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30절 까지 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아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예수님의 ‘아멘’
오늘 본문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장엄한 선포로 시작되는 유명한 대목이자, 예수님의 첫 번째 논쟁이 후반부로 접어드는 지점입니다. 본문 24절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간이 되는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더불어 본문 5장 24절은 ‘우리가 왜 교회에 다니는가’, ‘왜 예수를 믿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가장 명확한 정의를 내려줍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결코 물리적으로 영원히 생명을 연장한다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만일 영생을 그저 ‘끝없이 사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계시하는 단어의 참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진시황이 꿈꾸던 불로장생과 같은 탐욕의 산물이 아닙니다. 만약 악한 본성을 지닌 채로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증언하는 영생의 본질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상태’에 있습니다. 물론 천국에 간다는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나, 영생은 장소의 이동을 넘어 우리 인생의 어긋난 관계가 본연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잘못 끼워진 단추를 비로소 올바르게 다시 끼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천국은 확보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안도감으로 또 다른 세속적 욕망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끊어졌던 관계가 복원되는 것임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전제
영생이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면, 우리에게 이 말씀이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심지어 이미 믿음을 고백한 자들에게조차 동일한 엄중함을 유지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희가 과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마치 우리 모두가 본래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키듯, 그 관계를 부단히 확인하고 점검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선포는 매우 명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선포의 핵심은 우리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라는 선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마주한 결론은 자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을 온전히 믿음으로 고백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설교를 여기서 맺는다면, 여러분은 예상보다 이른 마무리에 내심 반가워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로운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만을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눈가에 자비와 사랑, 긍휼과 은혜가 충만하여 만나는 이마다 그분의 음성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성자(聖者)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대중 매체나 영화에서도 예수님은 흔히 압도적인 권위와 인자함으로 묘사됩니다. 영화 ‘벤허’의 명장면처럼, 탈진하여 쓰러진 벤허에게 물을 건네는 사나이의 얼굴을 마주한 로마 병사가 그 위엄에 눌려 뒷걸음질 치는 식의 묘사 말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존재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그리곤 하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메시아의 실체는 사실 그와 사뭇 다릅니다. 이사야서 53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흠모할 것 없는 메시아의 모습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리를 전파하실 때, 세상이 과연 그분을 환대하며 믿었습니까? 성경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이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실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만만하게 여겼고, 심지어 우습게 보았습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께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 제자들이 그 인격에 매료되어 목숨까지 바친 것이라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 순간,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곁을 떠나 도망쳤습니다.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비겁하게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중에야 슬그머니 나타난 소수의 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인간적인 지도력으로 보더라도 예수님은 부하가 대신 감옥에 갈 정도의 카리스마조차 보여주지 못한 분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앙적 고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이 사람이라면 세속적인 큰일을 도모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따랐을 뿐입니다. 성경의 어디에도 그들이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쫓았다는 기록은 희귀합니다. 이렇듯 볼품없고 무력해 보이는 분이 “내 말을 들으라”고 선포하셨을 때, 과연 누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외모와 겉치레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세속적 통념에 따라 예수님 역시 매력적인 분이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성경은 그분이 참으로 볼품없는 모습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한 외적 조건이 전무한 분이 스스로를 메시아라 칭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따른 유일한 이유는 성경의 증언대로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시고 오히려 군중을 피해 다니셨습니다. 사람을 모으고 가르치는 것이 목적인 여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도리어 대중을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를 보다 진지하게 고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면 우리도 당연히 믿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선포는 외적 매력이 아닌, 바로 25절의 말씀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음성
본문 2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간결한 말씀이 우리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때’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바로 지금을 뜻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주체가 바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장차 무덤에서 일어날 자들과는 다른, 현재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눈앞의 사람들을 ‘죽은 자’로 규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관점을 견지해야만 앞선 24절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됩니다. 죽은 자에게 “내 말을 듣고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죽은 자가 어떻게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마치 공동묘지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그 소리를 듣고 먼저 뛰어오는 자를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덤 속의 그 누구도 호루라기 소리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단절 앞에서는 그 어떤 고귀한 음성도 소음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는 신앙의 단계는 죽은 자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비극은 믿음의 여부가 아니라, 스스로가 ‘죽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 있습니다. 믿음을 단순히 지적인 동의나 주관적 신념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이 때로는 자기 확신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본래 죽은 자였다’는 사실을 통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자각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음을 처절히 깨닫는 자에게만 “석방”이라는 선포가 기쁨이 됩니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자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제안은 그저 기이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선포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분노하며 돌을 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단 한 번도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를 죄인이라 부르느냐”는 자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관념적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소소한 잘못들을 인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목하는 본질적인 죄, 즉 ‘죽어 마땅한 자’로서의 실존을 얼마나 깊이 절감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멘’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본래 감옥에 갇힌 죄수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사실을 진실로 직시하고 있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로 규정하고 말씀하신다면, “내 말을 들으라” 하신 앞선 권고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생명이 끊어진 자가 어떻게 그 음성을 청종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24절로 돌아가 그 해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 구절의 서두에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결정적인 표현이 자리합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는 선포입니다.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는 원어상 ‘아멘 아멘’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찬송이나 기도를 마무리하며 고백하는 ‘아멘’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본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가 됩니다. ‘아멘’은 단순한 추임새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옳습니다’라는 전폭적인 수긍과 확증을 담은 선언입니다.
