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9절로 부터 13절 까지 입니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멘.
참 빛을 알지 못하는 세상과 유대인의 착각
지난 시간에 우리는 “빛이 왔으되 세상이 알지 못하더라”라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심지어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조차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빛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세례 요한의 증거는, 그 자체로 분명한 증거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너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거한 셈이 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살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다 보니,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빛이 왔는데도 보지 못하다니, 대체 그런 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눈은 집에다 두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은가.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눈이나 다름없으니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정작 자기 자신은 본문 12절로 너무나 쉽게 넘어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영접할 수 있다는 우리의 오해와 성경의 증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며 ‘봐라, 영접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영접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영접하는 자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접하지 않는 저 김정일 같은 원수도 있으나, 반면에 영접하는 사람도 있으니 우리도 영접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아주 깊이 숨겨진 우리의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스스로 영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영접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선택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우리끼리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요한복음의 전체 내용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8장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여러분이 너무나 좋아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이 약속 말입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맞습니다, 진리를 주십시오. 내가 그 진리를 배워서 자유해지겠습니다”라고 반응할 것 같은데, 인간의 본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경임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이어지는 3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눈을 뜨게 해주겠다”고 하시니, 정작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가 언제 못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능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볼 테니까”라고 응수하는 격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여기뿐만이 아닙니다. 한 장을 넘겨 9장 39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본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소경 아닌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셔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다르며 충분히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며 바로 이 지점을 준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12절에 대한 결론을 13절에서 이와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누리는 영접의 기적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습니다. 즉, 12절에 등장하는 ‘영접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스스로 영접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영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하면 당신은 믿을 수 있습니다”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라는 선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것을 억지로 믿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정교한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조직을 잘 갖추어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저 종교는 참 훌륭하구나’라며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요한의 시각은 정반대입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 믿어지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듣고 “예, 믿겠습니다”라고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상식 밖의 놀라운 일이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신기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전하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접이란 도저히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만 비로소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해가 서쪽에서 뜰 수는 있습니다. 혹 기차가 모래사장을 달릴 수도 있고, 매주 사는 복권이 일 년 내내 1등에 당첨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안 됩니다. 그런 기적 같은 일들이 다 일어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만은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 있는 사람에게 임한 불가항력적인 은혜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닌데, 분명 영접했다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고 여러분이 만약 “네, 제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집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고백합니다”라고 말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가 막힌 기적을 통과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일컬어 ‘복 있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시편 1편에 나타난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는 시냇가에 ‘옮겨 심긴’ 나무입니다. 옮겨 심긴 나무라니요, 나무가 어떻게 스스로 자리를 옮겨 심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옮겨 심으신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적을 통과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통해 불치병을 낫게 할 수도 있고, 태평양을 건너 서울에 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산을 명하여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일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혹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만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구원
구원은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주십시오”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했으니 이제부터는 당연히 이래야 합니다”라는 식의 조건이 붙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제 제가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부터는 만사형통을 내놓으십시오. 주님, 제가 영접했으니 저에게는 무조건적인 표적과 축복을 당연히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를 믿었다”라는 사실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과 다름없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이지요.
여러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구절을 참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 다 잘될 거야. 하나님이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만약 그런 막연한 기대 때문에 이 구절을 좋아하신다면, 여러분과 저는 지금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다리를 벅벅 긁으면서 시원하다고 말하는 꼴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그토록 절규하듯이 이 말씀을 외쳤는지, 왜 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 혈통이나 육정, 혹은 사람의 뜻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났기 때문입니다.
혈통과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
로마서 8장 28절을 한번 찾아봅시다. 신약 성경 250페이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혈통이나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뜻으로 났다는 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말씀은 “이는 혈통으로나...”라고 시작합니다. 혈통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아무리 집안이 좋아도 그 집안 내력을 일단 접어두라는 뜻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목사입니다, 장로입니다, 우리 집안은 5대째 기독교 집안입니다”라는 자랑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라는 자부심도 접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집안이 20대째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괜찮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집안이 하나님의 복으로 철갑 무장을 했다는 뜻도 절대 아닙니다.
