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322절에서 30 까지 입니다.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아멘.

 

겸손을 넘어선 자기 부인의 고백

오늘 본문은 교회를 다니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접해보셨을 말씀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얼마나 겸손하게 예수님을 높였는지를 보며 자주 경탄하곤 합니다. 참으로 숭고한 모습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찾아와 결례에 대해 변론하던 중에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전했던 모양입니다. “저편에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은 과거 당신이 증언했던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그분도 세례를 베풀고 있고, 오히려 이곳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에게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말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은 내심 서운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스승이 엄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후배 격인 이가 주목받는 상황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겠지요. 그런 착잡한 심정으로 스승에게 달려가 묻습니다. “요단강 저편에서 예수가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전부 그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어찌 일입니까?

 

그때 세례 요한은 시기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그가 잘되는 것이 오히려 기쁘다. 내가 목적이 바로 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 참으로 초연하고도 위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세례 요한의 신앙에만 매몰되어 본문을 읽다 보면—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요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박수를 보낼수록, 그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말과는 상반된 인물이 되어 갑니다. 요한은 분명 “나는 쇠하고 예수께서 흥하셔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정작 우리는 본문을 대하며 ‘세례 요한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의 겸손을 본받자,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진정한 인물이다’라며 요한을 칭송하고 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우리도 요한처럼 겸손해지자’라고 거듭 다짐할수록 어떤 결과가 초래됩니까? 요한은 스스로 쇠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정작 우리는 그를 흥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이 주인공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그가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극히 중요한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확인하셨듯이, 복음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태초의 창조를 배경으로 6일간의 사역이 전개되고, 마지막 7일째에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잔치에서 주님은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하늘로부터 신령한 포도주가 우리에게 부어지는 경이로운 광경을 계시하십니다. 이어지는 성전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지상의 성전은 무너지고, 하늘에서 오신 성전이 친히 성전 되시는 모습을 선포하십니다.

 

나아가 우리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마주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무엇을 계시하십니까? “하늘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오직 하늘로부터 임하는 생명의 신비를 증언하십니다. 모든 말씀의 주인공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 역시 세례 요한의 입술을 빌려 하늘로부터 오신 참된 신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 본문을 살피려 하는데, 오늘은 하늘로부터 신랑이라는 깊은 본론에 앞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는 지점들을 먼저 짚어보고자 합니다. 가끔 한국의 중대형 교회에서 전임 목회자가 은퇴하며 후임자를 소개할 , 겸손을 표하며 하시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전임자가 아닌 증언자로서의 사명

“이제 후임으로 오시는 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떤 훈련을 거쳤으며…. 이처럼 후임자의 이력을 나열한 , “그러므로 이분은 흥하여야 하고 저는 쇠하여야 합니다”라고 맺는 말씀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러면 회중은 ‘역시 우리 목사님은 끝까지 겸손하고 인격이 고결하시다’라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역시 그런 광경을 보았고 여러분도 익숙하실 터입니다. 참으로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지요. 그분들의 진심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나, 안타깝게도 구절은 그런 자리에 인용될 성격의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사명을 완수하고 명예롭게 퇴장하는 전임자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수를 받으며 물러나는 자리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요한은 자신의 권한이나 지위를 누군가에게 이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28절을 보십시오. “나의 말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엄연한 사실을 증언할 이들이 바로 너희라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영광의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전임자가 아닙니다. 번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취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으려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영적 원리를 발견합니다. “나는 망하고 예수는 흥한다”라는 고백은 뒷사람을 세워주며 자신을 겸손하게 포장하려는 수사가 아닙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실질적으로 쇠하고 실제적으로 망한다는 처절한 선언입니다. 주님이 흥하신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철저히 지워져야 함을 의미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기 부인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의와 봉사로 이룰 없는 하나님 나라