본래 아멘이라는 고백은 항상 문장의 끝에 위치하는 것이 성경의 용례입니다. 시편 41편 13절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이라며 찬양의 끝을 맺습니다. 시편 72편 19절 역시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으로 종결됩니다. 오늘날에도 기도를 마칠 때 비로소 아멘이라 답하듯, 이는 모든 간구와 찬양을 확정 짓는 마침표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매우 파격적으로 말씀의 서두에 “아멘 아멘”을 두셨습니다. 이 용법이 얼마나 독특했던지, 유대 문헌은 물론 예수님의 말투를 가장 가까이서 익힌 제자들조차 감히 이 표현을 재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표현을 단순한 강조 어구로 치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강조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로마서에서 진리를 그토록 처절하게 논증했던 사도 바울이 왜 이 표현을 빌려 쓰지 않았겠습니까?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했다면 그 효과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도도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단순한 강조를 넘어 오직 예수님만이 선포하실 수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표현의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 5장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9절과 30절은 주어만 ‘아들’과 ‘나’로 다를 뿐,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는 동일한 고백을 반복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독자적인 행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들은 그대로 받드는 순종의 사역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할 때 비로소 ‘아멘 아멘’의 진의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계획과 말씀을 마주하며, 그 거룩한 사역에 대하여 먼저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선포는 “내 말을 잘 들어라”는 요청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주님의 전적인 순종, 즉 ‘예수님의 아멘’이 선행된 말씀입니다.
이 사실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이 바로 ‘죽은 자’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들을 능력이 없기에, 그들이 생명의 음성을 듣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아멘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아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아멘 하셨기에 그 효력이 우리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나아가 저들을 위하여 죽으라” 명하셨을 때, 주님께서 “아멘” 하고 순종하셨기에 죽어 있던 우리가 살아나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의 아멘이 있었기에, 우리도 비로소 주님과 함께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시당하신 하나님, 무시해온 우리
우리의 응답에 앞서 예수님의 ‘아멘’이 언제나 먼저였습니다. 그 무한한 은혜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듣고 믿으며,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명을 얻고 나니,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악행을 저질렀던 자들인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존을 날카롭게 지적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해 온 대목은 참으로 두렵고 무거운 진실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절감하지 않습니다. 타인을 미워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등의 윤리적 과오만을 죄라 여길 뿐, 창조주께 못할 짓을 했다는 자각은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여정은 ‘아,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구나’라는 뼈아픈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 가슴을 치는 회개의 과정을 수반합니다. 단순히 도덕적 결함에 대한 반성을 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얼마나 처참하게 무시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고통입니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용서를 구하거나 보상할 길이라도 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께 저지른 반역은 우리 힘으로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과 인생의 향방을 상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 묻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오면서도, 아무런 제약 없이 숨 쉬고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한 극심한 무시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인생을 구축하고 내 의지대로 삶을 경영하려 했던 그 모든 안간힘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한 세월이 드러납니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생존하려 했기에, 우리 인생이 쌓아 올린 것은 비대해진 자존심과 교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교만함이 커질수록 우리 내면의 열등감 또한 비례하여 자라납니다. 내가 설정한 이상적인 자아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마주할 때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열등감의 수렁에 빠집니다. 이 상태가 되면 타인의 모든 말은 상처가 되고, 심지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조차 ‘나를 무시하는 처사’로 곡해하며 삐딱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이는 소유의 많고 적음과는 무관한 실존적 질병입니다.
이러한 열등의식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야를 극도로 좁게 만듭니다. 오직 내가 만든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내 기호에 맞추어 타인을 편 가르며 미워합니다. 단순히 성격의 문제라 치부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그 근저에는 결국 “내가 내 인생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선언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주권이 오직 나에게 있다는 이 오만한 선포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가장 깊은 어둠입니다.
