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21절과 22절 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아멘.
요셉의 장례식과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
저희가 창세기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사실상 요셉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데, 오늘은 그 요셉 이야기의 결말이 기록된 신약의 히브리서 본문을 함께 읽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은 자기 인생의 최고 정점에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장례식은 어떠했을까요? 앞서 치러진 야곱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다면, 요셉의 장례식은 얼마나 성대하고 화려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아마 바로를 비롯한 모든 장관과 애굽의 온 백성이 모여 대단한 예식을 치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야곱의 장례식을 그토록 자세하게 기록했던 성경이 분명 그보다 더 대단했을 요셉의 장례식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그가 약속의 땅에 묻힘으로써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지를 보여주는 이정표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요셉의 장례식, 즉 그의 마지막은 그다음의 이야기를 향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그의 후손들이 이제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번성하다가, 결국에는 약속의 땅으로 함께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화려한 장례 절차를 기록하는 대신 요셉의 마지막 유언에 주목합니다.
성경은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신약에서 단 한 번, 바로 오늘 읽은 본문의 마지막 유언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요셉의 생애가 깊이 다루어지지만, 신약에서 그의 마지막 순간을 조명한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아들을 축복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면, 요셉의 이야기는 죽음을 앞두고 남긴 신앙의 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 즉, 두 사람의 생애에서 성경이 강조하고자 하는 신앙의 중심 지점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번성과 가나안을 향한 소망의 변화
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과연 왜 요셉은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요? 요셉은 이방 땅인 애굽에서 무려 93년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조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을 삶의 중심으로 삼았던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오히려 가나안을 잊어버리려 했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던 중 요셉은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소망을 바꾸기에 이릅니다. 원래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에브라임을 낳았을 때 그는 "내가 이제 이곳에서 번성할 것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그의 목적지는 애굽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이제는 형제들도 잊고, 자신이 겪은 고난도 잊으며, 가나안과 아버지의 집조차 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 애굽에서 번성하게 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 속에는 여전히 하나님이 계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생각과는 다르게 형제들과 야곱을 다시 만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요셉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요셉이 깨달은 바는 단순히 "가나안 땅이 중요하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가장 먼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어떻게 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천당'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으나, 이 표현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지극히 축소된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당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영적 여정이 존재합니다. 천국이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풍성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만약 "교회에 다니면 어쨌든 천국에 간다"는 것이 구원의 전부였다면 요셉의 선택도 달랐을 것입니다.
요셉이 진정 가나안 땅의 중요성만을 깨달았다면, 그는 죽을 때 야곱처럼 즉시 그 땅으로 가려 했을 것입니다. 혹은 죽기 전에 모든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가나안 땅 그 자체가 최종 목적지였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가나안은 단지 사후에 가야 할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라면, 요셉은 그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에덴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
그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요셉은 그 일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축복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단순히 인구수가 늘어난다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 애굽 한복판에서 에덴의 회복이 시작될 것이라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세상을 통해 어떻게 에덴의 회복을 이루어 가실지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반드시 약속한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이 두 가지 약속은 요셉에게 움직일 수 없는 실재였습니다. 그렇기에 요셉에게 가나안은 단지 생의 마지막에 돌아갈 물리적인 땅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궁극적인 목적지였으며, 바로 그 목적지가 분명했기에 요셉은 이 애굽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땅에서 에덴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본격적으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배워갈 것이며, 동시에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막 그 위대한 여정의 시작 단계에 들어선 셈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나의 구원자이자 주인으로 영접하여 주님을 생명 삼아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합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의 나라가 있다. 그렇다면 그 나라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오늘 우리는 목적지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것인가?” 요셉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로 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결말과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소망
여러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요셉의 이야기는 더 이상 개인의 일대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 관 속에 누워 있는 요셉은 사실상 창세기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창세기를 되짚어 보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요셉과 이스라엘의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요셉이 그 관 속에서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의 시작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덴동산의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은 어떠합니까? 관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깊이 묵상해 보면, 이 관 속에 놓인 요셉은 창세기의 모든 여정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의 모습이 죄의 쓰라린 결과를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직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형제가 형제를 죽인 가인과 아벨의 비극이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도 이 비극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셉 역시 형제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과거에 박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의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이 뻔뻔하게 자신의 죄를 덮고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를 쳤던 것처럼, 요셉의 형제들도 거짓으로 자신들의 죄를 감추려 했습니다. 그 깊은 미움의 상처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을 잊어버리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가 내린 최선의 결론은 그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큼 했다. 그 사람들이 너와 무슨 상관인가? 이제 너만이라도 잘 살면 그만이다.” 만약 우리가 요셉과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을 만났다면, 아마도 “과거는 잊어버려라. 이제 성공했으니 보란 듯이 여기서 잘 살아라”라고 조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참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 같았던 형제들을 다시 마주하게 하심으로써 요셉에게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흐르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단순히 개인의 성공을 넘어 형제들과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도구가 되었으며, 성경은 그 위대한 섭리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약속의 본질과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죄의 무서운 실재를 마주하게 됩니다. 요셉 또한 지금 관 속에 누워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당시 최고의 권세와 부, 그리고 명예를 누렸던 요셉을 결국 삼켜버렸습니다. 마치 죽음이 그에게 "요셉, 너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라고 냉혹하게 말하는 듯합니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요셉은 무엇이라 답했을까요? 그가 임종 직전 남긴 유언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 유골을 가나안으로 메어 올라가라.” 이 말은 곧, “나는 죽음에 매인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에 속한 자다”라는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신 가나안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 땅에 특별한 보화라도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요?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기 때문입니까? 출애굽 여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막상 가나안 접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 같으니 그들에게 죽고 말 것이다”라고 할 만큼 가나안은 두려운 현실이었습니다.
