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4장 1절에서 10절 까지 입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아멘.
이야기의 참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요한복음의 여정을 이어가는 가운데, 이제 4장에 기록된 매우 유명한 사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혹은 ‘우물가의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복음 성가가 있듯이,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매우 친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마리아 여인이나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다 보면 자칫 본질을 놓치는 오해에 빠지기 쉽습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4장의 주인공인 것처럼, 혹은 니고데모가 이야기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놓친다면 우리는 성경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과 그 이전인 2장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사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부터 시작된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습니다. 2장의 중간 부분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가 등장하고, 그 장의 끝은 성전 사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니고데모 사건이 등장하며, 4장에 이르러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4장의 대단원은 가나에서 일어난 두 번째 기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이 이야기가 가나에서 시작하여 다시 가나로 회귀하며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에서의 첫 시작은 일곱 번째 날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고 안식이 선포되며 천국 잔치가 베풀어지는 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나의 혼인 잔치는 일곱째 날에 이루어지는 경이로운 천국 잔치의 예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잔치에는 단순히 사람의 눈에 보이는 포도주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기적의 포도주가 부어졌습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성전 사건은 하늘로부터 온 참된 성전을 계시하며,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하늘로부터 다시 난 자에 대해 증언합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하늘에서 온 신랑을 향해 “그는 신랑이며 나는 그 신랑 옆에 서 있는 친구의 기쁨을 누린다”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하늘로부터 온 생수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리고 4장의 마지막인 가나의 두 번째 이적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난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조차 가로막을 수 없는 하늘의 생명을 선포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늘로부터 온 포도주이며 성전이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건의 중심 주제임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복음의 확장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여정은 유대로부터 시작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특히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시며 구원 사역의 서막을 여십니다. 그곳에서 니고데모를 만나시고 세례 요한의 증언이 이어지며, 그 후 비로소 수가성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수가성은 바로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가나에 이르기 전, 왕의 신하였던 한 사람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이방인을 향한 치유를 베푸십니다. 유대인 니고데모에서 사마리아 여인으로, 그리고 이방인으로 이어지는 이 순서를 보며 떠오르는 말씀이 없으십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을 함께 기억해 보길 원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전과 예루살렘,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사마리아인에게로, 그리고 다시 이방인에게로 향하는 이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셨던 생애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셨던 삶의 궤적과 친히 내리신 이 명령은, 결국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와 이방 땅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인 보혜사 성령께서 임재하심으로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성도가 누리는 성령 세례의 은총, 즉 성령 강림 사건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강조하건대 니고데모나 수가성 여인은 이 스토리의 진정한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 역사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 사건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 땅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해 가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쇠함으로 흥하게 하시는 주님의 길
여러분은 세례 요한의 고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그러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 요한이 참으로 겸손하여 자신은 낮아지고 예수는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흥하신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놀랍게도 그분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며 죽으시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흥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삶이었으며, 주님의 생애를 그림자처럼 미리 투영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쇠해지심으로 누군가를 흥하게 하셨습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시고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생애는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은 삶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쇠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흥하게 하셨다면, 그분의 뒤를 쫓는 우리의 생애 또한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쇠해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이 흥왕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명확한 원리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쇠하고 예수는 흥한다”라고 고백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쇠해지심으로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 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 역시 “우리는 쇠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흥하며 영광을 받는다”라는 고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성도의 삶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이러한 영적 원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개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로 가야만 했던 필연적 이유
본문 4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는 말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 줄을 주께서 아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대단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른바 세상의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되셨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세례를 받으며 그분의 제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3절에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을 때, 주님은 오히려 유대를 떠나버리십니다.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습니까? 바로 자신은 쇠하는 것입니다. 이 ‘쇠함’의 원칙은 갈릴리로 향하는 경로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단순히 유대를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굳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고자 하십니다.
