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18까지 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멘.
성육신, 이해를 넘어선 신비의 시작
오늘 저희가 함께 나누는 본문 말씀은 아마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공격과 핍박을 받은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성도에게는 무한한 감사와 떨림,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준 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구절을 기억하신다면, 우리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에 직면하게 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육신’이란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인간의 몸만을 가리켜 육신이라 표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이란 외형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육신이란 곧 인간 전체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고 할 때 그것이 속은 하나님인데 겉만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물론 우리는 곧장 어려운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며,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입니다. 성경 공부를 진행하다 보면 가끔 이러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고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들을 텐데, 도무지 말이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맞습니다. 인간의 지각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여러분과 제가 오히려 특별한 것이지, 믿지 못하는 이들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지각을 넘어서는 실재의 은혜
이러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너무 쉽게 단정하거나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뇌가 어떻게 운행되고 움직이는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작용하고 판단을 내리는지 그 모든 과정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인간이 뇌에 대해 아는 바는 고작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특히 무의식의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한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생각하는 행위 자체를 멈추는 사람은 없습니다. 뇌의 기능을 다 알지 못해도 우리는 모두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즉,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해야만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그 안의 산소가 호흡의 근원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산소와 수소, 질소와 이산화탄소가 각각 몇 퍼센트씩 섞여 있는지 일일이 분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그 안의 원자와 분자, 혹은 양자들이 어떤 작용을 거쳐 우리 몸에 생명력을 공급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100%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그 원리를 다 알지 못해도 숨을 쉬며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이해하고 안다고 해서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해도 현실이 되는 일은 우리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깊이 파고 들어가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조차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결론입니다. 이는 마치 내가 뇌의 구조를 잘 모르니 뇌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길은, 그것이 내 삶에서 실질적으로 숨 쉬는 것처럼, 또한 생각하는 것처럼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데 있습니다. 그 의미와 작용이 실재하는지를 살펴볼 때, 비로소 성육신의 사건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실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도적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은, 우리가 구원을 얻거나 구원을 논함에 있어 그 시작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으로부터 구원이 나오지 않았음을 성경은 ‘하나님이 오셨다’라는 표현으로 대신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먼저 오시지 않고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오심’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대할 때도 아브라함 개인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곤 합니다. 그와 같은 신앙을 갖기 위해 노력하느라 정작 아브라함에게 ‘누가 나타나셨는가’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으셨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이 중직자이셔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온전히 여러분의 결정으로만 이루어진 일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로 찾아오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본래 그 신비를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을 받았고 저 사람은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라는 말은 매우 경계해야 할 표현입니다. 그 이면에는 “나는 그래도 하나님을 믿을 만한 조건이 있었기에 그분을 안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는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노래합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이 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을 자신의 하나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기에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믿음이 결코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결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또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달려간 적도 없고, 먼저 구원해달라고 간구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오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자랑하며 타인의 불신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을 자신의 공로나 조건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오해가 깊어지면 “하나님,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봉사하며 믿어주었는데 왜 내 형편을 모른 척하십니까? 마땅히 복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보상 심리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구원을 이해하는 기초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의 걸음이 오직 주의 은혜라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 안에 거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과연 십자가의 도가 그러한 것이군요”라고 시인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비단 믿음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듣기 좋은 수사나 정서적 위안을 위한 표현이 아니라, 실재하는 영적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진리를 마음 깊이 붙든다면, 세상은 뒤집어질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사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풍파도 여러분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진리를 머리로만 수긍하고 문을 나선다면, 일상의 삶 속에서는 다시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타인의 부족함이 우습게 보이고, 끊임없이 나와 남을 비교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진실로 은혜 안에 거하는 자에게 무슨 자랑이 있겠습니까? 내가 남보다 낫다고 말할 근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은혜를 아는 자는 언제나 타인을 나보다 낫게 여깁니다. 질병이 치유되어 ‘나은’ 것이나 상태가 ‘나은’ 것을 뜻하는 ‘낫다’이지,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러한 교만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인간의 무능력을 대신하신 율법의 순종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나, ‘왜 하필 육신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영광 중에 강림하셔서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자녀라”라고 선포하시며 우리를 취하시면 될 텐데, 굳이 비천한 육신을 입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신성 그대로 행하시면 훨씬 수월해 보임에도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육신을 입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실 수 없는 과업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가 육신을 입고는 있으나, 우리 육신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그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누가복음 18장 26절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성경은 구원이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임을 명시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어떻게 증명하고 있습니까?
