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4 7절에서 15 까지 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아멘.

 

분석이 아닌 마심이 필요한 시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은 너무나 아시는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흐름을 가만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타는 듯한 갈증과 영혼의 목마름을 가진 여인에게 ‘생수’라는 본질적인 선물을 주려고 다가가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인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계속해서 엉뚱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나에게 말을 거느냐”, “물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디서 물을 얻겠느냐”라며, 눈앞에 계신 생명의 근원을 보지 못하고 자꾸만 방법과 상황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찾아오셔서 은혜라는 선물을 이미 내밀고 계시는데, 우리는 선물을 받기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있느냐”며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느라 귀한 시간을 허비하곤 합니다. 제가 여인의 태도를 보면서 예전에 군대 훈련소에서 겪었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먼지를 마시며 훈련을 받던 훈련병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오직 모금뿐입니다. 그때 마침 트럭 대가 연병장으로 들어오더니 차가운 얼음물이 가득 들어있는 시원한 물병을 하나씩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물병을 받는 순간부터 1분가량은 정말 적막이 흐릅니다. 그리고 1 후에 소리가 연병장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전부 조용하게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너무 시원하니까 ‘확’ 소리만 ,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훈련장에, 신성한 훈련장에 어떻게 트럭이 들어왔느냐? 그리고 “도대체 차는 무슨 차냐, 누구 차냐?”라고 묻거나 “이 훈련장에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무슨 백으로 들어왔느냐”며 따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마도 동료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할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물이 있고 목이 마른데, 물을 놓고서는 “이 물이 H2O인데 수소와 산소가 몇의 비율로 결합하여 물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물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물이 되었을까”라고 누가 분석하고 있겠습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인과 함께 계신데, 여인은 도리어 “어떻게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갈등을 느끼게 하시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으로 분입니까? 어떻게 여기 오셨습니까? 나에게 오셨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현대의 지성인들이 분명히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일이 일어나느냐”고 묻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현대인의 반지성과 영적 갈증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점검을 해봅시다. MRI 찍고 엑스레이도 찍고 CT 촬영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만, 환자는 위가 너무 아파서 죽겠다고 호소합니다. 그때 의사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계를 보십시오. 숫자를 보십시오. 절대로 아프지 않습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너무 아파서 왔는데 의사는 결과와 수치만을 내밀며 “절대로 아프지 않다”고 고집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의사를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대는 아무리 사실로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객관적으로 논증되지 않고 우리가 납득하지 못하면 사실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밥을 먹을 탄수화물이 어떻게 에너지가 되고 소화되는지 복잡한 과정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식사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을 완벽히 설명할 있어야만 비로소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사실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 앞에서 ‘어떻게’만을 묻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오히려 반지성입니다. 지금 물이 눈앞에 있는데 물이 어떤 것인가를 아무리 분석해도 여러분의 타는 목마름이 시원해지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라는 한마디로 너무 비약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기 뭐라고 말하냐면 ‘하나님의 선물’이랍니다. 선물이라는 뭐죠? 그냥 주는 것이고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에게 와서 선물로서 하나님의 선물, 생수를 너에게 주러 왔고 내가 바로 생수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떻게 여기 왔냐고 물어보는구나.

 

“당신 어떻게 유대인인데 사마리아인에게 와서 얘기합니까? 당신 받을 벌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당신 왕따 당하는 것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당신 잘못하면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받을 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나에게 왔습니까? 그걸 물어보냐는 거죠. 내가 너에게 어떻게 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앞에 있으며 내가 생수이고 나를 마시면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게 현실이고 지금 여러분이 눈으로 보고 알고 그리고 여러분이 느끼는 바라는 말씀입니다.

