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 10절에서 18 까지 입니다.

 

유대인들이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아멘.

 

은혜의 집에서 사라진 은혜와 예수님의 등장

우리는 지난 시간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데스다라는 명칭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으나,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쉽게 풀이하자면 ‘거저 준다’는 의미와 상통합니다. 우리 측면에서는 어떠한 조건이나 원인 없이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습성에 익숙한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게 다가올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받았거나 축복을 누릴 ,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로 나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나름의 이유를 찾아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주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의 조건이나 원인과 무관하게 결과가 나타난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은혜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 또한 그러합니다. 진정한 은혜의 집이라면 조건 없는 자비가 흘러넘쳐야 마땅하겠으나, 이상하게도 그곳에서는 물이 움직일 때마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을 얻는다는, 은혜와는 전혀 무관한 ‘누가 먼저 들어가는가’라는 경쟁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나 성도들의 자화상과도 무척 흡사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로 함께 모여 은혜의 장소에 왔음을 고백하고 감사와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일상은 내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는지를 따지며 다투고 걱정하는 모습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내의 경쟁과 은혜의 부재

누가 많이 봉사했는지, 누가 많은 사람을 전도했는지, 혹은 누가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를 따지며 가자미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거나, “사랑하라 하셨는데 사랑하지 않느냐”라며 다툼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분명 은혜의 집으로 모였건만 무언가 중요한 가지가 결여된 것입니다. 결국 은혜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모여서도 누가 능력이 있고, 누가 힘이 세며, 누가 높은 지위를 가졌는지를 두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정당한 이유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도들이 스스로 몸을 낮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들이 교회에 오면 제게도 가끔 “저분은 밖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신 분이니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전도하고 싶은 열망에서 나오는 마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가 얼마만큼 능력을 갖추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기준이 된다면 교회는 은혜로 사는 곳이 아니라 능력으로 사는 곳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그때는 교회의 이름이 아닌 세상 회사의 간판을 걸어야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통해 우리는 은혜의 집에 결정적인 결핍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다름 아닌, 은혜의 집에 정작 은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예수님을 등장시킵니다. 주님께서 그곳에 가신 것은 이유 없이 지나다가 들르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음을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곳에서 38 동안 앓아온 중풍 병자를 만나셨습니다. 여러분, 38년이라는 세월입니다.

 

안식일의 논란과 유대인의 시선

38 동안 움직이지도, 자신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도 없던 병자를 주님께서 고치심으로써, 그분이 바로 은혜의 집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그곳에 있던 물이 아니라, 주님이야말로 진정한 은혜였습니다. 만약 오늘 자리에서 38 병자가 기도를 통해 벌떡 일어나는 일이 벌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송합니다”라며 박수를 치고 대단한 환호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감사해야 마땅한 상황임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38 동안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나 걸어가는데 그들에게서 나오는 말을 보십시오. 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일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여러분, 이들의 말투를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단어와 문장을 매우 세심하게 선택했음을 강조한 있습니다. 그들은 “내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싫다”라고 말하지 않고 “옳지 않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틀렸다는 단정입니다. 성경에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네가 사용하던 침구를 들고 움직이는 것은 일한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유대인들의 주장은 상당히 지당한 말처럼 들립니다. 성경에 분명히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규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형식과 창조 구원의 완성

출애굽기 20 8절부터 1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분명히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듯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3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여인을 고쳐주셨을 , 회당장이 분을 내며 말합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것이니라. 얼마나 합리적이고 당연한 주장입니까? 회당장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다소 의도적인 행보를 보이시는 같기도 합니다. 굳이 안식일이 아닌 다른 6일을 두고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안식일의 본질을 가르치고자 하셨음을 시사합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고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면 주님의 의도를 파악할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 번째 계명인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받은 정통파로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경건한 민족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근거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의 참된 의미나 목적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관습대로 지키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수단으로 안식일을 사용했기에, 그들은 정작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참된 이유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심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도전하셨을까요? 그분은 안식일이 주어졌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읽은 출애굽기 20 11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셨기에 너희도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창조가 완전히 완성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며, 안식에 우리도 동참하라는 뜻입니다.

 

창조의 완성과 안식일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 안식일에 쉬었다는 것은 창조가 완성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신명기 5 12절부터 15절을 보십시오.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 창조와 구원이라는 가지 완성된 사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 명하셨고, 안식의 완성을 그날에 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 하나님의 평안에 참여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창조 사역을 완성하신 안식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기념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날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만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원받은 날이니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고 찬송하는 여러 활동을 하면 좋을 텐데, 아무 일도 하게 하셨을까요? 질문을 깊이 살피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명확히 이해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셨기에 우리에게도 쉬라 하신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도 쉬셨으니 우리도 쉬는 날이구나”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됩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으로 에너지가 소진되어 어쩔 없이 쉬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데에는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누리시는 완전한 평안과 기쁨의 안식에 우리를 함께 참여시키려 하시는 있습니다. 내가 쉬니 너도 쉬라는 말씀은, 하나님만이 누리시는 안식의 즐거움을 우리도 누리게 하겠다는 초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신다는 것은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시고 그들을 당신의 안식으로 인도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을 시작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참으로 감동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홀로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누리시는 안식에 여러분을 초청하여 함께 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기억해야 사실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평안에 참여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굴레나 멍에가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내가 고상한 사람이 되거나 율법을 완수하여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지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평안을 우리가 함께 누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놀라운 평화를 우리도 누리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하심과 구원의 경험

