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3 16절에서 21 까지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아멘.

 

가장 익숙한 구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가령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 같은 분은 로마서 1장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을 꼽을 것이고, 여러분 또한 저마다 사랑하고 아끼는 구절이 하나씩은 있으실 압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인지하고 있으며 가장 사랑하는 구절 하나는 단연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3 16절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기록된 말씀은 수많은 성도뿐만 아니라, 심지어 믿지 않는 이들조차 암송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고귀한 구절입니다

 

우리의 신념을 넘어선 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구절을 이해함에 있어 믿지 않는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믿는 성도들조차 간혹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대개 말씀을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이해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땅에 보내셨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믿지 않으면 멸망에 이른다. 문장이 간결하다 보니 이처럼 평면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구절을 통해 여러 차례 깊이 묵상해 보겠지만, 우선 가지 짚어둘 사실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믿었기에 영생을 얻고, 너는 믿지 않았기에 얻지 못한다’는 식의 인과관계나 인간의 선택에 방점을 구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에 놓여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한 뒤에야 참된 의미를 비로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고 말할 자칫 오해하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주관적인 ‘신념’에 그치기 쉽습니다. , 내가 얼마나 강하게 확신하는지, 혹은 얼마나 견고하게 마음의 결단을 내렸는지를 성경은 믿음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그저 내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이해는 잠시 보류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과연 어떠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요한복음 3 16 이하의 구절들을 통해 더욱 세밀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니고데모의 조건을 지우시는 하나님의 주권

먼저 요한복음 3 16절의 주어가 누구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문장의 주어는 누구입니까? 말씀이 시작됨과 동시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선포하듯이,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어라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3장을 줄곧 상고하며 보았듯이, 여기에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선포의 주체는 결코 니고데모가 아님을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주어가 아니라는 말은, 우리 역시 주체나 조건이 없다는 뜻과 같습니다.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엄중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함에 있어 니고데모도, 우리도 결코 주어가 없으며 어떤 조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은 니고데모의 명성이나 고매한 인격을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혹여 억울한 마음이 드십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획득한 명예와 지위, 그리고 그동안 갈고닦은 고결한 인격조차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자리에는 명함을 내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 복음 자체는 인간이 지닌 어떠한 조건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평등한 인간의 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실 , 우리가 TV 살인자를 보며 “어떻게 사람이 저럴 있는가”라며 개탄할 때의 대상과 우리를 동일하게 취급하십니다. 소위 ‘인간 말종’이라 지탄받는 이들이나 우리 자신이나, 성경은 동일한 선상에 둡니다. 어떻게 그럴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으시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에 있어서는 흉악한 범죄자나 평생 없이도 살았을 법한 여러분의 형편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다는 절대적인 기준 앞에 우리 모두는 평등할 뿐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배경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십시오. 니고데모에게는 탁월한 실력과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관원이었으며, 깊은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의 용기와 영적 갈망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배경과 실력조차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달 없는 밤에 화장을 고치는 것”과 같습니다.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장을 한들, 그것이 미려한지 추한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니고데모가 아무리 뛰어난 인격과 식견을 지닌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살인자나 강도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스스로 아무리 꾸며본들 캄깜한 밤중에 화장을 고치는 것처럼 무용한 일이며, 빛을 알지 못하는 상태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흘러나오는 완전한 사랑

니고데모가 제아무리 스스로를 가꾼다 한들 소용이 없기에, 서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니고데모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사랑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행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가장 특징은 그것이 인간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에서 비롯된 사랑이나, 우리가 인간적인 지성으로 정의하고 설명할 있는 차원의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속성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익히 아는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불변의 존재이시고,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이러한 거룩한 성품들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속성들로부터 발현됩니다.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사랑에 관해서라면 여러분과 또한 나름의 경험과 말이 많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력함과 멍든 사랑의 한계

우리 역시 사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사랑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제 만남을 시작하여 열정이 타오르는 청춘남녀를 때면, 우리는 “참 보기 좋다, 사랑이란 저런 것이구나,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나 보다”라며 흐뭇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에 대한 가장 절절한 정의 하나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시종일관 평안하기만 사람은 없습니다. 애달프게 울고 견뎌내야 하는 고된 과정이 수반됩니다.

