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 15절로부터 21절 까지 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는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아멘.
야곱의 출애굽과 요셉의 출애굽 사이, 그 광야의 시간
우리는 지난주, 고대 세계에서 거행된 지극히 성대한 장례식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세기의 장례식’이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였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가 승하했을 때 72일간 애도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야곱을 위해서도 70일 동안 애도가 이어졌으니 그 위세가 실로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이 화려한 장면을 보며 요셉이 향유했던 막강한 권력과 부의 크기를 가늠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외피를 벗겨내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요셉이 진정으로 천명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권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즉 이스라엘이 결국 가나안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불변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과 가나안 입성을 향한 장엄한 서사 속에서, 예기치 못한 문제가 고개를 듭니다. 바로 형들의 불안이었습니다.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자마자 형들은 요셉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뿌리 깊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제 요셉이 본색을 드러내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겠느냐는 공포가 그들을 잠식한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임종 전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는 형제들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십시오.” 그러고는 요셉 앞에 납작 엎드려 스스로를 종이라 칭하며 굴복합니다. 그 참담한 고백을 들은 요셉은 눈물을 흘립니다. 요셉은 왜 울었을까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요셉의 마음속에는 이미 형들을 향한 진실한 용서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0장을 깊이 묵상하면 매우 흥미로운 구조가 발견됩니다. 전반부에서는 야곱이 장례를 통해 애굽을 떠나는데, 이를 ‘야곱의 출애굽’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요셉이 형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남기는 간절한 유언이 등장합니다. 그는 “내가 죽거든 내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당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출애굽’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장엄한 마무리는 야곱과 요셉, 두 인물의 출애굽 사건이 앞뒤를 감싸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식은 훗날 모세가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는 사건, 그리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여호수아가 다음 세대를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하는 장면과 궤를 같이합니다. 출애굽의 여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광야에서 모세는 출애굽의 신학적 의미를 새 언약처럼 백성들에게 거듭 가르칩니다. 마치 두 번의 출애굽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출애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번의 출애굽 사이에는 무엇이 가로놓여 있습니까? 바로 40년이라는 엄혹한 광야의 시간이 존재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광야에서”라고 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의 출애굽과 요셉의 출애굽 사이, 그 중간 지대에 놓인 광야와 같은 시간, 곧 메마르고 불안하며 끊임없는 시험이 교차하는 그 순간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신앙의 지점입니다.
죄의 비참함을 넘어 하나님께로 눈을 돌리는 위로
사실 요셉은 형들에게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로 응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님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적당한 위로를 건네고 상황을 매듭지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형들은 용서받은 몸이었고, 굳이 해묵은 상처를 다시 들추어낼 이유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굳이 이 장면을 다시금 조명하고 있을까요?
이 형들의 모습은 출애굽하여 광야로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보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합니다. 애굽을 등지고 광야에 진입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와 보호를 매 순간 체험했습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었고, 갈증이 일 때마다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틈만 나면 과거의 종살이하던 애굽을 그리워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시험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실 수 있는가, 이 인도를 진정 신뢰해도 되는가”라며 끊임없이 의구심을 던졌습니다.
그 광야의 불신 섞인 모습이 지금 요셉 앞에 선 형제들의 모습 위로 겹쳐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주하는 이 서사는 단순한 사건의 재방송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받았던 것처럼, 형제들 역시 동일한 실존적 문제를 안고 요셉 앞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잠시 제쳐두고, 요셉이 이미 형들을 용서했던 과거의 시점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에서 요셉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어지는 7절에서는 더욱 명징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현재 우리가 묵상하는 곳은 50장이지만, 요셉은 이미 45장에서 동일한 신앙 고백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당신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이 장엄한 선언은 움직일 수 없는 용서의 확증이었습니다. 특히 45장 15절은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말하니라”고 기록합니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눈물로 화답하는 이 장면은 완벽한 화해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다시 눈물을 쏟아냅니다. 이번 눈물은 단순히 재회의 감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면상으로는 몇 장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약 17년에서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요셉은 형들과 그 가속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습니까. 안락한 처소를 마련하고 생계를 책임졌으며, 생업을 이어갈 비옥한 토지까지 세심하게 예비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마음의 심연에 쌓인 “언젠가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불신의 앙금을 걷어내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 서글픈 진실을 마주했을 때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내가 형들에게 이토록 신뢰받지 못했는가”라는 자책 섞인 슬픔이 그를 엄습했을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가 요셉의 눈물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이는 신앙적으로 매우 깊은 통찰을 줍니다.
