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3 1절에서 8 까지 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라비어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인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있나이까.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있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 육으로 것은 육이오, 성령으로 것은 영이니 내가 내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귀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사람은 이러하니라.” 아멘.

어둠에서 빛을 찾아온 이스라엘의 엘리트

요한복음 3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본문을 살피고자 합니다. 본문 속에서 니고데모는 실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다”라는 너무도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말씀이 과연 누구에게 선포되었는가를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결코 평범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비추어 보아도 그는 최고의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 있습니다. 학교로 비유하자면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으면서 모든 자치 활동의 장을 맡고 있으며, 스승과 동료들로부터 두터운 신망과 사랑을 몸에 받는 학생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범적인 학생이 어느 갑자기 교수회의로부터 거부당하여 학교의 모든 공식 행사에 참여할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구도 쉽게 이해할 없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니고데모와 같은 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있었을까요. 니고데모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어둠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가 깊은 밤중에 주님을 찾아온 사실을 두고, 사도 요한은 그가 본질적으로 어둠에 속한 자임을 은근하면서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행적을 끝까지 추적해 보면, 요한복음 19장에서도 성경은 굳이 “밤중에 예수께 왔던 바로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입니다. 그가 밤중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영적으로 매우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 어둠에 속한 사람이었으나, 세상의 눈으로 그는 도저히 어둠 속에 머물러 있을 법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더욱 역설적입니다. 무엇보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가장 존경받던 종교 지도자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유대인의 관원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가지 지위를 동시에 지닌 사람은 당대에 명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요, 칭송받는 자들 중에서도 으뜸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결코 자신과 무관한 이야기로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만일 이토록 완벽해 보이는 니고데모조차 어둠에 속한 사람이라면, 과연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입술로만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이들 명이었습니다.

 

종교적 체험과 지위가 보장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

당시 니고데모나 바리새인들만큼 성실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준수하려 애썼던 이들은 없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실로 그토록 뜨거운 열심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향해 도리어 "어둠에 속했다" 증언합니다. 그가 어둠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주요한 특징 하나는, 그가 표적을 보고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보고 믿었다는 것은 현상적인 표적을 쫓았음을 의미하며, 이를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체험을 추구했다"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체험은 매우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고침을 경험하거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받는 것은 신앙의 자산이 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를 통해,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바는 기적을 체험하고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입성을 보장하는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자기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가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혹은 수십 년간 신앙생활에 몸담았거나 모태 신앙으로 자라왔든, 그러한 외적 조건들과 무관하게 여전히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일 있습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라는 매우 엄중한 실례를 제시합니다. 가룟 유다가 경험한 영적 체험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기도하여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적을 행했던 인물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 역시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적과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영적으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가 소유했던 풍성한 체험들조차 그가 하나님 나라를 있음을 증명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비록 유대인으로서 고귀한 혈통과 최상위의 지위를 지녔을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라는 집단이나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됩니다. 그는 누구보다 간절히 하나님 나라를 대망했던 사람이며, 목적을 위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부단히 자기 수양에 매진했던 사람입니다. 선행을 실천하고 십일조를 정직하게 봉헌했으며, 금식과 기도를 쉬지 않으며 경건 생활의 정점을 달렸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헌신했던 니고데모는 심지어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이라며 정체성을 정확히 짚어내기까지 했습니다. 올바른 교리와 생각을 갖추었으며, 틀림없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그를 향해 실로 뜻밖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야 하는 천국 시민

주님께서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는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분이라 고백하며 마치 네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너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라고 지적하신 것과 같습니다. 니고데모로서는 실로 경악할 수밖에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니고데모조차 그러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성경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되돌립니다. “니고데모를 보라. 너의 신앙생활과 네가 믿고 있는 바를 그와 비교해 보라. 과연 네가 니고데모보다 낫다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당시 니고데모에게 던지셨던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던지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니고데모보다 나은 의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당혹해하는 니고데모에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며 그의 무지를 일깨우십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마주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이어왔고, 스스로 거듭났다고 믿으며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묻게 됩니다. 니고데모와 대조해 보았을 여러분은 과연 나은 점이 있습니까? 니고데모가 쌓아 올린 철저한 의보다 여러분의 의가 진정으로 우월하다고 확신할 있습니까?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갇힌 니고데모의 질문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문제의 본질이 니고데모가 행한 행위나 업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문제는 니고데모라는 인물 자체였습니다. 니고데모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조금 발전시키고 결점을 보완하여, 더욱 향상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아니다, 그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너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이에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은 그의 관점에서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주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있습니까? 어머니 태중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있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니고데모가 어찌 이토록 어리석은 질문을 있는가'라고 반문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니고데모야말로 가장 일관된 논리를 펴고 있으며, 오히려 우리 자신의 정직한 내면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 철저하게 가지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율법을 지키려 애썼으나 여전히 결핍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태어나 율법을 지키고, 깊이 수양하며 나를 단련하여 자격을 갖춘 자로 살아간다면 그때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외에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늙은 제가 어떻게 다시 모태로 들어갈 있단 말입니까?'라는 고뇌 어린 호소인 것입니다.

