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1 18절에서 28 까지 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묻되 네가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섰으니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요단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아멘.

 

빛과 어두움의 세계관

요한복음의 서두를 장식하는 장면들에는 주로 ‘태초에’, 그리고 ‘빛과 어둠’과 같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사도 요한은 세상을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창세기를 기억하신다면, 창조의 때에 ‘흑암’과 ‘혼돈’이 있었다는 기록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도 어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란 과연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바로 어둠 가운데서 부름을 받아 이제 빛의 자녀가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운데 거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자 평안이며 즐거움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다니다 보면 어둠과 치열하게 싸우고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가운데 살기보다는, 오히려 어둠 속에서 조금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예배당을 찾는 모습이 우리에게 가끔 나타나곤 합니다.

 

어둠도 포기하지 못한 그저 가끔 그곳에 비치는 빛을 보는 것에 만족하며, 어둠 속에 머물면서도 어떻게 하면 안에서 있을지 방법을 찾기 위해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이 어디에 속한 자이며, 그에 속한 자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소중한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찾아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질문에 답하는 요한의 태도는 우리가 보기에도 다소 삐딱해 보입니다. 성경 기자가 도대체 무엇을 의도했기에 이렇게 기록했나 싶을 정도로 요한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묻는 이들은 그에게 “네가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아니면 선지자냐?”라고 묻지만, 요한은 시종일관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라며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을 부정하는 이유

다른 사안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니며 모세가 예언했던 선지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압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복음서를 통해 세례 요한을 가리켜 직접 엘리야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 13절에서 1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엘리야가 사람이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조금 완곡하게 표현하여 ‘내가 바로 엘리야다’라고 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사도 요한에게는 복음서를 기록해 나가는 특유의 논조가 있습니다. 서두는 ‘나는 아니다’라는 부정의 표현을 통해 강조하려는 바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그러한 논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서 그보다 깊숙한 이야기를 전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한쪽에서는 맞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니다라고 했으니, 이는 표면적으로 분명 서로 상충되는 모습입니다. 성경을 읽을 유념해야 중요한 원리 하나는, 성경의 저자들이 지능이 낮거나 부주의하여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기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신약 성경만 하더라도 우리가 적어도 2 동안 간직해 책입니다. 세월 동안 이처럼 상반되는 기록이 있었다면, 후대의 사람들이 이를 발견하고 벌써 삭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기록이 그대로 보존된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것이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확히 상충하는 이야기가 책에 적혀 있을 , 여러분은 그것이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은 단순히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당사자들과 질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어둠과 빛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여기서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인이 속해 있는 세계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하나는 어둠이며 다른 하나는 빛입니다. 물론 어둠에 속한 사람들 중에 스스로 어둠에 속했다고 말하거나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세계관과 언어 안에 갇혀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이 아이들과 대화할 느끼듯, 아이들의 언어와 어른들의 언어는 엄연히 다릅니다. 아이가 매우 심각하게 여기는 일이 어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부모가 매달 감당해야 지불금(Payment)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덟 아이가 앉아서 “어머니, 다음 결제 대금은 준비되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이처럼 세대마다 사용하는 언어와 관심사가 다르듯, 어둠의 사람들은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결국 “당신들이 말하고 있는 방식의 엘리야는 내가 아닙니다”라는 선언인 셈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세례 요한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록을 보아도 이처럼 답변하시는 모습을 자주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찾아와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오실 그분입니까?”라고 물을 , 예수님께서 “그래, 바로 나다. 그러니 나를 따르라”고 시원하게 대답해주시면 좋으련만,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말하려 하면, 오히려 “어디 가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계하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가 아니기에 회피하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과 능력,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메시아로 진실하게 고백한 이들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는 압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리시는 방법은 “내 양은 음성을 듣는다”는 원리이지, 단순히 “내가 메시아니까 따라와라”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정통성과 그들의 어두움