세상의 가르침과 다른 복음의 본질
그러한 의미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가계에 흐르는 복”이니 하는 말들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표현들입니다. 여러분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이 여러분의 죄보다 크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해결하신 분 안에 있는데, 가계의 저주 따위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여러분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옥 심판의 저주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계에 흐르는 운명 같은 것 때문에 왜 두려워하십니까? 그것은 기독교라기보다 무당의 푸닥거리에 가까운 생각입니다. “조상의 죄가 있으니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니 조상의 죄를 위해 기도하자”라는 것이 어떻게 성경의 가르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다음은 “육정으로 난”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육체, 즉 우리의 본성과 경향으로 났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감정 같은 것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소위 말하는 종교적인 체험이나 감동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깨달음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깨달음의 영역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을 때 깨달아지는 것이지,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순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신념으로 도달할 수 없는 자녀의 권세
세 번째로 요한은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결국 우리의 의지나 결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우리의 의지와 결심이 통할 때가 많습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반드시 이루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역경을 딛고 학위를 취득하거나 자수성가하여 기업을 일구고, 정계에 진출해 귀감이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어린 시절부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결단하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강한 의지로 쓰러져가는 회사를 일으키기도 하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기도 합니다.
역사적 신념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 강한 신념과 의지, 결단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세 가지 경우, 즉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들은 인간 세상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대단한 것들입니다. 혈통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자기 집안이 자랑스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저 역시 족보가 있었다면 이럴 때 자랑을 좀 했을 텐데, 피난 나온 집안이라 뿌리를 잘 몰라 그러지 못할 뿐입니다. 집안이 화려하다면 왜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또한 육정, 즉 타고난 지능과 신체를 왜 자랑하지 못하겠습니까? IQ가 높고 머리가 좋아서 한번 본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은 참으로 부러운 일입니다. 의지력이 강해서 결심한 바를 반드시 이루어내는 성품 또한 얼마나 훌륭합니까?
솔직히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요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물론 히틀러처럼 강한 의지로 악한 영향력을 끼친 경우도 있지만, 한 개인의 결단이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적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의 한 귀퉁이를 이끌어갈 만큼 강력한 의지와 신념, 화려한 혈통과 뛰어난 육체라 할지라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심과 예정된 십자가의 뜻
그런데 만약 말이에요, 여러분에게 그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면, 곧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게 되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그 무엇으로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오직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난 것이구나’ 하는 결론 말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했던 그 일이 내게 일어났기에, 우리는 비로소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마음대로 처리하셨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냥 되어버렸다는 식의 단순한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훨씬 더 깊고 풍성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되었다”라는 의미는 복음서 곳곳에 나타나 있는데, 마가복음 14장 3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 언급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그저 기분에 따라 임의로 행하시는 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창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하겠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아무런 계획 없이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여러분을 다루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분이 좋아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제외하는 식으로 행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3장 11절이 증언하듯,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다는 것은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결심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열심대로 행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나선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인의 후손을 통해 “내가 너희를 건져내리라, 내 사랑을 너희에게 보이겠다”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매듭지으시는 바로 그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며, 그 뜻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파노라마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구원하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열심을 내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인 되었을 때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증해 주신 그 사랑의 열심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뜨거운 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데, 어찌 그 선한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진실이라면, 이제 그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열심을 그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비로소 크게 뜨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중한 구원의 파노라마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며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여러분의 시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의 기쁨이었던 자녀 됨의 은혜
우리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잘 압니다.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와는 참으로 다른 차원의 경험을 했지요. 바울 같은 지성적인 인물이 자신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이 낫는 기적을 보았을 때 얼마나 경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 서신 그 어디에서도, 그들이 자신이 행한 기적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들을 자녀의 자리에 앉혀주신 사실 그 자체를 최대의 만족으로 삼았고, 이를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우리와는 다른 천성적인 강함이나 특별한 의지를 가졌기에 마지막까지 달려갈 길을 마치고 온몸을 제물로 드리듯 충성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대단한 위인이었기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라 보십니까?
