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 22절로 부터 26절까지 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곁의 무성한 가지라.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오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아버지의 축복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형제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아멘.

 

번역의 다양성과 요셉의 생애가 지닌 풍성함

야곱의 여러 아들 이제 마지막으로 라헬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 명의 아들만이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인물은 요셉입니다. 사실 본문은 읽기에 따라 다소 난해할 있습니다. 내용이 복잡해서라기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개역개정판이 아닌 새번역 성경으로 대조해 보면 의미가 확연히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요셉을 '무성한 가지' 아닌 '들망아지'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단어는 연상되는 이미지가 전혀 비슷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정도라면 이해의 폭이 좁혀졌겠지만, 식물인 '가지' 동물인 '들나귀' 사이의 간극은 매우 큽니다. 이러한 번역의 차이가 발생하는지 성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무성한 가지' '들나귀' 모두 학술적으로 가능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페레' 본래 자음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새번역은 단어 본연의 생동감을 살려 '들망아지' 혹은 '들나귀' 옮겼고,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열매 맺는 번성함에 주목하여 '무성한 가지'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이 시사하는 요셉의 고난과 승귀

해석은 각기 나름의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요셉을 '들나귀' 이해한다면, 이는 장차 왕이 타는 나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는 요셉이 겪을 존귀한 신분의 변화를 암시합니다. 이미 우리는 유다 지파를 공부할 스가랴서의 말씀을 통해, 지극히 높으나 스스로 낮아져 나귀를 타신 겸손한 메시아의 형상을 살펴본 있습니다. 요셉 역시 모진 고난을 통과하며 겸손해졌고, 끝내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음을 '나귀'라는 단어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반면 '무성한 가지' 이해한다면 요셉의 생애가 맺은 풍성한 결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특히 가지가 '담을 넘었다' 묘사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요셉을 통한 축복이 자기 가족이나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이방 민족과 가나안 땅의 모든 이들에게까지 흘러갔음을 뜻합니다. 결국 번역 모두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가 누린 축복을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기에, 어느 하나가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창조의 복과 연결된 무성한 가지의 의미

그럼에도 저는 '무성한 가지'라는 번역에 조금 무게를 둡니다. 여기에는 가지 신학적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이 선포하는 가지 복의 성격 때문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하늘의 , 샘의 , 주는 자의 복과 태의 복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깊은 샘은 창조 때의 궁창 위아래의 물을 연상시키며, 번성과 생육의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상징합니다.

 

둘째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능자( 샤다이)' 호칭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중에 상세히 다루겠지만, ' 샤다이' 특히 창조주로서의 권능을 강조할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만약 요셉이 누릴 왕권과 통치적 지위를 강조하려 했다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뜻하는 ' 엘룐' 사용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요셉이 누릴 권세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인한 생명력과 번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신학적 견해의 다양성과 겸손한 신앙의 태도

어떤 번역을 선택하느냐가 요셉이 받은 축복의 본질을 훼손하지는 않습니다. 해석 모두 요셉의 풍성함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훗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 우리는 비로소 모든 진리의 명확한 답을 얻게 것입니다. 그전까지 우리는 성경의 깊은 신비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때로 성도님들께서 특정 신학적 견해나 종말론적 관점을 물어오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어느 가지 학설만이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 태도를 경계하라고 말씀드립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은 서로 다른 견해들을 존중하며 복음의 본질을 지켜왔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을 가려내는 지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만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겸손의 가치

사실 우리는 종교개혁자 칼빈보다 성경에 관한 정보들을 많이 접하며 살고 있습니다. 500 전의 신앙 선배와 비교해 , 오늘날의 우리가 성경의 지리학적, 고고학적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칼빈의 주석서를 살펴보면 학문적으로 교정되어야 부분들이 종종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분이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였을지라도, 당시의 연구 수준으로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영역이 있었음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가 기록된 성경 말씀 앞에 진실로 무릎을 꿇어야 하며,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 낮은 자세를 견지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해석이나 견해의 차이가 우리의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과정은 본문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요셉을 향한 축복의 본질은 무성한 나무나 풍성한 열매, 혹은 들나귀와 같은 상징물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요점은 이러한 복을 허락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과연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 점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의 축복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다섯 가지 핵심적인 고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축복의 본질인 하나님의 손과 동행