그러한 결판이 나는 곳은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설교를 듣는 자리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좋은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며 돌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진정 하나님의 양인지 아닌지를 결판내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다들 눈에 생기가 도는 같습니다. 그럼 과연 오늘 우리가 진정한 결판을 있을지 함께 살펴봅시다. 먼저 유대인들을 봅시다. 이들이 어둠에 속한 자처럼 취급받았으며,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답했을까요? 질문을 던진 바리새인이나 레위인, 제사장들은 한마디로 구약 신앙에 있어서는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이나 저보다 훨씬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네가 엘리야가 아니냐”라고 묻는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인 말라기 4 4절에서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한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것은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 400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땅에 강림하시기 전에 분명히 엘리야를 먼저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엘리야가 다시 와서 하는 일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유대의 성경학자들이 구절을 놓쳤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오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 정확하게 해석했습니다. 얼마나 정당하고 올바른 해석입니까? 그런데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라고 외치며 죄를 사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요한이야말로 예언된 엘리야임이 분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가 바로 요한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는데,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마태복음 3 1절을 통해 확인해 봅시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때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사방에서 그에게 나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7절의 기록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회개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요한은 매우 무서운 독설을 내뱉습니다. 여러분, 이들을 단순히 괴물처럼 생각해서는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혹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셨다고 해서, 그들을 달린 괴물처럼 여겨서는 된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 교수나 사회 지도층과 같이 지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능통했고, 요한을 찾아온 이유 역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갈합니다. 이유는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세례의 자리에 나왔으나, 속으로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자신이 아브라함의 혈통이기에 괜찮은 의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그들을 향해 입술의 자복은 있으나 삶의 변화라는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누가복음 18장에 나타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기 묘사된 바리새인의 행위를 보고 그를 단지 교만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한다면, 우리 역시 그와 다를 없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바리새인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주일에 금식하는 , 말로는 쉬워 보여도 막상 실천하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존경받아 마땅할 만큼 소득의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렸고, 남의 것을 탐하거나 불의를 행하지도, 간음을 저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의를 위한 도구로서의 율법

그렇기에 바리새인은 진심으로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간음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모습이 얼마나 거룩해 보입니까? 그런데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해답은 앞서 읽은 9 말씀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자손이며, 선택받은 백성이고, 그러므로 의롭다’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물론이고 예수님께서도 바로 지점에서 눈에 불을 켜고 엄히 꾸짖으십니다. 다른 이들을 만나실 때는 온유하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만 마주하면 유독 말씀이 거칠어지셨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성경 말씀대로 모든 율법을 행하며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읽고 행한다고 해서, 행위 자체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만 따로 떼어 오해하시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저는 금방 이단 목사가 되고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자체가 나쁜 일일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문제는 바리새인의 경우처럼, 그리고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있는 어떤 ‘태도’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철저히 순종하는 같은데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있습니다. 이유는 일을 행하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과연 어떠한 근거와 중심을 가지고 행동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으려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 올린 ‘의’의 목록에 ‘회개’와 ‘세례’라는 종목을 하나 추가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는 회개까지 마친 사람이다’, ‘나는 이제 세례까지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모든 율법과 계명을 자기를 완성시키는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명하신 일들을 자신의 완성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비록 외적으로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오직 자기 완성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했기에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는 아니고, 오히려 세리가 의인이다”라고 말입니다. 사도 요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어둠 속에 거하면서 어둠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있을지 방법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식으로 표현한다면,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없습니다. 내가 돋보이기 위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실상은 내가 드러나기 위해 하나님이 높아지셔야 하고, 내가 세워지기 위해 하나님은 전능하셔야 하며, 내가 잘살기 위해 하나님은 힘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가 원하는 일을 주셔야만 하는 하나님, 결국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단지 어둠 속에서 길을 비춰 전등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비춰 주는 작은 불빛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단언합니다. 그런 방식의 엘리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당신들이 기대하는 그런 식의 엘리야는 내가 아니다”라는 대답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보여 주고자 하는 참된 엘리야는 과연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이 보낸 자들이 다시 질문하자, 요한은 다른 설명 대신 이사야 40 3절에서 5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 창조의 구조

