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29절로부터 33절까지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아멘.
야곱의 유언과 마지막 축복
지난주까지 우리는 야곱이 열두 아들을 어떻게 축복하였는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막내 베냐민을 끝으로 자녀들을 향한 축복의 여정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음을 목전에 둔 야곱이 자신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이하고 준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자손들에게 장례 절차를 당부하는 모습은 표면적으로는 여느 평범한 유언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마지막 부탁이나 명령을 넘어선 중차대한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열두 아들에게 선포했던 그 어떤 축복보다 본질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야곱이 생애 마지막에 전하는 종말론적인 복의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넘어, 자신과 자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최후의 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려 한다"라는 말로 운을 떼며 장엄한 유언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가족과의 영원한 연합
때로 유려한 번역이 본래의 의미를 가릴 때가 있습니다. 야곱의 고백을 단순히 "조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이삭이 잠든 곳으로 돌아간다" 혹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천(歸天)'의 의미로만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33절의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앞서 언급된 ‘조상’이라는 단어와 궤를 같이합니다. 문맥에 따라 조상 혹은 백성으로 번역되었으나, 대개의 영어 성경에서는 이를 모두 ‘people’로 표기합니다. 이 단어는 본래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을 뜻하는 ‘킨즈먼(kinsman)’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어를 조상이나 백성이라는 관념적 표현보다 ‘가족’이라고 번역할 때 그 본질이 우리에게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돌아간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사프’의 독특한 성격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발걸음을 돌리거나 하늘로 올라간다는 능동적인 의미를 넘어, 수동태적 의미인 “하나님께서 모으셨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누군가에게로 불러 모으셨다는 뜻이며, 바로 ‘하나님의 가족’에게로 그를 불러 모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고백을 가장 깊이 있게 번역한다면 “나는 이제 하나님의 가족과 연합하려 하노라”가 됩니다. 이것이 야곱이 선포하는 첫 번째 복입니다. 죽음이란 참으로 고독한 길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홀로 마주해야 하기에 인간은 죽음 앞에서 근원적인 두려움을 느낍니다.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도 그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누구나 외로움과 공포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죽음이 결코 고독한 종말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천군 천사가 우리를 맞이한다는 사실도 귀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가족 공동체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영원히 연합하게 하시는 신비로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언약 속에서 맞이하는 성도의 죽음
본문이 강조하는 핵심은 내가 임의로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나를 맞이하여 그 품 안으로 모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라고 환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고백은 "나는 이제 언약의 가족들과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라는 승리의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을 묵상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성도가 누리는 참된 복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홀로 당하는 것도, 적막한 죽음 속에 방치되는 것도, 어두운 구렁텅이 속으로 유기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속으로 들어가며, 그 언약의 가족들과 영원히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이르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형제와 자매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어버이 되시는 하나님을 뵙게 되며, 이 세상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미처 가늠할 수 없었던 거룩한 공동체에 참여하여 온전하고도 완벽한 연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땅 막벨라 굴의 의미
성경은 이것을 야곱이 누리는 첫 번째 복으로 증언합니다. 야곱은 지금 죽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떠밀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 안으로 들어가 언약의 백성들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지닌 구체적인 함의는 야곱이 전하는 두 번째 복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조상들과 함께 장사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조상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아내 레아 역시 그곳에 잠들어 있음을 상기시키며, 자신 또한 반드시 그 자리에 묻어줄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조상'과 '장사하다'라는 단어는 창세기 49장부터 50장까지 수십 번 반복되어 등장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핵심어보다 더 본질적인 대목은 조상들과 함께 묻히게 될 ‘장소’의 문제입니다. 그곳은 바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정당하게 사들였던 막벨라 굴입니다. 야곱은 지금 자신이 거주하던 애굽 땅이 아니라, 반드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자신을 안치해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야곱에게 가나안 땅이 지닌 무게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경계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그 땅 자체가 다른 지형보다 더 신성하다거나, 그곳에 묻혀야만 구원의 확률이 높아지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땅이라는 어떤 물리적 혹은 주술적인 신비함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영원한 기업
그 땅이 그토록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굳이 가나안까지 시신을 운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이 아닌 애굽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음 이후 육신의 거처가 어디인들 본질적으로 무엇이 그리 중하겠습니까?