가나안이 귀한 이유는 그 땅에 대단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 곧 ‘에덴의 회복’을 상징하는 땅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셉은 사후에 자기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할 것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의 뼈를 옮기라고 명했습니다. 이는 육신의 부활까지 염두에 둔 신앙이었습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구원하시어 영원히 주와 살게 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죽음 앞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이 가나안이 너, 죽음의 권세를 깨뜨릴 것이다. 나에게는 죽음보다 강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약속하셨다.” 이는 단지 더 좋은 영토를 얻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통해 영원한 하늘나라를 보여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이 종착지가 아님을 알았고, 가나안조차도 하늘의 도성을 가리키는 표지임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살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땅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그는 “하나님, 주신다던 가나안 땅은 왜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씨(자손)’를 더 귀히 여겼습니다. 땅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땅이 영원히 머물 정착지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경의 증언대로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스스로 ‘나그네’임을 고백했습니다.
이 깨달음은 아브라함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과 애굽을 오가며 거절당하고,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던 긴 훈련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 이 가나안조차 궁극적인 목적지는 아니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고 반드시 주어질 기업이지만, 동시에 그는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실상과 오늘을 결정짓는 종말론적 삶
여러분, 우리는 이 지점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가 나의 최종 목적지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장차 죽음 이후에 도달할 막연한 미래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오늘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짓는 명확한 기준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우리가 온전히 누리게 될 나라입니다. 질병과 죄, 미움이 사라지고 오직 사랑만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단순히 멀리서 바라보는 동경의 대상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 깊이 깨달을수록,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가치를 알아갈수록 우리의 오늘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본질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깊이 알아갈수록 바로 오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변화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적 삶’이라 부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현재의 내 인생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내가 이해하고 납득한 범위 안에서만, 혹은 내 의지와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제한하려 합니다. 오직 내가 아는 만큼만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단지 오늘 우리가 깨달은 단편적인 지식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해가 부족할지라도, 영원한 나라에 대한 계시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능력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내며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영적 실재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저희는 토요일마다 성도님들과 마음을 모아 기도하기 위해 새벽 기도회를 열고 있습니다. 아직 기도회 소식을 접하지 못한 분들도 계실 듯하여 오늘 광고를 겸해 말씀을 드립니다. 기도회가 끝나면 소박하게 아침 식사를 나누는데, 지난주에는 뜻밖에 풍성한 음식이 준비되어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묵사발이 차려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언제 마지막으로 맛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인데, 이곳에서 묵사발을 대하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갖가지 채소와 육수, 고명이 어우러진 묵사발을 함께 나누며 식탁 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러다 누군가의 시작으로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 장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모든 말씀이 다 소중하지만, 특히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이 늘 제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장로님께서 이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실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침 오늘 나눌 본문이 히브리서였기에, 저는 그 자리에서 답을 아껴두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다룰 핵심 내용이 미리 공개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이 질문은 오늘 본문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실상'이라는 단어는 번역본들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보다 선명해집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를 '실상(실체)'으로, 새번역 성경은 '확신'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타당합니다.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본다면 이런 뜻이 됩니다. "내가 바라는 영원한 나라가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이라는 필터를 통하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실제적이고 참된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그것이 바로 내 삶의 근거이자 확신"이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즉, 믿음은 막연한 기대나 추측이 아닙니다.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우리에게 실재(reality)로 주어진 확고한 사실이며,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분명한 확신입니다.
