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 27절과 28 말씀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그들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아멘.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인가 물어뜯는 이리인가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냐민에게 임한 축복을 살펴본 , 본문 끝자락에 기록된 “각 지파에게 이와 같이 축복하였더라”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우리가 읽어왔듯이, 때로는 축복처럼 들리지 않는 예언들이 야곱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어떠한 영적 교훈을 우리에게 남기는지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대단원의 마지막으로 먼저 베냐민을 보겠습니다.

 

베냐민은 본래 라헬이 산고의 고통 끝에 목숨을 잃으며 낳은 아들입니다. 죽어가는 어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의 ‘베노니’라 지었으나, 야곱은 이를 거두어 ‘베냐민’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아들은 오른팔이며, 힘의 근원이다”라고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베냐민을 향해 “물어뜯는 이리”, 늑대라고 칭합니다. 이는 매우 강렬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은유입니다. 사실 베냐민은 이스라엘 지파 수적으로 가장 작은 지파였습니다. 시편 기자조차 그들을 일컬어 ‘작은 베냐민’이라 직접적으로 불렀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작다고 해서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예언한 ‘물어뜯는 늑대’라는 표현처럼, 그들은 매우 용맹하고 저돌적인 지파로 성장하게 됩니다.

 

작지만 강한 베냐민 지파의 용맹함

실제로 성경 역사 속의 걸출한 인물들 중에는 베냐민 지파와 깊은 인연을 맺은 이들이 많습니다. 사사기의 용사 에훗이 그러하며, 이스라엘의 초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전쟁에 능한 용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광채에 가려 사울을 과소평가하기도 하지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노래에서 보듯 명의 적을 감당하는 또한 실로 대단한 기상입니다. 특히 요나단은 소수의 특공대를 조직해 블레셋 진영을 격파할 만큼 담대한 전사였습니다. 이처럼 베냐민은 작지만 강한 기상을 품은 지파였습니다.

 

용맹함 이면에 감추어진 탐욕의 경고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부분은 27절의 전체적인 묘사입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눈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용맹함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빼앗은 것’을 먹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분복에 만족하지 않고 타인의 것을 탐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이는 통제되지 않는 탐욕에 대한 경고입니다.

 

늑대는 사납고 용맹할 뿐만 아니라, 지독히 탐욕적입니다. 얼마나 먹는 일에만 몰두하는지 음식을 나눌 틈조차 없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기보다 저녁까지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베냐민 지파의 내면에 잠재된 강한 소유욕과 독점적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늑대는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양들을 공격하고 보호하지 않는 거짓 목자들을 늑대에 비유하셨고, 구약에서도 타락한 종교 지도자나 악한 관원들을 묘사할 이리의 이미지를 자주 차용하곤 합니다. 스바냐서는 이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라. 이처럼 움킨 것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끝까지 독식하려는 탐욕스러운 모습이 바로 성경이 경계하는 늑대의 본성입니다.

 

무너진 환대와 기브아의 영적 타락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상징에 머물지 않고 사사 시대의 실제 역사 속에서 비극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훗날 남북으로 갈라져 내전을 겪게 되지만, 이전에 발생한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처참한 동족상잔은 바로 베냐민 지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베냐민 사람들이 거주하던 기브아라는 땅이었습니다. 레위 지파의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 일부러 동족의 땅인 베냐민 지파의 고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비극은 예견되었습니다. 고을에 들어섰으나 누구 하나 나그네를 환영하거나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목 사회에서 단순한 결례를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이자 공동체의 영적인 타락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사생활을 존중하기에 낯선 이를 들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울 있으나, 성경의 시대에는 다릅니다. 물과 음식을 얻지 못하면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환경이었기에, 율법은 나그네를 반드시 선대하라고 엄히 명령합니다. 그러나 기브아 고을 전체에서 그를 맞이하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은, 공동체의 영적·도덕적 상태가 이미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서글픈 증거였습니다.

