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 21절로부터 26 까지 입니다.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이다 하고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아멘.

 

 인간의 잣대로 두려움의 드라마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형들은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시선을 요셉에게만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섭리가 그리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면, 결국 자기만의 잣대와 상상력으로 인생의 드라마를 내려가게 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가나안까지 야곱의 시신을 모시고 애굽 사람들과 함께 올라가 모든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길은 요셉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에게 길은 이십여 노예로 팔려 왔던 길이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고통의 길입니다. 말하자면 절망의 길을 다시금 되짚어 오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정확히 어떤 사색에 잠겼는지는 없으나, 형제들의 마음만은 그들이 요셉에게 건넨 말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그곳은 요셉을 팔아넘기고 그를 죽이려 모의했던 참혹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이 군대와 함께 그들 곁을 지나고 있습니다. 원수를 갚으려 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셉이 자신들을 자리에 묻어버리고, 고센 땅에 남은 권속들까지 모두 노예로 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형제들은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자리에 인간의 잣대가 들어서자, 그들은 스스로 만든 두려움의 드라마 속에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드라마와 불안의 굴레

이처럼 요셉의 모든 형제에게 귀환의 길은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요셉 앞에 나아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명분으로 내세웁니다. “요셉아, 아버님께서 우리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또한 요셉이 이를 거절하거나 안색이 변할 것을 염려하여, “우리는 너의 종이 되겠다”라고 미리 덧붙입니다. 혈육에게 종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모의하여 요셉에게 전한 이야기는, 요셉의 처지에서는 참으로 뜻밖이고 황당한 일이었기에 성경은 그가 울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개연성 있는 드라마였습니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일을 자주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스스로 드라마를 집필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걱정이 뒤따릅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생각의 틀로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짐작이 적중할 때도 있겠으나, 대개의 경우 우리는 스스로 내려간 비극 안에서 절망하며 스스로를 가두곤 합니다.

 

그들의 염려는 그들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요셉을 죽이려 했던 과거의 죄책감을 고려하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 속에는 결정적인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아무리 치밀하게 분석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탁월하다 해도, 하나님이 배제된 드라마의 결말은 오직 두려움과 근심뿐입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인생은 스스로 드라마를 이끌어야 하고, 스스로 모든 결론을 내리며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결국 모든 삶의 하중을 본인이 감당해야 하기에, 우리는 걱정의 굴레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다시 쓰는 구원의 역사

요셉은 형들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는 19절과 20절의 고백은 모든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인생의 드라마 안으로 개입하시는 순간, 근심과 두려움으로 점철되었던 역사는 구원과 생명의 역사로 완전히 탈바꿈합니다.

 

여러분, 진리를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삶에 일어난 사건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건의 진정한 핵심을 꿰뚫어 보지 못할 , 우리는 요셉의 형제들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죽어가는 생명들이 살아난 기적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들을 이곳까지 인도하여 놀라운 일을 성취하고 계신다는 사실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실재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오직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다시 노예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드라마 속에는 치밀한 분석과 개연성 있는 논리가 가득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부재했기에 사건 이면에 담긴 진실을 마주할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죄와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의와 생명의 결말로 변화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지금 눈앞의 시련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방식은 어떠하며, 수많은 삶의 굴곡 속에서 무엇을 응시하고 계십니까?

 

물론 여러분도 상황을 분석하고 최선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 고심하며,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 결정의 순간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내려가는 드라마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을 조연으로 밀어내지는 않았습니까? 곤경에 처할 때만 도움을 청하거나, 방관하시느냐고 원망의 대상으로만 삼지는 않았습니까? 삶을 진실되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결코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없습니다.

 

요셉의 마지막 세월과 해피엔딩의 반전

창세기 22절에 이르면 요셉 생애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집니다. 야곱을 장사할 무렵 요셉의 나이는 50 중반이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날 때는 110세였습니다. 야곱이 서거한 후에도 54년의 세월을 향유한 셈입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자손이 태어났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에브라임의 자손 3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손자들 또한 그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다고 기록합니다. , 그는 증손들까지 품에 안는 복을 누렸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함의를 기록한 이유는 단순히 요셉이 장수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8편은 "자식의 자식을 보는 "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 성경이 요셉의 노년을 이토록 상세히 요약한 것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복을 입은 사람이었음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된 장대한 여정이 드디어 50장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요셉의 자손들이 번성하고, 형제들과 우애를 회복하며, 모두가 평안을 누리는 결말은 자체로 완벽한 해피엔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극적인 해피엔딩 뒤에 숨겨진 반전을 기대하듯, 창세기 50장에도 놀라운 반전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남긴 마지막 유언입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에서의 삶을 진정한 안식처로 여겼다면, 그는 굳이 이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는 이제 죽으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돌보시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때 해골을 메고 함께 올라가 주십시오. 만약 애굽이 인생의 종착역이었다면 그곳에서 평온히 죽음을 맞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애굽은 진정한 의미의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신앙적 결단

