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1장 15절에서 18절 까지 입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멘.
영원한 빛을 증거하는 겸손한 고백
오늘 본문 15절에 등장하는 요한은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요한이 증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요한복음 1장의 서두에서 이미 발견했듯이, 그가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선포한 말의 본뜻은 ‘내가 예수님보다 6개월 일찍 태어났으나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계셨던 영원한 존재이시다’라는 시간적 의미도 물론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요한이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빛을 증거하러 온 자이며, 내가 증거하는 그 빛은 영원부터 계신 분이다. 나는 결코 그 빛이 아니다. 나는 단지 한 인간으로서 이 자리에 서서 그 빛을 증거하는 존재일 뿐이다.’ 요컨대 요한은 철저하게 ‘나는 아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오직 주님만이 은혜이시며, 그분만이 우리 은혜의 유일한 근거가 되심을 증거합니다.
여러분, 요한은 선지자입니다. 그것도 구약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기록인 말라기 이후 400년 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을 통해 계시된 것입니다. 무려 400년의 침묵을 깨는 사건이었으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나타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선포를 시작으로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자신은 진정한 구원자가 아님을 외쳤습니다.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조차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으며, 그의 외침 또한 우리를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육신으로 오신 참된 성전과 충만한 은혜
여러분, 요한복음 1장 14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로 시작하는 그 구절 말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친히 성막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의미임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과 제사 기구들이 있었던 예배의 처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천막 형태의 성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그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사 제도도 성전 건물도 그 실체 앞에서는 무의미해진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와 성전의 기구들을 능가하며, 오히려 그것들을 폐하실 만큼 강력한 참 성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신으로 오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가장 힘들 때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영적 갈급함 속에 계신다면, 오늘 선포되는 말씀과 성찬을 통하여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나누는 핵심적인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는 모두 이 ‘은혜 위에 은혜’를 입기를 갈망하며, 마땅히 이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성도에게 주시는 이 큰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흘러나오는데, 이때의 충만함은 바로 은혜와 진리를 의미합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넘어서는 전적인 은혜의 실재
요한은 처음에 세례 요한이라는 선지자를 들어 ‘나는 아니다’라는 고백을 전했고, 이어서 성전과 제사 제도 역시 실체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요한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심화시키기 위해 모세를 등장시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충만한 삶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은혜와 진리는 결코 율법을 통해서는 오지 않습니다. 율법으로는 은혜와 진리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나눈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잠시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말하는 본질은,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을 오해하여, 빛과 어둠 중 하나를 스스로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여러 카드 중 더 가치 있는 것을 골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빛과 어둠을 분별할 줄 모르는 눈먼 소경과 같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사실 또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무지 속에 머물던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내가 빛을 택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빛을 택했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의 눈이 떠졌음을 의미합니다. 눈을 떴기에 보게 된 것이고, 보았기에 빛을 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을 뜨게 된 것이 먼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해주신 사건, 그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선택이나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에, 사도 바울도 로마서 4장 1절 이하에서 이를 명확히 표현하였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분들은 즉시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어떤 분들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 당혹해하기도 합니다. 이는 여러분의 영적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번역의 어감이 생소하기 때문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노동을 하면 그 대가로 보수를 받으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가를 받는다면, 그것을 바로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죄를 지었기에 마땅히 감옥에 가거나 사형을 당하는 등의 대가를 치러야 함에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 복이 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입니까? 우리가 죄를 없애달라고 요청해서 이루어진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주권적인 복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은 결코 은혜를 줄 수 없으며, 진정한 은혜와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모세가 전해준 율법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율법 또한 ‘나는 아니다’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관통하는 자기 부인의 고백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세 가지 핵심적인 기둥을 짚어보았습니다. 선지자와 성전 및 제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율법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한결같이 ‘나는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구약의 역사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핵심 원리가 됩니다. 성도의 삶이란 결국 ‘나는 아니다’라는 사실을 증명해 내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빛과 생명은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 이 ‘만’이라는 단어에 담긴 배타적 절대성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이 은혜를 흉내 낼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 외에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장 19절 이하를 보면, 유대인들이 보낸 이들이 세례 요한에게 그 정체를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냐?”라는 물음에 그는 단호히 아니라고 답합니다. 엘리야냐고 물어도,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냐고 물어도 요한은 거듭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깊이 읽으신 분이라면, 예수님께서 분명 요한을 엘리야라고 칭하셨음에도 왜 정작 요한 자신은 이를 부인했는지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담긴 깊은 의미는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지금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핵심은 이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시종일관 철저하게 ‘자신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할 때에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또한 내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니다’라는 진리를 몸소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미련해 보이는 전도와 간증의 본질
이러한 고백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따르며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 가운데, 바로 이 ‘나는 아니다’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최근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친구나 지인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간절히 권면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물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성도는 마땅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실 믿음이 있다는 우리조차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는 전도해야 하며, 그 전도를 통해 보여주어야 할 본질은 바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나는 아니다’라는 선언이 지닌 의미를 고린도전서 1장 21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성경은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 칭합니다. 즉, ‘나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은 세상의 눈에 미련해 보입니다. 전도라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도로는 사람이 올 수 없음을 증명하는 과정이 곧 우리의 전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다해 전도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전도의 참된 의미입니다. 자칫 난해하게 들릴 수 있으나, 이는 성경의 원리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이 표적과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거나,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지혜로 설명해 보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할 뿐입니다. 전도라는 수단 자체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 예수를 믿게 되는 것, 그것이 전도의 신비입니다. 만약 특정한 훈련이나 효율적인 방법론으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태도입니다. 전도는 오직 성령님만을 의지하는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 외에는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겸손히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나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 즉 ‘방법론으로서의 전도는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진정한 전도입니다.
