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서 46장 9절로부터 11절 까지 입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아멘.
영원한 도성을 향한 소망과 성경의 퍼즐
요셉의 마지막 숨결이 잦아들던 순간, 그가 남긴 외침은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간절한 고백은 훗날 출애굽 사건을 통해 장엄하게 성취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유해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돌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고통 어린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친히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출애굽기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모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증언에 따르면, 요셉의 이 선포는 단지 눈앞에 나타날 모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 멀리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한 갈망이자 소망이었습니다. 즉, 이 땅의 가나안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이끌 그분이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라는 궁극적인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서 참으로 감사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아는 이들입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요셉의 예언은 이미 온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창세기가 단지 태초의 창조 이야기로 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새로운 시작이자 새로운 창조를 선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는 어쩌면 끝나지 않는 설교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퍼즐을 맞추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이들과 함께해 보셨을 수도 있겠으나, 조각이 수없이 많은 대형 퍼즐을 완성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인생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설계도
조각이 천 개만 넘어가도 퍼즐을 맞추는 일은 하루 이틀 만에 끝낼 수 없습니다. 때로는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조각을 함께 맞추다 보면 가족 간의 화목이 돈독해지기도 하여 퍼즐을 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퍼즐을 맞추는 데 가장 필요한 성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인내입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조각을 도무지 찾지 못할 때의 답답함은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서 인내보다 더 중요하며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퍼즐 조각이 담겨 있던 상자를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상자 앞면에는 우리가 맞추어야 할 완성된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 그림이 있어야만 비로소 흩어진 조각들을 제자리에 맞출 수 있습니다. 완성될 마지막 그림이 없다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퍼즐을 완성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 또한 이와 매우 흡사합니다.
깨어진 파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성경은 66권과 1,189장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수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파노라마와 같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질서 없이 흩어져 있는 듯하나, 이 조각들은 결국 하나의 장엄한 그림을 완성해 냅니다. 이를 단순히 기계적으로 조각을 끼워 맞추는 과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비유해 보고 싶습니다.
어떤 이가 일곱 조각으로 된 퍼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종이가 아니라 아주 정교하게 세공된 유리 퍼즐이었습니다. 처음 퍼즐을 맞추었을 때, 그 영롱한 색채와 반짝이는 유리의 광채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이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예쁘던 퍼즐은 순식간에 수천 조각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제 그 사람은 깨어진 유리 조각들을 다시 맞추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일곱 조각을 맞추었을 때 보았던 그 아름다운 원형의 그림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 기억을 이정표 삼아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섭리 속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설계도
우리의 인생 퍼즐은 단순히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 넣는 반복적인 작업이 아닙니다. 비록 유리가 깨지듯 삶이 산산조각 났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결국 다시 완성해 나가시며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세밀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이러한 역사를 허락하신 것은, 흩어진 파편들이 결코 헛되이 소멸하지 않도록 완전한 지혜로 붙드신다는 약속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 이미 완성된 그림이 있으며, 설령 유리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시련이 닥칠지라도 그분은 계획하신 그림을 반드시 이루어 내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은 바로 이 엄연한 사실을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초부터, 곧 처음부터 종말을 알리시는 분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옛적부터 미리 보이시며,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상을 시작하시는 그 태초의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완성된 종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명확한 계획
이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선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하신 것이 아니심을 깨닫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임기응변으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분명한 목적과 치밀한 계획이 있습니다. 심지어 “빛이 있으라”는 장엄한 명령이 온 땅에 울려 퍼지기도 전부터, 그분의 계획 안에는 이미 ‘종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끝맺음이 태초부터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표현하며, ‘알파와 오메가’라고 부릅니다. 이사야서를 비롯한 성경 곳곳에는 이와 같은 신앙의 고백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온전히 성취될 그 종말은, 사실 세상의 창조나 우리의 구원보다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먼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오직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신비로운 섭리입니다.
