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5절 까지 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아멘.

요한복음 강해를 위한 제언과 권장 도서
우리는 하박국 강해를 마친 뒤 이제 신약의 지평으로 넘어와 요한복음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깊은 세계를 탐구함에 있어 성도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 영적 사유를 넓혀줄 몇 가지 문헌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권하는 책은 박영선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입니다. 전 5권으로 기억되는 이 강해집은 본 강의의 흐름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나, 본문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큰 통찰을 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의』입니다. 전 4권의 방대한 분량이 자칫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본문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며 곁들여 읽기에 더없이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영어권 문화에 친숙하거나 원서 독해가 가능하신 분들을 위해 한 가지 제언을 덧붙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석이나 설교집 중 제임스 보이스 목사와 유사한 강해의 결을 지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저작을 참고하시되, 독특하게도 『요한복음』이 아닌 『로마서 강해』를 권해 드립니다. 이는 로마서와 요한복음 사이에 흐르는 신학적 맥락이 매우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국어 번역본만으로도 이미 11권에 달하며 앞으로의 분량 또한 상당하겠으나, 로마서를 통해 다져진 신학적 토대는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데 견고한 기초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 문헌들을 곁에 두고 묵상하신다면, 선포되는 말씀을 깊이 있게 소화하는 데 큰 유익을 누리시리라 확신합니다.
 
친숙한 언어 뒤에 감추어진 요한복음의 깊이
요한복음은 성경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나  초신자들에게 가장 먼저 권해지는 책입니다. 그만큼 읽는 즉시 심령에 깊이 소생을 주는 구절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로 시작되는 영생의 약속이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시는 주님의 절절한 위로가 모두 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얼굴로 다가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신약의 다른 성경들과 비교할 때 가장 평이한 수준의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절제된 어휘와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여, 깊은 학문적 소양이 없는 이들조차 복음의 진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학적 평이함은 결코 진리의 가벼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주석들이 단권에 그치지 않고 서너 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출간되는 이유는, 그 간결한 문장 아래 갈무리된 진리의 깊이가 실로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라는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풍성한 열매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감동에 젖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포도나무'가 내포한 성경적 상징과 '가지가 붙어 있다'는 표현이 구약의 맥락에서 갖는 함의를 치밀하게 추적해 나간다면, 우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학적 층위와 마주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또한 이러한 지점에 머물러야 합니다. 평이함 속에 감추어진 측량할 수 없는 신비, 그 심연을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로고스: 헬라 철학의 개념을 빌려온 요한의 의도
오늘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장엄한 선포로 시작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하는 데 있어 지극히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요한복음은 사복음서 중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즉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장 선명하고 강력하게 변증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라 칭합니다.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수많은 표현 중 요한은 왜 하필 헬라어로 ‘로고스(logos)’라는, 당대 학문적·문화적 배경이 집약된 독특한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여기에는 요한의 치밀하고도 전략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당시 헬라적 사고 체계 속에 머물던 이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접촉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헬라는 주지하다시피 철학의 산실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은 당대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학창 시절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암기하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이처럼 철학적 사유가 고도로 발달한 헬라 문화권에서 ‘로고스’는 매우 특별하고도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근동과 로마를 아우르던 헬라적 세계관의 핵심은 ‘변화’에 대한 고찰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면 세상은 결국 통제 불능의 혼돈 상태에 빠지지 않겠는가?” 그들은 가시적인 무질서와 변화 이면에 우주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 합리적으로 운행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근본 원리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바로 ‘로고스’라 명명했습니다. 따라서 헬라인들이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라는 선언을 접했을 때, 그들은 우주의 질서를 구축하고 운행하는 그 거대한 지성적 원리가 곧 이 ‘말씀’임을 직관적으로 인지했을 것입니다.
 
성육신: 철학적 한계를 넘어선 파격적인 선포
요한이 헬라 철학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일종의 ‘거룩한 변증적 접촉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로고스’라는 익숙한 개념을 제시하여 헬라인들의 관심을 끈 뒤, 그 개념을 징검다리 삼아 성경이 계시하는 본질적인 진리로 그들을 인도합니다. 만약 요한이 로고스를 관념적 질서나 이성적 원리에 가두어 두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생동하는 실재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인류 역사를 뒤흔드는 파격적인 선언으로 나아갑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날 우리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위로의 메시지로 담담히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헬라적 사유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 이 선언은 그들의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숭고하고 거룩한 로고스가 비천하고 유한한 육신을 입을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에게 이 현상 세계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의 이데아 세계만이 참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으며, 가시적인 현실은 덧없는 허상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 안에서 영혼은 불변하는 본질인 반면, 육신은 영혼을 가두는 껍데기나 감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갈망한 구원이란 육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영적인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그들의 철학적 금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로고스가 스스로 육신을 입고 역사라는 구체적인 시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헬라 철학의 한계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가히 혁명적인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새로운 창세기: 구약의 창조를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선언은 헬라 철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격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신비로운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로고스’라는 언어를 빌려왔을 뿐, 그가 전하고자 한 ‘말씀’의 본질적 뿌리는 철학이 아닌 구약 성경의 비옥한 토양에 맞닿아 있습니다. 본문의 도입부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즉각적으로 연상시킵니다. 이는 성경의 첫 페이지를 여는 장엄한 선포를 의도적으로 병치한 것으로, 독자로 하여금 태고의 창조 사건을 복기하게 만듭니다.
 
