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 17절에서 23 까지 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멘.

 

유대인의 반응을 통해 구원의 역사적 샘플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주님께서 38 병자를 하필 안식일에 치유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안식의 참된 주인임을 선포하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행보에 대해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며 반발한 것은 어쩌면 종교적 관성상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대할 , 우리는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십자가에 박은 무지한 자들이다'라는 상투적인 선입견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성경이 묘사하는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완강하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주님의 사역을 그토록 수용하기 어려워했는지에 대해 보다 깊이 있고 진지한 시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며, 우리와 유사한 사고체계 안에서 고뇌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거칠게 반응하게 하였을까요?

 

유대인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택함을 받은 민족'입니다. 이는 유대 민족이 족속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나타내실 구원의 역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 하나의 '모형(Sample)'으로 그들을 지명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형이 된다는 것은 실로 고달픈 여정입니다.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몸소 겪어내며, 이를 경험하지 못한 열방 앞에 하나님의 섭리를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이 구원의 도를 명확히 이해할 있도록 이스라엘의 역사를 섭리해 오셨으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역사가 유독 다사다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것을 우리는 '선택'이라 부르지만, 정작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체감하는 현실은 우리의 인식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열심과 자기 의라는 폐쇄된 시스템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으며, 선택의 명징한 증거를 ‘율법의 소유’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은 가지지 못한 신령한 법을 수여받은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율법에 명시된 안식일을 철저히 성수하기 위해, 그들은 본래의 계명을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세부 규정들을 덧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조항이 아니라 600가지가 넘는 방대한 규범을 만들어 준수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교과서만 공부해도 충분하다는 지침에 더해, 완벽을 기하고자 스스로 참고서까지 탐독하며 열을 올리는 학생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들의 열심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만큼 율법에 대해 뜨거운 열정을 품고 이를 삶의 양식으로 삼으려 분투했던 이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들 앞에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성시해 안식일을 거리낌 없이 범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본적인 법도 준수하지 않는 이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며 “내 말을 들으라”고 선포하니, 이는 유대인들에게 가히 형용할 없는 충격이자 신성모독적 발언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율법을 수호하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각별히 사랑하시어 복을 주시고자 법을 허락하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심리적 기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율법을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지킬 있다고 자만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비록 온전치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수한 열정과 진심을 보시고 복을 내려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이유조차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못한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 순종하여 율법의 의를 이룬다면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고, 그분이 다윗 왕조의 영광을 재건하여 만국 위에 우뚝 서는 강성한 나라를 만들어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견지해 신앙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에는 치명적인 신학적 오류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복을 독점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으며, 율법 준수라는 행위를 통해 사랑받을 권리를 확증할 있다고 오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을 지키면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명제가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논리가 위험한 진정한 이유는, 그러한 폐쇄된 시스템 안에서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불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견고한 행위의 체계 안에서 예수님이 계실 자리를 지워버렸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낼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너희를 위해 죽으러 왔다”라고 선포하시니, 도무지 대화가 성립될 없었습니다. 스스로 조금만 정진하면 하나님 앞에 있는 의인이라 자처하던 이들에게, “너희는 본질적인 죄인이며 너희의 힘으로는 결코 없기에 내가 대신 죽으러 왔다”라는 선언은 수치스러운 부정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너희의 열심을 응원하러 왔다”라거나, “더 나은 삶을 위한 새로운 율법을 전수하러 왔다”라고 하셨다면, 그분은 아마도 유대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율법 학자가 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와 인간의 전적인 무능함

여러분, 과거 한국 사회에서 사랑을 받았던 복음 성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아마 노래를 접해보지 못한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찬양은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휴대폰 벨소리로도 오랫동안 1위를 차지할 만큼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문구는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운 위로입니까? 물론 찬양이 주는 긍정적인 메시지도 분명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현대 기독교 신앙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를 한없이 아끼시는 분이라는 진리는 듣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달콤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오직 그러한 감상적인 안에서만 규정하려 , 신앙의 논리는 이내 심각한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의 사랑만을 베푸시는 분이라면, 세상은 이토록 참담한 고통으로 가득 있습니까? 전쟁의 포화는 멈추지 않으며, 인간의 욕망을 넘어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무고한 생명들이 스러져가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비극을 목도하며,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립할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이러한 악의 실재를 허용하시는가 하는 질문은 끊임없는 회의로 이어집니다. 결국 인간의 제한된 이성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모순된 존재로 남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을 선포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할 없는 비극을 방치하시는 분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논리를 밀어붙여 보면, 하나님이 진정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무조건적인 수용의 사랑을 가지신 분이라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실 이유가 있었겠느냐는 의문에 도달합니다. 굳이 복잡하게 인간의 몸을 입혀 성육신시키시고,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에 내어주셨다가 다시 살리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의 전능하신 자비로 우리 모두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면 간단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우리가 흔히 영화나 문학에서 찬미하는 ‘조건 없는 대자대비’에 부합하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게만 하셨다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도, 십자가의 대속도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혹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이러한 심판과 대가가 수반된다고 설명하지만, 공의라는 명분조차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는 공허한 변명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결국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출발점 자체가 오염되어 있음을 방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 역시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억울함과 의구심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명제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은 누구나 좋아하며 기꺼이 수용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정작 거부하며 인정하지 못하는 진실은, 인간이 선한 양심을 동원하여 힘을 다해 살지라도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께 도달할 없다는 비참한 실존적 한계입니다. 아무리 정결하게 살고 타인의 모범이 만큼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준엄한 사실을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결코 양보하지 않으려 하는 신앙적 교만의 실체입니다.