역사의 시작에 담긴 완성의 설계도
하나님의 계획이 시초부터 존재했기에,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 단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지으셨다거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노아와 아브라함의 서사가 이어진다는 식의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종말이라는 완성된 그림을 우리에게 계시하였으며, 인류의 역사는 바로 그 그림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 진행되어 온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마지막 완성의 모습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차 역사는 어떻게 종결될 것인가, 그 완성된 그림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생깁니다. 창세기에도 그 힌트가 편재해 있으나, 역사의 마지막을 가장 선명하게 조망할 수 있는 책은 단연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 22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봅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에덴의 회복과 완성된 종말의 그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생명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마주하는 순간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장면에서 에덴동산을 즉각 떠올리지 못하신다면, 창세기 50장까지 함께 달려온 여정이 무색해질 정도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에덴을 떠올리지 못하신다면 설교자인 저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 똑같은 설교를 반복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실 테니까요. 하지만 생명나무가 있고 강이 흐르는 그곳이 영락없는 에덴동산의 형상이라는 점은 참으로 명확한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그림이 이미 창세기 서두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물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라 답하곤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죄로부터 건짐 받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절실하고도 큰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넘어 통치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설계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퍼즐 상자를 미리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 마지막에 그려진 완성된 그림은 단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십자가의 장면에 머물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온 우주를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백성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마스터플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에덴을 묵상하며 역사의 종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처음 에덴과 마지막 나라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처음 에덴에 있었던 것 중 어떤 것들은 마지막 나라에서 사라집니다. 여러 요소가 있겠으나 가장 명확한 차이는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던 그 풍경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그림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위대한 시작이자, 장차 이루어질 완성형의 모형이었습니다.
창세기를 종말의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선언하시며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본래 그림이었으나, 그 안에는 이미 종말의 청사진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초부터 종말을 마음속에 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목적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도달해야 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목적의 통로였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을 향해 나아갈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주께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를 깊이 깨닫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오늘 이 강론은 창세기 전체를 갈무리하는 마지막 시간인 동시에, 여러분이 앞으로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를 어떠한 관점으로 대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제가 창세기 설교를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창세기 강해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강해를 3년 넘게 이어오다 보니, 어떤 분은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으실 테고, 또 어떤 분은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한 권을 다루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잠시 고국에 다녀오신 분 중에는 “아직도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는가”라며 놀라시는 분도 계실 법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변명처럼 드리는 일화가 있습니다.
현대의 강해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로마서를 강해하실 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교회의 수많은 청년이 전쟁터로 떠나갔고, 오랜 전쟁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장에서 돌아온 그들이 목도한 광경은 무엇이었을까요? 목사님은 여전히 로마서를 설교하고 계셨습니다. 청년들이 “아니, 아직도 로마서가 끝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을 정도였으니, 수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뒤였지요. 그 강해는 무려 14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우리의 3년은 조족지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보다 분량이 훨씬 방대한 창세기를 우리는 오히려 상당히 신속하게 마무리한 셈입니다. 어쨌든 이 마지막 시간에 제가 나누고 싶은 고백은, 사실 이 강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종말의 빛으로 읽는 창세기의 신비
창세기가 기록된 본연의 목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만약 창세기를 오직 문자적인 틀에만 가두어 접근한다면, 우리는 매일 소모적인 논쟁의 늪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책이 과학적 사실을 얼마나 담고 있는지, 진화론과 어떻게 대립하는지, 혹은 창조의 엿새가 문자 그대로의 시간인지 아니면 긴 연대인지를 두고 끝없이 다투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결코 그러한 변증을 위해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우리만의 좁은 소견에 갇혀 본질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성경의 잣대로 과학을 섣불리 재단하거나, 반대로 과학의 논리로 성경을 설명하려 애쓰느라 정작 창세기가 전하는 지고한 메시지를 외면한 채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은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시초를 두신 이유는 종말이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는 ‘종말’이라는 렌즈를 통해 시작을 거꾸로 읽어 내려가야 한다는 소중한 힌트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해석의 원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이나 구약의 시편 속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되는 성경 고유의 방식입니다.