어떤 이들은 요셉이 그저 사후에라도 가족 곁에 머물고 싶어 그런 유언을 남겼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흥미로운 대목은 요셉이 생전에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는 점입니다. 그는 부친 야곱을 가나안에 직접 장사 지냈으며, 애굽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총리였습니다. "내가 죽거든 즉시 가나안에 묻어 달라" 요청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우선 이곳 애굽에 묻히겠노라 말합니다. 다만 훗날 형제들과 후손들이 가나안으로 행진할 , 자신의 유해를 반드시 함께 운구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실로 의미심장한 선택이며 일반적인 사고방식과는 궤를 달리하는 결단입니다. 요셉이 이토록 확고한 태도를 보인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 야곱을 통해 확인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이 처음 애굽으로 내려오던 순간을 기억해 보십시오. 요셉의 초청에도 야곱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46 3절을 통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확한 약속이자 뜻이었습니다.

 

야곱의 애굽행은 단순히 기근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려는 방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큰 민족’의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 아닌 애굽에서 성취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번성하는 것이 마땅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족장으로서 사명을 마치고 가나안으로 귀환했으나, 요셉은 애굽에서 민족을 이루어야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와야 했는지 본질을 알았기에, 구속사가 애굽에서 그대로 멈출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요셉의 생애를 통해 신실하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의 : 약속을 기다리는 광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이 본질적으로 어떤 곳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사실상 야곱이 걸었던 인생의 마지막 여정은, 비록 그가 애굽으로 내려갔을지라도 장차 후손들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그의 자체로 증명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이 애굽에서 보낸 세월은, 비록 그곳이 외적으로는 풍요로웠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광야를 지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야곱이 그곳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인생을 누렸을지 모르나, 성경은 그의 애굽 생애를 거의 묘사하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남을 속였던 부끄러운 일화까지 낱낱이 기록했던 성경이, 인생에서 가장 안락했을 마지막 17년의 시간을 한마디로 요약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곳이 본향이 아닌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곳은 그의 자손들이 앞으로 믿음으로 견뎌내야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이 얻은 구원은 바로 광야 생활의 서막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광야의 길목에는 반드시 용서의 사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루시고 그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구원의 사역이 자리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뼈저리게 깨닫는 , 내가 요셉을 팔았던 일이 진정 어떠한 죄악이었는지를 직시하는 , 그리고 요셉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는 모든 과정은 구원의 여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요셉은 순간 마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존재로서, 죄인을 용서하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광야 속의 나그네 의식

이제 광야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흔히 광야라 하면 결핍과 궁핍을 떠올리지만, 이스라엘이 마주한 영적인 광야는 사뭇 달랐습니다. 애굽은 매우 풍요로운 광야였습니다. 그렇기에 그곳을 빠져나오는 무려 40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안주하기에 너무나 달콤하여, 참으로 벗어나기 힘든 광야였던 셈입니다.

 

우리가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부르지만, 실제 지형은 캘리포니아 기후와 유사하여 물이 없으면 생존하기 척박한 땅입니다. 객관적인 조건만 본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은 오히려 애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처음 그곳에 당도했을 그들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고 모든 것이 넉넉했습니다. 요셉의 생애만 보아도 그는 애굽에서 막대한 복과 성공을 구가했습니다.

 

애굽은 요셉에게 고난의 현장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눈부신 성공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의 이름을 '고통을 잊겠다' 뜻의 므낫세로, 둘째 아들은 '번성함' 의미하는 에브라임이라 지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의 성공으로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매듭지으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때 그에게 물었다면,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으로 메고 가달라는 유언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으려 했던 형들을 다시 대면하는 순간,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전율하며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에 미리 보내셨는지 비로소 알게 것입니다. 형제들을 마주하며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준엄한 약속 말입니다.

 

"너는 반드시 알라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동안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자손은 사대 만에 땅으로 돌아오리라." 요셉은 언약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지금 누리는 애굽의 풍요가 아무리 감미로울지라도, 이곳은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라 나그넷길이며 우리가 객으로 머무는 광야라는 진실을 붙든 것입니다.

