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 37절에서 44 까지 입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있느냐. 아멘.

 

참된 빛과 십자가의 증거

성경은 세례 요한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땅에 증언하기 위한 가지 사명을 품고 왔음을 명시하고 있으며, 예수님 또한 사실을 확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증인으로 세우신 목적은 요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선포한 증언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지난 말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길을 비추는 등불일 , 스스로 빛이 수는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준엄한 증거는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하신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으로, 주의 백성을 사람도 잃지 않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 사역이었습니다. 사명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이제 저들을 세상에 두고 아버지께로 간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마침내 부활하시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실 대속의 사건을 바라보며 올리신 기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이자 예수께서 성취하신 사역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생애는 십자가를 향한 준비였으며, 그분의 자체가 십자가를 증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주님께서 자신을 증언하시는 방식을 배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삶에 어떻게 실재하는지를 목격하게 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음성

본문 3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말씀을 대하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증언하신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지만, ‘과연 구체적으로 언제 증언하셨는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요한복음 5장에 이르기까지 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언제 그분을 증언하셨습니까? 우리가 명확히 기억하는 것은 주께서 세례를 받으실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아들”이라 하신 음성뿐입니다.

 

그러나 음성조차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세례 요한과 이를 아시는 예수님 외에는, 사실상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경험한 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그분을 증언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은 성육신 이후의 가시적인 증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면면히 증언해 오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구약을 통해 끊임없이 나를 증언하셨으나, 너희는 음성을 깨닫지 못했고 형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중대한 논지가 전개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씀을 ‘하나님을 자가 없으므로 형상을 보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말씀이 더해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모세도, 여러 선지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유독 너희가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질책하신 진정한 의중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들려진 말씀을 거부하는 불신앙

대목을 이해하는 열쇠는 38 상반절인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말씀은 앞선 문맥과 연결될 비로소 예리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미 “너희가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선언하신 뒤에, 다시금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것은 자칫 중언부언처럼 보일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듣지 못한 말씀이 마음속에 머물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마디의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영혼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적 불통의 상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유를 명확히 밝힙니다. 바로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이 결여되었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도 깨닫지 못했음을 강력히 논증하십니다. 듣지 못하는 이유는 명백하게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믿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고 말합니다. 이는 옳은 방향이지만, 동시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엄중한 증언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많이 읽고 들었던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평생 설교를 듣는다 해도, 매일 말씀을 대하며 자라온 그들의 방대한 지식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아온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목적 삼은 유대인의 오류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에만 만족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의 실천에도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수없이 말씀을 들었으나 정작 음성을 들은 적이 없으며,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엄히 책망하십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려 애쓰는 성도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경건한 신앙인이라 칭송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점에서 신앙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주님께 책망받은 유대인들 역시 성경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부단히 고군분투했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이 너희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단호히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미세한 영역까지 말씀을 적용하려 노력했습니다. 지식만 비대해진 것이 아니라 지식을 삶으로 옮기려 했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모범적인 종교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가히 ‘적용의 천재’라 만큼 율법을 세밀하게 해석하여 삶에 녹여냈습니다. 유대인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는 바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길어 올린 그들의 치열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토록 철저히 성경을 연구하고 적용했음에도 주님께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신 이유는 하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탐구했다면 당연히 도달했어야 결론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문제는 예수를 향한 믿음의 부재였으며, 이는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대충 읽지 않고 깊이 상고하며 매일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 배나 더한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은 결국 본질을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생명의 실체

유대인들은 성경을 탐독하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들은 성경 안에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며 말씀을 깊이 상고했습니다. 성경을 탐구함으로써 스스로 영생의 문에 이를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성경을 그토록 가까이하면서도 정작 말씀이 지시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율법의 일점일획을 믿으며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면서도, 정작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성경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난해한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신약에는 원수 사랑이나 자기 희생과 같은 삶의 교훈이 풍성하지만, 구약의 상당 부분은 전쟁과 살육, 그리고 인간의 배신과 음모로 가득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비겁함, 위기 앞에서 가족을 앞세우고 홀로 남은 자의 모습 , 도덕적으로 온전히 수용하기 힘든 기록들이 구약의 면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기록들을 대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무엇을 구했겠습니까?