야곱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음 이후 어디에 머물게 될지, 누구와 함께하게 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언약의 가족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이 땅에 묻히든 바다에 던져지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이미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장지를 그토록 강조한 것은,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요청 속에는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울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소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며 "영원한 언약을 세우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더불어 "내가 너와 네 후손이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약 구약의 역사에 정통한 분들이라면 이 대목에서 일종의 괴리감을 느끼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훗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입성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의 역사를 보십시오. 다윗과 솔로몬의 전성기를 지나 왕국은 분열되었고, 결국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땅이 진정으로 '영원한 기업'이었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포로 귀환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의 영광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당시에도 유대 땅은 헤롯이 다스리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 있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주권 국가로서 온전히 소유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48년에 이르러서야 국제 사회의 승인 아래 땅을 되찾았으나, 오늘날 매일 들려오는 전쟁의 소식처럼 그곳은 여전히 혼란과 갈등의 연속입니다. 실질적으로 그 땅 모두를 평화롭게 수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분명히 '영원한 기업'이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가시적인 역사를 초월하는 또 다른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상의 가나안 땅은 유한했으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진정한 기업에는 분명 더 깊고 영원한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1500년경이었고, 기원전 1000년경에 이르러서야 사울과 다윗, 솔로몬을 거치는 왕정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온전한 영토 국가의 형틀을 갖추었다고 보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다윗 왕조의 역사를 기원전 1000년부터 계산하더라도 그 번영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 멸망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 이후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독립적인 주권을 완전히 누리거나 다윗 왕조가 온전히 복원된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기업’이라는 선언에는 지리적 영토 이상의 장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자의적인 추측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이 약속의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업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입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들이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다윗 또한 그들이 아직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궁극적인 안식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이 그토록 갈망하며 바라보았던 '영원한 기업'은 결국 마지막 때에 온전히 이루어질 약속의 실체였습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원한 기업은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기업은 단순히 지리적인 가나안 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음의 선조들을 아우르며 선포한 그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 한번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향한 여정
히브리서 11장, 이른바 ‘믿음 장’은 믿음의 선진들이 약속을 받지는 못했으나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주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심지어 아담에게도 약속을 주셨으나 그 약속의 실체인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당대에는 직접 대면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다만 그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가나안 땅에서 스스로를 외국인과 나그네라 칭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들이 진정으로 돌아갈 본향을 찾는 자들임을 스스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분명 약속받은 땅이자 고향이었으나, 그것이 종착지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떠나온 육신의 본향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이 말하는 가나안 땅과 영원한 기업은, 궁극적으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징하는 모형이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선포하는 두 번째 복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야곱은 지금 “나는 이제 영원한 기업을 받으러 간다”라고 장엄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비록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나지만, 자신은 이제 영원한 기업의 품으로 들어간다는 확신입니다. 자기를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묻으라고 당부하는 이 유언 속에는 실로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가나안 땅의 흙 아래 묻히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죽은 야곱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샀던 그 작은 밭 한 귀퉁이에 안치되는 것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야곱은 지금 자신의 장례를 통해 후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떠나 영광으로 올라가는 복
