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0장 7절부터 14절 까지 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아이들과 양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때가 심히 컸더라. 그들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강 건너편이더라.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무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아멘.
 
슬픔을 마주하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
오늘 우리가 마주한 이 본문은 야곱의 임종 이후, 요셉과 형제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에 이르러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눈 야곱의 유언과 죽음이 오늘 본문과 하나의 짝을 이루며 신앙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슬픔은 때때로 지나치게 부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죽음의 문턱에서 깊이 슬퍼하거나 힘겨워하는 지체들을 향해, 누군가는 그 모습이 신앙인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여길 때가 있는 듯합니다.
 
물론 그들을 위로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겠지만, 우리는 대개 “이제 그만 슬퍼하십시오”, “믿음으로 힘을 내서 이겨냅시다”라는 식의 조언을 건네곤 합니다. 진심 어린 배려와 사랑이 담긴 권면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 믿음이 있다면 다른 이들보다 상실의 아픔을 더 신속히 이겨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믿음이 깊을수록 슬픔의 눈물을 빨리 거두고 웃음을 되찾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이라는 것의 본질과 인간의 감정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회복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다루시고 그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과정, 때로는 슬픔을 이기게 하시거나 역경을 극복하게 하시는 모든 역사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대원칙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각 사람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현될 때, 그 방식은 실로 신비롭고 다채롭습니다. 단 한 사람도 똑같은 경로를 걷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조언할 때 신중해야 합니다. 동일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나누는 간증은 분명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하지만 나의 경험이 타인의 신앙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돌보시고 인도하며 이끄시는 손길은 단순히 차이가 있는 정도를 넘어,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신비롭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5년 혹은 6년이라는 긴 인고의 여정을 거치며 슬픔과 아픔을 서서히 극복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회복의 빛을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회복에 걸린 시간의 길고 짧음이 아닙니다. 혹은 어떤 방식으로 치유되었느냐는 방법론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 모든 시간과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함께 걸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겪는 슬픔이 아무리 깊다 한들, 주님 곁에 이르는 날 우리는 모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비록 육신을 입고 이 땅을 떠나는 그 찰나는 힘겨울지 모르나, 주님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 우리는 영원한 안식에 들게 됩니다. 또한 지금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 역시 제 모습을 보며 자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그분이 빚으신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상속받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슬픔이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결국은 영원한 기쁨의 바다로 들어가게 될 존재들입니다.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함께 걷는 교회의
슬픔의 기간이 짧으냐 길으냐를 잣대 삼아 신앙의 깊고 얕음을 논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이의 삶을 평생토록 낮추어 두기도 하십니다. 오늘 예배의 마지막에 부를 찬송의 작시자 크로스비(Fanny Crosby) 여사를 보십시오. 어린 시절의 사고로 시각을 잃은 뒤, 1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긴 인고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이 그녀를 어떻게 회복시키시고 치료하셨는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머물게 하셨는지는 감히 누구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적 경험이나 그로부터 도출된 주관적인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고난받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어떻게 용납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새롭게 하시고 바르게 세워가실지를 기대하며 끝까지 곁을 지키는 것이 본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바른 태도입니다. 물론 이는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닙니다.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영적 요소가 얽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세우기도 하고, 때로는 준엄하게 꾸짖으며 우리를 쇄신합니다. 때로는 형제와 자매를 통로 삼아 우리를 바른길로 돌이키게 하시고, 또 어떤 때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위로를 부어주십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유기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께서 목표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형상으로 조금씩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의미이자 지고한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존재가 “너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며, 그 길을 홀로 가게 두지 않고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말합니까? 어떤 때는 징계를 통해, 어떤 때는 환희를 통해, 또 어떤 때는 말할 수 없는 위로로, 심지어는 우리와 함께 울고 웃으며 그 길의 끝까지 인도하는 신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바침과 섬김, 예배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에 대해 묵상하며 배웠듯이, ‘예배’라는 말의 기저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이 믿음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나를 예배하고 모든 경배를 바치라”고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실로 경이로운 선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를 낮추사 종의 형상을 입으신 주님,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거짓 신이나 우상도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이며, 우리를 위해 오신 주님만이 보여주신 신비입니다. 이 놀라운 일이 이미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살펴보겠지만, 그에 앞서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껏 기뻐해도 좋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약속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인생의 종착역이 결국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이라는 이 확신보다 더 영광스러운 약속은 없습니다.
 