 

무법 지대에서 벌어진 참혹한 범죄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던 노인이 광경을 목격합니다. 없는 레위인의 사정을 들은 노인은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정성껏 대접합니다. 자체로는 참으로 귀한 장면이지만, 밤이 되자 상황은 완전히 뒤집히며 악화됩니다. 동네의 불한당들이 집으로 몰려와 레위 사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성적 폭력을 가하겠다고 말합니다. 집주인은 사람이 손님이니 그럴 없다고 필사적으로 거절합니다. 여기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도시에서 이런 소요가 벌어짐에도 재판관이나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 누구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기브아가 이미 법도 질서도 무너진 무법 지대였으며, 악이 공개적으로 활개 쳐도 아무도 제어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결국 레위인은 함께 자신의 첩을 내어주는 비정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밤새 고통당한 여인은 다음 아침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왔고, 레위인은 시신을 싣고 자기 집으로 향합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우리는 사사 시대가 정말 타락했음을 통감하는 정도로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 레위인은 더욱 참혹하고 무서운 일을 단행합니다.

 

시신이 편지와 최초의 내전

그는 여인의 시신을 열두 토막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각각 보냈습니다. 그대로 시신이 하나의 편지가 셈입니다. 그가 전하고자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나에게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고발이었습니다. 참혹한 소식은 이스라엘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고, 결국 동족끼리 칼을 겨누는 최초의 내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베냐민 지파의 위기

기브아 사건은 이처럼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40 대군이 베냐민을 공격하러 나섰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너희는 속히 해명하고, 잘못을 빌어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군대를 소집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완악함을 보였습니다.

 

전쟁 초기 양상은 뜻밖에도 베냐민의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번의 전투 번째와 번째 싸움에서 베냐민이 이겼고, 연합군은 4 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내며 대패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700명의 정예 특공대를 앞세워 연합군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차례의 패배 끝에 전략을 정비한 연합군은 번째 전투에서 마침내 승리하게 됩니다.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베냐민 사람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끝까지 추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이는 고작 600명뿐이었고, 그들은 광야 산속으로 도망쳐 숨어 지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지파를 보존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시점에 이르러 다른 지파 사람들의 태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비극이 일어났습니까? 어찌하여 오늘 이스라엘 가운데 지파가 사라지게 되었습니까?”라며 탄식하며 돌이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베냐민 지파를 다시 살리기로 결정합니다.

 

베냐민 지파가 멸망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끝까지 저항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강했거나, 먼저 회개하며 돌이켰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의 언약 때문에 베냐민은 보존될 있었습니다.

 

은혜의 역사는 훗날 흥미로운 결실로 이어집니다. 포로기 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전멸할 위기에 처했을 그들을 구원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바로 베냐민 지파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살려주셨는데, 훗날 하나님께서는 지파의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죄의 교묘함과 우리 내면의 영적 실상

그러나 베냐민 지파가 탐욕을 부리고 죄를 은폐하려 했으며, 끝까지 싸웠던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습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죄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죄에 깊이 빠져 있거나 죄의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이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곤 합니다.

 

오히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다윗조차 그러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죄를 지었음에도 1 동안 번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 그의 죄를 지적하기 전까지, 그는 아마도 자신이 왕으로서 누릴 있는 권리 정도로 여기며 죄를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죄는 이토록 무섭고 교묘하며, 우리의 내면에 비밀스럽게 침투합니다. 우리는 혹시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의 사례와 베냐민의 역사는 죄가 얼마나 우리의 영적 눈을 어둡게 만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 없이는 없는 존재인지를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징계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는 베냐민을 향한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베냐민을 멸망시키는 대신 징계를 택하신 것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단순히 벌을 주어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있지 않습니다. 그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빚어가는 것이 징계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계가 지닌 고유한 특징입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고난은 우리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과연 이런 분이시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자라나야 하며, 무엇을 깨닫고 죄가 무엇인지 깊이 알아야 하는구나”를 절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다윗과 베냐민이 경험한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는 죽이는 징계가 아니라 살리는 징계입니다. 베냐민은 바로 징계를 통해 진정으로 살아났습니다.

 

은혜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른 , 모세는 베냐민을 향해 놀라운 축복을 선포합니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물어뜯는 이리 같았고 탐욕스러운 늑대처럼 살았던 베냐민이, 징계를 거쳐 이제는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로 불리게 것입니다. 신명기 33장의 예언은 베냐민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분량대로 주시는 맞춤형 축복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다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라고 기록합니다.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신다는 것은 등에 업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나운 이리였던 베냐민이 이제 하나님의 등에 업힌 사랑받는 자녀가 것입니다. 겉보기에 야곱의 유언은 르우벤이나 시므온, 레위에게 저주나 심판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과정을 가리켜 분명히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의 축복에는 깊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복을 전달하셨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들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각자의 형편과 필요에 맞춘 ‘맞춤형 축복’입니다. 유다와 요셉의 복이 다르고, 르우벤과 단의 복이 서로 다르듯,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좋은 것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안에는 따끔한 징계와 엄중한 경고, 그리고 영적인 도전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운뿐만 아니라, 우리를 바르게 세우는 징계조차 하나님의 커다란 복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징계가 우리를 살리는 복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죄의 영향력과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은혜