요셉을 향한 축복의 번째 비결을 본문 24절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선포합니다. 요셉이 강인한 팔로 활을 당겨 승리할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무기나 개인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셉이 누린 권능의 핵심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힘입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본문 도입부에 등장하는 " 곁의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 역시 동일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 ' 단순히 요셉이 애굽이라는 비옥한 땅에 머물렀음을 의미하는 지리적 배경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음을 강조하는 영적 배경을 뜻합니다. 결국 요셉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의 정점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누린 풍성함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야곱은 은혜의 주관자를 가리켜 '야곱의 전능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지키신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야곱의 전능자'라는 표현을 무심코 지나치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녀를 축복하는 자리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는 대신, 굳이 " 아버지 야곱의 전능자가 너를 축복하시기를 원한다"라고 한다면 자녀는 의아해할 것입니다. " 하필 '야곱의' 하나님입니까?"라고 되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본래 '속이는 '라는 뜻입니다. 사기꾼이자 도피자로 살았던 그의 파란만장하고 허물 많은 인생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야곱의 이름을 빌려 하나님을 '전능자' 칭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분이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 분이신가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전능자란 어떤 완고한 인생이라도 꺾이지 않게 붙드시는 '가장 강하신 ' 의미합니다.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나의 전능자"라고 고백할 있었던 것은 결코 그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누구보다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여기까지 지키며 인도하셨음을 깨달았기에 그는 하나님을 진정한 나의 군대요, 나의 힘이며, 나를 붙드시는 강한 자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손을 끝까지 붙잡아 주신 분은 아버지 야곱이 아니라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치열하게 강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의지처를 넘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는 종종 진정한 전능자를 찾기보다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정의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존재로 축소시키곤 합니다. 신앙을 가졌음에도 하나님보다 보험이나 은행의 잔고를 든든한 요새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도모할 때조차 그분의 무한하신 공급하심보다 우리 주머니 사정을 먼저 계산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선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미래를 대비해 연금을 준비하고 근검절약하여 가계를 꾸리는 일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있는가?' 만약 모든 세상의 보루가 사라진다 해도, 안의 진정한 기쁨과 평안은 흔들리지 않을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복의 근원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 분만으로 인해 의미를 얻는다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땅의 재물과 성공을 우리 인생에 아무리 더한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답은 결국 '0'일뿐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가져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인생의 본질을 바꿀 수도, 참다운 기쁨을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정답은 반대에 있습니다. '인생 플러스 하나님' 비로소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대박' 같은 인생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비로소 인생은 완전해집니다. 사라져 버릴 세상의 안식처가 아닌, 진정한 안식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대박 같은 인생의 의미

우리 인생에 세상적인 부유함이나 성공을 아무리 더한다 한들, 끝에서 마주할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좋은 것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다 해도,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답은 '(0)'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영구히 간직할 있는 가치는 땅의 물질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이들이 많은 것을 가지려 애를 쓰지만, 세상의 것들이 더해진다고 해서 인생의 본질이 변하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기쁨의 생애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답은 반대에 있습니다. 공허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더해질 , 인생은 비로소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인생의 '대박' 바로 이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생 플러스 하나님' 비로소 모든 것이 채워지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세상의 성취도 남지 않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은 영원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사라져 버릴 세상의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곤 합니다. 진정한 안식이 은행 잔고나 연금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계십니까? 세상의 지혜를 활용하되 그것만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삶이라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전능자로 삼고 있는가."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

야곱은 하나님을 '야곱의 전능자' 부른 이어, 번째로 '목자' 고백합니다. 양이라는 동물은 자기 고집대로 움직이는 어리석음의 대명사와 같습니다. 방향 감각이 없고 고집이 세며, 심지어 뒤집히면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양이 목자를 만날 비로소 생명이 보존되며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거듭납니다. 만약 목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우리가 단번에 영리해지거나 고질적인 고집을 모두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성품이 한순간에 바뀌어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그렇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때로 갈망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타인에게 비난받지 않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에만 몰두할 , 내가 비록 낮아지고 짓밟히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진다면 기꺼이 길을 가겠다는 결단은 부족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헌신을 우리와는 상관없는 순교자들의 특별한 이야기로만 치부하곤 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생명을 거시는 목자 하나님을 향한 신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돋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높아지시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탁월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완수해 내는 유능한 일꾼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갖추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거창한 업적을 남기기를 간절히 소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유능함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복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물가로 인도하시며, 그분의 손길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게 하시는 은혜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있는 이유는 골짜기의 지형이 험하지 않아서도, 우리의 환경이 나아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목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양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목자의 신실함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우리는 비로소 앞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망각을 덮는 목자의 신실한 사랑