혹시 속으로 ‘설마 내가 예수님을 닮게 될까, 그저 상징적인 말씀이겠지’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조금 후에 성경 구절을 함께 읽으며, 우리의 짐작이 맞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슬픔의 공감, 성숙한 믿음의 시작
슬픔을 마주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함께 울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정답을 제시하려 합니다. “이제 그만 슬퍼하십시오”, “주님이 함께하시니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건네고 싶어집니다. 물론 견고한 믿음은 우리에게 답을 주며, 그런 신앙 고백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믿음은 동시에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능력을 수반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공감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비록 말로는 쉬워 보이나,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저 역시 말씀을 나눌 때는 ‘그렇게 해야지’라고 다짐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실수를 하곤 합니다. 오랜만에 교회에 나오신 분이나 멀리 여행을 다녀오신 분을 만났을 때, 우리가 흔히 건네는 인사가 무엇입니까?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오셨어요?”입니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관심과 배려가 담긴 인사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내가 온 것이 반갑지 않은가?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나?”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말하는 이의 의도는 선할지라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세심하게 배려해야 하며, 조급하게 위로의 답을 내놓기보다 묵묵히 함께 울어주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진정한 공감과 슬픔을 함께하는 믿음
저 또한 그런 실수를 자주 범하곤 합니다. 가끔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에 뵈어서 얼굴을 잊어버릴 뻔했습니다”라고 인사할 때가 있는데, 돌이켜보면 이 역시 듣는 이에게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그대로 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정말 반갑습니다. 그동안 참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진솔하게 이야기했다면 우리의 마음이 훨씬 더 따뜻하게 전달되었을 텐데,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마음을 돌려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전해야 할 진심이 온전히 가닿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슬퍼하는 이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라는 성경의 귀한 원리들이 우리 삶 속에서 먼저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를 위로하는 그 행위가 형식에 그치지 않고 실제가 되어야 함을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물론 성도가 슬픔에만 함몰되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상실의 아픔과 깊은 고뇌를 너무 쉽게 지나치려 하거나, 성급히 잊으라고 종용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하라”고 명하신 뜻을 헤아려 본다면, 우리는 지체의 회복을 위해 조금 더 오래 곁을 지키며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는 것처럼 나도 그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슬픔을 충분히 대면하는 믿음의 시간
믿음은 분명 슬픔을 극복하게 하는 동력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의 깊은 상실을 공감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요셉은 무려 70일 동안 애곡했습니다.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40일의 기간을 포함하여, 그들은 꼬박 70일간 슬픔을 쏟아냈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이동하는 2~3주의 시간을 더하면 이미 두 달을 훌쩍 넘긴 시간입니다. 장지에 도착해서도 요단강 건너편에서 7일 동안 다시금 심히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치면 석 달이 넘는 긴 시간입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그토록 오랜 시간 슬퍼할 수 있는가”라고 의아해할지 모르나,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는 슬픔을 억지로 억누르지 않고 충분히 표현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과 마음 깊이 고통을 나누고, 그 아픔을 함께 견뎌내는 인내의 과정이야말로 성경이 보여주는 참된 애도의 모습입니다.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신앙의 공동체
저는 여러분께 장례 절차를 무작정 길게 가져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혹시 타인의 슬픔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그저 신속히 지나가야 할 일로만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아픔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며, 참으로 아픈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러 사정 속에서 각기 다른 슬픔과 고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정말 아픈 일이군요”라고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만약 나에게 저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슬플까’를 먼저 헤아리며, 신앙적인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함께 울고 아파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합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애굽의 동료들은 그 슬픔의 시간을 기꺼이 함께했습니다. 그것이 남겨진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겠습니까?
 
야곱의 출애굽, 약속의 땅을 향한 거룩한 상승
이 ‘슬픔’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표현은 지난주에도 언급했던 ‘올라간다’는 단어입니다. 본문을 읽으시며 반복되는 이 표현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올라간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올라’입니다. 번제가 연기가 되어 하늘로 향하듯, 이 단어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는 거룩한 상승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올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한다는 뜻을 넘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출애굽’의 언어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핵심은 단순히 시신을 옮기는 장례 행렬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물리적인 장소만이 중요했다면, 야곱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부탁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육신의 장막을 벗는 순간, 그의 영혼은 조상들과 함께 하나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내 육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한 것은 지극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후손들에게 무언가를 가리키고, 동시에 강력하게 확신시키려는 신앙적 선포입니다.
 