말씀은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입니다. 이사야 40 3절에서 5절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씀은 분명하게 주의 길을 예비한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라기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다고 이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은 말씀을 인용하며 자신이 바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목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 25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했을 바리새인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지금 그들은 요한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그들이 보낸 자들은 요한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내가 바로 엘리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다”라고 답했으나, 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엘리야가 아니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세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나 엘리야 같은 권위 있는 자가 베푸는 세례를 받아, 자신들이 세례를 근거 삼아 하나님의 율법을 더욱 철저히 지키며 보다 의로운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속내였으나, 요한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한마디로 응수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푼다.

 

이는 얼핏 보기에 매우 뜬금없는 대답처럼 들릴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네가 그리스도의 권위가 없다면 세례를 주느냐, 우리는 권위 있는 세례를 통해 우리 자신을 더욱 의롭게 완성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요한은 돌연 “나는 단지 물로 세례를 뿐이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요한이 말한 ‘물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요한복음 1 19절부터 51절까지의 구조를 잠시 주목해 보십시오. 요한복음의 서두는 창세기의 서사와 마찬가지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창조의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의 구조는 단순히 선언에 그치지 않고 19절부터 51절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이튿날에”, “이튿날에”라는 표현이 반복되며 날짜가 지적되고 있음을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전개 방식입니다. 특히 가나의 혼인 잔치가 일어난 날을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정확히 표현함으로써, 사건들이 연속된 7일간의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창조가 6 만에 완성되고 7일째에 안식하셨던 것처럼, 가나의 혼인 잔치는 창조가 완성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 그리고 우리 구원의 진정한 목표가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의도입니다. 첫째 날에는 조금 우리가 읽은 것처럼 물세례에 대해 언급하고, 둘째 날에는 ‘어린 양’에 대해 이야기하며 성령 세례를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셋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는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6일째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거쳐 마침내 7일째에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창세기의 6 창조와 7 안식이라는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구조 안에 담긴 ‘세례’, ‘어린 양’, ‘하나님의 백성’과 같은 단어들이 창세기가 아닌 출애굽기의 핵심 단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손에 쥐고, 이를 같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와 주의 길을 예비함

그러므로 지금 세례 요한이 언급하는 세례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창조를 선포하는 거룩한 상징이 됩니다. 이를 출애굽의 관점에서 풀이하자면 바로 홍해를 건너는 사건과 같습니다. 요한은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의를 더하고, 더욱 온전한 의를 소유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내가 보여줄 있는 것은 당신들이 홍해에 수장되는 것뿐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홍해의 기적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안에는 참으로 심오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으나, 시간 관계상 핵심만을 짚어보겠습니다. 홍해라는 위대한 기적을 배경으로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며 홍해의 사건을 재현하지만, 이제 그보다 본질적이고 참된 세례가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뒤에 오실 분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다”라는 선언입니다. 홍해를 건넜던 수많은 이는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고도 결국 광야에서 쓰러져 갔지만, 이제 성령의 세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와 함께하시며 결코 쇠하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세례가 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엄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 달라, 세례를 하나 달라,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여 의를 더욱 견고히 세우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사실상 “홍해로 들어가 죽으라”고 일갈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결코 살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표현합니다. “내가 이곳에 이유는 굽은 길을 곧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베푸는 물세례가 단지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합니다. 홍해의 기적조차, 그리고 홍해에 자아를 장사 지내라는 준엄한 선포조차 실체가 아닌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참된 세례, 성령으로 말미암는 본질적인 변화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한은 참된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굽은 길을 펴는 ‘대로 공사’를 하러 왔다고 설명합니다.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을 깎아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은 누구를 위한 길입니까? 바로 주님의 길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친히 오실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가운데 가로막힌 산과 골짜기를 모두 제거하여 주님이 임하실 통로를 내는 , 그것이 바로 요한이 보냄을 받은 목적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다니시는 평탄한 인생의