그러나 그 눈물의 이면에는 분명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비참함’입니다. 형제들 사이의 거리를 이토록 멀게 만든 원인은 다름 아닌 죄였습니다. 뿌리 깊은 불안과 공포, 그리고 영원히 종식되지 않는 경계심을 배태한 실체가 죄라는 사실을 요셉은 직시했습니다. 요셉은 죄가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피폐하게 황폐화하는지를 목도하며 깊은 탄식을 토해낸 것입니다.
형들이 나아와 엎드리며 “우리를 종으로 여겨 달라”고 비굴하게 간청할 때, 요셉은 권세로 그들을 제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두려워하지 마소서”라고 그들의 떨리는 마음을 다독입니다. 그리고 본문 21절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성경은 요셉이 형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다고 표현합니다. 요셉은 과거의 시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믿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며 밀어내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징벌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 다시금 상처를 안겨준 형제들을 향해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넸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엄중한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요셉은 과연 어떠한 언어로, 무엇을 근거로 삼았기에 그토록 간곡하게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시선의 전환
요셉이 건넨 첫 번째 위로의 언어는 다름 아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만 접하면 이 표현이 자칫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 줄 아십니까?”라는 식의 가벼운 힐난처럼 들릴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이 품고 있는 뉘앙스는 전혀 다릅니다. 이는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이 느끼는 두렵고 떨리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사실 그 자격을 논한다면 요셉만큼 판단자의 자리에 설 만한 적임자도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기근으로부터 형들을 구원했고,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 모든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질서와 기준으로만 본다면 요셉은 누구보다 당당하게 형들의 과오를 심판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 모든 여정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셨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신적 섭리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존재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심판자가 아닙니다.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까지 왔고, 오직 그분의 자비로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하나님의 주권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요셉이 전하고자 한 핵심입니다. 그의 태도는 단순한 겸양을 넘어, 하나님께서 형들과 그 가속을 살리시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요셉이라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 치환하며 그들의 시선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건네는 위로는 “괜찮아요, 다 지나간 일입니다”라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방식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요셉의 위로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는 형들의 시선을 요셉이라는 가시적인 존재에게서 떼어내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요셉이 보여준 위로의 숭고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이 영적 원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처한 척박한 환경, 여러분을 압도하는 수많은 결핍과 절망, 아픔과 답답함이 여러분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장벽 앞에서 요셉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하라고 권면합니다.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느냐?”
내 인생을 견인하고 붙드시는 실체는 눈앞의 가혹한 환경이 아닙니다. 상황이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그것이 내 인생의 종착지를 결정짓는 주권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나의 아버지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만이 내 생애를 빚어가시는 유일한 주관자이십니다. 요셉은 형들이 사람의 손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영혼을 자유케 하는 진정한 위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통과하는 인생의 매 걸음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자녀의 장래, 무너진 건강, 혹은 이민 사회라는 광야에서 마주하는 실존적 불안이 우리를 포위합니다. 그때 우리는 담대히 외쳐야 합니다. “물질이, 명예가, 혹은 세상의 안락함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여러분의 심령을 어지럽히는 미움과 실망, 탄식과 속상함에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어찌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형들에게 전한 ‘간곡한 위로’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고개를 드십시오. 실망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 무엇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무너뜨릴 권세가 없습니다.
죄의 직시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
이처럼 시선의 전환이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요셉의 두 번째 위로가 발현됩니다. 요셉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말씀을 접할 때 우리는 대개 로마서 8장 28절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약속을 직관적으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고백의 심연에 담긴 의미를 조금 더 치밀하게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요셉이 이 말을 할 때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엄중한 사실이 있습니다. 요셉은 결코 과거를 왜곡하거나 형들의 죄를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난날의 비극을 회피하거나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사실을 변개하지 않았고, 그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했습니다.