그 선포의 실체는 바로 “너희 역시 머지않아 저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의 장례 행렬을 ‘야곱의 출애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던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야곱의 마지막 여정을 통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반드시 이끌어내시겠다는 언약의 그림자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야곱의 출애굽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이 '야곱의 출애굽'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애굽에는 시신을 처리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박물관에서 마주하는 미이라가 그것입니다. 정교하게 보존된 미이라를 보면 당시의 기술에 감탄하게 되지만, 사실 애굽에서 미이라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가 최고위층에 속했음을 의미합니다. 막강한 부와 권력을 지닌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백성들은 시신을 씻어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로 남아 있지는 않기에, 영구히 보존된 미이라가 우리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결국 미이라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 가문의 부와 권세, 그리고 종교적인 위상을 상징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오시리스(Osiris)를 숭배했습니다. 그들의 사후 세계관에 따르면, 영혼이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 동안 수많은 역경을 겪게 되는데, 이때 육신의 형태인 미이라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야 영혼이 길을 잃지 않고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육신을 영혼이 거하는 영원한 집으로 여겼기에, 미이라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것을 지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미이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셉은 과연 무엇을 신뢰했던 것입니까? 요셉이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과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요? 혹은 요셉이 세속화되어 신앙을 저버리고 애굽의 이교도적인 종교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일까요?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볼 때, 요셉은 단 한 번도 애굽의 우상에게 무릎을 꿇거나 그들의 신앙을 추종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오히려 정반대의 영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이라는 애굽 최고의 의술과 문화적 성취, 그리고 영생을 향한 그들의 종교적 염원이 집약된 최고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넘어선 신앙의 목적
야곱을 미이라로 처리한 것은 결코 그에게 세속적인 권세를 부여하거나, 요셉의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을 향한 정반대의 선포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당시 애굽이 가장 자부하던 최고의 기술과 문화, 그리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종교적 의미를 집대성한 그 결정체가 요셉에게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그것은 오직 야곱의 유해가 가나안에 당도하기까지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 그 이상의 가치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애굽의 모든 지식과 부, 그리고 찬란한 문명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단순한 기술적 수단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관점에서 볼 때, 애굽의 모든 영화는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여정을 돕는 ‘방부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방부제의 용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빵이나 과자를 사면 그 안에 작은 방부제나 방습제 봉투가 들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음식 안에 직접 섞지 않고 별도로 담아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직 음식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봉투에는 항상 “먹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아이가 포장을 뜯고는 정작 먹어야 할 빵은 제쳐둔 채, 방부제 봉투를 뜯어 먹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혼비백산하여 “얘야, 그건 먹는 게 아니야!”라며 말릴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이와 비슷한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물질이나 지위, 세상의 자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하고 드러내기 위해 주신 일종의 ‘방습제’요 ‘방부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의 복과 거룩은 맛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위해 잠시 허락된 방습제를 입에 넣으며 “이것이 최고다, 이것이 내 삶의 가장 맛있는 양식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약속의 가나안을 향한 화려한 여정
이 세상, 즉 애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수많은 혜택과 최고의 기술, 막강한 능력을 목도할 때 우리는 쉽게 흔들리곤 합니다. 하나님도 좋고 믿음도 귀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그래도 돈이나 성공만큼 확실한 것은 없지”라고 속삭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해도, 우리의 삶은 정작 영원한 양식보다는 방부제와 방습제를 모으는 데 더 열중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주시려는 약속의 땅은 망각한 채 말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 지점에서 세상과는 정반대의 가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모든 영화,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성취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허락된 방습제요 방부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세상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 요셉의 여정을 통해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야곱의 장례 행렬을 보십시오. 참으로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애굽의 모든 원로와 고위 관리들이 동행했으며, 병거와 기병까지 동원되어 군대가 호위하는 위풍당당한 행렬이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에 이르러 이 행렬을 가리켜 “심히 큰 떼”라고 묘사합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장례를 위해 길을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화려함에 매료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장례 행렬이 ‘어떤 경로’를 택했느냐는 점입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고 싶었다면 어떤 길을 택했겠습니까? 애굽에서 가데스 바네아를 지나거나 해변 길을 따라 곧장 가나안으로 입성하는 평탄한 경로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헤브론으로 직행했다면, 가는 길목마다 가나안 족속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길을 지났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과연 애굽의 총리가 되더니 요셉의 위세가 대단하구나. 우리와 함께 거류하던 야곱이 어쩌면 저토록 큰 성공을 거두어 돌아왔는가!” 죽음조차 성대한 장례 행렬로 치장된 그 겉모습만을 보며 감탄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그 화려함이 성공의 증거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뒤로하고 약속의 땅으로
세상의 시선으로 본다면 요셉은 가장 화려한 길을 택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장례 행렬이 요단강 건너편으로 우회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경로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곳입니다. 바로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여정 끝에 가나안으로 입성하던 바로 그 길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들을 보냈으나 불신앙으로 인해 40년을 방황한 끝에, 결국 돌아 들어갔던 그 상징적인 경로를 요셉은 지금 미리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애굽에서 거둔 성공이나 장례 행렬의 화려함을 과시하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의 초점은 자신이 누리는 권세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이 서린 가나안 땅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곧은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함으로써, 이 여정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야 할 ‘언약의 성취’를 예표하고 있음을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곳에 이르러 7일 동안 다시금 심히 애곡하며 슬픔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결국 막벨라 굴에 들어간 것은 애굽의 군대가 아닌 요셉과 그의 형제들뿐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의 군대를 앞세워 입성했다면 얼마나 위세가 당당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를 땅 한 평 없는 나그네라 업신여겼으나, 이제 보아라. 애굽의 군대가 우리를 호위하고 있다”라고 외치며 금의환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세상의 힘을 경계에 머물게 하고, 오직 하나님이 부르신 약속의 자손들만이 거룩한 땅에 들어간다는 신앙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함께 왔던 애굽 사람들 또한 그곳에서 크게 애통하였기에 그 땅 이름이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는 뜻의 ‘아벨미스라임’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들은 슬퍼하며 동행했으나, 언약의 핵심인 막벨라 굴에 들어가는 영광에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요셉과 그의 가족들만이 그 거룩한 안식에 동참했습니다.
 