보이는 현실 너머를 신뢰하는 신자의 확신
이러한 믿음의 원리는 요셉의 경우를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지금 눈에 보이는 애굽에 살며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을 만난 이후 약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가 바라본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요셉에게는 실체가 되었고 확신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진정으로 의지한 것은 지금 누리는 애굽의 지위나 권세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당대 최고의 자리에 앉은 이가 자신이 가진 가장 확실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약속을 실상으로 여기며 고백한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많은 분이 현실적인 고충을 토로하십니다. “목사님, 요셉은 신앙이 특별하니 그렇다 쳐도, 저에게는 당장 다가오는 각종 고지서와 매달 돌아오는 임대료가 더 무서운 실상입니다. 보험료 청구서를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데, 하나님이 한 번이라도 대신 내주신 적이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실상이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그 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우리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숫자, 집과 차, 예금 잔고, 혹은 직장이라는 환경이 정말 여러분 인생의 전부라고 확신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규정하는 모든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참된 신자는 바로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니다, 이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쫓다 결국 그 속에 함몰되지만, 신자는 “나에게는 이것이 전부가 될 수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만약 돈이 전부라면 부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 될 것이고, 명예가 전부라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유일한 가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부귀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갈급하다. 내 안에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다.” 이처럼 하나님을 고백하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막연하게나마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느끼지만 여전히 그 속에 매여 사는 반면, 우리는 더 분명한 실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여러분도 자주 흔들립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합니다. 때로는 세상의 가치가 전부인 것처럼 보여 마음이 힘들어지고, 물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만 같은 유혹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 마음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정말 그것을 의지해서 살 수 있겠느냐? 그것만 있으면 네 영혼이 만족하겠느냐?”
그 질문 앞에 우리 내면에서는 또 하나의 진실한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I need Thee).” 모든 조건이 완벽해 보이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자녀들이 건강하며 가정이 평안할지라도, 신자는 그 평온함 속에서 찬송을 고백합니다. “매 순간 주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세상의 조건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음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용사들 중 첫 번째로 부름받은 우리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놀랍게 대우하고 계시는지, 제가 한 가지 증거를 들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함께 펼쳐보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1절부터 읽어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어진 2절에서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3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 3절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큰 감격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3절은 “믿음으로(By faith)”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어서 4절 또한 “믿음으로” 시작하며 믿음의 사람 아벨을 등장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영웅장’이라 부르며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로 이어지는 믿음의 리스트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쟁쟁한 믿음의 용사들 가운데 누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지 아십니까? 아벨일까요? 다시 한번 3절을 귀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누가 나옵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아벨보다도 먼저 우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용사 리스트 맨 처음에 바로 여러분의 이름을 써 놓으셨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멀리서 바라본 자들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그분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후에 등장하는 선진들에 대하여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얻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뒤돌아보며 확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 능력으로 내가 살게 되었음을 실재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들고 인도하시며,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그 약속을 누리는 이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구약의 선진들과 같은 믿음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반열에서 우리를 가장 앞자리인 ‘넘버 원’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이토록 존귀하게 대우하고 계신다면, 우리가 결코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묵사발 내는 부활 신앙의 권세
관 속에 누워 있던 요셉이 그토록 담대한 고백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선포한다. 내가 지금 사는 곳은 애굽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요 부활과 생명의 나라다. 그러므로 나의 뼈를 약속의 땅으로 옮겨 달라.” 이 명령은 단순히 유골을 이장해달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비록 몸은 애굽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자신은 결코 죽음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며 오직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믿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했습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일깨워, 보이는 것들이 결코 우리를 주장할 수 없으며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하는 힘입니다. 요셉의 마지막 고백은 마치 이러한 선포와 같습니다. “사망아, 네가 삼키려 하는 것은 겉모습일 뿐 진정한 내가 아니다. 오히려 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신자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역설적으로 그 죽음 자체가 소멸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 영생 속에 우리의 진정한 실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요셉이 세상을 떠난 후 4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출애굽기 13장에는 이러한 기록이 나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라.” 400년이 지났음에도 모세와 이스라엘은 요셉의 유언을 잊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바랐던 그 약속이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그들을 살게 하고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현재의 ‘실상’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기에 그들의 삶은 변화되었고, 그 믿음을 따라 광야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호수아서는 요셉의 유골이 야곱이 샀던 그 땅에 장사 되었음을 기록하며 이 약속의 성취를 증언합니다. 요셉은 야곱을 만나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은 그날부터 70여 년 동안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뜻, 그리고 그분의 약속에 사로잡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힌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열한 번째 단락 교정을 진행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들이 경험하는 존재론적 변화와,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본 하나님 나라의 실재적인 능력을 정제된 문체로 다듬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힌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여러분도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에 앞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들은 영원한 나라에 사로잡혔습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에 사로잡혔던 것일까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그 나라가 주는 기쁨과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놀라운 변화가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러 사방으로 흩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정에서 일을 할 때나, 직장에서 업무를 볼 때나, 혹은 사람을 만날 때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신분이 노예였든 주인이었든,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가 그들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이 꿈꾸던 사사로운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꿈은 단지 막연한 미래의 환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위대한 실재를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하루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힘들고 어두운 날들이 있었고, 마음과 기운을 다 빼앗길 만한 고난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조차 예상치 못한 시련 앞에 얼마나 자주 낙심했습니까? 그는 여러 번 도망쳐야 했고 숱한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바울이 얼마나 연약해졌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 이제는 죽을 것만 같습니다”라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탈진했던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가 그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서 “이제부터 네 힘으로 열심히 나에게 오너라” 하고 손짓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동행하는 인생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깊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운명의 변화