 

목마른 자임을 깨닫는 은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왔을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의 인생과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거룩이 일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하는 말이 “아니 어찌 오셨습니까? 자기가 가지 사실을 잊고 있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렇고 저와 여러분도 그렇고 가지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무엇일까요? 자기가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목마르지 않으니까 뭐라고 질문하냐면 “어떻게 오셨습니까? 질문을 하는 거지요. 본인이 목마른 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예수님께서 여인을 지적하실 어떻게 지적하시냐면 갑자기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 본문 다음에 있는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말은 뭐냐 하면,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여인은 자기의 인생이 몽땅 하나님 앞에 열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곤고한 자이고 인생이 얼마나 목마른 인생인지를 그제서야 알게 되는 거죠. 그전에 예수님이 물어봤을 때는 자기 인생이 목마르다고 요만큼도 생각을 못한 거예요. 그저 물만 마시면 되는 알았죠. 그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육적인 갈증만 채우면 되는 알았는데 예수님이 그냥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거죠. “네 남편을 데려와라. 그랬더니 자기 인생이 그냥 드러나 버리는 거예요. 그때 여인이 알게 되는 거죠. “나는 목마른 자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질문과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여인이 자기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동시에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네가 지금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나에게 달라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생수가 있었고 생수를 있기 때문이다. 대답을 들은 여인에게 가장 와서 부딪히는 말은 뭐였을까요? 하나님의 선물일까요? 아니면 여인에게 “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나에게 부탁했을 거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말이었을까요? 여인의 대답을 들어보니까 여인에게 가장 관심 있었던 말은 ‘생수’라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물이었습니다.

 

기복적 신앙과 아첨하는 입술

여러분과 저는 좋은 나라에서 자랐고,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동 지방이나 사막 지방에서 물은 생명 자체입니다. 물이 없으면 죽음이기에 물은 그저 생명입니다. 너무나 귀한 것이라 물을 확보하기만 하면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도 때문에, 우물 때문에 여러 싸우고 쫓겨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야곱도 우물을 거금을 주고 샀습니다. 그들에게 우물은 부의 상징이자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여인이 “생수를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녀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과 만나면 내가 이익을 얻을 있겠구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분이 계신 교회라면 가치가 있구나. 교회에 와서 필요를 채울 있고, 외롭고 힘들 와서 외로움을 달랠 있다면, 나에게 이익이 있다면, 그러면 교회는 괜찮은 곳이구나.

 

만약 여러분이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그 우물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여자가 가로되 주여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나이까. 곧바로 자기의 생수에 대한 관심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표현하는 방법이 재미있지 않으십니까? 처음 대화할 때와는 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제까지는 “유대인인 당신이 나한테 그럽니까?”라고 쏘아붙이던 여자가 갑자기 “주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주여’라는 말은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 사람이 선생이다, 나보다 대단한 분이다, 내가 이분에게 항복하고 무언가 배우고 얻을 것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주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유사합니까? 교회에 오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금처럼 수많은 찬양 집회와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병이 나았다거나 기도했더니 이런저런 일이 일어났다는 간증이 차고 넘치는 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교회가 하나님을 떠난 적도 언제였습니까? 지금처럼 교회가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살아계심이 아니라, 자기 능력과 의를 의지하여 살았던 때가 기독교 역사상 언제 있었습니까? 여러분, 문제는 얼마나 심각합니까?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시면 정말 벌떼처럼 몰려옵니다. 그리고는 금방 와서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사랑이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구원자입니다”라고 찬송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마치 자기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신앙을 고백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 고백입니까? “주는 나의 구원자시요, 나의 반석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결정적인 하나를 놓치고 있습니다.

 

시편 78 34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하나님께 혼이 다음에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셨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여러분, 여기서 ‘간절히’라는 말은 간이 끊어질 정도라는 뜻입니다. 그토록 절실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얼마나 대단한 신앙 고백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속자이십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78편의 키포인트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니라.

 

여러분, 이렇게 놀라운 신앙 고백은 우리가 매일 듣는 아닙니까? 찬양 집회를 하면 전부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님은 정말 나의 모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요 구속자이십니다. 이런 소리를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할 때마다 얼마나 외칩니까? 그런데 여기 성경은 “저들의 입은 아첨이라”고 합니다. “목사님, 억울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얘기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저를 똑같이 취급하십니까?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얘기했고 나쁜 마음으로 아닙니다.