화려한 장례 행렬은 분명 애굽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요셉의 의도라기보다는 애굽 왕 바로가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요셉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세상에 공포하려 했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모든 세상의 영광을 뒤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언약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빚어지는 약속의 사람
요셉은 눈부신 권력과 명예, 그리고 막대한 부를 소유했으나 그 모든 것을 단지 '방부제'나 '방습제'처럼 대했습니다. 그의 진정한 관심은 화려한 애굽의 궁정에 있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방부제가 본연의 음식을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시고 허락하신 시간과 물질, 건강, 그리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은사와 복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원은 우리를 보존하고 훈련시켜, 결국 하나님의 귀한 약속의 말씀을 상속받게 하려는 도구입니다. 당신이 바로 '약속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인생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여러분을 그분의 사람으로 세워 가십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저 별들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드시고, 매일 마주하는 새벽과 저녁의 노을을 신비롭게 빚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과 저를 이토록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놀라움을 맛보게 하며,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누리게 하려는 통로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영광스러운 존재
이제 우리는 이 여정의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좇아 애굽의 행렬을 뒤로하고 오직 그들만이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애굽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에 속한 자임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선포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좋은 구절로만 여기지 마시고, 여러분의 존재를 정의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약속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성경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비천하고 낮은 몸을 주님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체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바라보았던 소망이며, 오늘날 우리가 이 거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하늘의 시민권과 영광의 몸을 입는 소망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많은 분이 하나님 안에서 이러한 다짐으로 신앙생활을 하곤 합니다. “내가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지.” 그렇게 결단하며 좀 더 괜찮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 혹은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더 나은 신앙의 모습을 갖추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계발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누구에게도 뒤처지기 싫어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기에, 더 선한 사람,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 애씁니다. 지성뿐만 아니라 인격까지 겸비한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쪼개어 공부하고 수양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력이 그들과 비교하여 무엇이 다릅니까? 단지 우리는 그 목표를 '예수님'으로 설정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노력할 뿐인 것입니까?
 