 

결혼 생활은 이토록 고단합니까? 상대는 진심을 그토록 몰라주는 것일까요? 사랑을 실천하려 할수록 고통과 통증이 따릅니다. 아무리 잘해주려 노력해도 상대의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킬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럴 능력 또한 우리에게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향해 갈구하고 소망하다가 끝내 마음이 멍드는 것이 우리네 사랑의 실상입니다. 부부 싸움 끝에 아내들은 흔히 이렇게 토로하곤 합니다. “당신이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알기나 해요? 속을 열어 보인다면 아마 시퍼런 멍이 바닷물이 흐를 거예요. 그만큼 고통스러운 세월에 마음이 시퍼렇게 멍들었다는 애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들 역시 지지 않고 대답합니다. “내 속은 어떻고? 나는 아주 피바다야!”라며 격렬히 부딪힙니다.

 

이처럼 사랑이 난해한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의 ‘관념’은 있을지언정 결정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있으나 그것을 끝까지 고수할 힘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시도는 수없이 반복하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완성해 나갈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랑은 어떤 면에서 애물단지와도 같습니다. 가치 있는 일인 줄도 알고, 주고받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정작 그것을 온전히 감당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행하실 있는 전능한 사랑

결혼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께 삶의 모습을 여쭈면 흔히 “이제는 그저 정으로 사는 것이지요”라고 답하시곤 합니다. 짧은 대답의 이면에는 상대가 싸움을 걸어올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정도 경지에 이르기 , 나이쯤 되면 어떤 말을 던져야 상대방의 마음이 무너지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길 때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상대의 자존심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연세가 드시면 한마디 속에 깊은 탄식이 담기게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사랑을 모르기도 하지만, 사실 사랑할 능력조차 없는 존재구나” 하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십니다. 앞서 상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능하시다는 것은, 그분께서 사랑을 시작하시면 사랑을 멈추게 있는 세력이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거나 막아설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능하심을 기초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전능하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대적하는 세상을 향한 조건 없는 긍휼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은 단순히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 의미가 아닙니다. , 머릿수를 세듯 많은 사람을 뜻하는 수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세상을 언급할 그러한 수적 표현을 즐겨 쓰지 않습니다. 혹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라고 했기에,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이 '믿는 자들을 사랑한다' 뜻인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믿는 자만을 선별하여 사랑하신다고 기록하지 않고, 명백히 '세상' 사랑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에서 '세상' 자주 하나님과 대척점에 있는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으로부터 단절되었으며,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워하는 적대적 상태를 '세상'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를 두고 "빛이 어둠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기록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의 세상은 '어둠' 상태에 있으며, 어둠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외면을 의미합니다.

 

단절된 실존과 죄인의 정체성

우리는 대개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찼습니다”라는 선언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으레 뉴스에 보도되는 흉악 범죄나 분쟁, 전쟁의 소식들을 떠올리며 세상의 악함을 수긍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세상에 죄가 가득하다고 말할 때는, 단지 눈에 보이는 비극적 사건들이 많다는 현상보다 훨씬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그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되었다는 ‘근원적 단절’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Summum Bonum)이십니다. 선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기에, 인간에게는 이상 참된 선을 수행할 능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오직 자기 자신의 힘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려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죄인의 실상입니다. 말씀을 부디 불쾌하게만 듣지 마시고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믿는 우리조차 하루에 하나님을 번이나 의식하며 사는지 자문해 본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형편은 어떠하겠습니까?

 

결국 '죄인'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의 영적 실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인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칭송받는 착한 일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기에, 선해 보이는 행위 속에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욕심이나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부정한 동기가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고귀한 일을 한다 해도 결국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행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넘어선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의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죄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단절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죄의 결과물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친히 오셔서 "내가 너희를 가르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우리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분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며, 성경이 말하는 '세상' 본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다 못해 하나님을 살해하려 했던 바로 현장이 세상인데,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대상은 바로 그러한 세상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에, 혹은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드리는 정성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 시간에 늦지 않으려 애쓰고 성경을 묵상하며 경건을 지켰기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조건이 없음에도 사랑하신다는 뜻이며, 굳이 조건을 찾자면 오히려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는 역설적인 의미입니다.