사도 요한이 창세기의 형식을 차용한 의도는 명확합니다. 그는 인류의 시작을 알렸던 첫 번째 ‘태초’와, 그리스도를 통해 전개되는 새로운 ‘태초’를 대비시키고자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창세기’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창조 기사가 만물의 물리적 기원을 다룬다면, 요한은 이제 그 창조를 완성하고 변혁시키는 재창조의 역사가 엄숙히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구원 역사를 관통하는 실로 경이로운 영적 통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역동적인 행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신적 발화는 지체 없이 현상이 되었고,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은 곧 실재하는 빛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언어는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이나, 하나님에게 말씀은 곧 창조의 ‘능력’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이 곧 인격임을 계시합니다. 구약에서 말씀이 창조의 도구였다면, 신약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내가 곧 말씀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계시는 명료한 진리를 가리킵니다. 창세기에서 빛을 존재하게 하셨던 분이 이제는 친히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만물에 생명력을 부여하셨던 분이 “내가 곧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요한은 에덴의 창조보다 훨씬 위대하고 근원적인 재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즉, 첫 창조를 압도하는 찬란한 재창조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 가운데 도래했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빛: 하나님의 광명 안에서 보는 참된 생명
이 신비의 층위를 더 깊이 고찰하기 위해 창세기 1장 3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서문을 여는 이 구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선포된 ‘빛’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태양빛이나 달빛, 혹은 성쇄하는 별빛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의 연대기적 구성을 살필 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라는 광명체는 창조 넷째 날인 14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첫째 날의 빛은 우리가 아는 천체적 현상과는 궤를 달리하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빛입니다.
 
우리는 태양빛의 근원이 태양임을 자명하게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서막에서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그 빛의 시원은 어디입니까? 이 빛은 가시적인 발광체나 인위적인 광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라사대"라는 신적 발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언어 체계가 성립되기도 전, 하나님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발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음성적 신호가 아니라 말씀의 근원, 곧 신적 본질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이 빛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근원이 되시는 빛이며, 그분의 영광으로부터 발산된 태초의 생명력입니다.
 
시편 36편 9절에서 다윗은 이 거룩한 신비를 실로 아름다운 시어로 노래합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이는 하나님의 근원적인 빛 안에서만 우리가 비로소 참된 빛을 인지할 수 있다는 신앙적 고백입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태양빛 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초의 빛이 있었고, 그 모든 빛의 궁극적인 심연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십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세 단계로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빛의 시원인 '근원적인 빛', 그로부터 말미암은 '창조 첫날의 빛',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자연적인 빛'입니다. 이 근원적인 '큰 빛'이 부재하다면 파생된 그 어떤 빛도 존재할 수 없으며, 우주의 심연을 덮은 어둠 또한 결코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본다"는 고백처럼, 그 시원의 빛 없이는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진리를 목도할 수 없습니다. 이 빛의 엄위함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믿음: 감추어진 실재를 발견하는 영적인 시야
이 빛의 존재가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계시되는 독특한 방식에 있습니다. 앞서 고찰한 '근원적인 빛'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온전히 인지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그 빛이 우리로부터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빛이란 높은 곳에 두어 만물을 비추고 생명의 환희를 선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왜 이 빛이 은폐되어 있다고 말할까요?
 
성경은 이 신비로운 감추어짐의 원리를 히브리서 11장 3절을 통해 역설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장엄한 선포의 본질은 우리가 목도하는 현상 세계가 가시적인 물질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어진 영적 실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즉,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근원의 빛이 토대가 되어 지금 우리가 보는 세상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추어진 실재를 자각하는 영적인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흔히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라 오해하곤 하지만, 참된 믿음은 도리어 ‘감추어진 실재를 인지하는 지각’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를 영아의 인지 발달 단계에 빗대어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아기들은 놀던 공이 가구 밑으로 사라지면 그것이 어딘가에 숨겨진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소멸했다고 믿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곧 비존재로 간주하는 유아적 인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인은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여전히 그곳에 실재함을 압니다. 단지 잠시 가려져 있을 뿐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또한 이와 같은 원리를 따릅니다. 믿음은 부재하는 대상을 상상으로 빚어내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실재하지만 잠시 은폐된 진리를 포착하는 영적 통찰입니다. 가시적 증거가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부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를 확신하며, 그 신령한 세계를 응시하는 능력”입니다.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지탱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고찰이 다소 난해하여 혼란을 느끼실 수도 있겠으나, 그 핵심은 간명합니다. 믿음은 결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믿기로 결심하는 의지’가 아니라, ‘실재하기에 확신할 수밖에 없는 반응’입니다. 비록 육안으로는 포착되지 않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견고히 존재함을 압니다. 히브리서의 증언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소멸된 것이 아니라 단지 감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께서는 그 감추어진 생명의 빛을 믿음의 눈으로 밝히 바라보시기를 소망합니다.
 
