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3 16절에서 21 까지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아멘.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로마서 5 6절부터 8절까지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는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이해를 넘어선 사랑의 목적

이는 참으로 경이로운 구원의 복음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릇된 신념을 위해서도 기꺼이 죽음을 불사하곤 합니다. 우리 역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때로 생명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수 자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없기에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지는 까닭은, 본래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미천한 개미를 위해 목숨을 버릴 있겠습니까? 길가에 지나는 강아지 마리를 위해 우리의 생명을 아낌없이, 의도적인 의지를 가지고 내어줄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가늠조차 없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일이 그토록 고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베푸신 사랑의 내용과 이유,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을 본문을 통해 명확히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 3 16절이 계시하는 사랑의 목적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 우리를 멸망의 길에서 건져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이 사랑의 위대한 목적입니다.

 

병을 아는 것이 소망인 이유

조금 봉독한 로마서 5장의 말씀을 본문과 연관 지어 묵상해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셨음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인 우리의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떠했습니까? 요한복음 3 16절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멸망의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의 본질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사실 이러한 설교는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역시 알기에, 본문이 조금 유쾌하고 희망적인 이야기여서 여러분께 따스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선언은 단호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존재였다는 의미입니다.

 

타향살이가 얼마나 고단하고 피곤한 일인지 깊이 공감합니다. 온종일 모국어가 아닌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살아야 하는 타국 생활에는 감내해야 고통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고단한 일상 속에서 '죄인'이라는 고리타분하고 진부해 보이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자칫 삶이 더욱 우울하고 어둡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발 밝고 희망차며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성경에도 아브라함이 복을 받거나 요셉이 총리가 같은 고무적인 이야기가 많지 않으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필 이토록 어둡고 침침한 이야기를 서두에 두어야만 했을까요?

 

한번 이렇게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행복일까요, 아니면 모르는 것이 행복일까요? 만약 고칠 방도가 전혀 없는 병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모른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편할 수도 있습니다. 병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깊은 고뇌와 갈등이 시작되고, 죽음이 다가온다는 공포로 인해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고 우울하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병을 완벽하게 치유할 약이 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때는 모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극입니다. 병을 정확히 진단해야만 고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병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지겨운 것일지라도,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이상 절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병을 모르는 것이 재앙이요, 병을 직시하는 것이 희망이자 소망이 됩니다. 병명만 정확히 안다면 100% 치유할 있는 확실한 치료약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비참한 상태에 있었는지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가장 확실한 소망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여러분을 침울하게 하거나 죄책감이라는 멍에를 씌우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가 누릴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소망을 선포하는 서막인 것입니다.

 

영생의 정의와 인격적 사귐

본문에서 말씀하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한다’는 구절을 통해 , 성경이 규정하는 멸망은 영생의 반대 개념임을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누었듯이, 단순히 영겁의 시간을 생존하는 ,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로장생’이 영생의 본질은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단어에는 그보다 훨씬 심오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 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직접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유명 인사를 안다고 매체를 통해 사람의 외모나 이력을 익히 아는 것을 떠올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러한 지적인 앎을 훨씬 초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영이시며 무소부재하시다는 정보적 지식은 참된 앎이라 없습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깊은 인격적 교제가 형성되어 있느냐, 하나님과 내가 어떠한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느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아버지가 자녀를 알고, 자녀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은 친밀한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몰라볼 없고 자녀 또한 아버지를 잊을 없듯이,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없는 영적 결속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생활의 요령을 터득하거나, 헌금하는 법과 기도하는 자세 같은 종교적 규범을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사귐의 자리로 초대받아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행하는 자의 특징