복음서에 등장하는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결여되기 쉬운 영혼에 대한 진지함이 넘치는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습관적으로 주일을 맞이하지만, 여러분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낀다면 ‘내 영혼의 종국은 어떠할 것인가’라는 고민 앞에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불확실하다면 불안해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의 물음에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켰느냐”라고 되물으십니다. 그는 당당히 “다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때 주님은 곧바로 핵심을 찌르십니다. “네가 가진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나 재물이 많았던 그 청년은 깊은 고민에 빠져 고개를 숙인 채 주님을 떠나갑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탄식하며 묻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은 이 대목에서 의아함이 들지 않으십니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 부유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왜 그토록 절망했을까요? 당시 제자들의 사고방식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저 사람은 부유하고 건강하며 모든 일이 형통하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저렇게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조차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비천한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곧 인간으로서 최고의 조건을 갖춘 자라 할지라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그 어떤 최선의 조건을 동원하더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너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입니다. 부자 청년은 율법을 다 지켰노라 자부했지만, 주님은 그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결국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첫째 계명에서부터 실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즉 율법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야만 했습니다.
종교적 상상을 뛰어넘는 참된 하나님의 법
우리의 신앙에는 한 가지 심각한 오해가 섞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어린 시절 동화 속에서 보았던 인자한 산신령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하나님을 흰 수염에 흰옷을 입으신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그려왔기에, 하나님은 그저 구하는 대로 다 주시고 무엇이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분이라 믿고 싶어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귀한 일이나, 그로 인해 공의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주시는 분이라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죽게 하실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적당히 타이르시거나 선지자를 보내 훈계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절대적인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순종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폭군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 자체가 ‘최고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에 합당한 의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하며,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그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있는 인생이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해가 어려우시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추해 보십시오.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았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따랐습니까? 광야의 고난 중에는 어떠했습니까? 그 사막에서 어떻게 주님을 따르느냐고 변명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세밀하게 인도하셨습니다.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음에도 그들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어떠했습니까? 전쟁하느라 바빴다는 핑계를 대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조의 태평성대는 어떻습니까?
나라가 가장 강성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 신앙생활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쫓았습니까? 이 역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황금기라 불리는 그 태평성대의 정점에서, 왕이었던 다윗은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죄를 저지릅니다.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아를 적진의 함정에 빠뜨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며,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적나라한 자화상입니다.
신화의 영웅주의를 거부한 고난의 메시아
우리는 깨끗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 실제로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둘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내가 비록 연약하나 온 힘을 다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고백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거룩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인간끼리는 서로의 노력을 치하하며 상을 줄 수 있지만, 그 상장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효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기준에서 주고받은 인정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 합당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우리에게 오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성 그대로의 영광 중에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 거룩함 앞에 압도되어 죽을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율법을 지키시는 것은 우리 인간의 순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성취하셔야만 했습니다. 육신을 입은 자로서 율법을 지켜내지 않고서는 우리를 의롭다 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연약함을 친히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은 고대의 수많은 신화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합니다. 세상 그 어떤 신화에도 신이 비천한 인간의 율법 아래 스스로 들어와 그 법을 온전히 성취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한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화려한 신화들을 접하며 살았습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신비로운 숫자와 같은 유사한 신화적 모티프들이 당시에도 산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도들은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러한 신화들과 결코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신화의 공통된 특징은 신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나타나더라도, 결국 그 주인공이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가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왕이나 황제들이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칭하며 신격을 부여받으려 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나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 역시, 주인공이 평범한 혈통이 아님을 강조함으로써 그 권위를 신성시하는 영웅주의적 이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 또한 동전에 자신의 신성을 새겨 넣어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이 모든 신화적 장치들은 특정 인물을 신격화하여 숭배하게 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1세기의 성도들이 수많은 신화의 물결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사건의 목적과 내용이 세상 신화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군림하기 위한 신격화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비하(卑下)하시고 죽으러 오신 전무후무한 사랑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러 오신 하나님, 역설의 복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상의 모든 신화는 영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숭배와 신격화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신을 입으신 이유는 단순히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죽으실 수 없는 분이기에, 죽음을 경험하시기 위하여 기어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가만히 지켜보시니 ‘말로 해서는 안 되고 여러 방편을 써보아도 소용이 없으니, 이제 내가 너희를 위해 죽기라도 해서 이 뒤틀린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보겠다’라고 뒤늦게 결심하여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임기응변식 신화가 아닙니다. 성경은 구약의 첫머리부터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뱀이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의 눈에는 그저 신화적인 묘사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씨’에 관한 약속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다시금 장엄하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쪼개진 제물 사이를 홀로 지나가십니다. 본래 언약이란 인간과 신이 함께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관례이나, 하나님께서는 홀로 그 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만약 이 언약이 깨어질 경우, 제물 사이를 지나간 당사자가 쪼개진 고기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신 장면입니다. 신이 자신의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반드시 구원하겠노라 고백하는 이 장면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어디 아브라함에게만 머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생소한 이라도 성경이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시편만 하더라도 무려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쓰인 글들의 집대성입니다. 그런데 그 방대한 기록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가 올 것인데, 그는 뒤꿈치를 상할 것이요, 쪼개질 것이며, 결국 죽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입니다.