 

혈통과 육정을 거슬러 하나님께로부터 자들

주님께서는 진정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요? 당시 니고데모의 내면은 오직 가지 확신으로 가득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이다. 같은 이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있단 말인가.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조건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유대인이라는 혈통입니까? 아니면 열정적인 교회 출석이나 막힘없는 성경 암송입니까? 혹은 구제에 힘쓰며 이웃에게 헌신하는 도덕적 삶입니까? 과연 어떠한 이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인지, 요한복음 1 13절에서 사도 요한은 답을 명확히 선포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자들이니라.

 

구절을 가슴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습니다.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중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설령 니고데모의 가정대로 어머니의 태중으로 다시 들어가 태어날 있다 한들, 중에 잉태된 죄인이라는 근본적인 실존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지난 삶의 과오를 뉘우치며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라고 굳게 다짐하며 인생을 새로이 시작하려 할지라도, 우리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여전히 가운데 출생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성품이 조금 나아지거나, 새해를 맞아 결심을 새롭게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의지적 결단만으로는 결코 ‘새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거듭남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본문 5절에서 거듭남을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 이제 답은 명확해졌습니다. 거듭남이란 모태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명쾌한 해답 같으나 질문은 더욱 깊어집니다. 도대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감정적 신비주의를 경계해야 거듭남의 실체

거듭남의 본질을 오해하여 신비주의적 신앙에 경도될 , 우리는 흔히 성령의 역사를 감각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기도할 때마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오셔서 나를 주관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어떤 신비로운 느낌이나 감각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감정에 휩싸여 마음이 요동치고, 이른바 ‘뒤집어지는’ 체험을 해야만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고 믿기도 합니다. 역시 과거에는 그러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며 ‘왜 다른 이들은 저토록 뜨겁게 반응하는데 나는 이리도 담담한가’를 고민하곤 했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나무뿌리라도 하나 뽑아서 은혜를 반드시 받고야 말겠습니다”라며 매달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마음이 뜨거워져 어쩔 모르는 경험을 하기도 했고, 비록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분명 강렬한 체험의 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본질적인 거듭남의 경험이라 없습니다. 거듭남이란 신비적인 현상을 빌려 인간의 마음을 무인격적으로 뜨겁게 달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러한 감정적 고조는 종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대중 가수의 공연장에 모인 청소년들을 보십시오. 노래 곡에 마음이 뒤흔들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가수를 향해 광적인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결코 꾸며낸 연기가 아니라 그들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실제적인 감정입니다. 1960년대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 내한했을 당시, 최고 학부의 지성인이었던 여대생들조차 극심한 감정적 동요 속에 상식 밖의 행동을 보였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성령의 감동이라 오해해서는 됩니다. 오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실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육체적 조건이나 종교적 의식을 넘어서는 생명

성령으로 다시 난다는 것은 본문이 명시하듯 '물과 성령으로 나는 '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교회사적으로 여러 견해가 존재해 왔습니다. 첫째는 '' 육체적 탄생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양수' 보는 시각입니다. 모든 인간은 모태에서 양수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기에, 이를 육적 탄생과 성령을 통한 영적 탄생의 대비로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우리가 양수를 통해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는 자명하나, 주님의 말씀 맥락에는 그리 부합하지 않습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임을 강조하시는 주님께서, 갑자기 육체적인 탄생 과정인 '양수' 다시 언급하실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 결코 육체적인 차원의 함의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견해는 '' '세례'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세례를 받고 이어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있다는 논리입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가지 난점이 존재합니다. 우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3장에 이르기까지 세례를 언급할 번도 ''이라는 상징적 표현으로 이를 대신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세례'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약 세례를 뜻하는 것이었다면 주님께서는 "물세례와 성령을 받으라" 명확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종교적 의식인 세례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목회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권능이 되지는 않습니다.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외적인 고백이자 표지(Sign) , 의식 자체가 구원의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세례식이라는 형식에 매몰되어 그것을 구원으로 신봉한다면, 이는 복음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 지닌 세례의 영적 의미를 살피는 것은 유익할 있으나, 이를 단순한 예식 자체로 국한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번째 견해는 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함께 역사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는 해석으로,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은혜로운 통찰입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며, 우리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본문의 세밀한 문맥을 살피면 다소 어긋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굳이 말씀을 '' 비유하여 말씀하실 개연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언급하려 하셨다면 직접적으로 '말씀'이라 칭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의미를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 10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서를 통해 계시된 물과 성령의 역사

본문의 난제를 풀어낼 핵심 열쇠는 바로 10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마치신 ,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표현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니고데모가 단순히 수많은 율법학자 사람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명망을 지닌 ‘그 스승’이었음을 뜻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면 마땅히 진리를 알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일갈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이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물과 성령이 동시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구절은 어디이겠습니까?