 

사랑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일렁이는 '감정' 머물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때마다 그저 사랑스러워 안아주고 싶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감정이 충만하여 사랑하신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 그러한 자애로운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니나, 본질적으로 사랑에는 결연한 '의지'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기어이 사랑하시고야 말겠다는 의지,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창세 전부터 준비된 어린 양의 희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셨고, 또한 하나님을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죽어갈 하나님의 마음이 어찌 평온할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구원의 경륜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본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이나 사랑을 논할 단계조차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미워서, 혹은 그분이 두려워서 도망치고 피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신을 스스로 고안하여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신이기도 했고, 재물이나 권세, 혹은 세상의 가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꺾이지 않는 고집,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집요한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이 땅에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고집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구절을 요한계시록 13 8절에서 확인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하니라.

 

성경은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책의 소유주인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2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책에 창세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단지 역사 시점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서는 이미 창세 때부터 예비된 일임을 시사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지성으로는 온전히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로운 시간 관념이 아닐 없습니다.

 

인간의 조건을 초월한 확증된 사랑

이러한 하나님의 시공간적 섭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지 확실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2 전이라는 역사적 시점에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희생은 우리가 역사로 이해하는 범위를 초월하는 영원한 효력을 지닌 사건입니다. 창세 때의 이들에게 효력이 적용되었던 것처럼, 이후로 수천 년이 흐른다 해도 세상 끝날까지 나타날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시대에 일어난 해프닝이 아닙니다.

 

말씀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신다면, 로마서 5장의 선포를 통해 선명하게 이해해 보길 원합니다. 바울은 신비로운 사랑을 로마서 5 8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대적하는 '세상'이었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세상이 가장 악했을 때에 이미 사랑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거룩한 역사에 우리의 어떠한 조건도 개입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창세 전에 예수께서 죽으시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갖춘 자격이 구원을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다는 사실, 지점이 바로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은혜의 신비’입니다.

 

종교적 본성을 거스르는 은혜라는 역설

언젠가 영국에서 비교 종교학회가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각계의 학자들이 모여 과연 기독교가 종교와 차별화되는 본질적인 특징이 무엇인가를 두고 심도 있는 토론을 벌였습니다. 어떤 이가 “성육신이 기독교만의 독특함이 아니겠느냐”라고 제안하자, 다른 이들이 반박했습니다. 신화 속에서도 신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는 이야기는 빈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결정적인 차이가 아니겠느냐”라고 주장했지만, 역시 부활의 서사를 가진 다른 종교적 사례들이 제시되며 토론은 공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성육신이나 부활, 동정녀 탄생과 같은 개념이 종교나 신화에도 유사하게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인간의 종교적 본성에 부합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신을 상정할 대개 우리가 범접할 없는 초월적이고 위대한 대상을 그리곤 합니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영원을 갈망하고, 약하기에 강한 신을 투사해 냅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종교적 안에서는 기독교만의 독보적인 정체성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회의가 길어지던 , 마침 복도를 지나던 C.S. 루이스 교수가 토론방에 들어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고심하고 있느냐는 그의 물음에, 학자들은 기독교만이 가진 유일한 본질을 정의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루이스 교수는 명쾌하게 한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갔습니다. “그렇게 쉬운 일을 고민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학자들은 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신다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정반대되는 원리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고 믿습니다. 노력한 만큼 얻고, 자격을 갖춘 만큼 대접받는 인과응보가 우리 본성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유일성은 바로 인과율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에 있습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추적

인간의 본성은 인과관계를 따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원인이 없음에도 복과 긍휼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축복'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이며 '사랑'이고 '긍휼'입니다. 일찍이 영국의 학자들도 깊은 논의 끝에 ‘은혜’ 외에는 기독교를 설명할 다른 결론을 얻지 못했다는 기록을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땅에서 갖춘 조건이나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와 상관없이,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먼저 찾으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분께서 사랑을 시작하셨고, 사랑을 절대로 끊거나 포기하지 않으신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 그것이 바로 은혜이자 복음의 정수입니다.

