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5 1절에서 9 까지 입니다.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날은 안식일이니.” 아멘.

 

옛 시대의 종언과 새 시대의 서막

오늘 우리가 상고할 요한복음 5장의 내용은 지금까지 살펴본 4장까지의 흐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이제까지의 말씀이 새로운 하늘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포도주, 그리고 생수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부터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동일한 개념을 다루되 옛것과 새것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본문 9절 하반부를 보면 "이날은 안식일이니"라는 구절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바로 안식일에 일어난 이 사건이야말로 오늘 설교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 상세히 살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대단원의 시작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으로 당시 유대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셨으며, 이때부터 주님을 향한 본격적인 배척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증명하시는 유일한 권위

주님께서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르며 혁신적인 견해를 지닌 한 명의 랍비에 불과했다면, 이 사건은 단순한 논쟁거리로 치부되었을 것이며, 어쩌면 유대교가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교의 교리와 사상이 수많은 랍비의 가르침을 통해 발전해 왔듯이, 예수님의 삶과 사상 역시 당시 에세네파나 바리새인들의 것과 겉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비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 또한 적지 않은 관심을 품고 그분을 지켜보며 가르침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러한 랍비들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부활이라는 주제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탈무드와 미쉬나와 같은 문헌들이 집대성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저 한 명의 랍비로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신 분이라는 사실 또한 그렇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기적을 절제하고 상황과 시간을 지혜롭게 조율하며, 기적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셨더라면 당대는 물론 역사 이래로 아무도 누리지 못한 거대한 인기와 권세, 그리고 부를 한꺼번에 움켜쥘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한 일을 하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을 통해 인기를 입증하신 적도 없으며,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기적을 이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음만 먹으셨다면 자신을 하나님으로 증명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여러 사도들의 증언이 한결같이 전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나를 증거할 이는 너희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뿐이다"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증거가 주님께는 필요치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인 진리는 인간 이성의 논리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수학의 공리 가운데 n + m = m + n이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는 누구나 아는 단순한 사실 같지만 수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원리이며, 흔히 공리라고 부릅니다. 수의 순서를 바꾸어도 결과가 같다는 이 명제는 더 이상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가장 궁극적인 수학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또한 다른 누구에 의해서나 어떤 현상에 의해서 증명되는 분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증명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과 동일하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을 향한 파괴적 혁신

어쨌든 주님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새로운 개혁을 도모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과는 함께할 수 없으니, 세상의 왕들을 갈아치우고 로마 제국마저 무너뜨리겠다’는 식의 세속적인 변혁을 꿈꾸며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새 시대는 옛것을 파괴하러 오신 측면이 있으나, 동시에 그 옛것을 온전히 완성하러 오셨다는 점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개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념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당시 빌라도는 그 진의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기에 주님을 향해 "네 나라가 여기 있다면 어찌하여 이런 고초를 겪느냐"라고 물었으나, 주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주님의 역사가 왜 하필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의문점이 남지만, 이 이야기는 연구할 때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에 대한 깊은 통찰을 선사합니다. 여러분, 우선 예수님께서는 파괴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5 17절과 18절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옛 시대에 비로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러 오셨습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을 매우 세밀하고 주의 깊게 살피어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그 배경이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이며, 그곳에 다섯 행각이 있었다는 기록 역시 그러한 세밀함의 산물입니다.

 

역사적 사실 위에 세워진 진리의 견고함

과거의 일부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을 연구하며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책을 기록한 이는 사도 요한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지형을 잘 모르는 이방인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다섯 행각'이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각'이란 연못 주위에 누각 형태의 쉼터를 조성하여 그늘을 만들고, 사람들이 그곳에서 쉬거나 연못을 구경할 수 있게 한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연못은 대개 사각형으로 조성되었기에 당연히 그 둘레에는 네 개의 변을 가진 행각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다섯 행각'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요한복음 기자가 예루살렘의 실정을 모르거나 훨씬 후대에 기록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비판들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요한복음에는 기원후 2세기경 그리스에서 성행했던 영지주의적 요소가 다수 발견된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습니다. 영지주의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상인데, 많은 비평가는 영지주의가 2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95년경 기록된 요한복음에 어떻게 영지주의적 내용이 포함될 수 있는가"라며 요한복음의 후대 기록설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은 역사적 사실 앞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현재 예루살렘 북쪽 성문 밖에는 '성 안나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내부에는 놀랍게도 성경의 기록 그대로 다섯 개의 행각을 갖춘 연못이 존재합니다. 본래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구조였기에 사방의 면과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면에 각각 행각을 세움으로써 다섯 행각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고고학적 증거 앞에서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려던 무수한 비판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지주의 발생 시기에 대한 논란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많은 연구자가 영지주의가 2세기 말에야 비로소 등장했다고 확신하며 성경의 기록 시기를 의심했으나, 이미 1세기부터 영지주의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들이 속속 발견되었습니다. 이로써 요한복음의 후대 기록설은 설득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의구심을 넘어, 변함없는 역사적 진실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읽는 계시의 말씀