성경은 과연 그것만을 말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은 어쩌면 여러분에게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너를 영원한 영광의 몸의 자리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하리라.” 이는 고린도전서 15장에도 기록된 약속입니다. 단순히 겉모양인 몸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존재 자체를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인 ‘영광의 교리’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 우리는 신비로운 영광의 몸을 입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들으셨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이런 질문을 던지셔야 합니다. “어차피 나중에 그렇게 완벽하게 변화될 것이라면, 굳이 이 땅에서 그렇게 애쓰며 살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그렇게 착해지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 질문이 터져 나와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어느 날 나를 그토록 놀라운 영광의 자리로 바꿔주신다면, 왜 여기서 힘들게 절제하며 삽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그날 ‘짠’ 하고 변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는 의문이 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삶으로의 부르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목적은 단순히 우리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괜찮은 인간'이 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결코 떨쳐내기 힘든 지독한 자기중심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훌륭한 신앙인들조차 때로는 이런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나는 남보다 더 나은 신앙을 갖고 싶다”라는 열망 말입니다. 물론 그 순수한 동기는 이해하지만, 자칫하면 ‘신앙이 좋은 나’ 자체에 몰입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아니라, 근사한 신앙을 소유한 내 모습에 만족하며 타인과 비교하거나 스스로 대견해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누가 감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영적인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쟁취하고 노력해서 얻어야 할 그 영광스러운 변화를 가리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의 마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자녀가 그저 기계적으로 훌륭해지기만을 바랍니까?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걸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고백은 명확합니다. 내 인생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연약할 수밖에 없고, 내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끼리 비교하면 조금 더 도덕적이고 온전해 보일지는 모르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임을 처절하게 고백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를 어여삐 보시며 나와 동행해 주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에 끊임없이 절망할 수밖에 없으나, 그렇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는 삶, 나를 붙드시는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는 삶을 우리는 한마디로 이렇게 부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의 교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혹여 '내 안에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열정이 남아 있을까'라고 회의적인 마음이 드신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지피신 거룩한 불꽃이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견뎌오신 권사님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그 사랑의 불씨가 살아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드라마를 보며 함께 울고 웃으며 타인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시는 그 마음이 바로 여러분 안에 사랑의 역동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 성령의 불꽃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너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영광스럽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풍성한 사랑 안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며,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은 곧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더 이상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지고한 기쁨이 됩니다. 연애의 감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삶의 동력이 될 때, 주의 법을 따르는 것은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이 됩니다.
 
신앙이란 나의 완벽함을 증명해 내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철저한 연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을 더욱 간절히 의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판단할 때 타고난 환경이나 성격을 보며 "저 사람은 유복해서 성격이 원만하다"거나 "고생을 많이 해서 예민하다"는 식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인간적인 조건과 형편을 뛰어넘어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빚어가십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참된 신앙의
우리는 흔히 어린 시절의 고통이나 환경이 성인이 된 이후의 인격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인인 것처럼 오해하곤 합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이해하려는 방편으로 그런 통계적 근거 없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배경과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보십시오. 주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증명하거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 하늘의 능력을 사적으로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무엇이든 쉬웠겠지, 우리와는 다르지 않나”라고 변명할 우리를 위해, 주님은 스스로를 낮추어 종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내 뜻대로 살지 아니하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모든 일을 감당하노라.”
 
예수님의 순종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 때, 주님은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느끼는 고통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옳음을 신뢰하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고, 배고픔과 분노, 눈물을 경험하셨습니다. 죄가 없으실 뿐,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셨기에 우리의 ‘첫 열매’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도 주님처럼 의지하며 살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리라.” 성령 하나님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의지하여 승리하신 그 본을 직접 보여주셨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보다 자신의 능력과 상황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자랑을 배설물로 만드는 주님의 보호하심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성령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참된 신앙의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여러분 또한 이 세상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려 애쓰기보다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보호하심으로 우리를 둘러싸십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것일지라도 우리를 연단하고 보존하는 ‘방습제’와 ‘방부제’의 자리로 내려놓게 하십니다.
 
세상의 그 무엇이 아무리 귀하고 아름다울지라도,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는 결국 배설물과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통하여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십니다. 참으로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나, 결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는 때때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저희에게 주시는 그 보배로운 선언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간절히 바라오니, 이 시간 저희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다시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주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참된 구주가 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와 연합하셔서, 친히 이 땅을 사셨던 그 거룩한 삶의 발자취를 저희도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도 여전히 저희를 도우시며 눈물로 간구하시는 그 크신 사랑을 저희가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기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여, 현실의 벽 앞에 자칫 포기하기 쉬우며, 시시때때로 나 자신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겨 흔들리는 저희에게 하늘의 새 힘을 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당당히 걷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165-광야에서-Part 2  (0) 2026.01.29
창세기-164-광야에서-Part 1  (0) 2026.01.27
창세기-162-마지막 축복  (1) 2026.01.24
창세기-161-사랑을 입은 자  (0) 2026.01.20
창세기-160-풍성한 자  (1) 2026.01.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