죽음에서 건져내시는 예수님의 사랑
우리는 스스로의 열등감과 교만을 통제할 힘이 없습니다. 그 굴레에 갇혀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실패의 공포와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합니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삶을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면 바로 그러한 상태가 곧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하려 했던 그 비참한 몸부림이 바로 영적인 사망 상태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호흡은 붙어 있으나 교만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던 그 모든 세월이, 성경이 지목하는 죽음의 현장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나만을 위해 살았기에 나 외의 모든 존재를 경쟁자나 적으로 간주하며, 심지어 가족과 친구조차도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해 온 이기적인 삶의 실체를 마주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고립된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사건입니다. 나를 위해 진심으로 염려하고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자존심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괴하던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바라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한 채 살아온 우리를 위해, 끝없이 배반하고 거역하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겠노라” 아멘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이때”라고 부르십니다. 죽은 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결정적인 찰나입니다. 세상에 나밖에 없는 줄 알고 고독하게 투쟁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을 등졌던 그 모든 순간에도 나를 위해 죽기로 작정하신 분이 계시다는 진리가 부딪쳐 올 때, 우리 안에서 생명이 요동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이로운 생명을 맛본 자는 “주님, 어찌 저 같은 자에게 이토록 기이한 은혜를 베푸십니까”라고 찬양하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치는 화려한 성취나 고상한 철학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이 의미를 얻으려면 먼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한 연명을 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 즉 ‘영생’을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관계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삶을 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9절에 이르면 우리는 다시금 중대한 신앙적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혹여 구원이 다시금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은 아닌지 당혹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과 선한 행실을 요구하는 이 말씀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시작하신 선한 일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해야 생명의 부활에 이른다는 말씀을 마주할 때 묘한 이질감을 느낍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 안에는 선한 지향과 악한 본성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실을 근거로 생명을 얻는 것이 복음이라면, 여전히 우리 삶에 자리한 악한 행실로 인한 심판은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 누구도 심판의 부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을 행한다’는 표현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윤리적·도덕적 차원을 훨씬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정의하시는 선한 일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여호수아서 23장 14절을 주목해 봅니다.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백성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어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의 결핍 속에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구원의 전 과정을 일컫습니다. 즉, 성경이 증언하는 선한 일은 인간의 도덕적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우리 삶에서 성취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 땅에서의 모든 섭리가 곧 선한 일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이러한 통찰을 더욱 확고히 뒷받침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며,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것”이라 기록합니다. 선한 일은 우리가 임의로 제조해 내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우리 삶의 지평 위에 펼쳐 놓으신 거룩한 경로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1절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즐거우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그것이 곧 선한 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내면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를 수용하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세우신 거룩한 뜻이 실제가 되는 것, 그것이 선한 일의 본질입니다. 그 과정에는 물론 도덕적 성결이 수반되겠으나, 보다 근원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우리 인생 속에서 중단 없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이 대목에서 제가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말씀은 빌립보서 1장 6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과 맥을 같이 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확신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서 ‘착한 일’이 바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선한 일’입니다. 선한 일의 시작점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시작하셨기에, 그분께서 우리의 남은 생애 동안 반드시 그 일을 완성해 내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한 자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자신을 붙들고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자라는 선언입니다.
성도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선한 일이 그 안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명료하고도 영광스러운 정의입니까. 성도의 인생은 단순히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구원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곁에 있는 지체들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걷는 배우자나 이웃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그들 안에서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 모습이 연약해 보이고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지라도,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 생명을 소유했다면 우리는 소망을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인생의 행로가 굴곡지고 험난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낼 때도 있으나, 우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현재의 짧은 단면만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성공이나 실패로 예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선한 일이 온전히 성취되도록 택함 받은 보배로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선한 일
신앙의 여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진리를 기뻐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아멘 하셨기에 내가 비로소 살아났구나’라는 복음의 감격이 우리를 춤추게 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고 그 빛을 따라 살아가려 할 때, 우리 삶에는 반드시 실재적인 변화가 뒤따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 우리 존재를 관통하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 안에서 움을 틔우며 옛 자아의 잔재와 타성적인 삶을 부수고 나옵니다. 예수의 인격이 우리 내면에서 역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말로 다 할 수 없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깊은 인내의 미학을 배우게 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통이 찾아오기도 하나, 이 모든 수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아멘’으로 순종하셨기에 가능한 신성한 과정입니다.
혹여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이토록 고단하고 고독한 길을 걸어야 하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때마다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예수님의 아멘 덕분에 생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을 지날 때에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신실한 아멘이 당신의 인생을 견고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품었던 그 위대한 확신을 우리 또한 가슴에 새깁시다. 인생의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선한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이 영광스러운 약속을 붙들고, 흔들림 없이 믿음의 경주를 완수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셔서 그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삶의 굽이마다 우리의 부족함을 보며 절망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현실 앞에 낙심할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내 힘으로 선을 이루려 애쓰다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시옵소서.
오늘 주신 약속대로 우리는 결국 생명의 부활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시작하신 그 거룩한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고 온전하게 성취될 것임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조차 주님의 완전하신 주권 아래 있음을 신뢰합니다. 주님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영원한 ‘아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먼저 순종의 길을 여셨으니, 우리도 그 뒤를 따라 기꺼이 아멘으로 화답하며 나아가겠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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