이 지점은 신앙의 본질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종종 불편한 진실을 매장하거나 외면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할 부분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말씀은 참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이토록 집요하게 죄를 언급하고, 왜 수많은 죄인의 치부를 드러내야만 합니까?” 혹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존감조차 희박한데, 죄인이라는 낙인까지 더해지니 숨이 막힙니다. 그 이야기 없이 설교할 수는 없습니까?”라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온통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세상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이 왜 사랑의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까? 바로 그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죄를 들추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죄인’이라는 자각이 선행되어야만 할까요? 사실을 직면하지 않고 자신의 실상을 은폐한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진정한 위로의 깊이를 결코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미한 감기에 걸려 약을 복용한 것과, 절망적인 암 수술을 통해 생환한 감격이 어찌 동일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어떤 죽음의 늪에서 건짐을 받았는지 명확히 아는 자만이 진정한 감사와 희열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감기는 또 걸릴 수 있는 일상적인 고충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치명적인 질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대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참된 위로가 얼마나 경이로운 기적인지 결코 체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실존과 연약함을 진실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죄를 비대하게 과장하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며 죄책감의 노예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이라는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그분의 순결한 빛 앞에 설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자각하게 됩니다.
죄의 비참함을 깨닫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가 바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골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엄중한 법궤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절망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 요구를 단 한 조각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다가도 사소한 이해관계 앞에서 원수가 되는 인간의 변덕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경계해야 할 태도는 죄를 범한 나 자신에게만 침잠하는 ‘자기 연민’입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나는 절대 변할 수 없어”라고 자학하는 것은 죄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중심성에 함몰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집중하면 서사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고 선하신 분인지 자각할 때, 그분 앞에 서 있는 나의 초라한 실존을 깨닫고 비로소 복음적 통회에 이르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죄의 결과로 닥쳐올 가시적인 형벌이나 불이익을 두려워합니다. 오늘 본문의 형들 역시 요셉이 보복을 시작하여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처단할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진정한 비참함은 물리적 형벌에 있지 않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우리가 누려야 할 모든 영적인 복락을 상실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 참된 사귐과 영혼의 교제가 불가능한 고립 상태에 놓이는 것이 가장 비극적인 형벌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의 물리적인 불길을 공포스러워하지만, 성경이 계시하는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벽히 부재한 공간입니다. 그곳은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는, 오직 증오와 원망만이 무한히 반복되는 장소입니다. 단 한 사람과의 관계만 어긋나도 영혼이 타들어 가는데, 영겁의 시간 동안 미움 속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고통이겠습니까?
우리가 죄의 비참함을 절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선하심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상기할 수도 없고, 진리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생각은 악의 독소로 오염되고 입술에서는 타인을 찌르는 가시 돋친 언어만 발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된 자의 소외된 삶, 그것이 바로 죄가 지닌 가장 무서운 얼굴입니다.