물론 성경에는 우리가 그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기록된 시기가 아득히 먼 과거이며, 이를 고고학적 관점에서 온전히 증명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신뢰하는 근거가 단순히 고고학적 증명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그분의 실존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령의 조명을 통해 주님을 믿고 압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성이 있기에 의심이 생길 수 있으나, 주님께서는 그 의심을 무조건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명확히 깨달아 가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며 마땅히 할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이 과학 서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의 존재가 누구이신지를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빌려 계시하신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고백할 때,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1 + 1 = 2와 같은 수식적 오류가 없다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진정한 의미는, 이 책이 그 어떤 역사적·학술적 검증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진리의 기초 위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신약 성경이 기록된 지 2천 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누구도 성경이 신뢰할 수 없는 책임을 명백히 증명해내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과 지명 가운데 단 하나라도 잘못되었음을 입증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토록 견고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이유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오류들로부터 성경을 친히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오류를 찾아내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진리를 지켜내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불러주신 내용을 받아 적은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고, 그 과정에서 기록자의 성격과 태도,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필체에 따라 어떤 부분은 흥미진진한 서사로, 어떤 부분은 딱딱한 교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 기록자가 지닌 고유한 문체와 학식, 그리고 그들의 사유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밀한 기록 속에 담긴 은혜의 실체

제가 성경의 기록 방식에 대해 말씀드리는 이유는 사도 요한이 지닌 문체와 기록 방식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성격이 그러했듯, 요한복음은 매우 세밀하고 주의 깊게 살피어 기록된 책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어찌나 정교하게 담아냈는지,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러한 요한의 세밀한 성격은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배 위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성격대로 옷도 벗지 않은 채 바다에 뛰어들어 예수님께 헤엄쳐 나아갔습니다. 요한은 그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던 그 장면에서, 낚아 올린 고기의 숫자를 정확히 153마리라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참으로 요한다운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그는 대단히 세밀한 사람이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러분께 요한복음을 건성으로 읽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오늘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이나 다섯 행각, 그리고 38년 된 중풍 병자와 같은 장치들은 사도 요한이 결코 우연히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복음의 핵심을 읽어내도록 세밀한 단서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기억하시고 본문을 더욱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문 북쪽에 위치한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그 집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풍성한 은혜를 경험해야 마땅한 장소이며, 행각에 들어가기만 하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기쁨의 장소여야 합니다.

 

여러분, 저 또한 미국에 처음 와서 아이들과 디즈니랜드를 찾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설계된 그 공간의 정교함에 감탄했습니다. 그곳의 책임자가 인터뷰에서 "디즈니랜드의 목적은 세상의 근심을 다 잊고 놀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히는 것을 들으며, 그토록 철저히 설계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입장해보면 어떠합니까? 놀이기구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정작 1 50초짜리 기구를 타기 위해 3시간을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결국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채 줄만 서다 지쳐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참으로 속상한 일이지요. 은혜를 누리러 왔다가 정작 줄만 서다 끝나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은혜를 삼켜버린 인간의 경쟁 논리

앞서 언급했듯, 베데스다는 이름 그대로 ‘은혜의 집’입니다. 본래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곳은 마땅히 누구에게나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3절과 4절을 살펴보면, 그곳에 모인 인간들이 나름의 규칙을 하나 정해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자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맨 먼저 들어가는 자가 치유의 기회를 독점하게 되니, 그곳은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진정 '은혜의 집'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치유의 기회가 철저히 선착순으로 제한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거저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이름은 '은혜의 집'일지라도, 정작 그곳에서 치유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은혜를 누리기는커녕 치열한 경쟁 속에서 줄만 서다 돌아가야 하는 처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38년 된 중풍 병자가 바로 그 비극적인 현장의 주인공입니다.