세상은 메시아가 오면 만민의 숭배와 환대를 받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사야 53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참으로 가슴 저미는 고백이 흐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탄식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면 사람들이 따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를 믿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기복의 신화를 넘어 참된 기독교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왜 생명력을 잃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이 왜 이토록 어려워졌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화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복음의 본질 위에 기복이라는 신화를 덧씌워버렸습니다. 성경은 분명 주님이 죽으러 오셨다고 증언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마땅히 고난을 통과하며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도리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신화를 만들어 기독교의 생기를 꺼뜨렸습니다. 복음이 희석되니 세상이 우리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반 신화들조차 신을 이토록 세속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욕심과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그분으로부터 세상의 안락과 향락만을 얻어내려 합니다. 결국 우리는 참된 기독교가 아닌,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신화적 종교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곁에 남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세속적인 복을 위해 전전긍긍하시는 모습뿐입니다. 언제든 대기하다가 우리가 부르면 복을 주어야만 하는, 마치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신 말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결코 그런 저급한 신화가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메시아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이 경이로운 이야기는, 그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로 인해 그 의미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신 목적은 단순히 우리에게 경배를 강요하거나, 다른 종교들처럼 새로운 교리를 창시하여 군림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예수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세력을 확장하겠다는 의도를 비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복음은 너무나 선명하고 순수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성경을 기록할 때,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억지로 신격화하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조작된 인정이나 신격화가 전혀 필요치 않은, 그 자체로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 불교의 전승을 보면, 부처가 태어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선포하며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비록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는 전형적인 신격화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나, 그 이적을 통해 우리에게 굴복 섞인 경배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확인이나 동의가 있어야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정한다고 해서 그분이 계시고, 여러분이 높여준다고 해서 그분의 위엄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초월하여 계시는 영원한 실재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는 임마누엘의 심장
여러분,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십니까? 왜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은 자신이 숭배받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시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아닌 우리를 향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내뱉으시던 그 거친 숨소리, 안타까움에 눈물이 고여 핏발 섰던 그 눈동자, 병든 자를 어루만지느라 거칠어진 손마디, 그리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사막의 먼지를 뒤집어쓰며 헤매던 그 발은 모두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장막을 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 가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기서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너희의 죄로 인해 내가 진노하여 너희를 멸할까 두렵다 하셨으나, 모세의 간구에 결국 “내가 장막을 통해 너희와 함께하겠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성막 안에는 두꺼운 휘장이 쳐져 있었고, 그 너머에 법궤가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직접 맞닥뜨려 죽지 않도록, 휘장이라는 분리 장치를 두어 인간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1세기의 유대인이라면, 이 성육신의 선포를 듣는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던 그 엄위한 성전, 우리를 하나님과 격리해 두었던 그 거룩한 처소가 이제 우리 삶의 현장에 직접 텐트를 치고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실체입니다. 1년에 단 하루,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떨며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던 그 하나님을, 이제는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망치로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은 자기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우리 삶의 한복판에 던져 넣으심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좌절을 함께 겪으시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몸소 체휼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그분은 친히 울어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천한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는 법을 아시는 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여러분의 치열한 갈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신앙인답게 멋지게 살고 싶다”는 열망과 “믿으려 애써도 왜 이리 무너지는가”라는 고뇌를 다 이해하십니다. 그분 역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그 모든 연약함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영광보다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성부 하나님께 드릴 가장 큰 영광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문자가 아닌, 자신의 인생과 인격 전체로 증명하신 분입니다.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한 여호와로라” 하신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배신자 가룟 유다를 끝까지 참으셨고, 온갖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는 것을 아버지의 뜻이라 여기며 순복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심장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뜨겁게 고동치는 이 불타는 심장이 보이십니까? 주님께서는 그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심장을 바로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뜨거운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라.” 저 역시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그리고 우리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십시오. 방황하던 삶의 걸음을 돌이키십시오. 여러분의 생명과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발견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지금도 세차게 뛰고 있는 그 그리스도의 심장을 기억하며, 그 품으로 나아오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자격 없음을 아시고 친히 낮은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그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율법의 순종을 대신 이루시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셔서 우리의 모든 눈물과 갈등을 친히 체휼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를 향해 고동치는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을 품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임을 고백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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