야곱은 단순히 가나안 땅에 묻히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기업을 비로소 상속받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유언에 담긴 마지막 세 번째 복은 ‘올라간다’는 동사와 깊이 연결됩니다. 사실 이 표현은 야곱의 직접적인 발언 속에는 없으나, 이어지는 50장 초반부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본래 창세기 49장 29절부터 50장 14절까지는 하나의 의미 있는 묶음인데, 성경은 그가 죽은 뒤 애굽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히브리어로 ‘올라간다’는 뜻의 ‘알라’는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구약의 제사 중 제물을 태워 연기를 하늘로 올리는 ‘번제’ 역시 히브리어로 ‘올라’라고 부릅니다. 제물이 불타 하늘로 향하듯, 야곱의 마지막 여정 또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즉 애굽이라는 세속의 땅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향하는 거룩한 상승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성도 여러분은 지금 ‘알라’라는 단어를 통해 참으로 깊은 영적 의미를 마주하고 계십니다. 야곱이 누리는 마지막 축복의 핵심은 바로 ‘출애굽’입니다. 야곱은 자손들에게 “나는 너희보다 먼저 출애굽한다”라고 선포하며, 이것을 자신이 누리는 복이라 고백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애굽은 이 세상에 속한 것, 혹은 죄에 빠져 종노릇 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야곱은 이제 죄로 점철되었던 인생, 자기 힘으로만 살려 했던 과거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떠나려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지막 날을 가리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이미 이 영광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가끔 성도님들의 지친 표정을 뵐 때면 이 ‘영광’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느껴질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C.S.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거처를 지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아담하고 살 만한 집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거창한 궁전을 지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실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는 이미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 즉 우리 인생을 마치는 찰나에 완전한 영광으로 완성됩니다.
야곱은 지금 바로 그 복을 확신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언약의 백성들과 하나가 된다. 나는 영원한 기업을 받게 된다.” 야곱이 누린 이 확신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한 승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살아서 누리는 구원의 기쁨
야곱은 “나는 이제 영광의 자리로 나아간다.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간다”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야곱 개인의 복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여기에는 더욱 깊은 구속사적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은 사후에 시신이 되어 가나안에 들어갔으나, 훗날 그의 후손들은 어떠했습니까?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서 그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모세는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으나, 수많은 백성은 여호수아와 함께 살아서 약속의 땅을 밟았습니다. 야곱은 죽음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서 출애굽의 영광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차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대한 영적 진리를 시사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복은 단순히 사후에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야곱의 유해가 가나안을 향했듯 우리 또한 언젠가 영원한 본향에 이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출애굽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죄의 종노릇 하던 삶에서 해방되어, 살아있는 오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약속의 땅을 향해 걷는 것 자체가 성도가 누리는 생생한 복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죽어서만 영광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죽음 너머의 소망뿐만 아니라, 살아서 누리는 구원의 감격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교회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복을 노래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은 살아서 경험하는 실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영적 애굽에서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죽음의 재앙을 넘겼으며, 주님과 함께 홍해를 건너 세례를 받고 그분 안에 거하게 된 자들입니다.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의 신령한 음료와 만나가 되시는 주님을 먹고 마시며, 감사와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야곱이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복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서 누리는 현재의 복이 된 것입니다.
그 은혜의 결과로 이 땅에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교회의 지체로 삼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야곱은 죽어서야 언약의 백성 중 한 명으로 편입된다고 고백했으나, 여러분과 저는 살아있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위치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위중합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의 풍파에 휩쓸린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보곤 합니다. 흔히 교회의 세속화를 논할 때 지도자의 타락이나 재정적 부패, 혹은 기복주의적인 태도를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들도 세속화의 단면이겠으나, 목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심각한 세속화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관심’이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여느 기관이나 사회적 모임처럼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세속화의 시작입니다.