 

성경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기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처럼'이라는 표현을 흔히 문장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시어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말은 비교할 없는 크기를 나타내는 강조의 감탄사에 가깝습니다. 영어 성경의 표현인 "so loved"처럼, 어마어마하게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없고 상대할 없을 만큼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은, 단지 구절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 1절부터 이어져 전체 맥락을 포괄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선포에서부터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추적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눈길은 이미 태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온갖 역경과 인간의 완고한 거부, 그리고 세상의 비웃음을 뚫고 들려오는 사랑의 노래와 손길이 태초부터 오늘 시간 여러분에게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증명된 거부할 없는 고집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은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마치 광야의 놋뱀처럼 장대에 높이 들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 예수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차후에 깊이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방식인 ‘십자가’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뵙게 된다면, 그분이 얼마나 능력과 권세를 지닌 분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우주를 창조하신 분답게 장엄하고 위대하며 압도적인 모습으로 오시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한마디 변명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모습이 권세 있거나 있는 자의 모습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오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을 밀어냈고, 그분의 존재를 귀찮아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증거를 대보라”며 비웃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간섭을 불편해하며 “그저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 주일 예배는 드려줄 테니, 세상 밖에서의 삶에는 관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깊이 믿으면 하나님이 인생에 사사건건 개입하실까 겁난다고도 합니다. 어느 자매는 “하나님을 믿고는 싶지만, 혹시라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라고 하실까 선뜻 믿지 못하겠다”는 솔직한 두려움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있습니다. 가끔 우리 마음속에는 그런 거부감과 두려움이 공존하곤 합니다.

 

아들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사랑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외면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도망치고, 그분을 미워하며 심지어 죽이려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향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묵묵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심장보다 사랑하시고, 하나뿐인 아들보다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들을 아무런 변명도 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손길을 뿌리치고 대적하며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붙잡으신 손길을 결코 거두지 않으십니다. 끊임없이 말씀하시며 당신을 바라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뒤돌아 서서 묻습니다. "하나님, 이토록 저를 쫓아오십니까? 저의 삶을 그토록 집요하게 추적하십니까?" 대답은 여전히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생명보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를 추적해 오셨습니다. 도대체 그분의 손길과 추적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일까요? 본문은 우리가 '영생' 얻을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그저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할까요? 장담하건대,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삽니다.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원히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지옥에 가지 않는 상태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만족이 우리의 영광이 때까지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란, 하나님께서 지금 누리고 계시는 놀라운 복과 생명, 그리고 형언할 없는 영광을 우리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풍성함을 우리가 함께 누리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기까지, 하나님은 순간도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을 알고 예수를 영접한 것이 신앙의 끝은 아닙니다. 그것이 구원의 전부도 아닙니다. 참된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그분이 우리의 인생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입술에서 “하나님, 저는 정말로 기쁩니다. 제가 이제 만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 터져 나올 때까지, 주님은 결코 쉬지 않고 여러분의 삶을 추적하실 것입니다.

 

혹여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주님의 간절한 사랑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또한 이미 예수를 안다고 고백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쏟아부어 주시는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며, 마음껏 즐거워하고 기뻐하십시오. 위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능력이 되어, 오늘 하루도 세상을 이기고 주님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의 너머에서 부르시는 거룩한 집념

여러분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하나님, 제가 너무 힘이 듭니다.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실까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에 때로는 가시를 주시고, 인생의 험한 산을 남겨두기도 하시며, 차마 말로 없는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아들의 생명보다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이미 증명해 보이셨는데,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아끼며 무엇을 거두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여러분의 인생 속에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쉬지 않으시는 집요하고도 거룩한 고집 앞에,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내어 맡기며 믿음으로 인생을 일구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온전히 알기만 한다면 어찌 누군가를 미워할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너무나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헤아릴 없는지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 우리가 사랑을 정말로 깨닫는다면 어찌 이토록 서로 싸우고 미워하며 속상해하겠습니까? 어찌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겠습니까?

 

주님, 저희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부디 사랑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 깊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이미 이루신 놀라운 사랑이 우리 삶의 순간 실현될 때마다, 사랑에 감격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려 이웃을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