세례 요한의 사역이 탁월했거나 그의 성품이 잡을 없이 성결했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세상의 존경을 몸에 받을 만큼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주님이 높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명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요구받는 신앙의 본질이 세속적 가치관이 기대하는 종교적 덕목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고, 빛과 소금이 되며, 세상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부름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길이다.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돕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동력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성경의 진리라기보다 세속의 논리가 교회 안으로 침투한 결과에 가깝습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을 정직하게 대면한다면, 그는 철저히 쇠하고 망했을 뿐이지 자신의 어떠한 공로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킨다”는 목표를 구성원들의 헌신이나 노력과 동일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성도들이 흘린 땀과 정성 어린 예물, 그리고 투여된 시간의 양에 비례하여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맡은 직분이나 사역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혹은 성경 공부 리더로서 수고할 , 우리는 흔히 ‘내가 이토록 애쓰고 가르쳤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라는 자아도취의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참된 사역

하지만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심장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의 유능함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도가 진정 경계해야 것은 명백한 죄악만이 아닙니다. 악과 싸우는 못지않게 주의해야 지점은, 사랑하고 봉사하며 빛과 소금으로 살겠다는 열심의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교만의 위험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자원을 동원하여 성취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땅의 것을 아무리 끌어모은들 하늘의 신비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예수님께서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땅에 내려오셨으며, 그토록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겠습니까? 세상의 자원으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없음을 아셨기에, 오직 하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신 바로 단독적인 사건이며, 이는 어떤 인간의 행위로도 대체될 없습니다. 우리의 숭고한 사랑이나 희생, 심지어 우리의 생명이나 능력으로도 사역을 대신할 없습니다. 원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마태복음 16장을 잠시 찾아보겠습니다. 신약 성경의 서두에 있는 마태복음 16 2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가지 절대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말씀을 나누었으나, 정작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거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이 아닌 죽음의

성경은 여기에서 분명히 ‘십자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도님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인생의 고달픔을 토로하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자주 뵙습니다. “목사님, 원수 같은 자식만 없어도 인생이 한결 수월할 텐데, 아이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기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자녀라면 그나마 견딜 만하겠지만, 때로는 배우자가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계속 지고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제가 십자가를 감당할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구하십니다. 여러분,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짐’일 수는 있어도 결코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신 것처럼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십자가”라는 말은 나의 죽음을 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히 죽어지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주님을 따를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니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어지십니까? 내가 이토록 처절한 길을 가면서까지 예수를 쫓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가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십자가라는 관념은 종종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인도합니다. 눈앞의 고통스러운 문제만 해결되거나 짐만 내려놓으면 주님을 따를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사라진다면, 십자가만 없어진다면 비로소 온전한 신앙인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내가 완전히 죽었을 비로소 오직 주님께만 영광이 되는 길이 열립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이 무용지물이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미 죽은 자의 손에 쥐어진 것이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깊이 숙고해 보십시오. 주님의 요구는 명확합니다. 우리에게 “너의 십자가를 지라”고 명하시며, 우리의 전적인 죽음과 자기 부인을 요구하십니다. 재물도, 권세도, 명예도 주님을 따르는 도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와 ‘천국에 가야지’라거나 ‘좋은 말씀을 통해 영혼을 풍성하게 가꾸어야겠다’는 기대를 하시는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는 신앙의 한계

그러나 과연 성경이 진정으로 그런 복락을 약속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놀라실지 모르지만 여러분이 현재 보유한 신앙의 열정만으로도 주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나의 신앙을 의지해서는 절대로 주님을 쫓아갈 없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믿기에, 혹은 신앙을 굳게 붙들면 승리할 있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자꾸만 강력한 신앙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자극을 찾고 대단한 증거를 산출하려 애를 씁니다. ‘이 정도로 된다면 오늘부터 금식이다’라고 결단합니다. 하루 금식으로 부족하면 사흘, 그것도 되면 일주일, 나아가 철야 기도에 매달립니다. ‘이래도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40 금식으로 결판을 내겠다’는 식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신앙을 극단적인 행위로 증명하려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앙을 우리가 소유한 대단한 능력이나 힘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능력이라는 말은 내가 소유한 믿음의 분량이 어떤 물리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침과 저녁이 다를 만큼 가변적이고 나약하지 않습니까?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경건의 시간을 가지며 신실한 같다가도, 저녁에 돌아올 때는 ‘오늘도 거짓말을 하고 다투며 미워했구나’라며 자책하며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실상 아닙니까? 저를 포함하여 인간의 믿음이란 참으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무력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말할 ,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분의 믿음 안에 우리가 머물기에,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가진 믿음의 공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선포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부인이요, 우리의 죽음입니다. 원리가 선명하게 드러난 누가복음 17장을 통해 걸음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익한 종의 고백과 하나님의 은혜

