는 수식어에 너무 쉽게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런 종교적인 언어를 자주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앙적인 태도를 갖춘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 역시 입술로는 늘 감사를 고백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백이 진정 자기 영광을 취하기 위한 수단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머금은 실제인지의 여부입니다. 그 중심이 바로 서 있을 때에만 우리의 감사와 영광 돌림이 비로소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율법이 고소하는 교만과 회칠한 무덤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에 머문다면, 성경은 모세의 율법이 우리를 고소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는 오늘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라는 공로 의식을 품고 있다면, 그 율법이 여러분을 고발할 것입니다. "남들보다 깨끗하게 살려 노력했다"거나 "다른 이들처럼 악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라는 자부심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면, 하나님의 법은 도리어 여러분의 숨은 죄를 낱낱이 드러낼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인간적인 판단 기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선포합니다.
바리새인을 향한 성경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겉으로는 경건의 형식을 완벽히 갖춘 듯 보이나, 그 내면에는 "나는 타인보다 우월하다"라는 교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지적입니다. "네가 아무리 애쓴들 나의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 우리가 내놓을 답은 오직 "없습니다"뿐입니다. 은혜의 말씀을 듣고 자책에 빠지는 분들 중에는 "나는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이 모양일까"라며 실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함이 아니라 꺾여버린 '자기 의'에서 비롯된 회한이라면, 율법은 다시금 우리를 고소할 것입니다. "과연 네 힘으로 선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는 강렬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단장되어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속은 부패한 시체의 냄새로 가득하다는 준엄한 진단입니다. 외형적인 신앙생활은 번듯할지라도 내면에는 여전히 죄악의 악취가 진동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결코 남과 비교하여 나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선한 삶을 지향할 뿐이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 고백이 진실하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의 시선을 넘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증거이기에 참으로 귀한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발견하는 누더기 의복
참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창조주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고백을 터뜨리게 됩니다. 내가 행한 선한 일들과 바르게 살려 했던 모든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는 빛나는 의복이 아니라, 오염된 누더기와 같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압도적인 거룩함 앞에서 인간의 의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던 세리의 기도를 자신의 고백으로 삼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산상수훈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한 백부장을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군대 조직의 질서를 비유로 들며 오직 주님의 권위만을 신뢰했던 이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놀라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며 극찬하셨습니다.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하며 오직 주님의 말씀 능력만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믿음의 본질입니다.
백부장의 믿음과 주권의 고백
우리가 흔히 본받아야 할 믿음의 귀감으로 꼽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백부장의 일화입니다. 우리는 대개 "예수님께서 왜 이 사람을 그토록 칭찬하셨을까"를 묵상하며, "주님, 저희 집까지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도 낫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그의 확신을 '큰 믿음'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단순히 확신의 강도가 믿음의 크기를 결정하는 척도라면, 이보다 더 큰 믿음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셔도 나을 줄 믿습니다"라고 하거나, 한술 더 떠 "주님, 바라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저를 한번 생각만 해주셔도 병이 깨끗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훨씬 더 대단한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이런 방식으로 믿음의 크기를 겨루곤 합니다. 내가 얼마나 더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있는지, 혹은 얼마나 강렬한 확신을 품고 있는지를 믿음의 수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의 영역에서도 묘한 경쟁이 벌어집니다. 누군가 "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다"라고 간증하면, 옆 사람은 "나는 나을 줄 미리 믿고 일어났더니 이미 나아 있었다"라고 응수합니다. 또 다른 이는 "나는 이미 나은 줄로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하고, 마지막 사람은 "나는 이미 완쾌되어 식사를 마치고 출근 준비까지 마쳤다"라며 자신의 확신을 과시합니다. 도대체 이 중 누가 진정으로 큰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뒤로 갈수록 더 견고하고 대단한 믿음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의 이야기는 그런 식의 주관적인 확신이나 열정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오시기도 전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장담했기에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목하신 믿음의 핵심은 "오지 않으셔도 낫겠습니다"라는 호언장담이 아니라, 이어지는 그의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말씀에 진정한 핵심이 있습니다. 즉, "주님, 저는 주님의 군사입니다. 주님은 나의 대장이시니 그저 명령만 하십시오. 병이 나으라 하시면 나을 것이요, 그리 아니하셔도 오직 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오며, 죽으라 하시면 죽겠습니다. 저는 오직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종일 뿐입니다"라는 전적인 항복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큰 믿음'의 본질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이 고백을 통해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통치만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리처럼 통회하며 엎드릴 수 있고, 백부장처럼 온전한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군사요, 주님은 나의 영원한 대장이십니다."