우리는 간혹 ‘내가 예수를 믿기 이전보다 지금 조금 나아졌다’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전보다 조금 윤리적이고 고상하게 살려 노력한다는 사실 자체가 참된 신자의 결정적인 표지는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규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모습 또한, 자체만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의 본질적 특징이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점을 우리는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멸망하는 자를 ‘악을 행하는 자’라고 표현할 , 우리는 흔히 흉악한 범죄를 일삼는 사람만을 떠올리곤 합니다. , 파렴치한 죄만 짓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죽어간다고 쉽게 단정하며, 그리스도인이란 그저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박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목하는 ‘악을 행하는 자’는 단순히 우리의 윤리적 잣대에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세상적 기준에서 우리보다 훨씬 도덕적인 사람도 부류에 포함될 있습니다. 성경이 규정하는 악을 행하는 자는 멸망에 처할 사람인데, 여기서 멸망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모두 멸망한 자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요한복음 3 16절이 선포하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켜 ‘악을 행하는 자’라 명명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는 엄숙한 기점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악을 행하는 자를 단순히 도덕적인 범법자라고 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행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사람이 ‘어둠’이라는 영적인 통치 영역 아래 갇혀 있으며, 어둠의 나라에 귀속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중심의 어둠에서 하나님 중심의 빛으로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인이 되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인이 되듯, 우리는 본래 어둠의 나라에서 태어나 체제에 속해 살아가던 존재였습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나라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우리는 스스로 그곳을 벗어날 방도가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에덴동산에서 생을 시작한 이는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예외 없이 어둠의 영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빛의 자녀가 아니라 어둠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어둠 가운데 산다는 것은 단지 윤리적인 죄를 짓는 행위를 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살아가는 근본적인 결핍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어둠에 속한 이들은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섬기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이어야만 한다’고 스스로 규정짓습니다. 물론 성경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포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사랑과 성경이 계시하는 사랑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대한 간극이 존재합니다. 어둠에 속한 이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저 나아가기만 하면 무조건 용납하시고, 언제나 낙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을 사랑이라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수준에 머문다면, 예수님께서 땅에 오실 이유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잘못했다는 한마디에 천국으로 인도하시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는 반드시 ‘거룩’이라는 수식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이십니다. 또한 어둠에 속한 이들은 ‘기적의 하나님’을 고안해 냅니다. 인생의 모든 난제를 해결해 주시고, 내가 원할 버튼만 누르면 즉각 응답하시는 자판기와 같은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둠에 매여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조차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용할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어둠에 속한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갈망, 그분의 일에는 진정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땅에서 내가 얼마나 안락하게 있을 것인가에 모든 시선을 집중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언어로 포장할지라도 중심에는 결국 ‘나’라는 우상이 견고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정의하며, 이를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의 결정적인 특징이라 말씀합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어둠의 행복

지금 말씀을 나누며 여러분은 아마도 마음 한편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며, 인생을 살아가며 나를 중심에 두고 행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니냐는 반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삶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씀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니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과거를 회상하며 ‘나도 한때는 그랬지’라고 생각하실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에 거하는 이들의 본질적인 특징을 깊이 성찰해 보십시오.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스스로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갈구하는 최고의 행복은 매일이 편안하고, 언제나 기쁘며, 아무런 난제나 걱정 없이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런 상태에 놓인 이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정신병동을 찾아가 보시길 권합니다. 과거 제가 병원 사역을 경험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근심 없는 이들은 사실 이성을 온전히 놓아버린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나 삶에 대해 아무런 고뇌가 없으며, 타인의 비난이나 주변의 상황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행복입니까? 아마 누구도 그것을 참된 행복이라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그러한 무지의 평안을 행복이라 오해합니다.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입니다.

 

가운데 드러나는 죄인 됨의 고백

지금까지 ‘악을 행하는 자’와 ‘멸망할 자’에 관하여 살펴보았다면, 이제 반대 개념인 ‘영생을 소유한 자’를 성경은 어떻게 정의하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은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악을 행하는 자의 반대말로 단순히 ‘선을 행하는 자’라 하지 않고, ‘진리를 좇는 자’라고 명명합니다. 이는 가운데 행하는 , 어둠이 아닌 빛의 영역에 귀속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단순히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갑니다”라고 고백하는 단계를 넘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져 하나님의 나라, 빛의 나라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진 존재”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과거 우리가 어둠의 나라에 거할 때도 나름의 방식으로 선행과 미담을 쌓아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에서 가졌던 사고방식과 관심사는 빛의 나라로 옮겨온 지금도 우리 내면에 집요하게 남아 있곤 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어둠에 속한 자와 빛에 속한 자는 근본부터 다르다고 말씀합니다. 빛에 속한 자의 번째 특징은, 자신이 과거에 어둠의 영역에 철저히 예속되었던 존재임을 명확히 인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고백은 단순히 도덕적인 허물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유와 행보가 오직 나를 중심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최고라는 자기 확신 속에 매몰되었던 인생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절, 나는 철저히 자아를 중심에 두고 항상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행한 선한 행동조차 동기가 하나님을 거부한 결과였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타인을 돕고 자선을 베풀었음에도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있다는 사실은, 죄인의 본성에서 비롯된 참으로 억울하고도 준엄한 진실입니다. 우리가 이를 억울해하는 이유는 선과 악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정립해 놓고, 기준을 충족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도취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면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마음과 다를 없습니다.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타인보다 조금 정결하고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자아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에 불과할 있습니다. 형식만 바뀔 세상을 사랑하는 본질은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과거 내가 어떠한 왜곡된 삶의 패턴 속에 살았는지를 정확히 직시하는 것입니다. 삶을 완벽하게 교정했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내가 누구였는지를 아는 겸손입니다. 그리고 앎을 통해 나의 소속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이제는 빛의 나라에 거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래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용서

