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6절에서 13절 까지 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아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개입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적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안다고 확신하거나, 혹은 그 존재를 전제하며 나아오신 분들일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고자 갈급한 마음으로 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어떤 이는 성경을 읽다가, 어떤 이는 설교를 듣다가, 또 어떤 이는 깊은 사색 끝에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이러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을 제시합니다. 빛이 이 땅에 왔으나 그 빛에 대해서는 반드시 '증언'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본래 성경은 세상을 어둠이라 규정합니다. 어둠 속에 빛이 임하면 그 찬란함에 모두가 빛의 도래를 알아채는 것이 당연하거늘, 성경은 도리어 그 빛에 대한 증언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빛이 비추었음에도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한다고 기록합니다. 증언이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본문 6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표현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결코 자의로 온 이가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억지로 왔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온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보낸 이의 목적과 뜻을 받들어, 오직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보내신 이가 있다'는 선언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대개 자신의 판단과 예측에 따라 삶을 영위한다고 믿습니다. 사업도, 일상의 사소한 계획도 우리의 계산대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보내신 이'에 의해 개입된 흔적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목도하는 역사가 전부가 아니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신성한 개입이 실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이 사실이 놀라운 이유는 이 역사가 곧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보내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을 '하나님의 손길', 혹은 성도들의 고백을 빌려 '사랑의 손길'이라 부릅니다. 이 손길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늘 우리 곁에 머물러 왔으며, 이제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에까지 닿았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반추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그 손길을 내미셨으나 인간은 번번이 그 손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신들을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집요하고 독특하신 분입니다. 오랜 세월 거절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누군가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번에 보냄을 받은 이는 이전의 선지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매우 특별한 사명을 띤 인물입니다.
 
마지막 선지자 요한과 복음의 시작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그분 바로 직전에 도래한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구약의 문을 닫는 마지막 선지자라고 증언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 이르기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구약 시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자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으로 선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 번째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육신으로는 친척 관계였으나, 그들의 삶의 궤적은 사뭇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일상을 사셨다면, 요한은 거친 광야를 떠돌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털옷을 입은, 마치 엘리야의 재림과 같은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독특한 인물을 보내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피조물을 통한 간접적인 계시를 넘어, 빛 자체이신 그분이 세상에 직접 현현하시는 단계에 이릅니다. 복음의 시작이 인간의 열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 빛을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절대적인 빛이 피조물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빛이 비치면 그 자체로 광명이 선포되는 것이지, 그 빛의 정체에 대해 새삼스럽게 논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빛은 그 자체로 자명한데, 왜 굳이 요한이라는 증언자가 필요했던 것일까요?
 
빛을 보지 못하는 세상을 위한 증거
어두운 방 안에서 전등을 켜면 순식간에 사방이 환해집니다. 이는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그 명백한 현상 앞에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성경이 그 빛에 대하여 세상이 "알지 못한다"라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빛이 비쳤음에도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빛을 마주한 자가 '보지 못하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광명이 도래했으나 그 밝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영적인 소경인 셈입니다. 본래 빛은 타인의 증명을 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이며, 요한이 빛이라 일컬어 빛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증언을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면 이는 큰 오해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단지 지식의 전달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은 요한의 증언 덕분에 메시아가 되거나 빛의 자격을 얻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한복음 5장 33절과 34절은 기록하기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냄에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 모든 증언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이어지는 35절과 36절에서 주님은 요한을 일컬어 '켜서 비추는 등불'이라 칭하시며, 당신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거, 곧 아버지께서 맡기신 역사와 하나님이 친히 보내셨다는 사실 자체가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요한의 증언이 철저히 우리를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흔히들 '요한은 빛 자체를 더 빛나게 하지는 못해도, 우리가 그 빛을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온 설명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 10절의 말씀은 엄혹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요한이 혼신의 힘을 다해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성경이 이 무거운 사실을 기록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탁월한 증언자가 곁에 있어도 빛을 알아볼 수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너무나 당연한 기득권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전인적 결핍과 하나님을 아는
오래전부터 예수를 믿어왔기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고, 혹은 아직 믿음이 없으면서도 스스로는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여깁니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한 채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분을 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며, 헌신하고 눈물을 흘리는 행위 자체만으로 신앙을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의 위기가 시작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늘 이 본문을 그저 익숙한 요한복음의 서론으로 치부하지 마시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깊이 성찰해 보시기를 권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쉽게 오해하는 근저에는 인간 본연의 '종교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절대자에게 의지하려는 성향을 지닙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장인의 손길이 닿은 작품에 제작자의 흔적이 남듯, 인간의 육체와 영혼 깊은 곳에는 조물주의 흔적이 배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본능적인 자취를 따라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동원하는 우리의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전인적으로 오염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1 더하기 1' 같은 산술적 진리는 명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장엄한 선언은 그 어떤 산수보다 자명한 사실임에도, 인간의 머리로는 좀처럼 수용하기 힘듭니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타락하여 영적인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합리적이라 자처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명제는 수긍하는 듯하다가, 죽은 자가 살아나거나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생존했다는 구체적인 역사 앞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는 막연히 긍정하면서도 그분의 구체적인 통치는 부정하는 모순, 이것이 바로 한계에 부딪힌 인간 이성의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지성이 얼마나 뒤틀린 상태에 놓여 있는지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 우상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이러한 전인적 결핍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정립한 이론이나 주관적인 생각들을 우상의 반열에 올려놓곤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과정이 "자기도 모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스스로 깨닫고 있다면 그 오류에서 벗어날 길을 찾겠지만, 대개는 자신이 만든 생각의 틀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합니다. 일례로 신약학의 거두인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달나라를 왕복하는 이 첨단의 시대에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의 신학적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논리의 오류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영적인 진리는 서로 차원이 다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지성이 영적 진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인 시대를 살아간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본질적인 진리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는 인간이 지식과 감정, 의지를 하나님 안에서 조화롭게 사용하는 능력을 상실했음을 방증합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 의지가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려면 먼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규명해야 합니다. 인간은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부모라는 근원 없이는 태어날 수 없기에 부모와 연결되어 있고, 자녀와 친구, 그리고 사회라는 거대한 그물망 속에 엮여 있습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관계의 맥락을 살펴야 합니다. 가령, 어린 시절 부모의 과한 기대와 인색한 칭찬 속에서 자라 소심한 성격이 형성되었다면, 그 과거를 배제하고는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결코 온전히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나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마치 아버지 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현재 우리가 그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단절된 이 비극적인 상태를 가리켜 '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신할 '대용품'을 찾아 헤맵니다. 이는 고도의 지식을 갖춘 철학자나 대지에서 흙을 일구는 농부나 마찬가지로 지닌 본능적 경향입니다. 미신과 온갖 종교가 끊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 없이는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믿게 만드는 대용품이 우리에게는 하나씩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자녀나 일, 혹은 직장이나 건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견고한 대용품은 '돈'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헛된 대용품을 세워두고 그것을 우상 삼아 살아갑니다.
 