누가복음 17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앉아서 먹으라’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일을 것뿐이라’ 할지니라. 아멘. 여러분, 비유는 오늘 본문과 연결할 매우 중대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사실은, 종이 하는 사역에는 주인을 향한 어떠한 ‘유익’도 전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고백하듯 자신은 그저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밭을 갈고 주인의 상을 차리며 힘을 다해 섬겨도, 그것이 주인에게 어떤 결정적인 보탬이 되는 유익한 일이라고 생색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진지하게 자문해 보십시오. 우리의 봉사가 진정 하나님께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유한한 인간의 수고가 무한하신 하나님께 무슨 실질적인 보탬이 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께 어떠한 유익도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정직과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근사하게 세워갈 있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우리의 기여는 사실상 전무합니다. 여러분이 정직하게 살고 사랑을 베푼다고 해서 타인이 저절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죽어 누군가를 변화시킬 있다는 생각 또한 오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하나님 나라를 현시할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무익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예배가 끝난 헌금을 되돌려 달라고 하실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 유익도 없는 일이라면 내가 예물을 드리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까?”라고 항변하실 수도 있겠지요.

 

솔직히 역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이 행한 열심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공로에 부합하는 복을 차등적으로 내려주신다고 전할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대로만 복을 받는다면, 여러분, 우리는 험한 세상을 하루도 견딜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 무엇이 그리 대단하기에 감히 하나님께 복을 요구할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복과 위로, 평안과 기쁨은 결코 우리의 행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두어 먹는 ,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본질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린 유익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원리가 결코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 보상을 넘어서는 사랑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당혹스러운 지점은, 우리가 하는 사역이 정작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런 보상적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역시 이런 설교는 피해 가고 싶지만, 본문의 진리가 저를 이토록 가혹하게 몰아세웁니다. 저라고 축복만을 전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전심으로 주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찬란하게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확언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모든 헌신을 마친 후에 있는 고백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명시합니다. “나는 마땅히 해야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겠느냐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돌아올 세속적인 유익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여했다는 자부심은커녕, 자신에게 돌아올 실질적인 이득조차 기대할 없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물이 여러분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줍니까? 우리는 흔히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상의 물질적 복을 주신다”는 것을 신앙의 기본 공식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접근입니다. 요즘 교회들의 행태를 보면 마치 투자를 통해 이익을 회수하는 주식회사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투자로 여기며 이익을 남기려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병을 고치고, 부를 쌓으며, 성공이 보장된다고 가르칩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욕망이 실현된다고 하니 누가 재물을 아끼겠습니까? 십일조를 내어 배의 결실이 보장된다면, 그보다 확실한 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헌금을 하는 것은 하는 만큼의 실질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만큼 여러분의 가계부에서 액수가 줄어드는 것이 엄연한 물리적 사실입니다.