 

뭐가 나쁜 마음인데요? 여러분 주위에서 그렇게 주님께 고백하는 사람들이 나쁜 마음입니까? 아니요, 정말입니다. 정말 그분들은 하나님께 그렇게 나온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는 입으로 아첨한다”고 그럽니다. 아첨한다고 하는지 아시지요? 여러분, 뇌물과 아첨을 합니까? 돌아오는 있으니까 하는 아닙니까? 아부합니까?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그토록 따르고, 자기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고, “주님은 나의 반석이요 구속자”라고 그렇게 멋있게 신앙 고백합니까?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너무나 아셨습니다. 여인도 생수에 모든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터진 웅덩이를 버리고 생수의 근원께로

여러분은 교회에 나와서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삼으십니까? 이곳에 나와서 과연 무엇을 보십니까? 광야에 나가서 도대체 무엇을 보셨습니까? 거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정말 들으셨습니까, 아니면 좋은 옷을 입고 멋있는 관을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행복만을 누리는 자들을 보셨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심각한 시대에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의 영광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주를 구원자라 반석이라 부르며 주님만을 위해 산다는 선교사와 목사, 장로와 집사들이 넘쳐납니다. 교회에 가면 집회 때마다 문자 그대로 난리법석을 떱니다. 상상할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모든 분주함 속에서 정작 ‘참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남보다 낫다거나 잘났다고 자랑하기 위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과연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수를 바라보고 주님께 “주여!”라고 외쳤으나, 모든 고백은 거짓이며 아첨일 뿐이었습니다. 여인은 호기심에 예수님 앞에 나왔지만, 그녀의 관심은 하나였습니다. ‘목마른데 갈증을 어떻게 해결할까? 어떻게 하면 길러 오지 않아도 될까? 어떻게 부자가 되어 편안한 인생을 있을까? 성경은 문제를 결코 쉽게 넘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속아서 가고 있다 할지라도, 세상에는 올바른 주의 음성이 여러분의 양심에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고통 속에서도, 말씀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서 2 13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이 가지 악을 범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그들처럼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드렸던 족속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너희는 나를 버렸다”라고 탄식하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반드시 경고로 받으셔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 있고 예배를 드리며 성경책을 들고 있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번도 빠지지 않고 매일 드렸던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까? 생수만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땅의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말로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만약 어떠한 이유로든 세상에서 행복과 건강, 부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하나 실상은 바알을 섬기며 그에게 절하고 예배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두고 “너희 스스로 웅덩이를 판다”고 말합니다.

 

물은 본래 솟아나는 샘물이며 생수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만의 웅덩이를 만들려 합니다. 자기의 행복을 쌓아두고 그것으로 삶을 지키려 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목적이 혹시 웅덩이를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닙니까?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샘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4 13절과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웅덩이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만든 웅덩이가 전혀 쓸모가 없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웅덩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이에게는 돈이, 어떤 이에게는 자식이, 건강이, 재주가, 혹은 세상에서 소유한 것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웅덩이를 끊임없이 파고 있습니다. 웅덩이가 가끔 우리에게 물을 주기는 합니다. 더러울지언정 갈증을 잠시 해소해 주기에, 우리는 웅덩이가 마치 대단한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햇볕이 내리쬐면 말라버릴, 빠진 독처럼 새고 흘러가 버릴 웅덩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것을 파고 파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솟아나는 샘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웅덩이와 샘물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단순히 물이 솟아나느냐 말랐느냐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샘물은 물을 마실 사마리아 여인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샘물의 특징은 우리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웅덩이로부터 물을 마셔서는 없는, 오직 솟아나는 샘물로만 채워질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샘물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짜로 어디에 목말라하는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여러분에게도 주님은 똑같이 질문하실 것입니다. “네 은행 계좌를 가져와라, 인생을 가져와라, 남편과 아내를, 자식을, 능력을 가져와라. 그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웅덩이는 여러분의 인생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웅덩이는 여러분을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웅덩이를 좋아하고 사랑할 뿐이지, 웅덩이는 결코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웅덩이는 오직 여러분을 이용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이 오히려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웅덩이는 여러분의 인생에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오로지 샘물만이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여인 또한 다섯 개의 웅덩이를 팠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다섯 개의 웅덩이를 파서 얼마나 행복해지고 싶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파고 파도 전혀 만족할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웅덩이들은 여인에게 진정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웅덩이만 팠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곳에 무슨 행복이 있었겠습니까. 웅덩이는 여러분을 이용할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샘물은 여러분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어느 물을 마시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마시다