종교성과 도덕을 넘어서는 하나님 신앙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내면에 깃든 '양심'입니다. 여러분,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을 엄중히 경청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앞서 언급한 종교성이나 자신의 양심을 근거로 하나님을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도덕적 자각을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도는 누구보다 민감한 양심을 지녀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양심은 단순히 보편적인 도덕성을 추구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내가 더 윤리적이고 교양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양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맙시다"라는 권면을 대할 때, 세상은 "거짓말은 나쁜 것이니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마땅히 더 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신앙의 본질을 도덕주의로 퇴색시키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도덕적 수양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도가 거짓을 멀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기에 나 또한 거부하는 것이지, 내가 남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서 그런 저급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성도와 일반인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착하게 사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단순히 도덕적인 삶으로 치환해버리는 순간, 복음의 능력은 사라집니다. 물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는 세상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와 고상한 양심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도리는 착한 행실과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기에 그분의 성품을 자연스레 투영하는 것이지, 나의 선함을 내세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율법의 지식과 영적 소경의 한계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이고 아픈 실상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 지식을 쌓으면 하나님을 안다고 확신합니다. "성경을 이토록 잘 아는데 어찌 하나님을 모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시다. 이스라엘에 참 빛이 임했으나, 정작 그들은 그 빛을 감지하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몰랐기에 메시아를 몰라본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과 성경을 맡기셨습니다. 그 거룩한 기록 안에는 하나님의 뜻과 심장, 구원의 구체적인 경로가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의 수호자였던 그들이 정작 주인공이신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배척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그 글을 읽어낼 영적인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글자는 보되 실체는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시력을 잃은 자에게 문자로 된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읽을 능력이 없으니, 생명의 말씀이 담긴 그 귀한 두루마리를 가지고 고작 일상의 잡무를 처리하거나 가려운 곳을 긁는 도구로 전락시킨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그것을 가문의 보물로 삼아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유용한 가보"라며 애지중지 모십니다. 만약 누군가 다가와 "도대체 이 글의 진정한 용도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대신 자존심을 앞세워 "내가 이 가치를 모를 줄 아느냐"며 오히려 화를 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실상이자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습니다. 율법의 수건을 벗겨내고 보면 그 안에는 오직 "예수를 믿어야 산다"는 한 문장이 흐르고 있음에도, 영적인 눈이 감긴 그들에게는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보며 경계하십시오. 우리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을 손에 쥐고도 그 본질적인 생명력은 외면한 채, 그저 종교적인 안위와 온기만을 구하며 "참으로 좋은 말씀이다"라고 자족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은 이토록 무지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는 빛을 볼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성경이 내리는 준엄한 결론입니다.
 