여러분, 요셉이 남긴 유언을 다시 한번 경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을 깊이 울리기를 소망합니다. 창세기의 대단원을 장식하며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돌보실 것이다. 그분이 너희를 인도하여 내실 때, 내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 달라.” 참으로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리니”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읽은 출애굽기 13장에서 모세가 요셉의 유언을 재인용할 때 어떤 표현을 썼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는 ‘돌보심’으로, 출애굽기에서는 ‘찾아오심’으로 표현되었지만, 원어로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살피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기에 ‘돌본다’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의 더 본질적이고 정확한 의미는 ‘찾으신다’ 혹은 ‘방문하신다(visit)’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를 찾아오실 것이라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히브리어 시제로 미완료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오신다는 예고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를 끊임없이 찾으신다’는 의미를 담아 ‘돌보신다’고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학자 브루스 월트케(Bruce K. Waltke) 교수는 이 단어의 의미를 더욱 특별하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돌봄을 넘어 “내가 너의 운명을 바꾸리라”, “내가 너의 인생을 새롭게 하리라”라는 주님의 의지가 담긴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주님의 손에 두시고,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고 너의 하나님임을 끊임없이 가르치며, 너를 자녀 삼아 네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며 네 인생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겠다는 거룩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써,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인해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운명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소망하는 백성의 삶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영원한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나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전쟁, 부조리한 갑질과 끝없는 탐욕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자신은 물론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제게 묻곤 합니다. “목사님, 예수님은 도대체 언제 오실까요? 이만하면 이제 오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제가 그 간절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편으로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뜨겁게 소망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단지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이 불공평하고 폭력적인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푸념 섞인 바람입니까? “그저 힘드니 예수님이라도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은 아닌지요.
우리는 정말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 왜 그토록 소망해야 하는지 그 본질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나라의 진정한 영광을 알고 계시는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하나님과 함께 기뻐 뛰놀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살아갈 그 영광스러운 모습에 진정 관심을 두고 사랑하며 사모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우리가 그 나라를 진실로 소망하고 있다면, 그 소망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소망은 반드시 우리의 인생과 운명을 바꿉니다. 주님이신 성령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그분은 여러분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을 외면한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도저히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거룩, 그 기쁨을 이 땅에서 전혀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둔 채, 그저 우리가 가진 작은 것들에 안주하며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불평하고 불만하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투는 삶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어찌 하나님 나라를 안다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나라에 속한 자로서의 감사와 승리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사모하고 있다면 우리의 아침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 순간 나의 음성과 마음, 나의 모든 형편을 헤아리시는 분, 사랑이 부족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 오늘도 나와 보폭을 맞추어 걷기를 기쁨으로 여기시는 그분을 정말로 안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일이니 교회에 가야지"라는 의무감을 넘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오늘 우리 앞에 힘들고 어려운 과제가 놓여 있을지라도,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답답함과 가슴 아픈 상처가 남아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오 주님, 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나 자신을 기억합니다. 그 영광의 보좌 앞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우리는 현실의 고통 중에도 다시 찬양하며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기를 원합니다. 나는 더 이상 알량한 자존심에 목매는 사람도 아니요, 미움과 경쟁, 죽음의 그늘 속에 갇혀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 풍파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무력한 자가 아니라, 당당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는 오늘 하루를 감사로 채우겠습니다. 내일을 예비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기뻐하겠습니다. 나에게 찾아오셨고 지금도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성령님께서 내일은 또 어떠한 길로 나를 인도하실지 기대합니다. 내 인생의 어두운 구석마다 어떠한 창조의 빛을 비추어 주실지, 내 마음속에 어떤 창조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오 주님,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오늘을 지나 내일도, 나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아무리 다그친들, 무엇이 우리의 이 완고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녹여낼 수 있겠습니까?
주여, 바라옵기는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오늘의 초라한 모습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나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바라는 그 영광스러운 나라가 바로 오늘, 믿음 안에서 우리의 실상이 되고 확고한 확신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지금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 안의 나'라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끝나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나'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바로 그 진리가 오늘 우리를 살게 하며, 우리 입술에 노래를 머금게 하고, 우리 영혼에 기쁨을 부어줌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형편에서도 나 자신에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매일 아침 다시 일어나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요, 믿음으로 그 나라를 보는 사람이며, 믿음으로 그 나라를 살아가는 자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그 믿음의 권세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원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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