세상의 방식을 넘어선 교회의 관계
우리는 세상에서 체득한 인간관계의 방식을 교회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미운 사람은 보지 않으면 그만이라 여기고, 내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성향이 맞는 사람, 나를 즐겁게 해주는 이들과만 시간을 보내려 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마음임을 이해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 안의 모든 관계를 넉넉히 감당하라 명하셨고, 그 일을 능히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며 우리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몸소 고백했습니다. 그는 성도들의 슬픔에 함께 울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여겼습니다. 오죽하면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어줄 수 있을 정도라고 확신할 만큼, 그는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생 말년을 기록한 디모데후서를 보면 가슴 아픈 토로가 나옵니다. “누구는 나를 떠났고, 또 누구도 나를 떠났다.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라고 말하며,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겉옷과 성경책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합니다. 제가 바울의 처지를 동정하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교회의 연합을 지키는 일이 지난하고 치열한 영적 전투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갈라섰던 마가를 다시 부르고, 하나님 안에서 동역하는 기쁨을 회복합니다. 비록 상처 입고 외로울지라도 성도들을 끝까지 ‘한 가족’으로 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인간이 나눌 수 없다는 진리를 바울은 너무나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과 교회의 참된 표지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성도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 되는지, 때로는 교회가 서로를 찌르는 가시가 되어 얼마나 힘겨운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분열의 골이 깊었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교권이나 성향에 따라 파벌이 나뉘고, 심지어는 ‘예수파’라는 이름으로 당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바울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겪고 계신 고난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 고난의 신비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모든 상황을 묵묵히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길을 위해 끝까지 경주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참기 어려운 일과 속상한 일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그 고통 속에서 육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구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진정한 표지를 ‘말씀의 바른 선포’, ‘성례의 바른 집행’, 그리고 ‘권징의 바른 시행’이라 가르쳤습니다. 교회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내 감정의 만족 여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연약함이나 지체들의 부족함 때문에 공동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교회가 여전히 주의 말씀을 붙잡으려 분투하고 있다면 그곳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만약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완전히 이탈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교회의 표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지 않는 곳이라면, 그때는 단호하게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찾아 나서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씀으로 서로를 교정하고 세우는 치리
교회가 말씀의 토대 위에 견고히 서 있다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법이 온전히 시행되도록 함께 진력해야 합니다. 흔히 '치리'라고 하면 당회에서 특정인에게 벌을 내리거나 성찬 참여를 정지시키는 엄격한 행정 절차만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칼뱅이 제네바에서 시행했던 치리의 실상을 살펴보면, 그 핵심은 우리가 으레 짐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치리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경청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길을 돌이키는 '자기 교정'의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가는 것, 그것이 곧 치리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성도 간의 교제 속에서, 혹은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다가 "내가 이 말씀을 오해했었구나.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구나"라고 고백하며 서로를 용납하는 일, 그리고 상대방에게 "맞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가야 할 옳은 길입니다"라고 부드럽게 권면하는 모든 과정이 치리의 중추를 이룹니다.
제가 속한 PCA 교단을 비롯하여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건전한 교단의 헌법에는 이 원리가 명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을 매개로 개인적으로, 또한 은밀하게 서로 권면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당회는 결코 공식적인 권면을 시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규정한 정당한 절차이자 질서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난 주님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아무도 모르게 찾아가 조용히 권면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만일 그가 그 권면을 듣고 돌이킨다면, 당신은 비로소 잃어버릴 뻔한 형제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처럼 사랑의 법 안에서 서로를 말씀으로 바로 세워주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권징이자 치리입니다.