악조차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요셉이 형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만났고, 깊이 깨달았으며, 무엇보다 그 광대한 은혜와 사랑을 몸소 체험했던 바로 그 하나님 곁으로 형들을 데려가려 합니다. 요셉은 결코 형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묶어두지 않습니다.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게 합니다. 훗날 수많은 성도가 입을 모아 노래하게 될 고백, 곧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로 형들을 이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렇게 선포하는 셈입니다. “형님들, 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를 보지 마십시오.” 이를 오늘 우리의 삶에 투영한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척박한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손에 쥔 유한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집착이나 여러분을 괴롭히는 절망과 아픔, 미움과 상처라는 그 깊은 수렁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십시오. 요셉은 단언합니다. “나의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보던 그 모든 것조차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로마서 8장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상기합니다. 대개 이 구절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기적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떻게 악조차 선의 도구로 승화시키실 수 있는지 그 신비로움에 경탄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품고 있는 진의는 그보다 훨씬 강인하고 심오합니다. 이는 단순히 “악을 재료 삼아 선을 빚으셨다”는 의미를 넘어, “우리의 악과 죄가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은 결코 좌절되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어떠한 패역함이나 죄악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광대했기에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 말씀을 “결국에는 다 잘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결과론으로 치부하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본질은 현상적인 결과가 아니라 변개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악과 죄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 그분의 은혜를 우리의 죄가 결코 압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속적인 ‘고진감래’나 ‘전화위복’의 서사가 아닙니다. 도무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폐허 같은 잔해들이고, 무엇 하나 호전될 기미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엄중한 약속입니다. 끝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고, 결국 그분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순교자 짐 엘리엇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삶은 이 진리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짐 엘리엇은 원주민의 창끝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잃은 뒤 재혼했으나, 두 번째 남편마저 암으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삶의 단면들만 놓고 본다면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시다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한 남편은 살해당했고, 다른 남편은 암으로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고백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보이는 환경은 결코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신뢰는 가변적인 감정이나 본능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기인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권자이시며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이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 생애의 가장 놀라운 위로이자 승리의 근거입니다.
평안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을 지극히 간절하게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심연에 흐르는 진실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으십니까? 이미 익숙한 말씀이지만, 이 구절을 한 번 더 영혼의 울림으로 읽어보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여러분, 하나님과 싸우지 마십시오.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분명하게 개진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향방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아신다고 확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선한 계획을 우리 인생 가운데 반드시 성취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 엄존하는 진실이며, 우리가 누릴 참된 위로의 보루입니다.
요셉의 서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선언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을 품고 형들을 위로합니다. 그 위로는 본문에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고백으로 수렴됩니다.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생명을 살리는 구원을 성취하셨다는 엄숙한 선포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요셉 한 개인에게서 매몰되지 않고, 우리 안에서 고이지도 않습니다. 요셉은 말합니다. “형님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겼던 그 참혹한 사건은, 외적으로 보기에는 극악한 죄악이자 악의 결정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해하려 했던 바로 그 어둠의 일들을 통로 삼아 허다한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섭리의 역설입니까. 여러분, 이 말씀의 깊은 층위를 헤아려 보십시오. 요셉 역시 처음부터 이 모든 비밀을 간파했던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차디찬 지하 감옥에 유폐되었을 때나 쇠사슬에 결박되어 있을 때, “주님, 저를 통해 많은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이런 고난을 예비하셨군요. 감사합니다”라고 초연하게 기도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시편에서 묵상한 바와 같이, 그는 목에 칼을 쓰고 착고에 채인 채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며 호소했습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야곱도, 요셉도, 아브라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생애를 추적해 보면,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적 도면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미리 조망하며 살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성도들을 대할 때 간혹 마음 한구석에 깊은 안타까움이 머물 때가 있습니다. 결코 실망 속에 거해서는 안 될 분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체득하지 못하시는 듯 보일 때입니다. 내가 어떠한 신분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지금 무엇을 향유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여 그 삶과 생각이 곤고해 보일 때 목사로서 깊은 애잔함을 느낍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호흡하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 자체로 이미 하나님께서 세우신 ‘복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이 발걸음을 옮기는 처소마다, 여러분을 통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를 수혈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적으로 메마른 세상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영적 비타민’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조우하는 이들은 여러분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 생명의 은총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요셉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당대에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행한 가시적인 봉사나 헌신, 혹은 가르침만을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우리가 계수하던 작은 일들보다 훨씬 찬란한 열매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보라, 이것이 너의 손을 통해 맺힌 열매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경탄하며 반문하겠지요. “주님, 제가 언제 이토록 존귀한 일을 행하였습니까?”
성경이 계시하는 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 삼아 구원을 경륜하시는 동안, 우리가 무심코 건넸던 따뜻한 말 한마디와 별 의미 없다고 여겼던 미미한 섬김들이 어느덧 영원한 생명의 열매로 익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선교 현장을 다녀오신 분들이 종종 “언어도 통하지 않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라고 겸양의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만난 그 어린 영혼이 장차 하나님 나라의 거목으로 자라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신비롭고도 완벽한 방식입니다.