야곱이 전하는 축복의 번째 특징은 우리가 처한 영적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죄와 완전히 무관한 삶을 것이라 오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끊임없는 시험과 유혹을 받으며, 때로는 죄인 줄도 모른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회개할 기회조차 잊어버릴 만큼 영적으로 무뎌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핵심은 죄의 영향력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걸려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결코 방치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건져내십니다. 이것이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전한 축복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복입니다.

 

스스로의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르우벤의 삶을 반추해 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장자였으나 정작 자신이 누리고 있는 복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가졌는지 모르니 기쁨을 상실한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무엇이라 부르시는지를 자꾸만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닌 세상의 잣대로 스스로를 정의하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떤 직장에 다녔으며, 지금 형편은 어떠하고 직업은 무엇인지가 마치 나라는 존재를 결정짓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조건들로 점철된 삶은 길어야 년도 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관점에서 , 고작 년의 시간으로 우리의 전체 인생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우리의 인생이 년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중 년은 사업에 실패하여 고생하고 모든 것을 잃었으나, 나머지 구백 년을 세상 최고의 부자로 살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사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습니까? 인생 실패자입니까, 아니면 부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잊어버릴 , 우리는 르우벤처럼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쁨을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내일의 성패나 오늘의 형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는 교만과 흔들리는 신앙

시므온과 레위의 모습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무자비했습니다. 상대가 할례를 받고 무방비 상태였음에도 용서를 베풀 몰랐던 이유는 그들에게 ''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어떤 종류든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우리를 없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이 자기 힘이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부유함이 있기에 “나는 부지런했고 남들처럼 대충 살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해서 돈으로 정당하게 살고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지하는 순간 우리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물질이나 건강이 흔들릴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가 가진 것들이 언제든 사라질 있는 유한한 것임을, 그리고 “내가 진작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가”를 고백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임한 하나님 나라의 약속

사실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당장 주머니에 있는 작은 돈이 "영원한 나라를 주겠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깝고 실재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만 누리는 막연한 곳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오늘부터 기쁨의 열매를 맺으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의 이야기가 죄로 끝나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을 단지 구원하시는 그치지 않고, 징계와 경고를 통해서라도 끊임없이 당신의 자녀로 빚어 가셨습니다. 은혜의 섭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은밀하고 파괴적인 죄의 실체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며 은밀하게 움직입니다. 타인의 허물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명백한 죄들은 우리 눈에 너무나 보입니다. “어떻게 저럴 있는가”라며 쉽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께서 말씀하신 속의 들보, 내가 지금 짓고 있는 죄의 모습은 발견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인지하든 하든, 죄는 자체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 인생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죄는 반드시 파괴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언제 스며들었는지 모를 의심과 불신을 심고, 상대방을 미워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죄는 우리의 욕심과 미움, 분노의 근원을 정확히 파고들어 “네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며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이처럼 교묘한 유혹 앞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고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애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 대신 시기와 질투, 불평과 미움이 싹트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정당하게 누군가를 미워할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미 정당하지 못한 죄인이기에 누군가를 정죄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잘못을 바로잡고 의를 추구하기 위해 애쓸 수는 있으나,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불쑥 솟아오르는 타인과 자신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나의 주관적 판단일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로 보기에 아무리 옳다 해도,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 주께서는 형제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우리의 소중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함부로 말할 없게 되고, 끝까지 인내하며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로 승리하는 신비로운 지체 공동체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바로 서기 위해 끊임없이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의를 추구해야 의무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나 용서보다 더욱 깊이 새겨야 진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상처와 심각한 죄가 우리 안에서 기승을 부릴지라도, 어떤 아픔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길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존재입니다. 몸의 지체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탓하며 불평할 있듯이, 우리 안에도 서로에 대한 불만이 존재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결국 머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됩니다. 비록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연약한 모습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허물을 포함하여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길 없다고 가르칩니다. 모두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로 묶인 신비로운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놀라운 정체성을 붙들 ,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참된 교회로 서게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유혹과 진정한 기업 되신 하나님

죄의 영향력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에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끊임없는 유혹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곳에 평안이 있고 여기에 행복이 있다"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현혹하여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숭배하게 만드는 수많은 우상을 우리 앞에 세워둡니다.