여러분, 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란 말입니까?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반석으로부터 나는 물을 마셨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생수, 솟아나는 샘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생수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시고, 그분의 부활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마시며, 주님과 함께 죽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를 배신한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간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지킬 없어 매일 절망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순종하신 그분의 순종을 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분의 생애 자체를 마십시오. 샘물은 무엇으로도 막을 없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솟아나는 샘물은 문자 그대로 멈추지 않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연약함으로도, 여러분이 가진 가장 강한 무엇으로도 샘물을 가로막을 없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물론, 심지어 우리의 더러움과 죄악으로도 생명의 물줄기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물은 솟아나 우리의 연약함을 적시고, 어리석음을 깨끗하게 하며,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낼 것입니다. 나아가 사막과 같이 갈라진 우리 인생 곳곳으로 흘러들어, 메마른 삶의 자리에 풀을 내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푸른 동산으로 변화시킬 유일한 물은 바로 생명의 샘물입니다. 아무리 누르고 덮어놓아도, 여러분의 인생 과거가 아무리 실패의 연속일지라도, 스스로 자랑할 하나 없는 메마른 인생일지라도, 여러분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샘물은 반드시 솟아나고야 것입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그분은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생수를 마신 자는 결코 은혜를 피할 없습니다.

 

땅의 것을 이기고 영원한 것을 준비하라

물은 우리의 실패보다 강합니다. 여러분, 물은 우리의 과거보다 강하고, 우리의 죄보다 강하며, 죽음조차도 능히 이깁니다. 죽음도 솟아나는 샘물을 결코 가로막을 없습니다. 인생의 좌절과 답답함, 실패와 아픔 또한 샘물을 막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수로 여러분의 영혼을 적시십시오. 여러분을 가로막고 있던 죄의 장벽을 뚫고 솟아오르는 샘물에 의지하여 죄와 치열하게 싸우십시오. 눈앞의 유혹에 결코 굴복하지 마십시오. 당장 보이는 것들이 여러분의 눈을 현혹할 때마다 믿음으로 대항하십시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며, 하늘의 모든 영광과 보배를 지닌 존귀한 자들임을 기억하여 땅의 헛된 것들에 굴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것들은 하늘의 영원한 가치를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운동 기구와 같습니다. 아무도 운동 기구 자체에 이름을 새겨 모셔두고 그것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매일 운동을 하지만, 운동 기구는 근육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일 , 거기에 절하거나 그것에 감사하며 모시지는 않습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땅의 것들을 그렇게 모시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늘의 가치를 깨닫고 그곳에 가까이 다가갈 때에야 비로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삶의 목표가 되는 순간,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을 빨아들이고 뒤에서 잡아당기는 터진 웅덩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지지 말고 싸우십시오. 영원한 것을 준비하십시오. 이미 영원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하늘나라의 시민인 우리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능히 이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여러분의 또한 그분으로 말미암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덧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모습이 너무나 교묘해져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과거 예레미야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배반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한다면 아마 누구도 자신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지 다시금 일깨워 주시옵소서. 우리가 땅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모든 것들이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임을 순간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겪는 실패와 아픔, 고난조차도 하늘나라를 예비하는 통로이기에, 우리가 소망 중에 꿋꿋이 이겨 나갈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할퀴고 고통을 줄지라도,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솟아나는 생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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