목자의 희생이 이토록 숭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지내오셨습니까? 성경의 가르침대로 쉬지 않고 주님을 기억하며, 순간 그분의 은혜를 갈망하며 사신 분이 우리 중에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보건대, 누구도 감히 길을 온전히 걷고 있다고 자신할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모든 필요를 공급받으면서도 금세 눈을 돌려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 양의 본성입니다. 주인을 충직하게 따르는 반려견과 달리, 양은 끝까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은 우리 인간의 모습과 참으로 닮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어리석은 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변함없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 우리는 흔히 이를 가벼운 위로 정도로 여기곤 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니 힘이 거야" 혹은 "고난 중에 나를 건져주시겠지"라는 수준의 막연한 기대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시사하는 바는 훨씬 처절하고 숭고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여러분을 위해 순간도 쉬지 않고 당신의 명예와 생명을 걸고 계시는 분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정작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목회자인 역시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느냐는 준엄한 질문 앞에 선다면, 즉답하기보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주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모든 순간 당신의 전부를 거십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영광과 능력이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이미 건지셨고, 지금도 건지시며, 앞으로도 반드시 건지시리라는 확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변개치 않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석이며 약속이신 하나님

번째로 야곱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 고백합니다. 흔히 우리는 '반석'이라는 표현에서 어떤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터전이나 견고한 요새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본문에 쓰인 단어의 뉘앙스를 정확히 전달하자면, 이는 단순한 바위보다 '(Stone)'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합니다. '' 야곱의 생애에서 매우 특별한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과거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치던 시절, 광야 같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환상 속에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잠에서 깨어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세워 기둥을 삼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돌은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맺어진 거룩한 언약의 증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돌이시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은 '약속 자체'이시라는 선포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변치 않는 언약의 돌이요, 흔들리지 않는 약속의 실체가 되십니다.

 

우리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삶에 실재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의 아들을 내어줄 것이며, 그의 죽음을 통해 너희를 구원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은 단순한 선언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며, 하나님 당신의 존재와 같습니다. 거룩한 약속이 과연 성취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이미 온전히 성취되었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이 지닌 위대한 힘이자 실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내가 너를 결코 잊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실한 약속이 하나님의 성품이며, 바로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복된 자의 반열에 서게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는데, 하물며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겠다는 말씀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우리의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실제적인 은혜입니다.

 

이를 조금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사람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속에 깊이 새겨진 존재라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는 나의 심장이며 나의 사랑이라" 고백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를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기필코 빚어내고야 말겠다"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 당신이기에, 우리는 약속의 견고함 속에서 참된 복을 누립니다. 어떤 죄악이나 고난, 심지어 죽음조차 우리를 해할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반드시 완성되리라는 약속이 우리 모든 복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다 보면 무심코 지나치거나, 암송하면서도 쉬이 잊어버리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특정 구절에 마음이 닿아 눈물로 말씀을 붙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매일 읽는 성경임에도 습관적으로 지면을 넘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말씀을 잊고 지나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뱉으신 말씀을 결코 잊지 않으시며, 당신의 때에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어찌 있는 자가 아닐 있겠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의 보증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번째 복의 근거는 앞서 나눈 이야기보다 더욱 놀라운 선포입니다. 처음에 야곱은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을 내걸고 '야곱의 전능자' 복을 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허물 많은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두는 것만으로도 무척 뜨거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번째 고백은 더욱 파격적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 아버지의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다"라고 축복합니다. 이는 앞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썼을 때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밀도 높은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증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 라헬이 우상을 숨겼다가 발각될 뻔했던 절박한 순간이나, 얍복강가에서 홀로 밤을 지샌 이튿날 아침 다리를 절뚝이며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을 요셉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험난하고 모순된 삶을 살아왔는지 요셉은 누구보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들 앞에서 야곱은 지금 자신의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약한 부모의 하나님이 되시는 은혜

야곱이 이토록 당당하게 " 아버지의 하나님이 복이다"라고 말할 있었던 배경에는 깊은 영적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요셉아, 너도 나의 연약함을 보지 않았느냐? 내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부끄러운 모습이 많은 자인지 너는 것이다"라는 실토와 같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손에 쥐려 했던 허물투성이 아버지가 어떻게 복의 근원을 논할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의 허물만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께로 돌이키는 뒷모습 또한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자녀 교육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교육 비법과 전문가들의 조언이 넘쳐나지만, 그들의 자녀라고 해서 삶의 풍파가 비껴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녀를 명문대에 보낸 부모의 성공 신화를 듣곤 하지만, 화려한 결과 뒤에 가려진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상처를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사실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녀에게 번의 트라우마도 주지 않았다고 자신할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지 않은 자녀가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낼 우리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이유는 "살아생전 조금 잘해 드릴걸" 하는 만회할 없는 후회 때문입니다. 이처럼 부모와 자식 관계에 있어서 온전히 자신만만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완벽함을 물려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부모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자녀의 참된 복이 됨을 선포한 것입니다.