우리가 안식일에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날이 하나님께는 일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식하시지만, 실상은 우리가 안식을 누릴 있도록 가장 바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제사장들이 모든 백성이 안식할 오히려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며 분주히 움직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하시려고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우리를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시고, 일주일 동안 흘린 눈물과 아픔을 씻어주시며,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분주히 움직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창조와 구원이 오늘도 우리 속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병자가 나음을 얻은 것은 그의 뛰어난 믿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38 중풍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고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단순히 병을 고치신 것을 넘어 그의 죄를 사하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사건의 핵심은 예수를 만나 병을 고친 사실 자체가 아니라, 만남을 통해 사함의 은혜를 입었다는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놀라운 사건이 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물에 들어가야만 구원받을 있다고 생각했으나, 물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를 사망의 물에서 건져내어 생명을 주었습니다.

 

물에 들어가는 의식이 과거 홍해를 건너던 출애굽을 상징한다면, 이제 우리에게 진정한 출애굽과 홍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를 사망에서 건져내어 살리셨습니다. 이는 그에게 일어난 분명한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육체적인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온전히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출애굽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출애굽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번째 특징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당연히 죽어야 마땅했던 자리에서 오히려 살아나 생명을 얻고 진정한 기쁨과 찬양을 누리는 , 그것이 바로 우리가 누려야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식일의 번째 특징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평안을 함께 누리며, 그날 우리에게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 “주와 같은 분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애굽 군대를 몰살시키시고 주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라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던 것처럼, 진정한 출애굽을 경험한 우리 역시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안식일의 다른 중요한 특징은 단순히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거듭나 구원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안식일 자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중요할까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처럼 지금도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유는 단순히 치료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의 안식을 땅으로 가져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땅에 오시며 하늘의 안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단순히 그분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늘의 안식이 무엇인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땅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주시고, 눈물 흘리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이 바로 하늘의 안식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의 개념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안식일입니다. 이전까지는 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이었지만, 이제 하늘의 참된 안식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렇다면 형식적인 안식일보다 하늘의 안식 자체이신 예수님이 훨씬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안식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이제껏 율법적으로 지키던 안식일의 형식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안식일이 됩니다. 주님이 계신 곳이 안식일이라면, 주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분은 어떤 존재입니까?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주님과 동행한다고 고백한다면,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곳과 그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날 진정한 안식을 경험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안식을 우리에게 가져오셔서 친히 경험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안식일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매일이 안식일임을 깨닫지 못한 ,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다가 주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님,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만 너무나 힘이 듭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적 빈곤함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는

이처럼 지금 우리의 신앙은 순서가 잘못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하늘의 안식이 임했다면, 나는 병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 아닙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성공해야 하는 아닙니까? 좌절도 절망도 없이 언제나 기쁨만 있고 세상의 모든 일이 형통해야 하는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께서 땅에 오셔서 병을 고치시고 역사하신 이유는 하늘의 안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결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늘나라에는 고칠 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안식이 내려왔다고 해서 여러분의 육신의 병이 모두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하늘에는 애초에 고칠 병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안식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땅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마땅히 누려야 하늘의 기쁨과 존재 가치, 그리고 은혜를 지금 예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어 여러분에게 주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육신의 병이 낫거나 사업이 번창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병이 낫더라도 우리의 육신은 유한하며, 사업의 성패 또한 세상의 일일 뿐입니다. 물론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위해 일들은 소중하지만, 죽을 가져갈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영원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잠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자녀, 부모님, 그리고 배우자 또한 바로 영원을 예비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합니까? 단순히 남의 눈치를 보거나,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라는 세상의 상식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님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의 자녀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분들이며,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베푸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는 단순히 효도의 수준을 넘어,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형을 찾아가고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성경이 부모 공경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고 명령합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을 굳이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도 그토록 강하게 강조하시는 것일까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관계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매일이 바로 안식일이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매일매일 “주님, 오늘도 나는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라고 고백하는 , 그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일을 수는 없지만, 나의 수고가 아닌 주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신 이유 역시, 이러한 참된 신앙의 메시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사시는 인생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엿새 동안은 마치 힘으로 살아온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안식일에 이르러 모든 수고를 내려놓고 멈춤으로써 “내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셨기에 여기까지 있었고, 주님께서 인생을 완성해 가시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 안식일에 쉬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없으며 주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여러분이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일조차도 사실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고백하는 방식이 안식일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의 시대가 열려 예수님으로 인해 매일이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날마다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삽니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아무런 계획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계획하고 생명을 걸고 사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바로 안식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을 깨달은 자는 고백합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에서 살아가며, 인생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에 비로소 안식의 인생이 되는구나. 일전에 과학 잡지에서 사람의 몸에는 종류의 근육이 있다는 글을 적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있는 근육은 ‘마음대로근’이라 부르고, 내장이나 심장처럼 의지대로 되지 않는 근육을 ‘제대로근’이라 부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마음대로 같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오히려 제대로 사는 사람,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대로 되는 일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옛날 같으면 욕하고 다툼으로 끝냈을 일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본을 보이려 고개를 숙이고 먼저 사과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의 매일을 안식일답게 만드십시오. “오늘 하루 내가 모든 힘을 다해 살았으나, 이것은 힘이 아닌 주님과 함께 인생입니다.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주님을 위해 버려야 것이 있다면 버리고, 감수해야 고통이 있다면 감수하겠습니다. 말씀을 읽기 위해 삶을 조금 절제하겠습니다”라고 주님께 증명해 보이십시오. 그렇게 우리의 인생길이 안식의 길이 됩니다. 다만, 길은 마음대로 가는 길이 아니기에 때로는 원치 않는 고통의 길을 걸어야 때도 있고, 고난이 닥쳐 “하나님, 제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라며 답답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빼앗길 없는 하늘의 기쁨

