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절에서 8절 까지 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아멘.
거듭남의 성경적 의미와 그 필연성
오늘 함께 나눌 주의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유명한 구절이 포함된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 일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도 “교회가 거듭나야 한다, 사회가 거듭나야 한다”며 이 ‘거듭남’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본문의 원조 격인 이 단어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세속적 관점에서의 거듭남이 세상을 고치거나 무언가 새롭게 한다는 뜻이라면, 성경이 선포하는 ‘거듭남’은 이보다 훨씬 깊고 본질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한복음 3장은 그 중요성이 매우 큽니다. ‘거듭남’과 ‘영과 육의 문제’, 나아가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16절의 말씀과 같은 보물 같은 진리들이 이 장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약 3-4주에 걸쳐 이 3장을 좀 더 세분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기원후 26년경의 어느 봄날 밤,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 극찬하며 다가섰으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에 니고데모는 놀라며 반문합니다. “어떻게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답하십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육적으로 다시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뜻이 아니라, 영으로서 출생한다는 말이다. 너는 반드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는 거듭나지 않는다면 니고데모가 가진 모든 지식과 신분, 그리고 그가 의지하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가 처해 있던 실존적 상황은 과연 어떠했는지, 본문을 통해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어둠에 머무는 인간, 그리고 새로운 창조
2절 첫머리를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에 찾아왔다는 사실은 혹여 다른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관원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몰래 숨어 왔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개인적인 행동을 넘어, 그가 처한 근본적인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밤의 사람’입니다. 어둠에 속해 있으며, 어둠 속에 거하는 자인 것입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에 물과 성령이 등장합니다. 어둠, 물, 성령이라는 단어들을 접할 때 연상되는 성경 장면이 있습니까?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흑암과 공허, 혼돈이 가득한 세상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나타납니다. 요한은 지금 단순히 니고데모가 밤중에 찾아온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나는 새로운 거듭남이 곧 창조의 역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되는 바로 그 새로운 창조입니다.
영어로 이를 ‘래디컬(radical)’하다고 표현합니다. 이는 완전히 단절되고 새롭게 결단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조금 보충하고 보완하여, 그저 조금 더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은혜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자기 발전이 아닙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이 새로운 창조가 요청되는 어둠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그는 여전히 그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과 종교적 열심의 한계
본문 2절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니고데모는 홀로 예수님을 찾아왔음에도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며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니고데모가 개인적인 결단 대신 공동체라는 울타리 뒤로 숨으려 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기를 주저하고 자꾸만 ‘우리’라는 이름 뒤에 숨는다는 지적입니다. 그 해석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겠으나, 본문의 문맥을 살피건대 성경의 본래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1절을 펼쳐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의 주어 또한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존재를 ‘우리’라는 표현 뒤에 숨기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 기자는 니고데모가 단순히 개인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유대 관원과 바리새인을 대표하여 온 것임을 명확히 합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이를 확장하여, 니고데모를 우리 인간 전체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자로 세우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요한복음 2장 25절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주님께서는 특정 부류의 내면만을 꿰뚫어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속을 우주적으로 살피고 계십니다. 25절은 바로 3장의 배경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핵심은 니고데모가 가진 직위나 신분이 아니라, 인간을 대표하여 주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본모습을 비추는 데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처한 상황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표적을 보고 이름을 믿었던 이들 중 한 명이라는 점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 표적은 그것이 가리키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처음 꺼낸 말을 보십시오.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는 표적에 대한 앞선 이야기가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믿는 신앙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내면을 들춰냄으로써, 기적만을 좇는 믿음의 실상이 과연 어떠한지 사도 요한의 펜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참 믿음이 아니라, 기적 그 자체를 추구하는 거짓된 믿음입니다. 이는 말하자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쫓아다니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는 치사하게 먹고 배부르려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 나는 진리를 따르고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 진리를 따르는 궁극적인 이유가 이 땅에서의 평안과 행복을 얻기 위함은 아닙니까? 우리가 진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나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진리를 좇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니고데모의 신분적 배경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실존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좇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만약 기원후 26년 예루살렘 성에 우리와 여러분이 살고 있었다면, 아마 우리도 똑같이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쳤을 바로 그 죄인들일지도 모릅니다.
최고의 경건, 그 역설적 비극
니고데모의 신분적 배경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특징은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이 누구입니까? 흔히 우리는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의 실체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대중들은 전혀 다르게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대 가장 존경받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전쟁사』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약 6천 명 정도였는데, 그중 유대인 관원까지 겸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는 100명 이내에 불과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권력을 지향하지 않았고, 사두개인들처럼 제사장이나 왕권과 결탁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이러한 처신 덕분에 그들은 당대 가장 청렴한 이들로 알려졌으며, 특히 헤롯 왕이나 로마 제국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백성들에게 대단한 신임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극도의 경건을 실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십일조와 안식일 규례를 그들만큼 철저히 지킬 수 있는 이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율법을 지극히 귀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를 삶의 현장에 직접 적용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요세푸스 역시 그들을 “당시 율법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했던 사람들”이라고 평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전도에도 힘을 쏟아 많은 이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려 애썼던 열정적인 그룹이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이들 아니었습니까? 만약 오늘날 우리 교회에 그런 분이 온다면, 모두가 그 인격과 경건함에 감탄하며 당장 장로로 세우자고 입을 모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을 계속해서 낮추십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경건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에 오른 이들임에도 말입니다.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 앞에 늘 고민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단계를 뛰어넘어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건에 도달했던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매일 상고하고 삶에 철저히 적용하며 살았습니다. 단순히 지식만 쌓은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제 삶으로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찌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 채 제멋대로 살았다면 모를까, 율법을 매일 묵상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았던 이들이 어떻게 그토록 어긋날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성경이 선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말씀을 주었더니, 인간은 그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대신 오히려 그 말씀을 이용해 하나님을 팔아먹고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앉으려 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장 선한 하나님의 율법을 손에 쥐어도 결국 그렇게 행동하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주님이라 고백한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과연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말씀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팔아먹으며 자신의 영광을 취하려는 모습이 바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경건을 추구하는 듯하나 실상은 하나님을 최고로 대적하는 자리, 그것이 바리새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역설적 비극입니다.