약한 자를 붙드시는 그리스도 안의 기적
여러분, 디모데전후서와 고린도전후서를 보십시오.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 고린도후서에 어떤 고백이 나오는지 보십시오. 그는 "내가 마음에 너무너무 근심한다"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쓴 편지 때문에 혹여 성도들의 마음이 상했을까 봐, 그 글로 인하여 그들이 아파했을까 봐 몹시 걱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서야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너희가 바로 섰구나"라고 안도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소심하고 세심한 사람인지 보이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니 그것으로 끝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보낸 편지 때문에 노심초사 근심할 정도로 유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역동적으로 일을 추진하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라고 하면 그저 갇혀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런 바울을 끝까지 붙잡고 흔들리지 않게 했을까요? 그가 직접 체험했던 수많은 기적입니까? 아니면 남보다 특별한 은혜를 받아 정신이 늘 맑게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사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의 인생에 최대의 만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기적을 잊어버린 우리의 비극
여러분, 우리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작 이 본질적인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뒤에 내가 누릴 축복에만 마음이 가 있지, 예수를 믿게 된 사건 자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기적인지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었는데도 병이 낫지 않으면 하나님께 왜 고쳐주지 않느냐고 따지고, 사업이 예전만 못하면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며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을 원망하듯 쳐다봅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일어난 기적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이 진정 누구이신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명절에 세배를 하고 나면 모두 세뱃돈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가끔 아주 훌륭한 어른을 만나면 동전 대신 지폐를 주시곤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으면 그게 얼마나 큰 가치인지 잘 계산이 서지 않습니다. 미국에 오신 지 오래되셨으니 아시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큰 돈이었습니다. 그저 종이돈을 받았다는 기쁨에 들떠서 "1, 2, 3, 4, 5" 세어보고 뒤에 붙은 동그라미 세 개를 보며 "와, 좋다!"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반드시 가는 길에 그 돈을 가로채기 위한 '거래'를 제안하셨습니다.
가치를 몰라 세상 복과 바꾸는 어리석음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꺼내 보여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이 동전을 봐라. 반짝반짝하고 예쁘지 않니? 이걸로 네가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으렴." 당시 풍선껌이 5원이었으니 200원이면 참 많은 것을 살 수 있는 돈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유혹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 동그라미 수를 비교해 보렴. 내 손엔 동그라미가 4개나 있고 네 건 3개뿐이지? 봐라, 이게 훨씬 더 많은 거야." 그쯤 되면 어린 마음은 여지없이 넘어갑니다. 동그라미가 네 개니 더 좋다고 생각하며 그 귀한 5천 원짜리 지폐를 기분 좋게 어머니께 바칩니다. 사실상 상납하는 셈인데도 그저 좋다고 웃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5천 원짜리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모르니 너무 쉽게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가치인지 모르기에, 우리는 자꾸만 그것을 다른 것과 바꾸려 합니다. 알록달록한 세상의 복으로, 반짝거리는 성공으로, 혹은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편안하게 사는 삶으로 그 귀한 복음을 치환해 버립니다. 내 마음의 작은 평안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복음의 거대한 능력을 너무나 쉽게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만 해결해 주신다면 제가 무엇이든 할게요"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가치의 전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복음의 능력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일과 예수의 이름으로 된 일이 아니라면, 결국은 모두 무너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시에 놀라운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일이라면, 그 어떤 세력도 절대로 그것을 흔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임하셔서, "그렇구나, 예수가 바로 그런 분이셨구나. 나는 내 힘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구나"라는 진실한 고백을 주셨다면, 세상 그 무엇도 여러분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내 손으로 직접 쥐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생활 속에서 인과관계가 명확히 파악될 때 비로소 만족과 안정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옷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황합니다. "이게 언제 들어온 돈이지?" 하고 원인을 찾으려 애씁니다. 만약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 "아내가 나를 시험하려고 넣었나? 아니면 꼭 써야 할 돈인데 잊고 있었나?" 싶어 조심스러워하며 마음 편히 쓰지 못합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에 집착하는 습관은 우리의 기쁨과 모든 결정을 좌우할 만큼 강력하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원인을 찾는 본성과 은혜의 충돌
이처럼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손에 쥐고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그 본성 때문에 가끔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혜’라는 말은 ‘공짜’라는 의미와 상통하기에 공짜라는 말 자체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공짜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공짜가 “당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선언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자신 안에 그 원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인을 찾지 못하면 그때부터 불안해집니다. 사람은 무언가 근거가 될 만한 원인을 스스로 갖고 있어야만 안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난 그래도 운이 좋아서 이렇게 된 거야”라는 말이라도 해야 마음이 풀리는 것이지요. 우리 세대는 이른바 ‘뺑뺑이 제도’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배정받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들이 모여 이야기할 때면 꼭 다르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애는 뺑뺑이를 돌렸는데도 역시 실력이 있어서 그런지 경복이나 경기에 갔어.” 이런 식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싶어 합니다. “우리 애는 뭔가 다릅니다. 나는 그래도 운이라도 따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숨겨진 마음입니다.