사마리아라는 지역은 우리 민족이 이해하기에 다소 생소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단일 민족임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이스라엘에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순수한 혈통은 커다란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720여 년경,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 있을 때 북이스라엘은 당시 최강국이었던 앗수르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앗수르는 매우 강성한 국가였고,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속절없이 함락되었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점령지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사마리아의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들을 타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이방 민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민족을 혼합하여 앗수르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결국 북이스라엘은 혈통이 혼합된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남쪽에 남아 있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격렬하게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사실상 열 지파가 사라진 셈이 되자, 남은 두 지파가 자신들만이 진정한 정통이라 자처한 것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라고 강조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 외에는 혈통적 의미가 무색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보다 더한 멸시를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 지형을 보면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기조차 싫어했기에, 그곳을 피하려고 요단강 기슭으로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사마리아 땅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완강한 거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그 사마리아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시는 더욱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섭리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여인을 만나셨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는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엄격한 관습 때문입니다. 비록 성문화된 율법은 아닐지라도, 랍비들은 자신들만의 권위 의식과 규칙에 따라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인을 대면하여 대화하는 것을 철저히 금기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로 향하는 길목인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만남 그 자체도 파격적이지만, 이 여인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다섯 번이나 결혼했으며, 현재 함께 사는 남자 또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다섯 번의 결혼’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인생이 매우 처참했을 것이라 짐작하곤 하지만, 성경은 그 내막을 상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분명한 점은 그녀가 결혼을 통해 행복을 갈구했으나 끝내 그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된 결혼과 이별을 거치며 그녀는 이제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저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있을 뿐, 진정한 삶의 목적은 상실된 채였습니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에 앞서, 우리는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단했을지,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큰 실패로 여겼을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물을 뜨러 온 시간이 ‘여섯 시’, 즉 오늘날의 시간으로 낮 열두 시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대개 물은 서늘한 아침이나 저녁에 긷는 것이 상례인데,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에 우물을 찾았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거나 그들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인생의 깊은 좌절을 맛본 영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본문 4절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의 원문은 “반드시 사마리아를 거쳐 가야만 한다”라는 강력한 필연성을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되었고,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마리아로 강권하여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8절을 보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시기 직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자리를 비우고 예수님 홀로 남겨진 이 순간이 아니었더라면, 이 내밀한 대화는 성사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에 그분의 세밀한 섭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목격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종종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애쓰다가 예기치 못한 기회를 마주하곤 합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라거나 ‘어떻게 이런 기막힌 타이밍을 주셨는지 모르겠다’라는 고백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본질입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친히 섭리하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 안에서 이와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은 우리의 유창한 언변이나 지혜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 함께 임재하신 결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고, 그 일을 주관하셨으며, 친히 성취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는 단 한 번의 우연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우연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모든 과정을 되짚어 보십시오. 오랜 세월이 걸렸든, 무심코 교회를 오가던 시간이 어떠했든, 참된 예수를 만나는 그 찰나에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구나.’ 그 누구의 권유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되며, 그 경이로운 섭리 앞에 기꺼이 항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 좀 달라 하시는 주님의 뜻
이처럼 놀라운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주목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 땅으로 향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훗날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 친히 자신의 몸을 뉘으실 분이십니다. 이 얼마나 거대한 구원의 서사입니까?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진행되고 있다면, 우리 같으면 이 절호의 기회 앞에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를 믿으십시오”라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십니다”라고 직접적인 복음을 선포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 주님께서는 뜻밖에도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저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전도를 위한 일종의 대화 기술이나 매개체로 이해하곤 합니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있으나, 요한복음 전체의 흐름을 통찰한다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생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설명을 위해 물이라는 소재를 빌려 쓰신 것이 아니라, 참된 생수가 무엇인지를 계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요청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을 달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을 요청하시는 예수님과 물을 줄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여인 중, 과연 누가 더 부요한 자입니까? 겉보기에는 예수님이 결핍된 자처럼 보입니다. 인간적인 모습의 주님은 분명 목이 마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후 34절에서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주님은 여인에게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않으신 채, 자신에게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별개의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에게는 물리적인 물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물 좀 달라”는 말씀은 물 자체가 필요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통해 누가 진짜 목마른 존재인지를 일깨워 주려 하신 것입니다. ‘너의 메마른 인생을 적시고 풍성하게 하며,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할 참된 생명을 너는 진정 소유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비록 여인은 처음에 이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인생의 갈증을 축일 물이 있느냐고 물으시는 이 요청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물질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술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도 재정이 있어야 사역을 이어갈 수 있지 않겠나’라는 현실적인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유를 비교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겠습니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예물을 요구하시고, 시간을 내라 하시며, 각종 직분으로 섬길 것을 명하십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시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하나님께 부족함이 있어서 우리에게 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진정 누구이며 무엇을 가진 자인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신령한 배려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물로 교회가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물을 요구하심으로써 여러분의 인생이 물질에 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혹여 이러한 가르침 앞에 마음으로 온전히 항복하지 못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신을 명령하시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핍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소망을 두는 거짓된 부유함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으로만 만족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시려는 사랑의 섭리입니다.