 

당시 바리새파의 석학 힐렐(Hillel) 신명기 32 2절을 주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채소를 자라게 하는 단비와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단단히 붙잡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나, 놓치는 자는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고백과도 매우 흡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말씀을 붙들었던 그들을 향해 “너희 속에 말씀이 없다”라고 엄중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많은 지식을 축적하고 정교하게 율법을 암송했으나, 정작 성경이 가리키는 실체인 그리스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목적지가 되어버린 우상이었을 ,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성경 지식을 넘어 생명으로 나아가는

이러한 비극은 오늘날 현대 신학의 현장에서도 반복됩니다. 탁월한 지성과 열정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정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해체하여 학문적 성과를 거두는 몰두할 , 성경이 기록된 본래의 목적에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의 의도가 아니라, ‘자신이 성경을 얼마나 멋지게 해석해내는가’에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자동차를 사람이 운전은 하지 않은 엔진의 구조만 파고드는 것과 같습니다. 무거운 쇳덩어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의심하고 부품의 설계를 비판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정작 자동차의 본질인 ‘달리는 기능’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제원을 완벽히 꿰고 있다 한들, 차에 올라타 목적지로 향하지 않는다면 지식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 한다는 본질을 잊은 , 텍스트의 완결성이나 역사적 사실 여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타지도 못할 차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입니다.

 

세상을 통달하는 지식과 하늘을 움직이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을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지혜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차라리 조금 미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그분과 동행하는 편이 훨씬 복된 길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엄중히 분별해야 합니다.

 

도구에 불과한 성경을 우상화하는 함정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더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그저 ‘거룩한 책’이라 칭하며 선반 위에 고이 모셔두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성경은 그저 집안을 지켜주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습니다. 이른바 ‘후탁 교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주일 아침 집을 나설 때에야 비로소 성경책을 꺼내어 표지에 쌓인 먼지를 ‘후’ 하고 불고 ‘탁’ 쳐서 들고 나온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책은 반드시 구비해 둡니다. 성경은 거룩한 책이기에 집에 권쯤 두면 악귀를 쫓아주고, 난관에 봉착했을 문제를 해결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때로는 성경 자체를 절대시하는 오류에 빠져, 자체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능력을 있다고 착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인쇄된 기록물입니다. 자체가 여러분을 구원하거나 대단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책은 그저 무미건조한 기록에 불과하며 우리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도 못합니다. 그분을 빼놓고 나면 성경은 별다른 재미도, 읽는 보람도 없는 책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걸음 나아가 보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을, 혹은 안의 내용을 ‘무소불위의 축복을 주는 책’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대로 주장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최근 오용되고 있는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경을 넓히고 반드시 번창하게 하실 것이며, 믿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는데 주시지 않겠느냐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구약입니다. 여러분이 즐겨 찾는 신명기 28장만 보더라도, 전반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에게 약속된 어마어마한 복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으며, 반죽 그릇까지 복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는 동일한 무게의 경고가 따릅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지, 안팎은 물론 반죽 그릇까지 저주를 받게 것임을 선포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대목만 골라 하나님의 약속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을 자신의 형편에 끼워 맞추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가 필요할 임의로 가져다 쓰는 도구가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된 본질적인 의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말씀은 결코 여러분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취급하며 “금 나와라 뚝딱” 식의 기복을 구하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본래 약속이란 매우 엄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약속의 이행을 주장하고 싶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지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당연한 권리인 성경에서 좋은 구절만 골라 아전인수 격으로 적용하곤 합니다. 성경은 결코 기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나 질병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징계하여 참된 자녀로 빚어 가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소홀히 대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유일한 목적과 의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본연의 목적을 외면한 자신의 편의와 욕망을 채울 근거만을 찾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성독이라 없습니다. 이쯤 설명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삶에서는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됩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명확한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비롯한 우리 역시 말씀을 읽으며 엉뚱한 길로 빠져드는 것입니까?

 

서로의 영광을 구하는 불신의 뿌리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매우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아버지가 보낸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어떤 이는 성경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존재가 있는지를 확인하려 하는가? 누군가는 책을 유명한 문학 작품처럼 여기거나, 속에 담긴 도덕적 진리를 지켜내는 일에만 매몰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함에도 그렇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유를 요한복음 5 44절에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있겠느냐. 성경을 수백 통독하고 세계적인 석학이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서로의 영광을 취하려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모든 연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사례를 보면 ‘영광을 취한다’는 말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율법을 배우며, ‘조금만 지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있고 마침내 하나님을 만날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여 실패했다면, 자신들은 철저히 순종하여 답을 찾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보다 엄격한 세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걷는 거리까지 제한하는 법을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도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정답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 인간이 도리어 자신과 타인을 정죄하며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경고합니다. 우리 중에는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고결하게 살아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내놓을 없는 미미한 의로움일 뿐이며,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결코 온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뿐입니다. 마더 테레사나 간디, 심지어 부처조차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한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들 누구도 감히 자신을 향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선포할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선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유일하고도 위대한 분이십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의 본성