 

중에서 불을 헌금하면 남는 것은 구백 불입니다. 불만큼 분명히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비단 예물뿐만이 아닙니다. 봉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바쳐 충성하지만 남는 것은 육신의 고단함과 질병뿐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애를 써도 사람들이 알아주기는커녕, 부엌에서 흘려 음식을 준비하면 맛에 대한 타박만 돌아오곤 합니다. 투자 대비 유익을 생각한다면 손해일 뿐입니다. 목사나 장로, 집사의 직분을 맡는 것이 세속적인 유익을 가져다줍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어떤 세상적인 보상이 나옵니까? 문제는 직분들에 어떠한 특권이나 유익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교회의 타락이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직분을 얻음으로써 무언가 대우를 받는 유익이 있다고 믿는 착각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조건 없는 헌신의 동력,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집사의 직분을 얻으면 모종의 유익이 따른다 생각하고, 목사가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복을 회중과는 전혀 다르게 받는 줄로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그런 특권적인 복을 경험한 없으며 여러분과 사이에 어떠한 영적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드시는 양식을 저도 똑같이 먹으며, 여러분이 누리는 공기와 햇빛을 또한 동일하게 누릴 뿐입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근본적인 의구심이 드실 것입니다. ‘나에게도 이익이 없고 하나님께도 유익이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교회에 모이는가? 또한 같은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자리에 오셨습니까? 교회에서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귀한 예물을 드리고, 시간 자리를 지키며 모든 예배의 순서에 마음을 쏟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주변에서 찬양대원이나 여러 사역으로 봉사하기를 권유받아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을 먹고 찬양대에 서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음악적 기량에 대한 세세한 평가와 참견뿐일 때가 많습니다. 어느 주일에는 은혜를 받았다며 따뜻하게 손을 맞잡다가도, 그다음 주에는 차가운 시선으로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교회의 민낯이기도 합니다. 조용히 머물다 가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 자꾸만 봉사와 헌신을 요구받는 상황이 때로는 고단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상이 담보되지 않는 사랑과 봉사, 빛과 소금의 삶을 우리에게 그토록 강조할까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특히 아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공감하실 광경이 있습니다. 평소 외모에 무심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거울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정성껏 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강권해야 겨우 하던 일들을 스스로 챙기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 뒤에는 대개 누군가를 향한 연모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용돈을 털어 상대가 기뻐할 만한 것을 준비하고, 거절을 당하면서도 아낌없이 베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 수고를 자처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하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너무나 좋기에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종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이유는 오직 주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행위는 아부나 투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실질적 도움도 드릴 없는 무익한 종임을 깨달았습니다. 돌아올 보상이 전무함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영광의 자리

교회 안에 수많은 봉사의 직무가 있으며, 예물을 드리고 시간을 내어 예배 공동체로 모여야 하는지 이유를 이제는 조금 아시겠습니까? 모든 과정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할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여러분이 교회에서 아무리 헌신한다 해도 교회나 목사가 여러분께 드릴 세속적 보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얻는다고 해서 세상이 주는 떡과 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신앙의 행위가 즉각적인 유익으로 치환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의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도 여전히 주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자리가 바로 사랑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겪은 역경과 그들의 희생에 주목하며 경의를 표하지만, 사실 그들은 명성을 얻거나 보상을 받기 위해 길을 걸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공로에 따른 보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토록 처절한 길을 완주할 있었던 이유는 오직 주님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는 자체가 형언할 없는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종의 태도이며 신앙의 정수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유익이 창출되는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고, 성공보다는 실수가 잦으며,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소란스럽기도 곳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교회가 감당해야 당연한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이곳에서 무릎 꿇게 하시고 거룩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수고 자체가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직분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리에 머무는 자체가 이미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선포한 ‘자신은 쇠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흥하는’ 신비로운 영적 원리입니다. 다음 주에는 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영광을 보여주시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의 마음을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나에게 돌아올 보상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님 분만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는가?

 

기도합시다.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를 무익한 종으로 부르시고, 세상의 어떠한 유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할 있는 은총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너무나 사랑스럽기에 우리가 자리에 모여 주님을 높이며 기뻐합니다. 여기 고개 숙여 경배하는 주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들의 속에 참된 위로와 기쁨이 되어 주시고, 고단한 삶의 자리에서도 환희와 인내로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고백이 끊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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