요한의 결론: 죽으러 오신 어린
이제 세례 요한이 선포한 증언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봅시다. 그의 증언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나,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자, 이분이 예수님이니 내 설명을 잘 듣고 빛을 발견하라"는 식의 교리적 안내가 아닙니다. 요한이 증언하는 핵심 역설은 '빛이 임했으나 인간 중 그 누구도 그 빛을 스스로 식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조차 빛을 알아보기에 무력한 존재임을 드러낼 정도로 철저하게 인간의 한계를 증언했습니다. 훗날 그가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던 사건은, 인간의 지각으로는 메시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요한이 깨달은 진리는 명확합니다. 이 빛은 인간의 학습이나 수양, 혹은 종교적 열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적 교육을 강화하든, 용광로 같은 고난을 통과하든, 부흥회의 뜨거운 눈물 속에 자신을 던지든, 인간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빛을 '알아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도달한 요한의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가 '죽으러 오셨다'는 선언입니다. 예수께서 탁월한 웅변과 설교로만 다가오셨다면 과연 우리가 깨달았을까요? 주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셨으나,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채 그분을 십자가로 몰아넣었습니다. 주님이 악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지고한 사랑을 선포하셨음에도, 인간의 어둠은 그 선하심을 견디지 못하고 빛을 살해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은 선포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것이 요한이 내린 복음의 종결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발을 디디신 목적은 화려한 통치가 아니라 처절한 죽음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때 죽음의 잔을 마시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기독교와 구원의 감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역사서 한 구절에 "예수라는 현자가 나타나 고상한 가르침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는 메마른 기록으로 끝났을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어린 양은 오직 제단 위에서 죽어야만 그 가치가 증명되는 제물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죽기 위해 오셨고, 그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내셨습니다.
 
기적 같은 눈뜸과 성도의 기쁨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적입니다. 이것은 탁월한 설교를 들어서 혹은 성경 지식을 부지런히 쌓았기에 도달한 결과가 아닙니다. 어느 날 성령의 간섭으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눈을 떠 실체를 마주하게 된 자에게 무슨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하는 데에는 논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랜드 캐년의 장엄함을 목격한 사람은 그 감흥을 언어로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깊이가 몇 미터이고 폭이 얼마인지 수치를 나열한다고 해서 그 광활한 울림이 전해지겠습니까? 보지 못한 이가 그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저 "직접 가서 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일하고도 명확한 정답일 뿐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처럼 눈을 뜬 사람입니다. 본래 어둠 속에서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던 자에게 참 빛이 임한 것입니다. 칠흑 같던 인생이 홀연히 밝아졌을 때, 그 빛의 감격에 젖어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의 순서를 뒤바꾸곤 합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하나님이 내 삶에 무언가를 더해주시고, 환경을 풍성하게 하시며, 나를 더 근사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이라고 계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도리어 우리를 본질적인 지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인생의 파고가 덮쳐오고 답답한 현실 앞에 좌절할 때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 예수 믿게 되었지 않느냐?"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신비가 보이고, 미련해 보이던 십자가가 믿어지는 사건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으며, 그분만이 내 생명이라 고백하게 된 이 초자연적인 상황을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섬기는 증거자의
그러므로 신자로 부름받은 우리는 이 땅에서 '앞을 보는 자'로 살아가기에 필연적으로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손해가 두려워 세상 밖을 나서면 다시 눈을 감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적인 시력은 회복되었으나 짐짓 소경인 척하며, 내면의 확신만을 간직한 채 세상의 방식에 순응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단한 일입니다. 주변의 대다수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볼 때 성도는 참으로 해학적인 존재입니다. 세상적인 보장이 전혀 없음에도 "주님이 나의 보증이 되신다"라고 선포하고, 실패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끼리는 통하는 언어일지 모르나, 세상이 보기에는 참으로 허황한 소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고백 속에 흐르는 은혜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약속 앞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사실, 배반을 일삼는 나를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그 사랑이 느껴지는데 어찌 평온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이 감격을 이해해주리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푸른 하늘의 청량함을 설명하는 것은 자칫 그들에게 상처나 조롱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목적은 세상을 정죄하거나 우월감을 뽐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 또한 똑같은 소경이었으나 오직 은혜로 눈을 떴기에, 이제는 낭떠러지로 향하는 이들을 붙잡아 주라고 세워진 것입니다. 파멸의 길인 줄도 모르고 걸어가는 이들을 보며 방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비난을 듣더라도 그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그리로 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증거자의 사명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어둠 속의 우리를 섬기러 오셨듯, 그 빛을 본 우리도 세상을 향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무시당하고 오해받을지라도 끝까지 그들을 사랑으로 인내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입니다.
 
여러분은 세례 요한처럼 증거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빛 자체가 아니라, 오직 그 빛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성공이나 자녀의 형통에서 오는 일시적인 기쁨보다, '영적 소경이었던 내가 보게 되었다'는 그 원대한 기쁨을 소유하십시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기쁨이 아니라,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구원의 즐거움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풍성함을 본 자답게 세상을 향해 넉넉히 져줄 수 있는 여유와 사랑을 품으십시오. 혹여 아직 그 빛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자신의 무력함을 겸비하게 인정하고 주님의 빛 속으로 온전히 걸어 들어오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버지, 어둠 속에 갇혀 참된 빛을 알아보지 못하던 저희에게 세례 요한과 같은 증거자를 보내주시고, 무엇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지혜와 의지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던 하늘의 신비를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보게 하시고, 영적 소경이었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하시니 이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의 경이로운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빛을 본 자답게 세상의 헛된 대용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우리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만을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가 단순히 인간적인 도덕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온전히 투영하는 진실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겸손한 섬김의 삶을 살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