 

스불론이나 잇사갈, 납달리와 아셀의 모습은 이러한 세상적 가치관을 투영합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믿을 것은 돈밖에 없다" 말이 자연스럽게 회자되곤 합니다. 친구도 환경도 나를 떠날 있지만 돈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미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시대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여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순간, 우리는 모든 자랑과 욕심이 결국 나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세상 풍조에 빠지는지 알고 계시기에, 동시에 우리가 자리에서 회복될 있는 또한 항상 열어두셨습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는 영원한 가치의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히 선포합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말씀은 단순히 시선을 위로 향하라는 외적인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영원한 관점에서 헛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는 영적인 요청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서 우리의 영혼과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짧은 인생을 살지라도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의 것들을 좇는 인생이 아니라, 참된 가치를 붙드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세상에서 거두어 하나님께 고정하라는 요청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 가장 소중합니까, 아니면 땅에서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되어 있습니까? 세상이 주는 찰나의 풍요보다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묵상하는 시선 속에 우리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평안이 담겨 있습니다.

 

고난의 시험 속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야곱의 축복이 지닌 번째 특징은 세상에는 고통과 유혹뿐만 아니라 환난이 실재하며, 시험 속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요셉과 유다의 생애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요셉의 인생은 얼마나 힘겨웠습니까? 그럼에도 야곱은 그의 인생을 향해 열매가 가득하며 가지가 담장을 넘을 것이라고 축복했습니다. 이는 어떤 시험과 유혹도 하나님의 강한 주권과 섭리를 결코 이길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가 얼마나 이겨냈는가" 혹은 "내가 끝까지 버텨서 승리했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며 나를 어떻게 알고 계시는 분인지를 깨닫는 과정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요셉의 삶이 목자이시며 반석이시고, 전능하신 ' 샤다이' 하나님과 연결되었을 그의 고난은 이상 절망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을 압도하는 성도의

성도에게 있어 어떤 상황이나 자리에 있느냐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요셉이 진정으로 빛났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화려한 총리의 자리에 있을 때였습니까, 아니면 억울한 감옥 생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던 그때였습니까? 성경은 간수가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앞에서도,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도 변함없이 빛났습니다.

 

그가 빛났던 이유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가 성공하여 인생이 편해졌기에 빛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하고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빛이 났던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조건이 아닌, 내면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비천한 속에 임한 왕의 영광

유다의 인생 또한 돌아보십시오. 그의 삶은 가출과 수치스러운 가정사 비루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보며 누가 인생에서 왕의 기품이 드러날 것이라 상상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끄러운 인생을 통해 왕의 지파가 나오게 하셨습니다. 단순히 유다 지파에서 왕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그가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비천한 속에 하나님의 뜻이 투영되었고 하나님의 역사가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빛날 있었습니다.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났기에 그는 복된 자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그의 후손으로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나, 무엇보다 자신의 속에서 그에 합당한 빛을 발하고 있었기에 성경은 그를 복된 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모양대로 빚어내시는 그리스도의 광채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모두 저마다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발하는 빛의 모양과 빛깔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은은한 별빛을 내는 이도 있고, 밤하늘을 밝히는 달빛 같은 이도 있습니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데우고 생명을 살리는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빛도 있습니다.

 

혹은 작디작은 반딧불이가 수도 있습니다. 낮에는 보이지도 않지만 깊은 밤이 되면 사람들에게 길을 비춰주는 반딧불이 말입니다. 작기 때문에 귀하고 크기 때문에 놀랍다는 것은 성경의 논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빛나기 때문에 우리가 귀하다고 선포합니다.

 

그것이 반딧불이든 달빛이든 별빛이든 상관없습니다. 자체가 발광체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 속에서 빛을 비추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빛나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다양한 빛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참으로 소중한 분들입니다. 모든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기에 여러분은 빛나는 것입니다.

 

분량을 넘어선 은혜와 빛나는 성도의 얼굴

우리가 빛나는 이유는 나의 어떠함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빛나는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혹시 "목사님, 빛난다는 말이 위로는 되지만 처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옵니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내려놓지 못한 욕심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반딧불이가 달빛을 시샘하거나 달이 되려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분량의 복이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자꾸만 복의 가치를 세상적인 양으로만 측정하려 하니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 사람만큼 가졌다면 나도 감사하며 텐데"라는 가정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뿐입니다.