미래가 현재로 침투하는 성경의 방식
역사의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이루실 그 완성된 결말이 미래로부터, 즉 종말로부터 현재를 향해 강력하게 침투해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역사를 바라보는 놀라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완성될 미래의 소망이 현재의 삶을 장악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찬란한 미래를 오늘로 끌어와 힘입어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이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죄’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의 출발점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백성들,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통치하시는 세계입니다. 창조의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너무나 풍성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전체를 요약하는 핵심일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장엄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요한계시록 역시 그 흐름을 이어받아 동일한 결론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 거룩한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우주를 함께 다스릴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 할 것이며, 함께 다스릴 것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품는 수많은 꿈과 소소한 계획들이 있겠으나, 정작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그 종말이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무지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일상의 분주함 속에 이를 진지하게 상상해 볼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나 또한 언젠가는 저 자리에 눕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하십니다. 반면 젊은이들은 ‘나는 저러한 종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여기거나 흐르는 세월을 경계하기도 하지만, 대개 죽음이란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치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연 여러분의 인생은 어디에서 마침표를 찍게 될까요? 정말 우리가 마련한 차가운 관 속에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우리의 정체성
요셉의 생애가 과연 그 좁은 관 속에서 마감되었습니까? 성경은 결코 그렇게 증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밤마다 올려다보는 저 수많은 별, 빛의 속도로 달려도 수억 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그 광활한 우주를 향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이 우주를 내가 너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어, 그곳에서 나를 영원히 즐거워할 것이며, 죄로부터 자유한 그 나라에서 진정한 평화와 기쁨과 정의를 누리게 될 것이다.”
저는 단순히 사후에 이르는 막연한 낙원을 소개해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한 나라의 백성인 동시에, 그 나라를 함께 통치하는 주인공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세상이 그토록 갈망해 온 민주주의의 진정한 완성이 비로소 그곳에서 실현됩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되, 우리 모두가 그분과 연합한 주권자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그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유한한 상상만으로 가능한 이야기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삶
세상에서 이상으로만 꿈꾸던 일,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그 풍성한 기업을 함께 나누며, 모든 행보를 같이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인 거룩한 성품을 우리 안에 빚어 가시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시는 위대한 구원의 도표입니다.
이 벅찬 이야기가 선뜻 믿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하루하루의 현실을 버텨내는 것조차 버거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장대한 비전을 품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의 정체성을 묻는다면 이 장엄한 그림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이 바로 여러분 인생의 진정한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여러분이 누릴 영광이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주신 가장 확실한 언약입니다.
이 소식은 우리가 마땅히 전율하고 기뻐해야 할 복음입니다. 우리 인생의 행로가 바로 그 찬란한 영광의 길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이와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단순히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는 것만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원히 왕 노릇 하는 데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권복을 스스로 저버린 전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토록 감동이 메마른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는 나만의 왕국을 꿈꾸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나라가 되기를 거부하고, 에덴이 아닌 '에덴의 동쪽'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가 왕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의 성향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잔존합니다. 내 인생의 주권이 나에게 있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우리는 나 자신조차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처참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안식과 약해져 가는 육신
세상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결국 자기 자신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인간이 스스로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겠습니까? 흔히 우리는 명석한 두뇌와 건강을 믿고, 자신의 학력과 실력을 유일한 의지처로 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 앞에 속절없이 약해져만 갑니다.
참으로 총명했던 머리는 단어 하나조차 떠올리기 힘든 상태에 이르고, 명민했던 판단력은 무뎌져 자동차를 앞으로 빼야 할지 뒤로 빼야 할지조차 혼란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르신들께는 송구한 말씀이나, 저 또한 아내를 곁에 태우고 운전하는 것이 점차 부담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예전과 달리 길을 잘못 들거나 생각지 못한 곳에 차를 긁기도 하는 저 자신을 보며 "이럴 리가 없는데"라며 당혹스러워하곤 합니다.