내 이해의 틀을 벗어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온전히 고백하기보다는, “내가 믿었다. 내가 결단했다”라는 말을 더 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전적으로 엎드리기보다는, 내가 믿었다는 그 원인을 내 소유로 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기보다, 내가 이해하기 편한 방식대로 성경을 재구성하고 싶어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이나, 우리 모두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다음 단계를 이야기하면 또 싫어합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당신이 가진 그 불완전함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무조건 하나님께 와서 의지하십시오”라고 권하면 그것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내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말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불완전하기에 오히려 의지하지 못하는 모순 속에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 중에 자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들 잘 모른다고 답합니다. 그 내면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런데도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 말씀대로 성취될 것이니 들어보라”고 권하면, “다음 기회에 듣겠다”고 회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진지한 직면과 간구
사랑하는 여러분, 제발 여러분 자신을 진지하게 직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내가 볼 수 없음을 인정하십시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일임을 깨닫고, 그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나 여러분의 문제와 삶을 함께 나누실 수 있는 인격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제발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진지하게 마주 서시는 분이시기에, 여러분이 진지하게 문제를 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 역시 진지하게 여러분을 대우해 주십니다. 그분께 의지하고자 하는 자를 이제껏 단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제발 기억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예수가 그렇게 좋다는데 나는 왜 잘 모르겠는가”라며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다면, 대체 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저토록 기뻐하며 찬송하고 눈물을 흘리는지, 왜 그들이 예수라는 분에게 매료되어 그분을 따르는지, 왜 한 목사는 매 주일 이 강단에 서서 목청껏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신다면, 이제는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인간의 한계를 넘어 기적을 붙드는 믿음
그분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의지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명석함이 얼마나 뛰어난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혜와 의지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인류 역사상의 수많은 철학자와 현자들이 이미 해답을 내놓았을 것이고, 인류는 지금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의 역사를 보아도 인간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인류가 해내지 못한 일을 여러분의 머리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교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말씀하십시오. “주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제 이 질문을 받아주십시오. 당신을 의지하고 싶습니다. 내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도 깨달았고,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자녀 됨의 기적을 누리는 성도의 삶
그리고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소유한 것이 얼마나 엄청난 가치인지를 제발 깨달으십시오. 결코 다른 것과 바꾸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이로운 기적이 일어났는지를 늘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믿게 되었으니 마땅히 납득하고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인생이 우리와 다른 특별한 건강 비결이 있어서 그토록 역동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고백하고 있는 바로 그 사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그 본질적인 기적 때문에 그 역시 인생의 마지막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동일한 믿음이 여러분 안에도 있음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빛을 알아보지 못하던 저희를 하나님의 뜻과 열심으로 먼저 찾아와 자녀 삼아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이 거대한 기적을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이 구원의 가치를 세상의 작은 복이나 성공과 바꾸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만을 평생의 최대 만족으로 삼으며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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