 

에스겔서 36 25 이하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것이며, 영을 너희 속에 두고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것이며,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서의 말씀은 본문 주님의 가르침과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첫째는 ‘물’과 ‘성령’이 나란히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맑은 물로 정결하게 씻어내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그들 속에 거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둘째는 결과에 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에스겔서 역시 정결하게 씻기고 성령이 거하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영원히 거하게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의 역사는 에스겔서 36장의 약속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은 ‘정결하게 함’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물로 정결함을 입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이 단순한 외적 세척을 뜻하지 않음은 자명합니다. ‘정결케 함’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스겔서의 배경이 되는 다른 구약의 결정적 장면을 상기해야 합니다. 물과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이 열리는 다른 역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홍해와 노아의 사건에 담긴 심판과 구원의 원리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출애굽의 홍해 사건입니다. 일렁이는 홍해 앞에서 물이 갈라지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길을 냈으며, 길은 약속의 가나안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마주했던 말씀은 사실 출애굽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이 어떻게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갈라진 사이를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정결함을 입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건을 두고 “우리 조상들이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라고 기록합니다. , 홍해를 건넌 사건에는 정결케 하는 의식인 ‘세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찌하여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을까요? 우리는 바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바다에 침몰하여 모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에게 바다는 ‘죽음의 바다’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죽음의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갔으나, 하나님이 여신 길을 통해 생명을 얻어 나왔습니다. 원리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인류 역사의 앞선 시점인 노아의 방주 사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의 물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그것은 죄악에 물든 세상을 쓸어버리는 엄중한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물에 잠겨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준엄한 심판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세상은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행된 후에야 진정한 정결함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라는 물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또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를 통과했음을 의미합니다. 심판의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면 죽음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나온 자들은 정결케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물’은 일차적으로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결국,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교적 예식이나 감각적인 체험 이상의 깊은 구약적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걸음 나아가 보십시오. 물과 흑암, 그리고 성령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이 어디입니까? 바로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입니다. 창세기 1장이 육에 속한 창조의 시작이었다면, 요한복음 3장은 영에 속한 새로운 창조를 다룹니다. 육의 것은 결국 쇠잔해지겠으나, 이제 영원한 영의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선포합니다. 여기서도 물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태초에 성령께서 수면 위에 운행하시며 물을 나누셨고, 출애굽 때에 물을 가르셔서 길을 내셨던 것처럼, 죽음의 심판 한가운데를 뚫고 생명의 길을 여시는 주권적인 역사가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건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이 여시는 심판과 구원의 통로

이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죽음과 심판을 통과하는 일이라면, 과연 어느 누가 지엄한 죽음의 무게를 스스로 견디며 통과할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너던 극적인 순간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이 스스로 바다를 가르거나 길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앞에 길을 여셨을 뿐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힘으로 물의 위력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방주 안에 머물렀기에 준엄한 심판 속에서도 생명을 보존할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선포하는 진리는 명확합니다. 심판의 물은 인간이 결코 피할 없는 현실이지만, 심판을 뚫고 지나 생명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결단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대신 죽음의 자리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인 열심을 내라는 독려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직면해야 심판의 자리에 누군가 대신 서야 한다는 준엄한 ‘대속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물속으로 들어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십자가에서 감당하실 죽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표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받아내야 하나님의 심판을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휩쓸려 죽어야 죽음의 물속으로, 예수님께서 대신 들어가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노력과 수양을 통해 어떻게든 나은 존재가 되어 보려 애썼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존재가 조금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이 죽음을 맞이할 때에만, 비로소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이 우리 안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혈통이나 개인의 의지로 이룰 있는 일이 아니요,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누리는 생명의 신비

성경이 선포하는 거듭남은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나 결연한 의지의 결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내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내가 함께 살아나는 신비로운 ‘연합’의 사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으로 사람의 진정한 실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 바람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근원을 없으나,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고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결과만큼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성령으로 사람 역시 자신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거듭났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결코 이전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결국 거듭남은 우리의 지식이나 종교적인 열심으로 성취해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역사입니다. 우리가 있는 유일한 일은,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내어맡기는 것뿐입니다. 스스로 쌓아 올린 의로움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간절히 바랄 , 성령의 바람은 비로소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기 시작합니다.

 

의가 아닌 예수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나라

결국 거듭남의 신비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귀결됩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의로움을 쌓아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려 했지만, 주님께서는 스스로 쌓아 올리는 노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친히 열어 놓으신 길만이 유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교회 출석의 연수나 봉사의 , 혹은 신비로운 체험의 유무에 있지 않습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내가 과연 예수와 함께 죽었으며 예수와 함께 살아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니고데모보다 의롭고 열정적으로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자아가 끝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 되시는 것뿐입니다. 거듭남은 나의 죽음을 인정하는 바로 처절한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물로 씻겨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속에서 관념에 머무는 고백을 넘어 살아있는 실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나의 열심과 의로움이라는 낡은 옷을 입고 하나님 나라를 꿈꿨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마땅히 휩쓸려 죽어야 심판의 물속으로 친히 먼저 걸어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제는 내가 죽고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는 ‘거듭남의 신비’가 관념적인 고백을 넘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생생한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임의로 부는 성령의 바람에 우리 인생의 돛을 맡기길 원합니다. 나의 의가 무너진 처절한 자리에서 오직 예수의 생명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 참된 천국 시민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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