 

아버지가 행하시는 창조와 출애굽을 잇는 아들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직접 수여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기에, 굳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기존의 율법 체계를 보완할 있는 권의 추가적인 지침을 주시며, "이것마저 지키면 너희가 온전한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며, 선지자요, 영원한 진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가히 상상조차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보조적인 수단을 기대했으나, 주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아버지께로 없다”라고 단언하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노력을 무위로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숨처럼 지켜온 율법은 무엇이며, 안식일조차 범하는 당신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오만한 말을 하는가. 유대인들은 분개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견고한 종교 체계를 무너뜨리는 위협적인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자신들이 쌓아 올린 공로와 의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제거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함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결코 멀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설교를 통해 부부간의 도리를 강조하며 감동적인 예화와 교훈을 들려드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이 가르침에 깊이 감화되어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성전 문을 나선다 할지라도, 안타까운 진실은 그러한 결단만으로는 결코 생명에 이를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조석으로 변하는 연약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율법적 행위’ 자체로는 생명을 잉태할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처럼 심각한 실존적 위기 앞에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안식일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칫 문맥과 어긋나는 뜬금없는 발언처럼 들릴 있습니다. 그러나 19절은 ‘그러므로’라는 결정적인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이는 앞선 상황과 주님의 선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다른 법을 갈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이 일하시듯 자신도 일하고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살해 위협에 직면하게 되자, 주님은 ‘그러므로’ 당신이 행하시는 사역의 근거를 다시금 천명하십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나의 독단적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바를 보고 그대로 수종 드는 것이다.

 

선포는 깊이 묵상할수록 신비가 한량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성자께서 목도하시고 그대로 계시하셨다는 말씀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사역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신 ‘하나님의 일’이란 일차적으로 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사역입니다. 사도 요한이 태초의 말씀을 통해 창조주 예수님을 증언했듯이, 요한복음의 구조 또한 6일간의 창조와 7일째의 안식이라는 안에서 움직입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시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새로운 출애굽의 지평을 여심으로써,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자리에서 새롭게 재현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창조의 서사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를 묻는다면 그들은 단연 ‘출애굽’을 거론할 것입니다. 시편의 허다한 찬양이 증언하듯,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난 구원의 사건은 그들의 골수와 뇌리에 새겨진 집단적 기억입니다. 주님은 지금 출애굽의 구원을 당신이 동일하게 수행하고 계심을 역설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그들 자신의 무력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듯, 38 병자 역시 자신의 의지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병자에게 어떠한 신앙 고백이나 율법 준수를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 하나님께서 먼저 고통받는 백성을 찾아가셨던 것처럼, 소망 없이 누워 있던 병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할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먼저 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자리에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며 십자가의 은총을 아는 자체가 바로 주님이 여러분을 먼저 찾아오셨다는 거부할 없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 생명과 심판

이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수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본문 20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다시금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대목은 우리가 이미 고찰한 있습니다. 성경은 이어 “또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고 증언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보다 근원적이고 위대한 일을 보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더 일’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21절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밝힙니다. 바로 생명을 부여하는 사역입니다. 위대한 과업의 핵심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이어지는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 심판의 권세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구원과 공의로운 심판,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이토록 중대한 이유는 단순히 사역의 외적 규모가 방대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관통해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 대한 완전한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의 타락 직후 선포된 창세기 3 15절의 원시 복음,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것이라는 예언부터 시작하여, 성막의 제사 제도가 상징하던 희생의 모형들, 그리고 가나안 광야의 고난 속에서도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모든 언약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 온전히 실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멈추지 않는 열심이 마침내 계획을 완수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보이시겠다고 ‘더 일’의 실체입니다. 구약의 파편적인 예표들을 넘어, 이제 ‘새 언약’이라는 완전한 구원의 실제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없는 율법이 무거운 멍에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고단하게 버텨야 했던 우리의 인생은 본래 율법에 예속된 삶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은 삶을 영위할지, 어떻게 하면 평안과 안식을 얻을 있을지 고뇌하며 수많은 종교적 노력에 매달렸던 비참한 연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진정한 해방을 선포합니다. 주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의 멍에를 대신 지시고, 우리가 감당해야 짐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은 현상이 거창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일이 비로소 완성된 사건이기에 ‘큰 일’이라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 예수가 행하신 일을 보고 따르는 목격자

