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5절 까지 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아멘.
 
새로운 창조의 시작과 말씀의 강림
요한복음 1장의 서두를 여러분은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하는 이 선언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창세기’와 같습니다. 요한은 마치 창세기를 새로 쓰듯 새로운 창조의 시작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창세기는 처음의 창세기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처음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곧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내가 곧 생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처음에는 “가라사대”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제가 왜 이 둘을 비교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처음의 창조 역시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을까요. 우리는 가끔 하이든의 「천지창조」라는 곡을 듣게 되는데,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장엄하고 웅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니, 그 광경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는 음성에 빛이 생겨나고, 바다와 땅이 나뉘며, 뭍이 드러나 그곳에 거하는 짐승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이 창조되고, 해와 달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을 잠시라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장엄하고 웅장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목도하고 있는 이 사건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천지창조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건입니다. 이제는 “빛이 있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빛 자체가 오셨습니다. 말씀이 직접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고,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창조의 열매입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의 원천
이 말씀이 오셔서 이제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본문 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 곧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생물학적인 ‘살아 있음’과는 다릅니다. 먹고 자고 일하는 차원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있는 것이지요. 저도, 여러분도 다 살아 있지 않습니까? 생각도 하고 일도 하며, 때로는 화를 내고 짜증도 내고, 졸거나 잠을 자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생명은 그런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라 불리는 생명의 원천을 뜻합니다.
 
이 표현이 시편 36편 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생명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요한복음 1장을 여러 번 읽으셨겠지만, 저 역시 꽤나 자주 읽어왔습니다. 그동안 4절 말씀을 무수히 접하면서 “그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지”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지나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며 곰곰이 묵상하다가 새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에게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왜 놀랍습니까? 사실 저는 그동안 마치 제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내 생명은 내가 소유한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말도 하고, 집에서 다투기도 하고, 속상해하거나 화를 내기도 하며, 아이와 TV 채널권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그 모든 일상 속에서, 저는 이 ‘생명’이라는 것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오롯이 저의 것인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제 생명이 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매일 붙잡고 제 힘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내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놀랐습니다. 단순히 숨을 쉬고 있으니 내가 생명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육신이 살아 있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구절을 깊이 생각해보니 생명은 결코 제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살아 숨 쉬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내가 참된 생명을 가졌다고,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진짜 사는 것이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살아 있다’는 개념이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단순히 걸어 다니고 숨을 쉬는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관계가 없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다’, 곧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보다 나은 주의 인자와 하나님과의 관계
시편 63편은 제가 읽다가 역시 깜짝 놀랐던 시편 중 하나입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시편 63편 2절과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말할 나위 없이 우리가 영위하는 육신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숨 쉬고, 밥 먹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명이지요. 그런데 그 생명보다 나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의 인자’입니다. 주의 인자는 주의 사랑이라는 단어와 아주 유사한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근거를 바로 여기서 찾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그는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성소에서 바라본 주님의 인자와 사랑, 영광과 권능이 자신의 육신적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살아 있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머무는 것이요, 그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상태임을 시편 기자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흔히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시황이 꿈꿨던 불로장생의 개념일 뿐,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어차피 영원히 살 존재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도 영원히 삽니다. 다만 거하는 장소가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좀 시원한 곳에서 살고, 그분들은 좀 뜨거운 곳에서 사시는 것이지요. 장소가 다를 뿐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단순히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본문이 말하듯 하나님의 인자와 권능과 사랑을 입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를 바라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진실로 사랑하며,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입은 존재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았으며 진정으로 사랑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아셨고, 그분의 사랑을 입으셨으며, 아버지를 사랑하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 또한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또한 가장 친밀한 친구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그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우리를 또한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늘의 자리를 내려놓으시며, 모든 권세를 뒤로한 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도저히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실 것입니다. 혹시 그분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실 때만 하나님을 보셨습니까? 하지만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비단 기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것같이 내가 너희를 얼마나 품으려 하였느냐” 하시며 우시는 그 눈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목도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느 누가 여러분을 위해 진실한 눈물을 흘려주겠습니까? 자식일까요? 제 아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저는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집에 들어설 때 아들 둘이 달려와 인사하는 것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제 손을 슬쩍 보고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으면 그대로 제 갈 길을 가버립니다. 빈손이면 ‘원수 같은 아버지’가 되고, 무언가 들려 있어야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지요. 과연 자식이 부모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까요?
 
