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3 31절에서 36까지 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하늘에 속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요한복음 3 31절부터 4 3절까지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실질적으로 마무리되는 대목입니다. 그중 오늘 우리가 함께 상고할 3 31절부터 36절까지의 말씀은 구절마다 참으로 깊은 신학적 함의와 신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의욕 같아서는 매주 절씩 깊이 나누고 싶으나, 목회의 현장에서 깨달은 것은 설교자의 열정과 성도들의 관심이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설교는 결코 설교자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오늘은 본문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중요한 나머지 주제들은 향후 요한복음 강해를 이어가며 다시 다루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31절과 32, 그리고 33절을 중심으로 영적 의미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본문 31절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라고 시작합니다. 구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표현한 실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세례 요한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하늘에 속한 '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땅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온전히 설명할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상의 상식이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없는 차원의 신비가 바로 복음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볼 마주하게 되는 가장 장애물은,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땅에 속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땅에서 태어났기에, 땅의 일을 듣고 말하며 이해하는 데는 매우 익숙하나 하늘의 일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자신 또한 땅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땅에 속한 회개와 하늘에서 오신 복음

세례 요한의 관점에서 땅에 속한 자의 특징을 본다면, 이는 이스라엘의 맥락에서 구약에 속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있습니다.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땅에 와서 땅에 속한 자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개를 외쳤음을 시사합니다. 그가 선포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외침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는 성격상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이 알아들을 있는 차원의 언어로 소통한 이였습니다. , 이스라엘에게 익숙한 율법의 계명을 근거로 회개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과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임재를 앞두고 모세를 통해 몸을 씻으며 정결하게 준비했던 것처럼, 요한의 세례 역시 그러한 정결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이 마땅히 성결하게 준비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요한의 이러한 선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심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서서 바르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메시지가 이토록 울림을 주었던 이유는 그것이 유대인들의 이해 범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누가복음 3 10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는 무리가 세례 요한에게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훗날 예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질문을 받으시지만, 질문은 같아도 대답은 사뭇 다릅니다. 요한은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와 같이 하라고 가르칩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세금 외에 강제로 거두지 것을, 군병들에게는 강포를 행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당부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있는 도덕적 가르침이지 않습니까? 세리에게는 탐욕을 경계하고 군병에게는 무력 남용을 금하는 , 일상에서 명확히 깨달을 있는 교훈들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이 가르친 나눔과 절제의 도는 모두 율법의 계명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의 찔림을 받았고 그것을 준행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지를 계명으로 받아들였기에 능히 이해할 있었고, 그리하여 많은 이가 요한을 선지자로 우러러보며 심지어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한계는 세례 요한 스스로가 구원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스스로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었으며, 타인에게 나누어줄 생명의 근원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자신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 참생명의 근원이 오실 것을 증언했던 것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 또한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며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이미 포도주가 있었으나 ' 나은 포도주' 것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포도주로 임하실 것을 선포합니다. 또한 기존의 성전보다 ' 나은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세례 요한 역시 같은 맥락에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과 계명을 도구 삼아 다가갔기에 백성들이 그를 이해하고 따를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신 "라고 증언합니다. 이어지는 32절에는 실로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세례 요한의 말에는 열광했던 사람들이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설적인 특징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세상의 논리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어떤 계명이나 규례를 통해 우리를 설득하거나 납득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늘의 증거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되거나, 논리를 듣고 ", 그렇습니까?"라고 동의하게 하려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설명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친히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만일 복음을 설명하여 인간을 납득시킬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고 들은 바를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으나 내용이 하늘의 일이었기에 땅의 사람 그것을 받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설교 또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을 만나는 이유는, 설교자의 역량 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것이 하늘의 일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땅의 관점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하늘의 언어를 전하다 보니 이해의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흔히 신앙생활을 하며 "오늘 설교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알아들었기에 믿는다"라고 고백하곤 합니다. 표현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고백을 때는 자신이 어떠한 의도로 말을 하는지 스스로 정리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알아들어서 은혜가 되었습니다"라고 , '알아들었다' 의미가 설교의 지적인 내용을 완벽히 장악했다는 뜻인지, 아니면 너머의 영적 접촉이 있었던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을 통해 참뜻을 살펴봅시다.