 

본문을 읽으시다 보면 3절 후반부터 4절까지 괄호가 쳐진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는 가장 신뢰할 만한 고대 사본에는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후대에 삽입한 경우에 사용되는 표시입니다. 사실 읽지 않아도 무방한 부분일 수 있으나, 본문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에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한다'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천사가 내려와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다고 볼 수도 있겠고, 민간에 흔히 떠도는 온천 치유 설화처럼 그 당시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민간 신앙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후자에 무게를 둡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사람들이 맹신하던 민간 전설을 언급함으로써, 인간이 추구하는 거짓 은혜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은혜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하려 했던 것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비석을 빌려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요한 역시 당시의 세속적인 풍문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은혜를 얻고자 '은혜의 집'에 왔지만, 그곳은 선착순 경쟁이 지배하는 '능력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치유의 조건이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 "얼마나 발 빠르게 움직이느냐"와 같은 인간의 노력과 실력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철저한 공로주의입니다. 병을 고칠 능력과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왜 은혜를 구하러 그곳에 왔겠습니까? 은혜의 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현장이 되어버린 모순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전적인 무능력 앞에 선 인간의 절망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를 일깨워줍니다. 은혜의 집에서조차 능력을 따지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설령 어떻게든 능력을 쌓아 병을 고쳐보려 애쓴다 해도 치명적인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물에 먼저 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실력을 갖춘 이들은 중증 환자가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들은 눈이 보이지 않거나, 걷지 못하거나, 중풍이나 혈기 마른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먼저 뛰어 들어가라"고 명령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치유의 기회가 주어졌다 한들, 볼 수 없는 이는 방향을 알지 못하고, 다리를 쓸 수 없는 이는 발을 내디딜 수 없으며, 중풍으로 굳은 몸은 일어설 수조차 없습니다.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불가능한 이들에게 선착순이라는 규칙은 절망을 확인하는 가혹한 형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38년 된 병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한 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놀랍고도 예리하게 포착합니다. 2천 년 전의 단회적인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38년 된 중풍 병자의 모습은 고대의 유물이 아니라 바로 ''의 자화상이 되어, 오늘 우리 삶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얻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 앞줄을 선점하고, 남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물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외우다시피 해도 몸은 꼼짝달싹하지 않습니다. 고전적인 예화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 큰 강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 다가와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배가 있었다면 벌써 건너갔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는 "다리를 놓아 건너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왜 강가에서 발만 구르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며 유치원 때부터 배를 타야 한다, 다리를 놓아야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방법론을 수도 없이 배웠습니다. 우리 역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애쓰지만, 자꾸만 제자리걸음인 자신을 보며 "도대체 왜 이렇게 안 되는가"라며 탄식하곤 합니다. 우리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방법을 행할 능력이 없어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다가오십니까? 그분은 "배를 짓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거나 "다리를 놓는 설계도를 주겠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우리를 붙들어 안으시고 친히 물속으로 다이빙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안고 함께 뛰어내려,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헤엄쳐 건너게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세상에는 위대한 스승과 성자들이 넘쳐나며,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이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가 바로 길이다", "내가 곧 진리다"라고 선포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제정신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입니다. 38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는 중풍 병자의 모습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실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절망적인 자리에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근원적 절망과 고독의 자화상

오늘 본문 6절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랜 기간 누워 있던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이 혹여나 상처를 주거나 약 올리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여기에는 분명한 주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옛 시대의 관습과 새 시대의 권능이 충돌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참으로 뜻밖입니다. 병자는 ", 낫고 싶습니다"라는 간절한 고백 대신, "나를 저 물속으로 넣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토로합니다. 자신의 치유가 오직 타인의 도움에 매여 있다는 비관적인 현실만을 읊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시대의 한계 속에 갇힌 인간의 실존입니다.

 