빛의 나라에 입성하면 가장 먼저 직면하게 되는 현실이 무엇입니까? 찬란한 빛이 영혼을 투영하면, 감추고 싶었던 자존심과 추악한 실체가 적나라하게 폭로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것만큼이나 속상한 일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사 우리의 연약함과 죄성, 그리고 내면의 부정한 것들을 낱낱이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드러난 죄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죄의 양식으로 변질시키는 우리 안의 뿌리 깊은 본성을 목격하게 됩니다. 가르쳐 적도 없는데 타인을 증오하는 일에는 어찌 그리 능숙한지, 스스로의 모습에 경악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미국에서의 학창 시절은 한국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면이 있는 듯합니다. 한국의 중고등학교 시절이 사제 간의 정을 나누고 우애를 다지던 낭만이 있었다면, 이곳의 생활은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느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역사 선생님과 수학 선생님을 가리지 않고 험담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선생님께 너무 심한 말을 하는 아니냐”고 훈계했더니, 아이는 오히려 그것이 학교생활의 가장 즐거운 일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날것 그대로인 본성입니다. 여러분은 예외이십니까? 우리 역시 타인을 헐뜯는 대화 속에서 기묘한 즐거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내가 타인을 비난할 비수가 나에게 돌아올 것은 망각한 , 순간의 쾌락에 탐닉하곤 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실상이 아래서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로 순간, 형언할 없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나의 추한 실체가 완전히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셔서 빛의 나라로 이끄신 하나님이라는 존재 앞에 압도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분은 우리의 허물을 고치실 생각이 없으신 것일까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당장이라도 잘못을 문책하고 깨끗하게 개조하셔야 같은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이미 받은 용서와 돌이키는 회개

이는 나성 남포교회 당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회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사안들이 적지 않기에 때로는 억울한 마음이 때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토로하고 나면, 당회에서 가장 연소자인 저에게 어르신들께서 일러주시길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수긍할 뿐이었지만, 곰곰이 묵상해 보니 말씀은 참으로 옳았습니다. 수준으로는 사소한 잘못이라도 모조리 드러내어 물에 깨끗이 고쳐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진정한 실력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언제 영광을 받으실지 그림을 읽어내는 ‘영적인 안목’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연륜 있는 어른들을 통해 배우는 귀한 지혜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참으로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발가벗겨지면 안에 감추인 더러운 실체를 마주하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그토록 추악한 모습 그대로인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이미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은혜를 비로소 경험할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이 진정한 고백으로 터져 나옵니다. 이는 결코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이미 측량할 없는 용서를 받았음을 알기에, 안의 더러움을 대면하고도 비로소 회개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회개라는 이름의 응답을 드리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법정에서 죄를 고백한다고 무조건 무죄 판결을 내리는 법은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면 그에 합당한 엤값을 치르는 것이 정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고 해서 고백 자체가 무조건적인 면죄부가 되는 또한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엤값을 치러주셨기에, 우리의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수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운데 행하는 이들은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신자의 삶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직 회개와 믿음, 가지가 전부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눈물 흘리며 통곡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용서를 기억하며, 다시는 죄의 자리에 머물지 않겠다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 바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세상 속에서 증명하는 신자의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영적인 어둠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일입니다. 다만 말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마치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인 착각하곤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은 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체험 자체에 매몰되어 현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만이 아는 깊은 영적 세계에 침잠하여 종교적 황홀경에 빠진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도피일 뿐입니다.