내 생애 최고의 시간, 광야에서의 구원
우리는 흔히 예기치 못한 삶의 궤적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나라를 경험하곤 합니다. 평생을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했던 배우자와의 관계가, 성령의 조명 아래 돌아보니 오히려 나를 하나님 앞에서 연단시키고 성숙하게 만든 거룩한 통로였음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 오묘한 섭리를 마주하는 찰나,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에 침잠하게 됩니다.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 그 심오한 진리를 목도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기가 막힌 사건들, 차라리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법한 비극적인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인생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가고 계셨습니다. 이토록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가 흠결 많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향해 흘러간다는 사실은 실로 경이로운 신비입니다.
요셉의 생애 또한 이러한 신적 섭리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반추하며, 스스로도 다 측량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적 역사가 자기 인생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우리 개인의 지평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을 향해 뜨겁게 박동하며 흘러가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조우하는 이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위하는 일상 또한 무의미한 시간의 나열이 아니며, 우리가 발설하는 언어조차 우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면한 과업이 비록 미미해 보일지라도, 혹은 그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수반되어 “왜 나에게만 이토록 가혹한 짐이 지워졌는가”라고 탄식하게 될지라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걷는 그 고독한 길 위에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이 곁에 계시며,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정교하게 사용하시어 당신의 선하신 목적을 완수하고 계십니다.
이 위대한 구원의 서사가 완성되어가는 한복판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여전히 두려움과 실망, 그리고 실존적 불안이 상존하는 곳입니다. 매일 만나를 먹고 목마를 때마다 반석에서 솟구치는 생수를 마시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망각한 채 “주여, 대체 어디 계십니까?”라며 공허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은혜를 호흡하며 살아가면서도 문득 애굽의 육체적인 안락을 동경하는 것이 우리의 뿌리 깊은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왜 광야의 시험에 매몰되겠습니까? 왜 하나님을 원망하며 단절된 과거인 애굽을 향해 고개를 돌리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불안과 공포 때문입니다. 홍해를 도하했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을 넘겼던 구원의 강렬한 기억이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전율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광야’라는 불확실한 지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광야에서 정처 없이 고생하는 방랑자가 아닙니다. 이유 없는 심적 고통을 겪으며 허송세월하는 자들은 더더욱 아닙니다. “세상이 원래 그러하니까”, 혹은 “나의 오판으로 초래된 결과니까”라며 유수처럼 흘러가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실존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빚어지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을 밀도 있게 경험해 가는 거룩한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은 역사의 정점에 선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을 대신 살아줄 대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생애 가장 중차대한 계절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동행하시며 당신의 구원을 완성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재의 고난이 엄중하고 괴로울지라도, 전체적인 구속의 도면 속에서 이 시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실현되는 ‘인생 최고의 시간’입니다. 요셉은 바로 이 확신을 담아 형들에게 간곡히 선포합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살리셨습니다.”
그 무엇이, 심지어 우리 내면의 완고한 미움과 탐욕, 요셉 자신의 분노와 상처조차도 어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에서 당신들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치르신 그 숭고한 은혜와 사랑의 무게가 어떠한데,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이 여러분을 그분의 품에서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요셉은 이 장엄한 순종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책임지고 기르겠습니다.”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미움과 슬픔, 이제는 사랑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장엄한 찬가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외쳤습니다. 진실로 아멘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화답할 수밖에 없는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의 죄를 이미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죄 사함의 안도감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제 나는 정죄함이 없으니 평안하다”라는 개인적인 해방감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토록 괴로워하던 죄를 담당하셨고, 주님께서 친히 그 저주를 짊어지셨다면, 이제 여러분은 능동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도사린 그 지독한 미움과 분노를 도말해 주셨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허다한 이들이 “죄 사함을 받았다”, 혹은 “자유를 얻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기만적인 태도에 갇혀 있곤 합니다. “나는 이제 의인이 되었으니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다. 이제는 내 욕망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살겠다”라며 다시금 옛 자아의 습속으로 회귀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복음이 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이며 왜곡된 신학적 오해입니다. 절대로 그러한 영적 기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자유의 본질을 정확히 응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슬픔을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슬픔의 재를 털고 일어나 기쁨의 화관을 쓰라는 엄중한 부르심입니다.