올바른 지식과 거듭남의 차이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건넨 말을 다시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아마도 2절은 오늘 설교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할 것입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 고백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면 니고데모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말에 긍정적인 화답을 하시는 대신, “너는 거듭나지 않고서는 지금 네가 말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을뿐더러, 네가 보았다고 하는 것조차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면 니고데모의 고백 내용이 틀린 것입니까?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잘못이었습니까? 하나씩 따져봅시다. 우선 ‘랍비’라는 호칭이 잘못되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랍비는 당시 가르치는 자에게 드리는 극존칭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마리아조차 ‘랍보니’라 불렀습니다. 이는 메시아라는 칭호보다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치는 기능을 올바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칭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는 고백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9장 33절을 보십시오. 눈을 뜬 소경이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주님을 향한 매우 옳은 표현입니다. 지금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드린 고백도 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내용상으로 전혀 틀린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 말도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확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의 말에는 논리적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욥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논하며 한 말들은 내용상으로는 거의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단정하십니다.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내용은 완벽히 옳은데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답안지에는 정답을 다 써놓았는데, 결과적으로는 ‘답이 아니다’라는 판정을 받는 격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라는 완벽한 교리적 고백을 하고도 정답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이것이 니고데모가 처한 실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대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교리를 많이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설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완벽한 교리적 지식조차 거듭남 없이는 무용지물입니다.
니고데모가 가진 대단한 신분도, 종교적인 경건과 열심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행위조차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 갖춘 성경 지식이나 훌륭한 신앙심조차 능사가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하나님을 몰랐겠습니까? 아니요, 그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심으로도, 그 이성과 지식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오직 거듭남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뒤틀린 존재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지성이 제한을 받고 있다는 식의 약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만약 성경이 말하는 바가 단순한 인간의 제한성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정답을 맞혀야 마땅합니다. 가령 시험을 치를 때 열 문제 중 아홉 문제를 확실히 알고 있다면, 적어도 그 아홉 개는 정답이어야 합니다. 나머지 한 문제는 내 능력 밖이라 틀릴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선포하는 바는 충격적입니다. 아홉 개의 답을 완벽하게 썼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빵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니고데모의 상황과 그가 지닌 여러 조건들, 즉 바리새인이요 관원이요 존경받는 지식인이라는 모든 자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결론지었을 때, 도대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가진 소유나 지위, 혹은 그가 지닌 신앙의 내용 이전에 니고데모라는 인간 그 자체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다고 자부하는 맹인의 실상
우리가 앞서 보았던 요한복음 9장에서 눈 뜬 소경은 니고데모와 똑같이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은 옳은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이유는 하나, 그가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두 시각장애인이 되어 눈을 떠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9장 35절 이하의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침 받은 이를 만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물으시고, 그가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이에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묻자 주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께서 그것을 ‘아는 척’에 불과하다고 보신 것과 같습니다. 그가 이 고백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한, 아무리 내용이 옳아도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이라 불렀을 때 주님께서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다”라고 하셨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을 언뜻 들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구나 오해하기 쉽지만, 주님은 다른 곳에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 칭하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그 모순을 몰랐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이 내뱉는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거듭나기 전에는 틀린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눈을 뜨지 못한 자가 내뱉는 대단한 교리와 위대한 사상도 결국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차라리 보지 못한다고 인정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다고 자부했기에 도리어 정죄 아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단순히 교만한 것은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랍비여’라며 다가왔던 모습은 지극히 겸손하고 경건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뿔 달린 마귀가 아닙니다. 그들은 너무나 신앙생활을 잘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폭로하는 인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최고의 율법을 주어도 그것으로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끝내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사용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환경을 주어도 살만해지면 곧장 “이제 내 힘으로 살겠다”며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본성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 모세와 아브라함을 믿었고 하나님이 누구신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나,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수동태로 임하는 새로운 은혜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핵심은 우리가 그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뒤틀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뒤틀린 안경을 바꾸지 않는 한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듯이, 우리 마음 자체가 비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을 조금 닦아내고 털어내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이성을 사용해도 결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흐르고, 최고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가나안의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처럼, 신앙심을 닦고 성경을 백 번 읽어도 거듭나지 않은 본성으로는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표현합니다.
끝까지 자신은 소경이 아니라고, 나는 정확히 보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지는 몰라도, 그 대가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 제가 성한 눈으로 왔습니다. 훌륭한 구제 사업을 하고 교회를 세우며 마더 테레사보다 나은 일을 하고 왔습니다”라고 당당히 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오직 “주님, 저희는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소경과 같으며 상한 심령들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엎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끊어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철저히 ‘수동태’입니다. 세상에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와 의논하여 출생 시간을 정한 사람이 없듯이, ‘태어난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힘과 능력, 지식과 열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요,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보다 명확한 답을 찾기 원하신다면, 다음 주에도 계속해서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끈기 있게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 자리에서 어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까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미쁘시며,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상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주님,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아무리 살펴봐도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최고의 경건을 가진 사람도, 유대 관원으로서 최고의 지식을 쌓은 사람도, 올바른 교리를 꿰뚫고 있는 사람도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들도 오직 주님 없이는 하나님 앞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새롭게 나지 않고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님, 이 말씀을 저희가 한 주간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니고데모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있었던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 우리 또한 그 복음을 듣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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