한 형제를 얻기 위한 사랑의 권면
그럼에도 그가 권면을 듣지 않고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증인을 동반해야 합니다. 그래도 결의를 굽히지 않는다면 중재할 수 있는 이와 함께하고,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 비로소 교회, 즉 당회와 같은 치리 기관에 알려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치리할 때 반드시 이 절차를 준수해야 합니다. 앞선 단계의 사랑 어린 권면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결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스스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그 진리를 배웠음에도 마음이 온전히 순종하지 못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주여, 저의 마음을 주의 말씀으로 통치하여 주옵소서. 저는 여전히 제 감정과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 말씀을 겸손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이러한 원리를 올바르게 시행하기 위해 부단히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권면과 치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발적으로 변화되는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만약 이러한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 교회는 성도와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세우신 치리 기관을 통해 잘못된 것을 드러내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당회는 바로 그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누가 잘못했으니 무조건 벌을 주어야 한다”라는 태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치리의 원리가 아닙니다. 성경적 치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떡하든지 한 형제라도 더 얻는 데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진심으로 회개하여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들추어 끝까지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과오를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결여된 치리는 결코 진정한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으셨고, 그 거룩한 부르심을 통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비록 현실 속에서 마음 답답하고 고단한 상황을 마주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끝까지 어떻게 인내하셨는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어떻게 눈물 흘리며 간구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이 교회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또한 교회를 위한 사랑과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야유회를 떠납니다. 이 교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지역의 교회로 부르셔서 한 지체가 되게 하셨다는 소중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다양한 지체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하나의 몸이며, 여러분 각자는 그 몸을 이루는 다양한 지체들입니다. 어떤 분은 눈이 되고 어떤 분은 귀가 되며, 또 어떤 분은 다리나 팔, 혹은 손가락이나 손톱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간혹 "나는 손톱처럼 작은 지체는 원치 않는다, 최소한 목 정도의 중추적인 직분은 맡고 싶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을 굳이 나무라지는 않겠으나, 목이라는 자리는 가장 무거운 머리를 온종일 지탱해야 하는 참으로 고된 자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나, 때로는 참으로 연약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손은 손이로되 말을 잘 듣지 않는 손일 수 있고, 발은 발이로되 깊이 상처 입어 다친 발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그 지체를 우리 몸에서 잘라낼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이 내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이상, 어찌 함부로 잘라내겠습니까? 당연히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아 보호하고, 다리에 깁스를 해서라도 절름거리며 함께 걸어가야 하는 것이 몸의 섭리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공동체와도 질적으로 다른 곳입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랑과 인내의 원리가 작동하기에 때로는 어렵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붕대로 감싸 안으며 끝까지 함께 나아가야 할 단일한 몸입니다.
하늘의 보석같이 아름다운 성도들
교회가 세상과 그토록 구별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전혀 다른 하늘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그 다름 때문에 교회가 아름답다고 증언합니다. 하늘의 예루살렘 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모든 보석이 박혀 있고 정금 길로 이루어진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바로 성도 여러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의 길을 걷고, 아픈 상처를 품으며, 그 힘겨운 순간들을 주님 안에서 인내로 승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 골짜기에서도 주님을 찬송하며 예배를 드렸기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참으로 아름다운 자들이라 부르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완수할 주인공으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거룩한 부름을 받은 자들이며, 참으로 깊은 신앙의 자리에 서 계신 분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야곱은 죽어서야 그 복을 멀리서 조망하였을 뿐 생전에 교회 한번 출석해 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결속된 한 몸의 공동체를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연약했던 이스라엘조차 끝까지 수호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여러분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찌 여러분을 보호하지 않으시며, 어찌 여러분의 손을 놓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영적 출애굽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약속의 성취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서로를 귀히 세우고 사랑하며 서로의 허물을 덮어줍시다. 동시에 주의 말씀으로 서로를 정결하게 합시다. 주의 말씀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없이 말씀 앞에 겸손해지십시오. 사람 앞에 서서 서로를 비교하지 마시고, 누가 더 우월한가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서서 그 인도하심을 따르는 아름다운 ‘하늘의 보석’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의 통치 아래 누리는 평강
그 말씀이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여러분의 심령이 부유해지며, 오직 그 말씀 덕분에 내가 살고 있음을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말씀에 의지하여 형제의 허물을 덮어줄 때 나 자신이 먼저 정결해지는 것이며, "아, 이 연단의 과정을 통해 내가 이만큼 성장하는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성도의 삶을 관통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저 "우리 교회에 오니 마음이 편해서 좋습니다"라는 고백에만 머물러 있다면, 계속 그 자리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왔더니 어려운 일도 없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저 즐겁기만 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소 동떨어진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유익을 나누는 친목 단체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교회 안에는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고, 기꺼이 감당해야 할 짐이 있습니다. "내가 저 지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하는 치열한 고민과 영적인 갈등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아무 문제 없이 좋다"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는 주님을 따라 짊어져야 할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다소 무거운 말씀을 드리고 있으나, 이것이 진리입니다. 참된 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마주하게 마련입니다. 일부러 고난을 구하며 기도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삶에 아무런 부딪힘이 없다면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가? 어찌 세상을 살아가며 칭찬만 받는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지내며 어찌 갈등 없이 즐겁기만 한가?" 혹시 내가 보고 싶은 사람, 호감을 느끼는 이들만 선별하여 만나고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백성으로 사는 삶
여러분 주위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을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거룩함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애굽의 삶을 그리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던져주는 욕심과 성공, 그리고 찰나의 칭찬만을 갈구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더 이상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소유를 늘리는 일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삶의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고, 그 헌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살아갑니다. 야곱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아를 바라보았기에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하고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던 자가 언약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야곱이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변화되었다면,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여러분은 더욱 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진리를 알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숙의 길을 배우고 계신 줄 믿습니다.