인생에는 반드시 이처럼 한계를 마주하는 날이 찾아옵니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에만 머문 채, 남은 생을 그저 버티듯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전부라면, 그것이야말로 죄가 얼마나 무섭고 비참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토록 고단한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명확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짊어지고, 함께 다스리며, 그분과 함께 기뻐해야 할 삶의 모든 무게를 이제는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리며,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하는 처절한 생존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홀로 짊어진 삶의 고통과 사랑의 근원을 떠난 인간
심지어 우리는 자신의 미래와 사후의 문제까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당장의 삶을 꾸려가는 것조차 버거운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죽음 이후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누어야 할 삶의 하중을 오롯이 자신의 어깨에 얹고 해결하려 하니, 우리 인생에는 고통과 슬픔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선과 모든 미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에, 진정한 선과 사랑을 온전히 누릴 길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창조의 둥지를 떠나올 때 챙겨온 사랑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제 기억을 반추해 보면, 큰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존재 자체가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되었다는 기쁨에 밤잠을 설쳤고, 아이를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출근을 앞둔 밤, 네 시간마다 깨어 우는 아이를 달래는 일은 현실적인 고단함으로 다가왔습니다. 너무 졸린 나머지 아이를 안아줄 기운조차 없어 눕혀놓은 채 발로 요람을 흔들며 재우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밤중에 발끝이 묘하게 축축하여 깨어보니, 배고픈 아이가 제 발가락을 젖인 줄 알고 빨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사랑은 참으로 유한하여 끝까지 인내하며 사랑을 지켜내기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예수님을 향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한 대목은 결코 예사로운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신성한 사랑에 대한 장엄한 선포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거절한 대가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여러분 중에 누가 그런 사랑을 조금이라도 흉내 낼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한두 번 사랑하거나 잠시 흉내를 낼 수는 있겠으나,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된 일이며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처음 마음으로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거절했고, 그 결과 죽음이 우리를 삼키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철저하게 배신하며 거역한 죄의 깊이는 필설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성경이 인간의 타락을 다룬 창세기 3장에서 끝을 맺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퍼즐 상자에 그려진 그 완성된 그림을 결코 잊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그 계획을 후회하지도 않으십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그 설계를 단 한 번도 후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한 그 처절한 순간에도 주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망가진 그림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내던져 산산조각 난 인생의 파편들을,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혈의 접착제로 하나하나 다시 이어 나가신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그림을 다시 완성해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그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의 계획을 멈출 수 없으며, 우리의 죄와 배신, 그리고 완악한 거역조차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좌절시킬 수 없음을 이 구원의 역사를 통해 증명해 보이십니다. “내 아들을 너희에게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리라.” 이는 참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속에 담긴 깊은 뜻을 우리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노아의 방주가 등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보호하실지를 미리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모든 짐승을 다스렸습니다. 그 좁은 방주 안에서 에덴의 질서가 다시금 재현된 것입니다. 즉, 종말에 완성될 그 나라의 모습이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도 이미 예표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법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을 지키시는지를 목격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약속된 “내가 너희 위에 장막을 치리니”라는 말씀이, 이미 그 옛날 출애굽의 광야 길에서 그림자처럼 우리에게 비쳤던 것입니다.