사실 인간은 울 때조차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웁니다. 자식이 잘못되어 우는 것도 실상은 내 자존심이 상해서 우는 경우가 많고, 자식이 부모를 위해 울 때도 부모님 자체보다 홀로 남겨진 자신의 처지가 가련해서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떠났을 때 흘리는 눈물도, 나를 혼자 둔 외로움 때문이지 오직 떠난 사람의 불쌍함만을 위해 울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여러분을 위해서 참된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여러분을 위해 우시는 분,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며 고치시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줄지어 찾아오는 이들을 외면치 않으시는 주님을 보며 우리는 온유와 긍휼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또한 아무리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고 딴짓을 하는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설명하고 또 외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속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왜 아직도 모르는가?” 하는 탄식은 사실 제가 설교를 마치고 방에 돌아가 자주 내뱉는 말이기도 합니다.
 
완악한 자들을 위해 무릎 꿇으신 사랑
방금 말씀드린 탄식은 제가 제 방에서 홀로 내뱉는 말이지만, 우리 주님은 끝까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우리 주님은 기꺼이 무릎을 꿇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으시고 제자들 앞에 수건을 동이신 채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목을 세우고 잘난 줄로만 알 때, 주님은 오히려 고개를 숙여 기도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러분, 우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얼마나 완악한 사람들입니까?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찔리는 이야기가 나와도, 그것을 자신에게 비추기보다 전부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특기입니다. “오늘 김 집사가 왔어야 하는데, 이걸 들었으면 참 은혜를 받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뿐, 정작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점잖게 마주 앉아 있으니 서로 속고 있는 것이지, 사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고집불통인지 모릅니다.
 
아닌 것 같으십니까? “그래,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 완악함이 얼마나 심각하냐 하면, 성군이라 불리는 다윗조차 그랬습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그 죄를 고발하러 왔을 때에도, 다윗은 그때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나단이 비유를 들지요. 양 백 마리를 가진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겠다며 가난한 이웃의 소중한 양 한 마리를 빼앗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다윗은 격분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당장 그 사람을 데려와 잡아 죽여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선지자가 말합니다. “그 죽을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제야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은 정말 빨리 깨달은 편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지적을 당해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우리입니다. 설교를 들으시는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야단만 치지 마시고 칭찬도 좀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도 모르는 사이 제 설교의 주된 내용이 야단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죽을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외쳐도, 전부 다 눈만 껌뻑이며 앉아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속으로는 여전히 “이 말은 김 집사가 들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을 자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며 십자가로 걸어가신 분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빛과 정직한 신앙의 공동체
그렇게 우리를 살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며,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이 비추어졌다고 할 때 그 생명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제 좀 깨달아지십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진정한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참된 생명,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정말 살아 있다면, 나의 생명은 예수 안에, 그분의 마음 안에,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이 흘리신 눈물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무릎을 꿇으셨던 낮은 자리와 그분의 겸손, 그분의 사랑 안에 내가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곧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산다’는 말의 본질이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본문 5절을 함께 보십시오.
 