그렇다고 해서 고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분께 가지 확실하게 보장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 안에 있는 , 매일매일 안식을 누리는 자는 모든 환경이 여러분을 삼킬 듯이 달려들지라도 여러분의 기쁨을 아무것도 빼앗아 없다”고 약속합니다. 여러분의 안식을 누구도 빼앗을 없습니다. 우리는 위로가 가득한 인생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며,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빼앗을 자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에게 주어진 안식이며, 결코 빼앗길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으로부터 많은 것을 앗아갈 있습니다. 건강도, 물질도, 실패의 아픔도 맛보게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만은 어찌할 없습니다. 안식은 여러분의 기업이며, 도둑과 좀벌레가 결코 해하거나 훔쳐갈 없는 하늘나라의 보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막힐 듯이 다가올 때에도 막히는 현실 속에서 주님을 찬송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짓밟는 것처럼 보이고,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있는가”라며 기가 막혀 하는 웅덩이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찬송하고 기도할 있습니다. 안식만큼은, 생명만큼은, 아무도 빼앗을 없는 영원한 생명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성도는 바로 안식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제가 설교 중에 “이렇게 합시다”라는 권면을 자주 하는데, 안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안식을 안식되게 합시다. 말은 단순히 “이렇게 하면 된다”는 식의 가벼운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안식을 안식되게 하라는 말에는, 여러분은 이미 안식을 가진 자이니 안식이 있는 자답게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깨닫고 제발 길을 따라와 달라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아마 ‘이게 말이 되나?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라고 말하면, “그럼 어디 한번 하나님이 언제 끌고 가시는지 보자” 하며 째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면 “왜 맨날 하라 마라 합니까”라고 시비를 걸지 마시고, 여러분이 진지하게 말씀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눈이 이미 떠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떠졌다면 이제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손이 살아났다면 손을 움직이는 또한 당연한 일이며, 생명이 살아났다면 이제 생명으로 살아가는 역시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시험과 유혹 속에서 오히려 안식을 내뱉게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없는 평안을 여러분의 입술로 고백하게 것입니다. 기쁨과 안식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안식을 끄집어내어 주십시오. 그리고 안식을 살아내어 주십시오. 제발 여러분 안에 있는 안식, 주님이 주신 놀라운 영광과 여러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귀한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놓치지 말고 살아주십시오. 사람을 만날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안식을 놓치지 마십시오. 세상이 유혹할 , 아무도 여러분의 안식을 빼앗을 없다는 놀라운 진리로 모든 환경에서 오히려 승리하십시오.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사해진 날이며, 여러분이 구원받은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평안이 여러분의 것으로 누려지는 날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여러분을 감당할 있겠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의 평안을 이해하고 그것을 뺏어갈 있습니까? 그토록 찔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모든 것을 잃고, 옷조차 찢기어 상처투성이가 성도가 마지막 남은 손가락 하나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데, 누가 손을 막을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예수가 함께하시는 결코 빼앗길 없는 안식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서로 비교하며 “네가 얼마나 예수를 믿는지 한번 보자”며 째려보고,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계산함으로써 예수님을 다시금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안식을 찬양과 기쁨으로 온전히 누려 주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놀라게 하십시오. “어떻게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부딪힐 때마다 부서질 수밖에 없는가, 사람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토록 평안한가”라는 말을 듣게 주십시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영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증거하였듯, 모든 경건과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주어졌습니다. 주님, 우리가 이를 너무나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구합니다. “저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에게 주어진 충만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가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합니다. 저희의 지혜 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사랑하는 주의 성도들이 자기 안에 거하는 안식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려 우리에게 허락하신 안식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반드시 누려야 기쁨을 결코 놓치지 않게 하시고,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평안을 얻게 하시고, 힘들고 어렵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오히려 여유와 기쁨을 품게 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