성경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으로 서로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증언합니다. 인간은 구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여 자랑할 근거를 찾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베푸는 은혜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내가 직접 이루어내야만 안심하고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를 성경적 관점에서 풀이하자면, 결국 내가 신이 되어야만 만족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가 최고가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신의 자리에 올라설 때에야 비로소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우상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때로 돈이나 사업이 되기도 하고, 자녀나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신을 만든 신에게 귀의합니다. 여기서 ‘귀의한다’는 말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신을 믿기로 작정하고는, 그때부터 신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우상으로 삼은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자녀가 신이 부모의 내면은 어떠합니까? 겉으로는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란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신이 되면, 자녀가 잘된 이후에 반드시 보상을 요구하게 됩니다. “내가 우리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겨우 여자 하나 만났다고 나를 이렇게 배반할 있는가”라며 분노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이는 자녀가 신이 되었음에도 정작 자신에게 돌아올 유익이 없으니 화를 내는 것입니다. “너 하나만 잘되기를 바랐다”라는 처음의 고백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내가 신을 만들면 대상이 무엇이든 항상 그에게 귀의하여, 자식이 해주는 것으로부터 살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하나님께 그대로 적용하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하수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셔야 하고, 우리의 기도에 무조건 응답하셔야 하며, 우리의 명령에 하나님은 그저 따르셔야 한다는 논리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진리이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종이 있습니까? 그것은 결코 있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접근 방식 때문에 하나님도, 성경도, 영생도, 예수님조차도 그분 자체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이들이 드뭅니다. 오히려 영생과 예수와 성경을 소유하여, 내가 노릇을 하는 필요한 장식품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할지라도,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와 성경 지식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화려하게 치장할 뿐입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이 그러한 모습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를 일컬어 바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 스며든 자기 영광의 경계

이러한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이미 교회 안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실로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화를 내고 속상해합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6개월쯤 지났을 ‘이거 이상한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지닌 인간적인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지나가겠습니다. 나중에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으실까 덧붙이자면, 교회에는 반드시 격려와 칭찬, 그리고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것들이 적은 편입니다. 아마도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다가 혹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염려하는 여러분의 순수한 신앙 때문에 그러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함께 길을 가는 성도들, 형제와 자매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격려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이 있을 반드시 그들을 돌아보아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중고등부 전도사님이나 강도사님, 혹은 목사님들에게 수고한다고 등을 두드려 주신 적이 언제입니까? 그저 아이들을 맡아서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결과만 보시지 않습니까? 수고한다는 한마디를 건네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격려하고 칭찬하는 일에 너무나 인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속으로 ‘칭찬할 만한 일을 해야 칭찬을 하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칭찬이라는 것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있는 것입니까? 좋은 면을 보고 자꾸만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 반주자는 아침 1 예배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에게 손가락은 안녕하시냐고 따뜻하게 물어본 적이 번이라도 있으십니까? 우리는 전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너무나 많은 헌신을 무상으로 받고 있습니다. 교회 뒤편에서 식사 준비를 하느라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정말 따뜻하게 “고맙다, 너무 맛있게 먹었다”라는 진심 어린 인사를 전하십니까? “오늘은 누가 소금을 넣은 거야? 간장은 이렇게 많이 부었어?”라는 평가는 누구나 있습니다. 불평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 100명이 있다면 불평이 개나 나올 같습니까? 100개가 아닙니다. 무려 1,000개도 나올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흠을 찾으려 들면 불평할 것이 많지, 어디 칭찬할 것만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평은 누구나 하는 것이니 그런 사람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십시오. 남들이 칭찬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여러분은 칭찬을 건네십시오.