섬김과 희생으로 증명하는 그리스도인의 현실
우리는 이 땅에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며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세상의 유혹과 죄의 권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원리를 잘 아실 줄 압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그렇게 살다가는 도태됩니다. 어떻게 남들에게 늘 지고, 빼앗기고, 주기만 하며 살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세상을 버텨내기가 참으로 고단하고 힘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주하는 현실은 늘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을 먹고 사는지, 무엇을 소유했는지, 어떤 집에 살며 어떤 직함과 자리를 가졌는지, 그리고 어떤 차를 타는지와 같은 것들이 여러분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현실적인 질문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당신은 누구의 백성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누구이며 지금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진정한 기쁨입니까?”가 성경이 말하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주신 교회의 지체입니다. 누군가는 손이고 발이며, 또 누군가는 눈과 귀입니다. 살다 보면 지체끼리 서로 원망 섞인 소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눈아, 너 정말 제대로 안 볼 거야? 너 때문에 내 발톱이 다 빠졌잖아.” 혹은 “귀야, 너 제대로 안 들어? 네가 듣지 않으니 상황이 이렇게 됐잖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가 화가 나 정말로 듣지 않기로 마음먹거나, 눈이 성이 나서 “나 이제 눈 감고 살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단순히 발톱 하나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체가 서로를 외면하고 기능을 멈추는 순간, 결국 서로를 해치며 공멸하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보듬고 깨끗하게 하는 지체들의 사랑
귀가 안 들리는 것 같아도 결국 들을 것은 다 듣고 가는 것이며, 눈을 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실눈이라도 뜨고 앞을 보고 가는 것이 우리 지체들의 모습입니다. 심장이 멈춘 듯 보여도 맥을 짚어보면 여전히 피를 열심히 박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 중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 모든 지체가 모여 바로 ‘우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를 정결하게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대를 가르치라는 지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얼마나 귀중한지, 그 말씀으로 인해 내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삶으로 증명하라는 권면입니다. 물론 억지로 하려 하면 한계에 부딪힐 것입니다. 이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누릴 때에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은혜로부터 소원해져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그분과 동행하며 살아가는데,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지체이며, 동시에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은 상속자들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 땅을 거쳐 간 그 어떤 이보다도 여러분은 가장 성공한 부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기에 여러분보다 더한 부자는 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소유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유혹 속에서도 끝까지 죄와 맞서 싸울 힘을 가진 사람들이며, 비틀거릴지언정 참된 회개를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타락해 가는 이 세상 속에서 물들지 않고 다르게 설 수 있는 존재들이며, 마침내 그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단지 관념적인 믿음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하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하신다는 진리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참된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담대히 선언하는 자들입니다.
주님, 우리의 인생을 다스리는 실체가 무엇인지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이 방황할 때마다 주님께서 중심을 바로잡아 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복을 누리고 있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주의 언약의 백성들과 한 몸을 이룬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아 누리는 자들이며,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을 걷는 자들입니다.
주여,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마음 깊이 새기게 하시고, 오직 그 진리 안에서 힘 있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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