 

애굽의 풍요 속에서 맛보는 꿀과 젖은 사실 죄와 악의 토양에서 피어난 것일 있습니다. 요셉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의 속에 민족을 이루어가겠지만, 요셉은 찰나의 풍요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죽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이정표

그러나 24절에 이르러, 요셉은 짧지만 강렬한 문장으로 극의 모든 국면을 전환합니다. 그는 선언합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고백은 단순히 요셉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죽음의 함의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방대한 족보를 보면, 누군가 해를 향유했다는 기록 끝에는 어김없이 “죽었더라”는 문구가 뒤따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실존적 한계가 바로 죽음임을 보여줍니다. 비록 에녹만이 주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함으로써 장차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생명의 역사를 예표했으나, 타락한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셉이 내뱉은 “나는 죽을 것이나”라는 고백은 참으로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요셉을 유일한 의지처로 삼고 살아온 형제들에게 말은 얼마나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겠습니까? 그가 사라진 뒤에 누가 자신들을 돌보며, 험악한 세월 속에서 누가 방패막이가 되어줄지 그들은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다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원적인 불안이 그들을 엄습했을 테지요.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선언하는 동시에, 죽음 너머의 소망을 제시합니다. “형님들, 저는 약속대로 가족들을 돌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깨달아야 합니다. 형님들이 바라보아야 대상은 제가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들을 살린 같았으나, 실상 그들을 돌보시고 언약을 지켜오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선을 자신이라는 존재로부터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돌려놓습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요셉은 당장 자신을 가나안에 장사 지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오히려 그는 후손들이 장차 마주해야 고된 광야의 현장에 죽어서라도 함께 남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죽음으로 증거하는 소망과 무덤의 메시지

야곱의 생애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그가 죽음 이후 가나안으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를 앙망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와 대조적으로 애굽이라는 광야를 살아갈 세대와 끝까지 동행하기를 선택합니다. 야곱이 약속의 소망이 무엇인지 선포했다면, 요셉은 소망을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하며 살아낸 이입니다. 그는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영적 훈련이 시작되었음을 통찰했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애굽 땅의 무덤으로 남기를 자처했습니다.

 

성경이 모든 세세한 기록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애굽으로 인도한 요셉을 결코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의 무덤을 지날 때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을 상기했을 테지요. “나의 해골을, 관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요셉의 묘비에는 아마도 “백십 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곳에 잠들다”라는 문구와 더불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나를 반드시 데려가라”는 간절한 유언이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무덤이라는 존재 자체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엄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너희는 이제 애굽에서 연단을 받으며 강성하고 번성할 것이다. 때로는 이곳의 삶이 안락하고 풍요롭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반드시 기억하라. 이곳은 결코 너희가 영원히 머물 집이 아니다. 요셉의 무덤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들의 영혼을 깨우는 영원한 이정표였습니다.

 

안주의 유혹과 영원한 본향의 기억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셉의 영향력 아래 장차 부요를 누리게 것입니다. 성경의 증언처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극하기 전까지, 그들은 상당한 안정을 구가할 테지요. 바로 그때, 요셉은 자신의 무덤을 통해 웅변합니다. 자신은 인생의 최정점에서, 애굽의 모든 존경과 영광을 몸에 받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후손들을 향해 엄히 경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남기는 말을 명심하라. 이곳은 우리의 진정한 본향이 아니다.”

 

현재 누리는 것이 무엇이든, 풍요가 선사하는 안전함에 얼마나 깊이 안심하고 있든, 애굽은 결코 영원한 안식처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요셉은 또한 하나님의 예언대로 사백 년간 후손들이 겪게 고난을 뚜렷이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난의 파고는 더욱 거세게 밀려올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자의 삶에서 고난이 지니는 소중한 가치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깊이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성도의 생애에 고난이 거두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고 성숙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난의 현장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땅의 나그네임을 망각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입니다.

 

고난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실재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셉의 덕택으로 장차 부요를 향유하게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극하기 전까지, 그들은 애굽 땅에서 남부럽지 않은 안락함을 누릴 테지요. 바로 그때, 요셉은 무덤을 통해 웅변합니다. 자신은 인생의 황금기이자 애굽의 모든 존경을 몸에 받던 정점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임을 상기시키며, 후손들에게 준엄한 경계를 남깁니다. “내가 너희에게 남기는 말을 기억하라. 이곳은 결코 우리의 집이 아니다.

 

이는 현재 누리고 있는 풍요가 어떠하든, 안락함이 주는 안전망에 얼마나 안심하고 있든, 또한 스스로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자만하고 있든, 애굽은 결코 영원히 머물 처소가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사백 동안 후손들이 겪게 고통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화될 고난의 무게를 통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자의 삶에서 고난이 지니는 소중한 가치는 이미 깊이 체득하고 계실 압니다. 성도의 생애에서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신앙을 연단하고 도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고난의 자리에 서야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직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입니다.