 

여러분, 세상으로부터 결코 도피하지 마십시오. 또한 세상의 고단함을 피하여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숨어들지도 마십시오. 교회에 와서 목소리를 높이고 기세를 부리며 인정받으려 애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도망쳐와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도피처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삶으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세상은 지금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일시적인 행복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세상이 강요하는 가치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주십시오. 세상은 끊임없이 요동치겠지만, 여러분은 반석 위에 굳건히 있는 존재임을 나타내십시오. 우리는 세상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반석 위에 뿌리를 내린 사람답게, 흔들림 없는 삶으로 여러분의 정체성을 증명하십시오.

 

예수께로 달려가는 신앙의 고무줄

진정한 신자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본문 21 후반부의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삶의 수많은 우여곡절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아는 , 바로 그가 ‘빛으로 오는 자’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는 이는 감격으로 인해 다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세상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오히려 불안 때문에 예수께로 달려갑니다. 세상이 달콤한 행복으로 손짓하며 “이것으로 만족하며 살아라”고 유혹할 , 역설적이게도 유혹의 손길마저도 예수께로 달려가는 동기가 됩니다. 이들은 마치 고무줄에 매여 있는 사람처럼 모든 일을 통해 자꾸만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상처를 입어도, 넘어져도, 기쁨이나 슬픔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찾습니다. 주님 외에는 진정한 행복과 위로를 얻을 곳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입니다.

 

진정 주님 안에서 행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이상 자기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께서 행하신 거룩한 일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기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인생의 중심에는 ‘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자리 잡습니다. 빛이신 예수님, 왕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고 어떤 뜻을 품고 계시는지에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헤아리는 깊이 몰입하게 되면, 세상이 주는 안일한 행복보다는 오히려 빛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갈등하고 고민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고뇌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기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겪는 거룩한 갈등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단순히 “내일부터는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사랑하며 살아야지”라는 다짐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분의 편에 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거짓말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탁월해서 거짓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작은 거짓말로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취할 있는데, 우리가 유혹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때문에, 그분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마음이 편안하기만 하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이 땅에서 갈등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입니다. 원수를 향해 복을 빌어주어야 , 마음속에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이만큼 고생했으니 이제는 길을 열어주셔서 평탄하게 살게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해도 여전히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어찌 번민하지 않을 있겠습니까?

 

이러한 갈등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고속도로처럼 탄탄대로로 달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분이 나에게 이런 시련을 허락하시는지 찾게 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인생은 벌써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의 안일함으로 도망갔을 것입니다. 하나님 주변을 맴돌며 그분의 뜻을 묻는 거룩한 갈등이야말로 우리가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게 붙들어주는 은혜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여러분이 누구보다 아시지 않습니까.

 

인생을 명작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경이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보다 복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눈에는 상처투성이로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미 완성된 명작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이 아름답다고 말씀하실 , 감히 “아닙니다, 하나님. 상처뿐인 인생입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피카소의 그림을 처음 접하면 도무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손으로 그린 것인지 발로 그린 것인지 없다고 말할지 모르나, 작품은 변함없는 명작입니다. 피카소가 그렸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자체로 예술적 가치를 지닌 명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는 무엇이 옳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면, 인생은 이미 점짜리 명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좌절하고 포기하며 슬픔과 절망 속에만 머물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지겹다”고만 응답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혹여 하나님께서 빚으신 여러분의 아름다운 인생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간절히 구하십시오. 험난한 세월 속에서 과연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어찌 물러설 있습니까? 세상이 여러분을 뒤흔들 , 오히려 흔들림을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로 달려가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의 환경을 어떻게 바꾸든 결코 굴복하지 말고 요동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모든 재물과 권세는 결국 불에 없어질지 모르나,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증명된 하나님의 일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일을 볼지어다”라는 선언의 참된 의미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참으로 없이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교만하게 행하며 주님의 뜻을 망각했습니다. 우리를 어둠에서 빛의 나라로 옮겨주신 주님의 은혜를 입고도, 우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좌절할 있단 말입니까. 무엇을 근거로 실망하며, 어떤 이유로 주저앉아만 있을 있겠습니까. 성도에게 낙심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 간절히 구하옵나니 저희가 주님께로부터 어디에서 구원을 얻어 어디로 옮겨졌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우리 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고 깨닫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원동력 삼아, 땅에서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께로 힘차게 달려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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