율법의 참된 목적과 그리스도의 영광
모세의 율법 또한 결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46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실상 모세를 제대로 믿지 않았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하셨으나, 그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리와 백부장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처절하게 고백했습니다. 스스로 내는 인공적인 빛이 아니라,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앙망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원리는 이토록 명쾌하고 단순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우리 마음에는 쉽게 와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오늘부터 간절히 철야 기도를 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쟁취합시다"라고 권면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그래, 오늘부터 기도로 승부를 보자. 산에 올라 밤을 지새워서라도 성령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라며 전의를 불태우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 선포합니까? "내가 이미 너에게 복을 주었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열심으로 무언가를 탈취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자에게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영광을 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율법을 실질적인 의미에서 믿는 사람이 됩니다. '율법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해 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직 주님의 군사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주인이자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께 자신의 전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고백입니다.
율법의 고소를 넘어 그리스도의 품으로
여러분, 혹시 지금 스스로 양심의 법이나 율법의 조항들을 나름대로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하십니까? "나는 그래도 예수를 믿으며 이만큼은 행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평안을 누리며, 은연중에 그것을 마음의 자랑으로 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속히 그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그것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썩은 다리와 같습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행하고 있으니 안전하다"고 믿는 그 자부심에서 속히 돌이키셔야 합니다. 오히려 세리처럼 "내가 알고 있는 율법이 도리어 나를 심판합니다. 내 양심의 가책이 나를 옥죄어 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옵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고백하는 낮은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대장이 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떠한 심판 앞에서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때는 율법도, 양심도 결코 우리를 고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고한 피난처 안에 거하기에,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며 양심 또한 우리를 고발하지 못합니다. 내 안의 욕심이 나를 멸망으로 이끌 수도, 나를 무너뜨릴 수도 없게 됩니다. 어떤 분은 "그러면 욕심을 마음껏 부려도 괜찮다는 뜻입니까?"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셔서, 더 이상 욕심에 휘둘리지 않도록 친히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에게 "이제 구원받았으니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방임하시는 법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성도의 삶 속에서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빚어지는 거룩한 싸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의 인생을 붙드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욕심과 맞서 싸우게 하십니다. 우리 내면의 추한 모습과 온갖 죄악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죄들로 인해 슬퍼하게 만드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고 결단하며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죄를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죄를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할 기회가 찾아와도 우리는 한 번 더 인내합니다. 이는 남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지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쓰러지고 넘어져 마음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정직하게 살려고 애를 쓰며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와 눈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나 연약하여 다시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제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저의 이 연약함을 도와주옵소서. 이 죄와 맞서 싸우게 하시고, 피 흘리기까지, 아니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만약 우리 안에 이러한 영적 몸부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경한 모습일 것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성도의 삶과는 거리가 먼, 참으로 안타까운 자리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유일한 피난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며 무엇이 가장 두려우십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은 직장을 잃는 것도, 몸담은 회사가 부도가 나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불치병에 걸려 육신의 생명을 잃어가는 것 또한 가장 두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 전체를 판단받아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만일 그때 여러분이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이 지킨 율법을 내세우거나, 평생 양심을 따라 행한 공로를 의지해 하나님 앞에 선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으로서 그 정도 애썼으면 충분하다. 그 연약한 본성으로 그만큼 한 것이 어디냐"라며 적당히 타협하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그렇게 불완전하고 악하게 창조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참으로 아름답고 선하게 지으셨으나, 인간 스스로 죄를 불러들이고 그 죄에 함몰되었습니다. 그러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도무지 변명할 말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망의 순간에 여러분이 그리스도께로 피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모든 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성령님께서 제 마음을 감동하게 하시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결코 뿌리치지 않도록 저를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간구하며 나아가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죄와 대항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눈물을 쏟기까지 치열하게 싸우며 그리스도의 품으로 숨어들었다면, 이제 담대히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주님, 이 십자가를 보시옵소서. 이것은 주님께서 저를 위해 행하신 일이 아닙니까? 저는 이제 제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저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살고 있습니다. 제 것이 아닌 오직 주님의 것을 의지하여 서 있사오니, 주여 저를 받아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렇게 그리스도께 피한 모든 사람에게는 단언컨대 그 무엇도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양심도, 끊임없이 솟구치는 욕심도, 여러분의 마음을 흔드는 사탄의 유혹도, 그 어떠한 세력도 결코 여러분의 인생을 뒤흔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이미 자신의 모든 허물이 용서받았음을, 그리고 그 사랑 안에 안전함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은총과 복음의 긴박함