 

앞선 32절은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증거를 받는 이가 전무하다는 선고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3절을 보면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이라며 증거를 수납하는 자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가 내뱉는 고백이 매우 독특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을 갖게 되었을 "내가 말씀을 깨달았다" 혹은 "내가 드디어 믿기로 했다"라고 표현하길 좋아합니다. 이는 훌륭한 신앙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믿었다"거나 "내가 이해했다"라고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증언합니다. 증거를 받았다면 " 말씀이 좋고 마음에 이해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자연스러울 텐데, 성경은 굳이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참되시다: 이해가 아닌 인정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해' '인정' 차이 때문입니다. "내가 알았다" 혹은 "내가 깨달았다"라는 말은 주관적으로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들은 성경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참되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옳으시다"라는 뜻입니다. 사이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전자는 "내가 오늘 읽고 들은 말씀을 이해했다"라는 자기중심적인 고백인 반면, 후자는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라는 존재론적인 고백입니다. 우리는 대개 '이해' 추구하곤 합니다. 이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답답함을 느끼고,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흡족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는 결코 완전할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 이해의 한계를 자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 하나님 말씀을 안다고 자부할지라도, 하나님의 광대하신 뜻과 섭리를 유한한 인간이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히 " 안다" 말할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참되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점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여 이해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여러분을 설득하거나 믿도록 시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해시키는 대신 "하나님은 계시다"라고 선언합니다. 가령 세계 인류가 모여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다수결로 결정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60 인구 59 명이 하나님은 없다고 손을 들고 1 명이 기권한다면, 하나님이 정말 없어지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우리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 혹은 우리가 이해하느냐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가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당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논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지난 세기 동안 가장 뜨거웠던 쟁점 하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첨예한 대립이었을 것입니다. 과정에서 진화론은 나름대로의 변화를 거듭하며 조금씩 이론을 수정해 왔습니다. 변치 않는 진리인 성경 앞에서 진화론은 여러 견해와 이론을 내세우며 끊임없이 요동쳐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설령 진화론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모든 과학자가 확실히 있도록 우리가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선포하여 증명해 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과연 그렇게 된다면 과학자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편을 들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세상의 본질입니다. 과거 과학계에는 지구가 형성될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다시 지구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 달과 태평양이 되었다는 학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달의 토양을 조사해 보니 지구와 성분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달은 지구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과학적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해서, 과학자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화성 탐사선이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 있는데, 나중에 어떤 학설이 다시 나오거나 뒤바뀐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세상의 모든 의문에 대하여 완벽한 답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신앙인의

여러분,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데,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책임은 도대체 어디서 만나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있으십니까? 만약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있는 분이 있다면, 제가 잠시 설교단 아래로 내려가서 설명을 듣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경계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 , 안에서 긴장하고 회개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듭 발견하고, 동시에 나의 연약함을 깨달으며, 책임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점검받는 고민의 과정이 신앙의 삶입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이고, 여기서부터는 인간의 자유의지다"라고 자르듯 나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해할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기에 매우 어려운 문제일 있으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은 자들의 특징은 바로 지점에서 "하나님이 옳으시다"라고 고백한다는 있습니다. 이는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있다" 오만함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꿰뚫어 본다는 뜻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일 것입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어느 해탈을 통해 이해하고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의문이 자기 앞에서 맑아지고 깨끗해져서 '대각(大覺)' 이르는 것이 그들의 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이치를 이해했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이 옳으시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힘든지 정말 모르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없다" 토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진정한

앞길이 어떻게 풀릴지 몰라 어쩔 모르지만, 가운데서도 가지만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을 바로 신앙인이라 부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옳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분명 긍휼과 자비로 나의 인생을 붙들고 계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주의 모든 원리를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성경 또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지식은 어쩌면 과학자들이 알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다는 사실만큼은 과학자들보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매일 별을 관측하며 위치를 찾고 이름을 붙이는 천문학자보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 쏟아지는 별들을 보라,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감탄하는 우리의 인생이 도대체 누구의 인생이 멋진 것입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이 옳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무조건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작정 우기는 것은 막무가내일 뿐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시며, 얼마나 공평하시며,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알기에 "나는 하나님께 항복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표현이지, 단순히 "내가 믿습니다"라는 결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하늘의 것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온전히 믿을 있겠습니까?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시던 그분께서 직접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하늘의 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하늘의 신비가 내려온 것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로마서의 말씀처럼 믿는 이도 없고 찾는 이도 없으며 그것을 알고 따르는 이도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은혜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겸손한 순종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모든 가운데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럼에도 나는 기꺼이 하나님께 항복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나의 인격적인 주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역사해 오셨는지를 알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생이 어떠한 처지에 놓일지라도 번도 나를 놓지 않고 인도하실 분임을 믿기에,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하신다면 그것이 옳습니다"라고 고백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우리의 신앙이 주저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충분히 배워서 알게 되면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며 깊이 섬길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엉뚱한 오해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같은 수준에 올라서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로 그분과 동행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교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그분을 이해하며 있겠습니까?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결코 그런 길이 아닙니다.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조금은 압니다. 그러나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의 전부인 말해서는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실 지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전부 아는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실을 뒤집어 생각하면 놀라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내가 아는 미미한 조각만으로도 이토록 엄청난 사랑인데, 그분의 '전부' 생각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미약한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손길만 보아도 가슴이 벅찬데, 하나님께 무궁무진한 은혜의 보고가 남아 있다면 그분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겠습니까?