 

여러분에게서 배어 나오는 빛이 '예수의 '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약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안에 거하신다면 나는 이미 가장 눈부신 사람입니다. 내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빛이 설령 작은 반딧불 같을지라도, 여러분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분명히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궁극적인 축복

야곱이 전한 축복의 마지막 특징은, 모든 복의 지향점이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야곱이 선포한 복은 자리에서 머물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고 여기서 끝나는 완성형이 아닙니다. 축복은 예언적인 성격을 띠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놀랍고 풍성한 모습으로 증폭됩니다.

 

베냐민의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본래 그는 사나운 늑대와 같았고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 모세는 베냐민을 향해 전혀 다른 선포를 합니다. "베냐민아, 너는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다." 사나운 짐승 같던 존재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갑자기 우리를 불쌍히 여겨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하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 우리가 흘리는 눈물과 고난을 친히 겪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우여곡절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이유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시고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완성 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깨어짐의 자리에서 피어난 진정한

사나운 늑대였던 베냐민에게 이토록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날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는 본래 자기 힘으로 싸우던 자였습니다. 700명의 정예 용사를 앞세워 40 대군에 맞섰던 기개와 용맹이 있었습니다. 번의 승리를 거두며 연합군 4 명을 패퇴시킬 만큼 그는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가 진정한 복을 누리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정한 복의 가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거듭난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의지하던 700명의 용사를 잃고 자랑하던 군대가 무너졌을 때였습니다. 자기 힘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완전히 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꺾이고 내가 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지는 지점이, 실상은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늑대와 같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부르시는 은혜의 반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금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힘이 사라진 자리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약속

베냐민은 모든 것을 잃었으나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의지하던 힘이 무너진 바로 지점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진짜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통로가 됩니다. 그전까지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힘인 알았고, 우리가 모든 일을 해냈으며 앞으로도 승리하여 모든 것을 소유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쌓아 올린 것들이 언제든 무너질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 내면에 간직된 가장 귀중한 것이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너는 나의 아들이며 나의 딸이다”라는 약속, “너는 나의 사랑을 입은 자다”라는 약속입니다. 세상의 어떤 풍파도 약속을 지울 없으며, 어떤 권세도 우리를 무너뜨릴 없습니다. 우리의 무장이 해제되고 모든 인간적인 힘이 사라졌을 , 비로소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세상 앞에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헛된 의지를 내려놓을 시작되는 참된 축복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 의지하고 믿으며, ‘이것 없이는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속히 내려놓으시길 권면합니다. 그것들이 결코 우리의 참된 힘이 아님을 하루빨리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후회하기보다, 지금 순간 그것이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기꺼이 손에서 놓으십시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릴 있는 최고의 축복이자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의지하는 대상이 주님이 아니라면 이제는 놓아버리십시오. 인간적인 수단과 도구들을 의지하기를 그치십시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를 알게 것입니다. 안의 빛이 아무리 작게 느껴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우주를 관통하는 영원한 생명의 빛임을 깨닫게 것입니다.

 

인생의 끝날까지 우리를 업고 가시는 아버지

여러분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아버지가 등에 업고 가는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모세가 선포한 축복처럼, 하나님은 오늘 하루가 마칠 때까지 여러분을 등에 업으십니다. 아니요, 1년이 마칠 때까지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는 여러분을 절대 내려놓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등에 업으시고 영원한 본향을 향해 함께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베냐민의 인생에 찾아온 모세의 놀라운 반전입니다. 거친 세상 속에서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 사나운 늑대처럼 날을 세워야 했고, 도태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켜야 했던 고단한 인생을 향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인생의 의미와 귀중함은 내가 지키고 있다. 내가 너를 업고 있으며, 끝까지 너를 절대 내려놓지 않고 함께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업혀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야곱의 축복 속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저희가 결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날마다 복을 새롭게 발견하며,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려는 인생이 얼마나 지치고 피곤한지, 또한 얼마나 외롭고 괴로운 것인지 저희는 이미 수없이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님보다 힘을 앞세워 일어서려 하는 연약한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다시 한번 주의 세밀한 음성을 들려주옵소서.

 

우리의 진정한 가치와 빛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진정으로 빛나는 때가 언제인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명확히 깨닫게 하옵소서. 내가 깨어지고 오직 주님의 등에 업혀 비로소 가장 찬란히 빛날 있다는 신비로운 진리를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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