“너희의 모든 눈물을 내가 나의 눈물병에 담았으니, 이제 너희는 내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의 시기와 질투를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이제는 서로 격려하며 타인의 짐을 나누어 지고 칭찬하며 살아가라. 너희의 탐욕과 정욕을 내가 다 짊어졌으니, 이제는 서로 베풀고 나누는 긍휼의 삶을 살아라. 너희의 절망을 내가 모두 감당하였으니, 이제는 영원한 소망을 노래하며 찬양하라.”
주님께서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셨다면, 이제 여러분은 고통받는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죽으셨다면, 이제는 마음을 낮추어 겸손의 도를 행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네 눈물을 내가 대신 흘렸으니 너는 웃으며 살아라. 네 악함을 내가 담당했으니 너는 이제 선함을 실천하며 살아라. 네 미움을 내가 소멸시켰으니 너는 이제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내가 너의 모든 아픔과 눈물, 탄식과 절망, 그리고 심령에 가득 찬 분노와 증오를 십자가 위에서 모두 거두어 갔으니, 이제 너는 오직 아름답고 선한 일에 착념하며 살아라. 사랑의 법을 성취하며 기쁨의 제사가 되는 삶을 살아라.”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어두운 잔재들을 다시 붙잡지 마십시오. 이미 지나간 상처에 매달려 영혼을 황폐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위하여 물과 피를 쏟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단 한 순간도 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든, 그 아픔의 근원이 어디에 있든, 그것을 위하여 이미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 하겠습니까? 오래전 어느 찬양의 고백처럼, 주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위로하여라, 네가 고통받을 때 내가 너를 위로했듯이. 눈물을 닦아주어라, 네가 흐느낄 때 내가 너의 눈물을 닦아주었듯이. 사랑은 나로 말미암는 은총이며 선물이고 긍휼이니, 그러므로 너희도 사랑하라, 끝까지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내가 너의 죄를 정결케 씻었으니, 이제 너는 의로운 길을 걸으라”는 것이 복음의 요청입니다. 여러분, 미움을 내려놓기가 여전히 고통스러우십니까? 그 미움을 주님이 대신 짊어지고 소멸시키신 자리가 바로 갈보리 언덕입니다. 심령 깊은 곳에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이 그 어둠 속에서 흘리던 눈물을 이미 보셨고, 그 눈물을 당신의 가슴에 담으셨습니다. 오직 여러분에게 참된 평강과 기쁨을 선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주님 앞으로 나아오셨다면 이제 그 품 안에서 진정으로 안식하십시오. 해소된 과거를 다시 소환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지옥과 같은 불행으로 밀어 넣지 마십시오. “주님, 저를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사오니, 이제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이 환희와 복음의 찬가와 참된 사랑을 온전히 누리게 하옵소서.” 이 절절한 신앙의 고백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의 생애를 다시 한번 주님의 거룩한 조명 아래 비추어 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저희에게 이토록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단비를 부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저희의 인생이라는 캔버스 위에 그려나가시는 그 존귀한 목적들과, 지금 이 순간에도 저희를 견인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손길을 저희가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제 저희를 향한 주님의 뜨거운 본심과 그 위대하신 주권을 깨달았사오니, 저희로 하여금 주님 앞에 겸비하게 무릎 꿇게 하옵소서. 주님의 통치 앞에 온전히 자아를 굴복시키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마음과 말씀을 기쁨으로 준행하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창세기-166-요셉의 출애굽 (0) | 2026.01.29 |
|---|---|
| 창세기-165-광야에서-Part 2 (0) | 2026.01.29 |
| 창세기-163-야곱의 출애굽 (1) | 2026.01.25 |
| 창세기-162-마지막 축복 (1) | 2026.01.24 |
| 창세기-161-사랑을 입은 자 (0) | 2026.01.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