우리는 여기서 걸음 나아가 더욱 놀라운 신비를 발견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행하신 일을 언급하신 , 제자들에게 실로 가슴 벅찬 약속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4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것이요 또한 이보다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많은 이들이 말씀을 오해하여 ‘우리도 주님처럼 죽은 자를 살리거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대대적으로 행할 있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더 일’은 결코 개인의 신비로운 능력 과시와 관계가 없습니다. 여기서 ‘더 일’이란, 앞서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보고 행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목격하고 완성이 우리 삶에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여러분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죄로 죽었던 여러분의 생명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구원의 경륜이 오늘 여러분의 속에서 실재가 것입니다. 이것보다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무엇과도 비교할 없는 구원의 사건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요, 하나님의 열심이 맺은 결실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지금도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보고 행하였듯, 너희 또한 내가 이룬 일을 보고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역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신비로운 연합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흐름입니다.

 

따라서 성도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목격’하고 발자취를 겸손히 뒤따르는 자입니다. 주님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기도하며 사역하실 때마다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내가 행하기 전에 아버지가 이미 이루셨듯, 너희가 행하기 전에 내가 이미 이루어 놓았으니, 너희는 나의 성취 안에서 나를 의지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본을 보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준엄한 명령을 누가 먼저 온전히 수행하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주님은 친히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압도적인 사랑을 목도했기에, 비로소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없노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갈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사셨음을 믿기에, 우리 또한 주를 위해 우리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주님이 하셨으니 방관하며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생명의 길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에 사로잡힌 성도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쉬지 않는 기도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내는 변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써 행하는 기도 또한 이와 같은 원리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하시기에 우리도 기도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발적인 노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탄식과 간구로 우리를 이끄시는 거룩한 이끌림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의 의지로만 기도해야 한다면, 시간의 집중조차 버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권면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끊임없는 기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주님이 기도하시는 호흡을 놓치지 않는 , 과거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 곁에서 졸며 쓰러졌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여 쉬지 않고 간구의 자리에 머물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약속하신 놀랍고 일에 대한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예수님께 보이셨던 영광을 주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진행 중이며, 장차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착수하신 선한 사역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증언하는 목격자들입니다. 영광스러운 목적지를 바라보기에, 우리는 자신의 성품과 삶을 주님의 자비와 긍휼 안에 기꺼이 내어드립니다.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완악하고 연약한지 스스로가 가장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며, 우리의 뒤틀린 성품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게 되셨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온도가 이전보다 조금 뜨거워지셨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은 지금도 여러분을 거룩한 형상을 향해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습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더 일을 보게 하리라”는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듯, 우리에게 주신 “더 일을 하리라”는 약속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것이라는 사실에는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열심을 마음에 품으라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거대한 일은 비록 지금은 미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마치 작은 생명의 씨앗이 자라 거목을 이루고 새들이 깃드는 안식처가 되듯, 우리 안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승리를 선포하며 우리에게 감사와 찬송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짊어지시고, 지금 순간에도 우리보다 앞서 길을 걷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해 감사합시다. 힘을 다해 주를 찬양합시다. 쉬지 말고 기도에 전념합시다. 하나님의 뜨거운 열심을 여러분의 심장 속에 품으십시오. 우리 주변의 소외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동시에 우리 자신의 영적 무딤과 연약함을 직시하며 눈물로 호소합시다. 여전히 세속의 가치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을 깨닫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하거든, 마음을 찢는 상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엎드립시다. 주님의 무궁하신 자비와 인자를 간절히 구합시다. 이미 모든 것을 이룬 자만하지 말고, 날마다 상한 심령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겸허히 나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신 은총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기도의 본을 보이셨고, 우리를 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과 감사를 돌리셨습니다. 주님, 이제 저희가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찬송과 존귀를 올려드립니다. 주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같이, 저희 또한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소유가 모두 주께로부터 것이오니, 우리의 생애가 오직 주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숨결과 눈길, 손길 하나까지도 주님의 통치 아래 두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큰일이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우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우리의 입술과 고백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지각이 새로워져 주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는 참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어,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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