 

고난의 :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식의 풍성함

고난의 유익은 단지 인격의 수양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의 깊이는 실로 경이롭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조차 얻을 없는 독특하고 풍성한 지식입니다. 천국에는 고난도 없고 시험에 빠지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풍랑을 같이 헤쳐 주시는 바로 이곳, 세상 속에서만 우리는 특별한 하나님을 경험하며 알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전히 고난은 낯설고 괴로운 것으로만 보일 있습니다. 그럴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인생의 드라마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고난은 그저 아픔과 눈물로 점철된 비극일 뿐이며,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식의 막연한 위안 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통과하고 있는 답답한 터널, 어찌할 바를 몰라 힘겨워하는 순간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타인에 의한 상처든, 자신의 허물이든,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든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난관을 극복할까", " 내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며 오로지 자기 자신과 상황을 분석하는 데에만 매몰됩니다.

 

그럴 말씀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모든 생각에 가장 중요한 가지, 하나님이 빠졌구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시며 지금 나와 함께 걷고 계신다면, 고통스러운 순간은 실상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기회일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악행이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현장 속에 현존하심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신비한 섭리를 대면하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즐거움

사도들이 고난을 마주하며 마치 찬송하는 듯한 기쁨을 누릴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시험을 이상한 당하는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백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인생 드라마 속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관점으로 창세기 50장의 대단원을 다시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속적 의미의 해피엔딩입니까? "나를 가나안으로,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 유언은 얼핏 보기에 "행복하게 살았더라" 결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무언가 미완의 과제를 남긴 끝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해피엔딩입니다.

 

요셉은 지금 자신의 죽음을 통해 웅변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전에 삼대까지 자손을 보았고 세상의 모든 명예와 부를 향유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죽음으로 증명하노니, 모든 세상의 복락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비교할 없이 귀하다. 그는 자신의 임종과 함께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세상의 어떤 안락함보다 복이며,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시는 그분의 인도가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성공을 맛보았고, 누구나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풍요를 실제로 거머쥐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고 솔직해지는 죽음의 문턱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세상의 전부보다 존귀하며 길이 가장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애굽에 묻히나, 훗날 반드시 자신을 취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애굽의 화려한 총리로 기억되기보다 하나님의 가난한 나그네로 남는 것이 훨씬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의 증언

장엄한 믿음의 고백을 히브리서 11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한다는 것은 인생의 국적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내려가는 인생의 일기장이 단순히 개인적인 분석과 단편적인 기록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손길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무엇을 먹고 어떤 날씨를 마주했느냐는 일상의 기록을 넘어, 하나님이 나의 신령한 음식이자 만나가 되셨으며 그분이 삶의 영원한 빛이 되셨다는 고백이 갈피마다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일기장에는 우리가 흘린 눈물과 슬픔만 고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좁은 길을 통해 어떻게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빚어 오셨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눈물 흘리며 속상해하던 , 모든 것이 끝인 것만 같아 절망하던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에게 분노하며 스스로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하나님은 바로 칠흑 같은 순간에도 인생의 주인이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일기장을 새롭게 쓰시고, 인생을 전혀 다른 차원의 신비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오직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 중심의 인생을 살았던 자들을 위해, 주님은 기꺼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영원한 거처를 예비하셨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여러분, 돌이켜보면 우리는 참으로 교만했습니다. 얼마나 자주 타인이나 환경을 탓하며 책임을 전가해 왔습니까?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작은 무시에도 분노하고, 때로는 자신에게 깊이 실망하며 지워버리고 싶은 인생의 순간들을 마주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절망의 심연에 빠졌다가도, 어느새 세상의 중심이 오만해지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납하기 어려울 때가 많으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인생을 나보다 깊이 통찰하고 계십니다. 내가 살아온 궤적과 지금 품고 있는 생각, 예배드리는 순간에도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아픔과 분노를 모두 보고 계십니다. 실망과 좌절로 일그러진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습까지도—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나보다 정확히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너희를 위하여 하늘과 땅을 예비하노라.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심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일기장에서 주인이 되셔서 매일의 기록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손길을 기뻐하십시오. 은혜를 가슴에 품고,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향해 마음껏 감사하며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우리를 너무나 아시는 주님, 참으로 우리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저희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핑계로 주님을 뒤에서 원망하고 멸시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훌륭한 분이라 칭송하면서도, 실상은 그저 땅의 삶에 유용한 도구로, 고난의 때에 잠시 위로를 주는 수단으로 여기며 주님을 가벼이 대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들과 딸이라 부르시는 것을 기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측량할 없는 은혜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올립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세상 속에서 주님을 당당히 시인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저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 동행하셔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걸음씩 정직하게 걷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알아가는 일이 우리 삶의 가장 기쁨이 되게 하시고, 나를 향한 끝없는 사랑을 깨닫는 일이 날마다 우리의 즐거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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