어둠을 결박하고 승리를 선포하는 생명의
요한복음 1장 1절을 대하는 순간, 우리의 심장은 거룩한 전율로 고동쳐야 마땅합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신비는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진 채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빚으실 때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현장의 목격자가 될 수 없었으며, 신적 권능이 휘몰아치던 그 숭고한 궤적을 직접 대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토록 신비롭게 은폐되어 있던 창조의 실재가 마침내 역사의 표면 위로 찬란히 드러났음을 선포합니다. 이제는 감각할 수 있고, 목도할 수 있는 실재로 우리 곁에 도래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사건입니까? 우리는 종종 “내가 만약 창조의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쏟아지는 그 장엄한 광경을 직접 보았더라면 내 믿음이 얼마나 견고해졌을까”라는 거룩한 상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그 영광은 피조물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감추어진 신비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무엇을 증언합니까? 바로 그 본질적인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우리 눈앞에 현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가라사대”라 말씀하셨던 그 신적 발화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관념이 아닌 실재가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창조의 새벽에 비친 빛이 어둠을 가르고 낮과 밤을 구분 짓는 질서의 시작이었다면, 요한복음이 선포하는 빛은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압도적인 권능을 지닙니다. 요한은 이 빛이 단순히 어둠과 공존하며 구획을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어둠의 세력을 결박하며 그 빛을 따르는 자들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준다고 천명합니다. 이 빛은 물리적 흑암을 걷어내는 차원을 넘어, 인류를 옥죄어 온 죄의 사슬을 끊어내고 우리 영혼을 짓눌렀던 실존적인 중압감을 단번에 해소합니다. 이는 죽음을 향해 죽음을 선고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마치 “죽음아, 네가 정녕 죽음을 보리라”고 외치며 죽음의 종말을 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곧 창조의 근원적 권능이 우리 삶의 현장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부와 함께 계셨던 그 영원한 말씀이, 이제 우리의 이웃이 되어 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 우리 곁에 오셔서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본문에는 앞선 선포를 압도하는 더욱 경이로운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선언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향유하시던 그 말씀이, 이제 유한한 시공간 속으로 들어와 우리와 생의 자리를 공유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우리는 세속적인 유익—자산의 증식이나 사업의 번창, 혹은 육신의 질병이 쾌차했다는 소식—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귀를 세우곤 합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가 피조물인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셨다는 이 지고한 선언 앞에서는 어찌 이토록 무덤덤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우리의 영적 감수성이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반증하는 안타까운 단면이기도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는 선포는 실로 인류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단순히 우리를 관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그분의 본질을 직접 계시하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모든 행적과 삶의 궤적은 하나님의 성품과 자비,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대하시는 근본적인 태도가 어떠한지를 완벽하게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명확한 신적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인생들을 보시며 안타까워하실 때, 그것은 곧 우리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긍휼한 심장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의 완악함을 바라보며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하시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실 때, 그 순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이 터져 나온 거룩한 분수령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초월의 하늘 위에서 지시와 정죄만을 일삼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비탄에 동참하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곁에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재창조의 초대: 빛으로 걸어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5절은 다음과 같은 서글픈 증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 창조의 시원이자 근원이신 그 위대한 빛이 친히 우리 가운데 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제 안의 어둠에 함몰되어 그 빛을 거부하고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마십시오. 어둠이 아무리 짙고 깊을지라도 결코 빛을 압도하거나 이길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본질이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 곁에 오셔서 거룩한 동행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단절된 과거의 기록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 ‘새로운 창세기’를 선포합니다. 태초의 창조가 말씀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외적 역사였다면, 성육신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창조는 그 말씀이 우리 삶의 내밀한 영역으로 들어오셔서 무너진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빚으시는 재창조의 사건입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 말씀의 빛을 생명줄처럼 붙드시길 바랍니다. 육안에는 포착되지 않으나 분명히 실재하며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의 시선으로 응시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에 공감하며 함께 눈물 흘리시는 주님, 우리를 날개 아래 품으시는 그분과 손잡고, 모든 어둠의 장막을 뚫고 찬란한 빛의 길로 걸어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 만세 전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 곧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권능이 비천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이 지고한 신비 앞에, 저희는 오직 겸손히 엎드릴 뿐입니다.
 
세상의 허망한 철학과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비록 보이지 않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깊은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죄와 사망의 결박을 끊어내시고, 죽음을 삼키고 승리하신 주님의 영광이 오늘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실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주간의 삶 속에서도 늘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의 손을 꼭 잡고, 빛의 자녀로서 당당히 승리하며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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