 

땅의 기준을 넘어서는 하늘의 관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면, 여러분은 우리 인생이 지금 어떠한 위에 놓여 있는지 이미 알고 계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걸음 나아가면,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땅에 속한 자들이 지닌 근본적인 약점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설령 안다 해도 자꾸만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모든 것을 '땅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며 땅의 소산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에, 은연중에 "우리는 땅의 기준으로 보아도 제법 괜찮게 살고 있다"라고 자부하곤 합니다. "이만하면 나도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가. 매일 아침 성실히 일터로 나가고, 자녀들을 정성껏 키우며 땅에서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환자다."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는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이제껏 자신은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쯤 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는 건강한 알고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며 저만치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오셔서 "휠체어를 미는 사람이나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이나 눈에는 똑같은 환자일 뿐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충격적인 말씀에 우리는 당혹감을 감출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차라리 이렇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말하지 마라." 이런 도덕적인 지침을 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지켜서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깨끗한 모습으로 서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너희는 모든 율법을 전혀 지키지 못한다"라고 단언하십니다. 이에 격분하여 "내가 언제 간음을 했습니까?"라고 항변해 보지만,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그분 앞에서 아무런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결국 우리는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땅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기준을 절대화하고 위에 있기에, 스스로는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 또한 땅의 기준으로는 결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모든 것을 지키고 있습니다. 십계명조차 어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자부하던,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도 이와 같은 범주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문제는 성도들에게조차 아주 빈번하고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요한삼서 2절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신약 성경 396페이지입니다. 여러분이 매우 알고 계시는 익숙한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가정마다 액자로 걸어둘 만큼 사랑받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대개 우리는 구절을 보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영혼이 구원받아 잘된 것처럼, 이제 사업이나 내가 하는 모든 일도 풀리고 육신도 건강하게 되기를 바란다.' 사도 요한이 그렇게 기도했으니 우리도 마땅히 이런 축복을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땅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땅에 속해 있기에,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식간에 땅의 가치로 치환하여 이해해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범사에 잘된다"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참된 형통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3절과 4절에서 "진리 안에서 너희가 행하는 것을 내가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체가 범사에 잘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범사에 잘되는 ' 우리의 사업이 번창하거나 육신이 안락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겪는 수고와 좌절, 실망과 아픔, 그리고 답답함과 핍박까지도 성경은 "범사에 잘된다" 역설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성공과는 사뭇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느덧 하나님의 말씀을 땅의 가치관으로 해석해 버리는 위험에 너무나 자주 빠지곤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닌 고질적인 경향성이라 있습니다. ''이라는 개념만 나오면 모든 것을 땅의 기준으로 치환하여 해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일이 잘될 때뿐만 아니라, 잘되지 않을 때조차 땅의 기준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것을 땅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내가 실패했다"거나 "좌절했다" 단정 짓곤 합니다. "남과 비교했을 나는 뒤처지고 있다"거나 " 정도는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쉽게 낙심하는 역시 똑같이 땅의 구조로 삶을 해석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세상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그것을 실패라고 여기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던 일이 어긋나거나 자녀가 기대만큼 성장해 주지 않으면, 마치 인생에서 실패한 것처럼, 혹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 것처럼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의 증언은 세상의 판단과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73 28, 구약 성경 854페이지입니다. 성경은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백이 나오기 , 그는 처절한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저토록 잘됩니까? 저들은 죽을 때조차 고통이 없으니,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의인들은 도리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말씀대로 살려 애쓰는데 일은 이토록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합니까?"라며 답답함을 토로했습니다. 고뇌 끝에 하나님이 주신 결론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비록 가난하고 일이 풀리지 않으며 모든 상황이 꼬일지라도, 일로 인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것이 복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물론 대목에서 여러분의 '아멘' 소리가 나오리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응답은 아마도 "세상일도 형통하고, 더불어 하나님과도 가까워지는 것이 복입니다"라는 것일 테지요. 우리가 땅의 것에 깊이 뿌리를 박고 살아가기에 이러한 본성을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이 풀리면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한 성공과 실패는 세상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성공한다 한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결국 세상을 떠날 가져가지 못할 만큼밖에는 성공할 없습니다. 이상의 성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 매달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세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끊임없이 하늘의 것을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진정한 성공과 실패는 오직 "내가 지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하고 소망을 얻어야 이유는 일이 일사천리로 형통함에 있지 않습니다. 형통하든 그렇지 않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혹은 병상에 누워 있든 강건하게 활동하든, 모든 형편 속에서 "내가 과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복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말할 나위 없는 복입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에 함몰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도리어 시험과 유혹이 되고 맙니다. 재물이 많아도, 혹은 너무 건강해도 우리는 같은 유혹을 받을 있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때로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은, 인간의 육신이 본래 연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승승장구하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좌절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귀한 섭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치게 잘되는 것에 도취해서도 되며,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해서도 됩니다. 모든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는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편,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이와 유사한 문제들에 직면하곤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우리는 순종의 방식을 두고 여러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술과 담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혹은 "주일에는 밖에서 음식을 먹어도 됩니까? 밥이 된다면 짜장면은 괜찮습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찬송에 대해서도 "시편만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복음성가도 가능합니까?" 같은 질문들을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열심에서 비롯된 고민들입니다.