이는 간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증의 목적 역시 ‘나는 아니다’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기도의 응답으로 병이 나은 사건 등을 간증하곤 합니다. 물론 당사자는 그 은혜에 감사할 수 있으나, 이를 듣는 이들은 자칫 기적이라는 표적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기적만으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 당시 수많은 이적을 목격한 이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경이로운 표적 앞에서도 사람들은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오늘날의 그 어떤 은사 운동이나 기적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구원의 역사는 기적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인생에 침투하셔서 그의 환경과 영혼을 사로잡으셨다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 가운데 개입하셔서 자신을 알게 하신 것이지, 기적을 보았기에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제가 바다를 마르게 하는 기적을 행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사람들은 결코 예수께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기적을 행한 사람에게 열광하거나 사사로운 유익을 구하려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증을 통해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증명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을 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법론과 프로그램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중심성
오늘날 교회 안에는 수많은 목회적 방법론이 존재합니다. 한때는 제자 훈련이, 또 한동안은 열린 예배가 화두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셀 목회가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법론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으나,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방법대로만 하면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만약 특정한 방법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성령께서 역사하실 자리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과 지혜, 능력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설 자리를 잃고 소외되고 마실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수단과 방법에 속지 마십시오.
제자 훈련 과정에서 우리는 경건의 시간을 매우 강조합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상고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설교의 적용점이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사십시오’라는 권면으로 귀결되곤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대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30분 남짓한 설교를 듣는 것으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마땅히 주님의 말씀 앞으로 스스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시간을 갖더라도 그 결과가 ‘이제 되었다’는 자만으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며 주님이 필요하다’는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며, 그분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생명을 누리는 것이지 그 어떤 방법론도 이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시간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 시간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 ‘내가 경건의 시간을 가졌으니 그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믿게 될 때입니다. 경건의 시간이라는 행위 자체가 은혜를 주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루라도 큐티를 거르면 운전 중에 단속에 걸리지는 않을까 불안해하거나 하나님께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이미 큐티라는 행위 자체에 복이 있다고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경건의 시간이라는 형식 자체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거나 여러분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 분,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삽니다. 경건의 시간을 갖는 목적은 바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경건의 시간이라는 방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방법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되시다'라고 선언하며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경건의 본질입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는 복된 삶의 증거
우리가 매일 영위하는 삶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공급받아 내가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혹여 이를 오해하여 내일부터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아멘입니다”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입에 붙이고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매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기계적으로 덧붙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게 형식에 치우치다 보면, 디모데서가 경계하듯 거짓 경건에 익숙해져 겉모습은 거룩해 보일지 몰라도 속은 검게 타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그분의 십자가에 모든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주님의 온전한 순종이 있고, 그분이 걸어가신 생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여러분의 모든 시선을 집중하고, 그분이 여러분 인생의 진정한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엉뚱한 신앙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내가 열심히 믿으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내 앞길에 탄탄대로가 열리고, 하는 일마다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기복적인 삶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열심으로 무언가를 얻어내려 하지 마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삼아 그분의 살과 피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겪는 삶의 여정은 이제 더 이상 여러분만의 일이 아니며, 여러분은 자기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제 예수 외에 다른 것으로는 살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식의 소극적인 겸손에만 머물지 마십시오. 오히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위대한 일이 나 같은 비참한 자의 삶 속에서도 오늘도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며 그 신비에 놀라워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주님의 성소에 나아오고, 주의 살과 피를 먹으며 예배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죄를 깨닫고 “내가 또 잘못했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구나”라고 뉘우치며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던 자신을 회개하며 돌이키는 그 모든 과정 역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여러분 안에서 실재가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고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반응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 봉사에 온 힘과 정성을 다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중심성이 결여된 열심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빈 수레처럼 요란할 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산다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일과 그분의 인격이 내 삶의 핵심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나를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 눈에 보이는 말씀이자 유일한 복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찬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는다는 것은 앞서 나눈 모든 진리를 확증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성찬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과 그분의 생명이 이제 나에게 부어져 나의 영원한 기업이 되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기독교가 약속한 유일한 복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증하는 단 하나의 참된 복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허락된 전부와 다름없습니다. 성찬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신령하게 먹고 마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기 자신’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째로 주시는 이 경이로운 사건이 바로 성찬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제발 다른 복을 찾느라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고 여기며 헛된 곳으로 눈을 돌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늘 성찬을 받으실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여러분의 존재를 온전히 덮어버려 주님의 생명이 곧 여러분의 생명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생명이 여러분 안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여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이끌어 가고 있음을 깊이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고 있음을 여러분의 삶으로 증명해 내십시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실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이 진리를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일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심이 증거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인생 전체가 오직 하나님 앞에만 온전히 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저희의 부족함을 다시 한번 정직하게 고백하오니, 그 부족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또한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서 진정으로 우리가 주님을 누리고, 주님이 이루신 일들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힘이 되기를 원하며, 그 주님이 우리의 참된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셨음에도 끝까지 참으신 것처럼, 그 인내가 우리의 인내가 되게 하소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이 우리의 겸손과 사랑이 되기를 원하오며, 주님의 성품이 우리의 손과 발, 입술과 눈을 통하여 온전히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 이제 우리가 성찬을 받습니다. 오 주여,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요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8-십자가를 지신 어린양 (3) | 2026.02.16 |
|---|---|
| 요한복음-7-예수만 드러나는 인생 (1) | 2026.02.15 |
| 요한복음-5-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 | 2026.02.11 |
| 요한복음 4 – 참 빛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 (1) | 2026.02.10 |
| 요한복음-3-눈뜬 성도, 빛을 증거하다 (0) | 2026.01.2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