한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언약
역사의 유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준엄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도, 모세도, 그리고 우리가 깊이 살펴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도 우리가 간절히 기다려온 그 궁극적인 '아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통해 장차 오실 그 한 분을 예표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고 구체적이며 확실하게 계시하시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자 바벨탑을 쌓아 올리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인간은 쉼 없이 하나님을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놓지 않고 붙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간파하셨기에 아브라함을 찾아가 약속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창세기 서두에서 여인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제 아브라함에게 한 아들을 약속하시며 그를 통해 온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마침내 그 약속을 따라 한 민족이 태동하였고, 그 민족의 혈통을 빌려 진정한 '한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된 구원이 임하였으며,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설계하셨던 그 영광스러운 나라가 비로소 실체로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인생의 가치와 소명
요셉 또한 우리가 기억하듯, 하나님의 거대한 설계를 완성하는 소중한 퍼즐 한 조각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요셉이 누린 기쁨이 얼마나 컸으며, 그의 생애가 얼마나 경이롭게 변화되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바로 이러한 깨달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난의 세월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던 요셉이 한때 “이제는 지난날을 잊고 이 땅에서 그저 안온하게 살리라” 생각했을지 모르나, 결국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부르셨음을 직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를 그분의 나라를 위한 필연적인 한 조각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 거룩한 뜻이 지금도 성취되고 있구나”라는 거룩한 자의식을 늘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일상에서 나누는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 그리고 내리는 모든 결정이 사실은 하나님의 거대한 설계도 안에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를 포착하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조각으로서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함께 그려가는 주인공임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회복
요셉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성경은 끊임없이 특정 인물의 서사를 등장시키며 첫째 아담이 아닌 ‘또 다른 아담’이 오실 것을 점진적으로 예고합니다. 이 둘째 아담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다만 그분은 첫째 아담과는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형상이십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었으나,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파괴된 우리의 형상을 온전히 복원하기 위해서는 참된 형상이신 그분이 직접 역사의 현장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증언한 바와 같이, 첫째 아담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으나, 마지막 아담은 모든 생명을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진정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행보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셨습니다. 아담처럼 풍요로운 에덴에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광의 보좌를 떠나 에덴의 동쪽, 즉 죄로 얼룩진 이 땅의 심장부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존귀하게 임하셔야 할 분이 가장 비천한 자리에 머무신 것입니다.
깨어진 우리를 위해 오신 주님의 고난과 승리
주님께서는 천상의 낙원인 에덴의 울창한 숲이나 안온한 꽃밭이 아니라, 가축의 체취가 진동하는 비천한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산산조각 난 아담의 후예들을 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망가진 삶의 자리로 내려오셨으며, 아담이 걸었고 오늘날 우리가 걷고 있는 그 실패의 여정을 친히 통과하셨습니다.
그 실패가 수반하는 모든 아픔과 눈물,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과 속상함, 그리고 뼈저린 좌절과 두려움까지도 주님은 온몸으로 겪어내셨습니다. 심지어 죄의 최종적 형벌인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까지도 묵묵히 감내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걷던 굽어진 실패의 길을 곧게 펴실 수 있고,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길을 대신 걸으셨습니다.
이 모든 섭리는 우리를 진정한 아담으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소극적인 복구가 아니라, 죄를 완전히 제압한 승리의 아담으로 우리를 재창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어떤 죄의 유혹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내기 위해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역과 부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청사진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주께서 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설계하신 마지막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질병과 눈물이 닦여지고, 모든 괴로움과 죄가 소멸하며 사탄의 권세가 멸해진 곳,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거하시는 그 나라를 주님은 공생애를 통해 직접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거나 현세적인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역의 가장 찬란한 정점이 바로 부활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입게 될 신령한 몸과 그 영원한 영광을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예증하셨고, 장차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비가 일어날 것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셨던 하루하루는 모두 종말론적인 삶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오늘로 끌어당겨 살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신앙의 완성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간절한 사랑의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 안에 거하라. 내가 이 길을 먼저 걸어갔으니 이제는 내 품 안에서 안식하라. 내가 너를 안고 업으며, 나의 심장에 너를 담고 이 길을 가겠노라. 이제는 나와 함께 걷자. 죄와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 결코 방종하거나 방황하지 마라. 이 영광스러운 길을 어찌 다른 이가 대신 걸을 수 있겠느냐. 오직 나와 함께 이 거룩한 행진을 이어가자.”