 

다만 칭찬과 격려를 마음껏 하시되 이것 가지만은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일들이 이루어진 결과나 성과, 혹은 얼마나 잘했느냐를 보고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을 직접 하고 계시며, 우리가 영광스러운 사역에 쓰임 받고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동역

우리는 어떤 결과나 성과 때문에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계신 일에 그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격려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훨씬 본질에 가까운 모습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셨다는 의식이 없다면, 우리들은 일의 결과를 두고 서로 싸우게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했느냐, 저렇게 했느냐”라고 다투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싸우는 것을 성경은 ‘서로 영광을 취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예전에 어느 교회의 입당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참으로 요란스러웠습니다. 예배당을 구입하고 꾸미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이해는 갑니다. 그런데 건물 완성을 위해 교인들이 보여준 태도는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치러낸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명씩 불러내어 각각 상패를 수여하고, 상패를 받은 이가 다른 이에게 상패를 주는 순서가 이어졌습니다. 서로 상패를 나누어 들고는 “이 일은 우리 장로님이 없었다면 되는 일이었다”고 추켜세우면, 장로님은 다시 “아니다, 목사님이 희생하셔서 이루어진 것”이라며 화답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엄청나게 겸손을 떠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들끼리 겸손을 떱니까? 그것은 참으로 우스운 광경 아닙니까? 겸손을 보이려거든 하나님 앞에서 보여야 마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히 누가 겸손을 자랑하겠습니까? 과연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보십니까? 그날 입당식의 첫마디는 분명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였습니다. 그런데 한마디만 빼놓고는 전부 자기들끼리 기뻐하는 그들만의 잔치였습니다. 이것은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럴 때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에게 만약 칭찬받을 만한 일이 있고, 여러분이 중에 그래도 괜찮은 결과가 있다면 말씀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누가복음 6 26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말씀으로 경계를 삼으십시오. 칭찬할 만한 일이 생겨서 ‘내가 잘한 같다’는 마음이 때면, ‘모든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화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라고 생각하며 넘기십시오. 우리가 주고받는 칭찬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어야 하며, 주님과 함께 일을 하고 있기에 나누는 격려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성경의 목적

우리가 일이 아무리 없어 보이고 미미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주님의 영광스러움을 알아가고 있다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결코 우리의 영광이 아닙니다. 비록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난 것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 재산을 바치거나 거창하게 생명을 바쳐본 적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런 외적인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헌신의 목적과 태도와 방식을 정확히 알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시든, 심지어 설거지를 하시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회사에 나가 업무를 보고 고객 분을 대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을 하십시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현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안에 함께하고 계시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과 기뻐하시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엉뚱한 것으로 서로 영광을 돌리지 맙시다. 우리가 서로의 영광을 취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온전히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를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있어 정리해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으러 가끔 하나님을 이용하는 같은 기분이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혹은 하는 일이 모두 막혀서 더는 방법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나오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내가 약해졌으니 하나님을 이용하러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이용과는 다릅니다. 그때의 마음은 단순히 약해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이제 제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러 왔습니다. 힘으로 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되지 않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대로 주님을 부리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혹은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부분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영생조차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도구로 삼았다면, 그것은 결국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이익을 챙기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쏟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것입니다.

 

성경의 참된 목적과 거룩한 근심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좋은 것을 가질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많은 것으로 마음과 생활을 풍족하게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이 하신 일을 선포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을 , 서로의 영광을 취하며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할 ,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묵묵히 오셔서 자신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실을 바로 알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전히 우리의 영광을 구하시겠습니까?

 

자신이 이룬 업적과 개인적인 욕망들을 또다시 구하시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자꾸만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을 ‘실패’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도저히 있을 없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패’입니다. 실패가 없습니까? 그것은 세상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과 삶을 하나님이 직접 붙잡고 계시는데 거기에 어떻게 실패라는 단어가 감히 들어갈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러분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뜻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읽고 있다면 이제는 정말 바꿉시다. 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나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고 계시는지로 질문을 바꾸고 그것 때문에 고민합시다. 비즈니스가 되기 위한 고민은 충분히 하셨습니다. 자녀가 되기 위해 애타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이제 애타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를 두고도 함께 근심해 주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드릴까?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나의 삶의 방식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인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장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주시려고 부르셨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외면하기에 자꾸만 신앙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합니다. 그저 ‘으쌰으쌰’ 하는 감정적인 열기로 바꾸려 하거나, 부흥회 같은 곳에서 울고 웃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그렇게 기분이 풀리고 나면 다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거룩한 근심’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반드시 짊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것인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평생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바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며, 그분께 기쁨이 되는 일이 나에게도 가장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울어버리는 것으로 신앙을 대신하지 마시고, 부디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삶을 온전히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의 말씀을 상고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혹여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취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서로의 영광을 구하느라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영접한 이후에도 여전히 습관과 인간적인 욕망에 매여 자신의 유익만을 구했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로 하여금 이제는 세상의 헛된 영광이 아닌 참된 소망과 기쁨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거룩한 뜻을 마음으로 추구하는 진정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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