마음이 부유한 자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
우리가 이 영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스스로를 부유한 자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인간적인 조건에서 매우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니고데모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관원이었고,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 부와 명예, 지위와 권세를 한 몸에 누리던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정반대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회적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자 여성이었으며, 다섯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이제는 삶의 의미조차 상실한 채 깊은 좌절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니고데모는 높고 귀한 신분이기에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사마리아 여인은 비천하고 결핍이 많기에 주님 앞에 쉽게 회개하며 돌아왔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하늘의 진리를 말씀하셨을 때,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하늘의 언어를 땅의 논리로 응답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될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시자, 그녀는 즉시 “그 물을 내게 주어 다시는 이 우물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하늘의 신령한 가치를 오직 땅의 효용으로만 이해하고 반응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오직 땅의 가치만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여인에게는 단 한 번의 성공적인 결혼이 인생의 정답이었을지 모릅니다. 마치 니고데모가 자신의 배경을 통해 행복을 만끽하려 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땅의 것으로 인생을 채우려 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족을 구했기에, 성경적 관점에서는 ‘부유한 자’입니다. 하나님 외의 것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상태를 성경은 부자라고 정의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마음을 채우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셨을 때 진정으로 깨닫게 하려 하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녀가 비록 처참하고 불쌍한 처지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아닌 땅의 것으로 만족을 구하고 있다면 그녀 역시 ‘마음이 부자’인 상태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가전제품의 발달로 가사 노동은 편해졌으나 실제로는 약 50%의 주부가 우울증 증상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삶의 환경이 개선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고통의 근본 원인은 결국 욕심이며, 그 욕심은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의 가치로 마음을 가득 채우려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두려움의 증거이며, 이것이 바로 성경이 경계하는 ‘잘못된 부유함’입니다. 이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물 좀 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여인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너의 영혼을 적시고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참된 생수를 너는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느냐’는 본질적인 물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리에서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는 네가 가진 그것으로 정말 인생의 목마름이 해결될 것이라 믿느냐? 네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무엇이냐?” 이 질문을 통해 여인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직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없이 다른 것으로 만족을 찾으려 했던 지난날의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아간 것입니다. 거듭된 결혼과 이별을 거치며 겪었던 절망과 아픔,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참된 행복에 대한 갈망이 주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행복을 추구할수록 깊어만 갔던 그녀의 좌절은, 이제 이야기의 참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짊어지신 주님
그 순간 여인은 자신에게 물을 청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물을 좀 달라” 하시는 그 말씀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몹시 피곤하셨고, 기력이 다하여 우물 곁에 주저앉으셨습니다. 주님이 목말라 물을 구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주님께서는 굳이 우리에게 물을 달라 하셨을까요? 그분께는 우리와 다른 양식이 있었고, 얼마든지 스스로 그 갈증을 해소하실 수 있는 분인데도 왜 자신의 목마름을 그대로 두신 채 우리에게 손을 내미셨을까요? 여인의 절망이 쏟아져 나오는 그 우물가에서 주님은 지금 목말라하십니다. 주님께서 목마르신 이유는, 여인의 메마르고 쩍쩍 갈라진 그 처절한 인생을 지금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그녀의 인생으로 말미암아 목마르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단순히 지식적인 교훈을 얻거나 정보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이 수가성 여인과 함께 성경의 현장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곳에서 수가성 여인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목마름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왜 목말라하십니까? 바로 여러분의 갈라진 인생 때문에 주님은 목말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인생 그 자체로 목마르셨습니다. 여러분의 좌절과 아픔, 죽음과 불행을 친히 짊어지셨기에 목말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목마름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위에서 울려 퍼진 주님의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중에는 “내가 목마르다”라는 처절한 외침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이 깊어서 목이 마르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인간의 모든 생애, 곧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어야 했던 인생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깊은 아픔을 주님의 생애 속으로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목마르셨고, 그 목마름의 대가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바로 그 생명을 공급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인생을 가져가셔서 대신 목말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여러분의 좌절과 실패 때문에 스스로 목말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가져가신 목마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죄로 점철된 인생과 답답한 현실, 실패로 인한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생수를 허락하십니다. “네가 만일 내게 구하였더라면 내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시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부어지는 생명의 선포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다음 시간부터 우리가 살펴볼 이 복음의 여정들이 참으로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그 물은 무엇이며 그 생수는 과연 무엇입니까? 여인에게 “물 좀 달라” 하시며 친히 목마름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무엇을 누리는 사람들입니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하나씩 펼쳐질 것입니다. 다음 주에 여러분이 다시 주의 말씀을 대할 때는, 상처 난 인생을 숨기지 말고 햇볕에 말리듯 그대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메마르고 갈라진 마음을 포장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나도 수가성 여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맛보리라, 그분의 생수가 어떤 것인지 나도 알리라”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만납시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물을 좀 달라.” 이 부르심이 한 주간 여러분의 깊은 묵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우리를 세우시고 붙드시며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 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하는 부유한 자입니까, 아니면 오직 주님만을 갈망하는 가난한 심령입니까? 주님의 거룩한 도전 앞에 저희가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닐 것입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심령이 가난하게 하시고, 우리의 참모습을 직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물을 달라 하실 때, “주님, 저에게는 제 목을 축일 물이 없나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허락하시고 저의 목마름을 가져가 주옵소서”라고 고백하게 하소서. 이 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가 되고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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