그러므로 창세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렌즈 없이는 결코 온전히 읽어낼 수 없습니다. 성경 전체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완성된 그림을 먼저 명확히 인식하고 그 관점 안에서 창세기를 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창세기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목적이 단지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세속적인 번영을 누리는 것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저 기복적인 복만을 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의 회복과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의 온전한 회복이었습니다. 깨어진 아담을 다시 빚어내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아담의 곁을 지키던 하와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가 탄생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영적 가정을 이루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가 마땅히 생명의 자녀를 낳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친히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실 수도 있으나, 주님께서는 신부 된 우리를 통하여 그 역사를 이루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이 시대의 영적인 하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가슴에 품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복음의 자녀들을 해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효를 제한하거나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으셨으나, 분명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의 명령이자 지상 최대의 복음 명령입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누리는 깊은 친밀함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 부름받은 우리는 지금 과연 어디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 앞에 놓인 산적한 현실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인격적인 신앙 성숙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 성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선명한 모형을 보여주십니다. 아내가 남편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할수록 가정이 화평해지며, 그 사랑의 결실로 자녀라는 선물이 주어지는 이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며 영적인 자녀를 낳는 일은 분명 고귀한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 사역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본질적인 과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랑 되신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하게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 사랑의 동력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척박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랑과 누리는 영적 친밀함이 전제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복음의 자녀를 잉태하고 해산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가까이하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목회자가 신앙의 성장을 위해 권면하는 답은 주일학교 어린아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습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여 때로는 가볍게 여겨지는 이 권면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신랑의 사랑을 깨닫고 누리는 성숙한 신앙의 가정
신랑 되신 주님과 친밀해지십시오. 그분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의 마음을 그분께 진솔하게 고백하십시오. 주님과 더 깊은 시간을 보내며, 그분이 여러분을 얼마나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시는지 온몸으로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랑이 사랑을 표현할 때마다 왜 그리 무심하게 반응하곤 할까요? 주님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마다 왜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피우는 것일까요?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즉각 응답하지 않으신다며 불평하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당장 좋은 신발 한 켤레가 필요한데, 남편은 곁에서 사랑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네. 말로만 하지 말고 신발이나 사주세요!”라며 다투는 모습이 혹시 우리 신앙의 자화상은 아닌지요.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신발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좀 보아라.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인격적으로 깨닫는 일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신랑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감격스럽다고 해서 그 자리에만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건강한 가정이란 사랑을 바탕으로 자녀를 낳고, 정성껏 양육하며,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부부가 함께 성숙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역동적인 과정이 우리 신앙의 여정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가슴 벅찬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이미 그 영광스러운 흐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으로 터지는 미사일과 같은 삶
저는 많은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정작 생명력 없는 종교 생활에 매몰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저는 성도님들께 이런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왜 이벤트를 지양하고, 성도님들께 과도한 교회 모임을 요구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단순히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시라는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서 기꺼이 복음을 위해 고생하시라는 의미였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능력을 터뜨려야 할 곳, 영적인 폭탄이 되어 거룩한 파장을 일으켜야 할 곳, 그리고 삶의 변화를 실재로 증명해 보여야 할 곳은 결코 교회 안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부딪히며 소중한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곳은 진리를 배우고 성도의 교제를 통해 은혜를 공급받는 충전소일 뿐, 여러분이 진정으로 복음의 미사일을 쏘아 올려야 할 격전지는 바로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매일의 치열한 일터에서, 자녀들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 속에서, 그리고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고 남편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그 가정의 자리에서 여러분은 복음으로 장렬히 터져주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파송하신 소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사랑하고 세상에서 역사하는 다이너마이트