여러분, "죄를 사한다"는 말의 참된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셨습니까?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한계 속에서 스스로를 의지할 때, 그 죄를 씻어낼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쌓아온 수많은 허물과 연약함, 그 내면의 더러움을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주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은총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압니다. 용서의 무게를 알기에 비로소 이웃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날 선 율법을 휘둘러 자신은 물론 타인의 마음을 할퀴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는 처지였음을 뼈저리게 알기에,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도 함께 주님의 품으로 피하자고 간절히 권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실 그날,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평범한 사람이 판단해도 허물이 많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점이 가득한데, 만약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판단하신다면 과연 그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속히 이 피난처로 피하십시오. 어서 빨리 함께 갑시다. 우리가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고, 어떻게든 이끌어오려 애쓰며, 눈물로 호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남보다 잘나서도 아니고, 대단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인생의 마지막에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있으며,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판단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는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며, 그 준엄한 판단으로부터 영혼을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지옥 같은 훈련을 이겨낸 자의 눈빛
여러분, 혹시 지금 마주한 삶의 문제가 너무나 커 보인다면 이 이야기를 기억해 주십시오. 군대 중에서도 가장 고된 곳을 꼽으라면 단연 해병대일 것입니다. 제가 해병대 출신들에게 들은 무용담 중에는 조금 과장된 부분도 있겠지만, 한 번은 이런 훈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갯벌을 끝도 없이 달리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더랍니다. 도저히 한 걸음도 더 뗄 수 없어 그 자리에 쓰러졌을 때, 교관이 달려와 욕설을 퍼부으며 일으켜 세우자 그는 대검을 꺼내 던지며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십시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여달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그러나 그 지옥 같은 훈련을 마친 장병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갓 훈련을 끝내고 나온 그들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이 납니다. 몸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백이 느껴집니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심판이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이 떨어져 모든 이가 멸망했던 그 심판보다 더 두려운 것, 곧 우리가 지은 죄와 절망으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무서운 심판을 능히 견디고 이기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대체 이 세상의 무엇을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그 거대한 심판의 파도를 넘어선 사람의 마음이라면, 당연히 하늘이 주는 자신감과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 무엇이 감히 여러분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 지옥 같은 심판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완전한 해방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위대한 성경의 선언을 마음속 깊이 새기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의 연약한 육신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기에 율법이 실패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 몸에 우리의 죄를 대신 선고하셨습니다. 이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오직 이 주님만이 여러분의 힘이 되어야 하며, 오직 이 주님만이 여러분의 유일한 만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원의 신비보다 더 귀하고 복된 것을 저와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다. 이 진리를 소유한 자는 어깨가 펴지고 눈빛이 살아나며, 그 얼굴에 환한 빛이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이 주님의 은혜 앞에 작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던 세상의 풍랑도,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주님이 대신 받으시고 나를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품에 안으셨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그저 시시해 보일 뿐입니다. 세상의 환난은 결코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나의 아픔도, 나의 연약함도, 나의 사역도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오직 주를 찬송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그 영광과 놀라우심을 다시 한번 찬양합니다.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우리가 어디서부터 건짐을 받은 자들인지 되새겨 봅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 그것을 쫓는 삶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방황하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의 대장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대신 짊어지셨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시요 나의 산성이시며, 대장 되신 주님 앞에 나의 병기도, 나의 갑옷도, 그리고 나 자신마저 모두 속해 있습니다.
나의 고민도, 내가 겪는 내면의 갈등도, 이곳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어려움도 이제는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어찌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오직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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