 

형식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로는 "예배 피아노를 사용해도 되는지, 아니면 반드시 오르간이어야 하는지, 드럼이나 기타는 괜찮은지" 같은 문제로 고민하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어떤 문제는 명확한 답이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완벽한 대답을 얻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열심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야 하며,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힘을 다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 완벽한 대답을 얻는 데만 정신을 쏟다 보면, 가끔 정말 중요한 본질을 놓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에서 제가 가장 편하게 이야기할 있는 곳이 찬양대입니다. 베이스 파트가 부족할 때면 그들이 제게 도움을 청하곤 하기에 저로서는 만만한 곳이지요. 말을 하고 나서 겪게 뒷감당이 걱정되기도 합니다만, 찬양대가 정성을 다해 연습하고 최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숙련된 기능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자칫 전문가가 되어버린 나머지 정작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곤 합니다. 음표 하나 틀릴까 전전긍긍하느라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엉뚱한 곳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실력이 조금 부족하여 틀리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 마땅합니다. 물론 우리 찬양대는 찬양이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은혜를 끼치기보다는, 언제 틀릴지 몰라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함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만듭니다. 언제 틀릴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한국의 '총알 택시' 같습니다. 운전사에게 이렇게 빨리 달리느냐고 물으면, 간혹 "그래도 내가 목사보다 낫다"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살리는 영과 죽이는 의문

이유를 물으니 "목사님들은 설교로 사람들을 잠재우지만, 나는 총알 택시를 운전해서 뒤에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답했답니다. 지금 졸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깨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여러분과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잘못된 신앙관이나 신학적 태도를 조금씩은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고, 교리를 치의 오차도 없이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이러한 본질을 놓치고 나무만 보다가 숲을 보지 못하여, 결국 죽은 전통에 갇히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순종을 빙자하여 다른 율법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하에 인간적인 규율을 세우고, 도리어 율법에 얽매이게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부분을 더욱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고린도후서 3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저가 우리로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여기서 '의문'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나 영은 우리를 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마땅히 '' 있어야 합니다. , 그리스도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과 길로서 여러 신앙적 문제들을 겸손히 상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은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민을 이어갈 , 우리는 바른길을 있습니다. 여러분, 순종을 위한 순종은 율법일 뿐입니다. 오직 사랑을 위한 순종,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옳으셨습니다: 인생의 최종 고백

잘못된 순종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서 목에 힘을 주게 하고 아는 체하게 하며, 타인을 판단하고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행하는 순종은 한없이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게 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힘써 순종한다 한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순종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순종의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즐거워하고 그분만을 의지합니다. 바로 그러한 자세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랑할 없으며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바라보며, 순종을 위한 순종이 아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오직 그리스도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되는 , 그것이 바로 진짜 순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늘의 것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분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이 칠흑처럼 어두워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의 다른 방편을 찾아 헤매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늘의 운세를 살피며 요행을 바라시겠습니까? 신앙인은 바로 그때 발을 내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분은 인생을 결코 실패하게 두지 않으신다"라는 확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인생 같아 보일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땅의 것으로 치환하여 탐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도리어 땅의 모든 소유와 사건들, 여러분이 겪는 모든 일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곳으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를 여러분의 참된 복으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도 함께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때로 우리는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그때 만일 이랬더라면" 하고 후회하곤 합니다. 주님, 반성하는 마음은 귀하나,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이토록 고백할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옳으셨습니다." 인생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희가 어찌 이토록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올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교만해 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사랑을 어찌 알았겠으며,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살아보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를 어찌 깨달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셨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과 사랑이 되심을 믿으며, 사랑하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