종종 교회에 대한 열심이 지나친 나머지, 정작 주님의 뜻대로 세상에서 살아낼 동력을 잃어버리는 분들을 봅니다. 교회 모임에 온 에너지를 쏟느라 삶의 현장을 돌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강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방향과도 결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물론 공동체에 충성한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것은 곧 내 곁의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에, 성도를 사랑하는 그 훈련 자체가 이미 세상으로 쏘아 올릴 복음의 미사일을 준비하는 거룩한 과정이 됩니다. 또한 선교를 위해, 혹은 도움이 필요한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모든 시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헌신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폭탄이 되지 마시고, 세상 밖으로 나가 복음의 능력을 터뜨리는 주인공이 되어주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이 다이너마이트처럼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그분이 내 인생 속에서 어떠한 일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십시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왜 기뻐할 수 있는지,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든든히 지탱하고 있는지를 삶으로 선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통치하시는 역사 속에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독립의 의미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성숙
제가 우리나라의 독립 만세 사건을 자주 언급하곤 합니다. 많은 분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그토록 기뻐했던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국권 회복에 대한 숭고한 기쁨도 컸겠지만, 대다수 민초에게는 "이제 우리를 억압하던 일제가 사라졌구나.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고 전쟁터로 내몰던 공포가 더는 없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독립 직후에는 나라를 어떻게 다시 세워야 할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독립되었으며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따르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지난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국가란 무엇이며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지, 또 국민으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씩 깨달아가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시련과 심지어 독재의 아픔까지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국민의 권리가 무엇인지, 왜 헌법에 그러한 가치들이 명시되어 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우리 사회는 큰 변화를 거쳤습니다. 이처럼 한국은 뼈아픈 역사를 밑거름 삼아 점점 더 성숙한 나라로 변화해가고 있습니다.
사명 없이 방황하는 안타까운 신앙의 모습
물론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으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이다"라거나 "나는 미국의 시민이다"라는 식의 정체성 확인 자체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현재 미국 사회를 향한 우려 섞인 시선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과거 미국이 지향했던 고결한 도덕적 가치와 공동선을 추구하던 정신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개인의 부와 안위가 최우선이 되어, "그저 배불리 먹고살게만 해준다면 누가 지도자가 되든 상관없다"는 식의 가치관이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국가가 지향해야 할 본질과 방향성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모습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벌어진다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영광 속에 들어와 있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나라 안에서조차 여전히 사소한 이권 다툼을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누가 더 유능한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지를 따지며 서로를 시기하거나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시간 낭비이자,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귀한 생애를 허비하는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우리의 목표는 서로 경쟁하여 우위를 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한마음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헛된 자존심 싸움으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위임하신 사명과 존재의 목적을 기억하며 충실히 살아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천국을 입은 사람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백성으로서 현재 나의 영적 좌표는 어디인지,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더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과 어떻게 친밀한 사귐을 나누며 살아갈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내면에는 성경이 약속하는 온전한 에덴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처를 정하고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슬픔이 지배하지 않는 나라를 소유한 자들이며, 그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슬픔 대신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으며, 재를 뒤집어쓰는 대신 승리의 화관을 쓰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결코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바로 천국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수사를 빌리자면, 여러분은 ‘여호와의 나무’입니다. 곧 여호와께서 친히 심으신 나무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낼 거룩한 생명 나무들입니다.
진리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여호와의 나무
오늘도 여러분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가지를 뻗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짓 대신 진실의 가지를, 죽음 대신 생명의 가지를 뻗어 내야 할 사명자들입니다. 미움 대신 사랑이라는 가지를 넓게 펼쳐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무성한 잎을 내야 합니다. 거칠고 추한 말 대신 격려와 칭찬의 말을 내는 이들이며, 조급함 대신 인내의 잎을 틔우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삶의 마당에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친절과 배려, 그리고 자비라는 꽃을 피워내는 아름다운 나무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여러분의 본질이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오늘도 열매 맺는 삶을 살겠습니다. 제 존재의 뿌리에서 생명의 가지를 낼 것이며 소망의 잎을 키우겠습니다. 주님, 그 잎들이 배려와 친절의 잎이 되게 하시고, 그 줄기들이 사랑과 인내의 줄기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거룩한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나라를 제 삶에 온전히 입혀 주시옵소서.”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온 존재를 주님의 나라로 입혀 주시옵소서. 우리가 오늘 어떠한 열매를 맺어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야 할지 명확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참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의 줄기를 뻗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온 세상이 보고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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