38년이라는 세월은 절망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최소한의 기간만 계산해도 환갑을 훌쩍 넘겼을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희망 없는 삶을 견뎌왔습니다. 여러분은 이 병자를 보며 "나는 이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이 대목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부터 고치지 못한 버릇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38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병자와 무엇이 그리 다를까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여 온전히 성취한 결과들을 헤아려 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절망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병자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합니다. 처음에는 "나는 친구도 있고 교우들도 있으며, 내 곁을 지키는 가족이 있으니 이 병자와는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이 허망한 착각임을 깨닫습니다. 자녀들이 어릴 적, 선물을 들고 귀가하면 아이들은 아빠라는 존재보다 선물 보따리를 보고 달려들곤 했습니다. 그 순간 느끼는 '인생의 고독'은 뼈아픈 진실입니다. 부모님의 헌신도 결혼 후 자신의 가정을 꾸리다 보면, 부모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내 아내와 내 자식에게 마음이 더 쏠리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을 향한 사랑과 부모를 향한 사랑의 크기가 같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홀로 서 있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 아파해 줄 수 없고,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어줄 수 없습니다. 고독은 우리 인생의 이름이며,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지고 홀로 강을 건너는 존재들입니다. 38년 된 중풍 병자의 외로움은 바로 우리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나를 대신하여 고통을 감당해주거나 나를 대신하여 살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 병자와 같은 고독한 실존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과의 비교, 그 시커먼 자아의 발각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 38년 된 병자가 내뱉는 마지막 탄식입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한마디에 우리네 인생의 비루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평생을 누군가와 경쟁하고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저 또한 목회자로서 나름대로 거룩한 삶을 지향한다고 자부하며,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한다며 훈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다른 목사님으로부터 "우리 교회는 매주 교인이 20명씩 늘어납니다"라는 소식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는 겉으로 축하하는 말과는 달리 "무슨 수를 쓴 거지?"라는 시기심이 불쑥 솟구쳤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더 깨끗하다고 자위했을 뿐, 사실 제 내면은 시커먼 욕망으로 가득 찬 죄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법 없이도 살 만큼 도덕적이고 정직해 보일 수 있는 것은, 단지 타인과 비교하여 내가 조금 더 나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스스로를 직시할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인생이 과연 이 정도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이루었나"라는 처절한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까? 우리가 겨우 붙들고 있는 자랑이라는 것도 고작해야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학벌', '더 많은 재산', '남보다 커 보이는 집'과 같은 비교의 산물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어도 그저 감사하고 기뻐하는 순수한 신앙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인간의 이중성 또한 이토록 적나라합니다. 과거 대학 시절 극장 표를 사기 위해 아비규환처럼 뒤섞인 인파를 보며 "왜 다들 줄을 안 서고 새치기를 하는가"라며 속으로 혀를 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극장에서 일하는 지인이 저를 알아보고는 "전도사님, 저쪽으로 오세요. 새치기할 것 없이 바로 들어가시죠"라고 제안하자, 정의롭지 못하다며 비판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라고 외치며 기꺼이 그 특혜를 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고작 그 정도 수준을 벗어나기 힘든 연약한 존재입니다. 38년 된 중풍 병자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민낯과, 은혜를 구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경쟁과 비교의 틀에 갇혀 있는 우리의 가련한 모습을 완벽하게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조건 없는 은혜로 여는 새로운 생명

여러분, 실상 더 무서운 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듯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분발하고 조금 더 잘 준비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 말입니다. 38년을 누워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스스로 체득했을 텐데, 그는 여전히 "누가 나를 조금만 도와주면 갈 수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못 가는 것"이라며 외부를 탓하기만 합니다.

 

방법을 안다고 해서 그 방법이 내 삶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담대히 대답하지 못할까요? 그가 여전히 옛 시대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병자의 대답을 통해 인간이 도대체 누구이며, 옛 시대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인정하기보다, 끝까지 타인의 도움이나 환경의 변화를 갈구하며 율법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8년의 고생 속에서도 그는 참된 치유자를 붙잡기보다는, 여전히 경쟁의 논리에 매여 "누가 나를 도와주면 살 수 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의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옛 시대의 폐허 위에 새로운 시대를 열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낡은 것들을 부수기만 하는 분이 아닙니다. "네가 진정 은혜를 원하느냐? 네가 지금 율법과 너의 자랑, 너의 힘을 의지하고 있음을 아느냐?"라고 물으시며 우리의 헛된 신뢰를 무너뜨리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일어나라!"

 

이처럼 옛 시대의 견고한 아집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어떻게 도래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안식일의 본래 의미와 어떻게 맞물려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는지, 그 놀라운 은혜의 서사를 다음 주에 함께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 오늘 38년 된 중풍 병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실상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위하여 왔노라,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닙니다, 주님. 조금만 더 도와주시면 제 힘으로 갈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며 하나님 앞에서도 스스로 떳떳한 길을 찾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참된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곁에 오셨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은혜의 집 안에서 누가 먼저 들어가 치유를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 비루한 경쟁의 논리를 내려놓게 하시고, 은혜의 집에 찾아오신 은혜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다가오셔서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오직 그 주님만을 붙잡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세상과 비교하며 높아지려 했던 우리의 눈을 열어,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만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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