요한의 선포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정작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예비한다는 ‘그 길’이 무엇인지에만 몰두했습니다. 만약 길이 열린다면 위에 금을 입히고, 빌딩을 세우고, 가게를 열어 어떻게 하면 먹고 것인가를 궁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 은으로 화려하게 덮느냐, 누가 금으로 치장하느냐는 식의 세속적인 관심으로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멋진 길을 닦아 자신들의 위세를 떨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사야 40 5절을 통해 길의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길이 닦인 이유는 자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앞에 놓인 모든 문제와 고통, 곤고함과 아픔의 산들이 깎여 나가고 깊은 골짜기가 메워진 것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온전히 예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길에 금칠을 하여 자신들의 영광을 드러내려 했지만, 세례 요한은 길이 오직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 위해 허락된 통로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를 우리 삶에 비추어 본다면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하실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시대와는 조금 다른 시점에 있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구약의 선지자로 길을 예비하러 왔지만, 우리는 이미 길이 뚫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길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골짜기를 이미 메우셨고, 가로막고 있던 높은 산들을 깎아 평지로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인생 앞에 놓인 커다란 산을 보며 “하나님, 산을 치워 주셔서 제가 길을 평탄하게 가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게 모든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겪으심으로써 길을 평탄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평탄한 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눈앞에 여전히 산이 보이고 빠져나오기 힘든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영적인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은 이미 주님에 의해 메워졌고 산은 낮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성경의 선언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만지고 경험하는 고통이 전부라면, 우리가 굳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같은 고난 속에서 여러분을 이미 건지셨고, 길을 평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눈앞의 형편에 흔들리거나 속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모든 구덩이를 메우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길이 평탄해졌다는 사실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 방향입니다.

 

인생의 골짜기가 메워지고 길이 멋지게 닦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다시 시험에 듭니다. 평탄해진 길에 금을 입히고 빌딩을 세우며, “이제 하나님이 길을 닦아 주셨으니 세상에서 멋지게 한번 살아보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을 내신 목적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길은 오직 ‘예수만 다니시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평탄하게 하신 하나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자유롭게 통행하시며 오직 그분만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로만 길을 채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평탄하게 하셨다는 약속은 우리에게 가장 위로가 됩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의 여정에 골짜기와 산이 많겠지만, 주님께서 이미 평탄케 하셨다는 믿음이 있기에 감사할 있습니다. 그러나 평탄한 위에 인간적인 욕망의 금칠을 하고 사람들을 모아 영광을 취하려 한다면, 그것은 목회로서는 망하는 길이요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위로 오직 예수만 다니시게 하고, 평탄함을 통해 오직 예수만 나타나게 하십시오. 앞에 놓인 때문에 두려워 떨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이미 산을 처리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갈 비로소 예수가 드러납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바로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인생의 깊은 골짜기와 험한 산을 예수가 지나가시게 하는 , 그때 비로소 우리는 가운데 행하는 성도가 됩니다. 내가 잘난 것이 증명되는 인생이 아니라, 못난 인생을 뚫고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산이 깎였을 평탄함을 즐기는 그치지 않고, “주님, 보잘것없는 인생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을 사십시오. 기가 막힌 웅덩이에 빠졌을 때조차 웅덩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나타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만이 진정한 위로가 되시며, 그분만이 우리의 메시아이심을 삶으로 증명하십시오. 바리새인의 어리석은 감언이설에 속아 인생의 길에 헛된 것들을 갖다 붙이려 하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드러내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 앞에 놓인 험한 산과 깊은 골짜기가 우리를 두렵게 때마다, 이미 모든 길을 평탄하게 닦으시고 친히 우리 삶의 대로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닦인 위에서 자신의 영광을 쌓으려던 바리새인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우리 삶의 위로 주님만이 통행하시며 주님의 영광만이 온전히 드러나는 빛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고난 속에서도 평탄케 하신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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