이 구절을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하자면, “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말씀은 문맥상 “이기지 못하더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의미가 이렇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빛이 임할 때 어둠이 물러간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어둠이 빛을 향해 끊임없이 공격하고 괴롭힐지라도 결국 빛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이를 증명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빛을 꺼뜨리기 위해 주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둠은 빛을 당연히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빛이 비치는 순간, 감추어 두었던 자기 안의 어둠이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왜 숨으려 하고 왜 피하려고 하겠습니까? 부끄러운 실체가 탄로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를 때 왜 불편한 마음이 드는지 아십니까? 바로 내 안의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숨기고 싶었던 어둠이 들춰지면, 사람들은 빛으로 나아오기보다 오히려 그 빛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빛을 꺼버리려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빛을 밀어내려 합니다. 어둠은 이토록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자인지를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화려한 의복이 아니라 누더기요 넝마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빛이 절실히 필요함을 고백하며, 그 빛을 알아가고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의 첫 발걸음은 “예수님, 사랑합니다”라는 화려한 고백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주님, 저는 누더기와 넝마를 걸친 비참한 죄인입니다. 주의 빛 앞에 제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는 통회함이 성도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설 때 비로소 우리는 빛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빛이 나를 심판하여 몽땅 태워버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따스한 빛이 나의 어둠을 씻어내고 깨끗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여러분, 과거에 어둠이 여러분에게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우리가 어둠의 세상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그 어둠은 우리의 말투와 생각, 삶의 모든 영역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로 인해 입은 상처가 우리 안에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그 상처를 직시하는 것조차 싫고, 대면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 피할 때도 많습니다. 가정에서 겪은 아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입은 자존심의 상처,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받았던 멸시 등,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흔적들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아마 이 세대를 살아오신 분들 중에는 전쟁이나 죽음이 남긴 깊은 흉터를 안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대개 깊은 곳에 숨어 다닙니다. 그러다 빛이 비치면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더욱 움츠러들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빛의 비춤을 온전히 받을 때, 비로소 ‘참된 정직’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과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됩니다.
 
왜 정직함이 그토록 중요할까요? 정직하게 빛 앞에 설 때부터 비로소 과거의 흔적과 상처들이 더 이상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약점이 더 이상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내 아픔과 상처가 부끄러움이 되지 않으며, 과거의 실패나 약점이 드러나는 일에 더는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면 성경 공부를 하고 설교를 들으며 개인적으로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교제란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과 마음이 깊이 나누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스스로 목회를 잘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마음의 나눔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단단한 갑옷을 입고 교회에 옵니다. 누구에게도 속내를 나누지 않습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며 얼굴 한번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진정한 교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마음이 나누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으니, 여기서만큼은 더 이상 거짓을 말하거나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오면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집처럼 편안하고, 지친 마음이 참된 평안을 얻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안에 머무는 풍성한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붙들지 못하면,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과거의 상처를 빛 가운데 내어놓지 않으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쓴 뿌리와 같은 마음을 안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나 교회 일을 할 때,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섬길 때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일에는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는 우리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보여드려도 괜찮습니다. 아니, 이미 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부터 나이가 들어 입은 아픔, 오늘이나 어제의 상처, 심지어 설교를 듣다가 마음이 상한 일까지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러분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이 이 사실을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빛 가운데로 들어왔다는 것, 그 빛이 여러분을 비추고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는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어둠 또한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진리입니다. 나의 상처가 주님의 인자와 사랑을 이기지 못하며, 나의 아픔이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주님의 그 사랑의 눈물을 앞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처를 가졌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깊은 마음의 고통을 품고 있든, 그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병든 몸조차 주님의 긍휼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죽음조차도, 자신을 죽음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조차 우리 주님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 세상 그 무엇이 여러분을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그 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저 빛을 만드시는 것으로 끝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창조물은 아담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하여 에덴동산을 만드셨고, 온갖 동물과 식물, 풍성한 먹을거리와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풍성한 창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창조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었을 때, 우리가 그 풍성한 창조의 은혜를 우리 안에서 마땅히 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위해 우신 주님, 내 발을 씻기기 위해 무릎을 꿇으신 주님,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어둠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과거의 어둠을 붙잡고 울고 계십니까? 왜 그것을 운명처럼 붙들고 사십니까? 왜 그 상처가 곧 여러분 자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 아픔 때문에 또다시 실패하고 무너질 것이라 여기십니까?
 
여러분, 주님께서 이미 이기셨습니다. 병든 몸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으며, 여러분 마음속 깊은 상처를 이기셨습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이 생명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이제 정말 아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저희에게 참 빛으로 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매여 있으나, 주님의 눈물과 십자가의 사랑이 그 모든 어둠을 이미 이기셨음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이제는 죽음조차 이기지 못한 그 풍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더 이상 상처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정직과 안식을 누리며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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