 

완벽함이 아닌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부모의

우리는 여전히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 아래, 부모가 몸소 완벽한 모범을 보여야만 자녀를 제대로 가르칠 있다고 믿곤 합니다. 물론 부모로서 선한 본을 보이려 노력하고, 올바른 양육법을 배우며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과정은 분명히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러한 노력의 중요성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결코 완전한 부모가 수는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녀들이 근본적으로 죄인인 것처럼, 부모인 우리 또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최상의 교육을 제공하며 주변의 악영향을 차단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가장 선한 것을 재료 삼아 가장 악한 결과를 만들어낼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녀들 역시, 그리고 부모인 우리 자신 역시 굴레에서 자유로울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도외시한 , 그저 좋은 본보기만 보여주면 자녀가 훌륭하게 자랄 것이라 믿는 것은 신앙 안에서 경계해야 어리석음입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모든 면에서 결점이 없는 완벽한 부모가 되어 자녀를 성공시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그런 완벽한 부모의 전형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관점으로 성경 인물들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사도 베드로조차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떻게 가족과 자녀를 뒤로한 예수님을 쫓을 있느냐고, 남겨진 가족들의 생계와 안위는 어찌하느냐고 따져 묻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자신의 삶을 복음에 내던졌습니다. 바울 역시 자녀가 없었기에 우리가 기대하는 유교적 부모상을 제시할 만무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부모 됨에 대해 거대한 오해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냉정하게 말해 세상에 완전한 의미의 '성공한 부모'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빚어낼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망각한 교만일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있는 최고의 것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중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세상 어디에도, 심지어 믿음의 가정 안에서도 이른바 ‘완벽한 부모’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양육의 완벽한 비결을 소유한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부모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처절하게 깨닫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실수가 잦고 부족한지, 우리 또한 야곱과 다를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앞에서 "나는 이만큼 의롭다" 모습만을 보이려 애쓰기보다, " 또한 너와 같은 죄인이며, 나의 부족함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었음을 안다"라고 용감하게 고백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전해주어야 진정한 본은, 연약한 죄인이기에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인 우리가 실수하고 흔들리는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붙잡아 주셨는지를 삶의 증거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녀의 앞날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부모 심정으로 환난이 비껴가길 기도하지만, 험한 세상에서 어찌 무서운 사람과 힘든 일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그러했듯, 자녀들의 삶에도 풍파는 필연적으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고난이 찾아올 자녀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사실과, 주님은 언제든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시며 끝까지 붙드시는 분이라는 확신입니다. 믿음을 붙들어야만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있습니다. 환난이 아예 없기를 바란다면 세상을 떠나야 것입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의 풍파를 피할 길은 없기에, 우리는 자녀에게 풍파를 피하는 법이 아니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전신갑주

기독교 교육의 취약점 하나는, 이른바 ‘착하게만 자란 아이들’이 대학이나 사회라는 거친 현실에 직면했을 쉽게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던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신앙을 떠나는 현상에는 부모와 교회의 책임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실상을 가르치기보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당위만을 반복해 왔습니다. 온실 속에서 세상이 마냥 친절한 곳인 줄로만 알았던 아이들이 죄악 가득한 세상의 민낯을 마주했을 충격은 실로 막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세상이 죄로 물든 곳임을 명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동시에 죄악 세상을 뚫고 나갈 유일한 권능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있음을 역설해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우리가 다시 있음을, 쓰러지고 흔들린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도저히 일어설 없을 같은 순간에도 상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걷게 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신뢰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진정으로 지키는 길이며, 우리 부부와 공동체 모두가 붙들어야 영원한 진리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진정한 의미

야곱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으로 고백하며 축복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전능'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바로 '샤다이'입니다. 우리가 흔히 ' 샤다이'라고 부를 때의 단어입니다. '' 하나님을 뜻하므로,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실 '샤다이'라는 단어는 신학적으로 해석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표현 하나입니다.

 

오늘날 영어 성경은 이를 '올마이티 (Almighty God)'이라 번역하고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번역이 원어의 풍성한 의미를 완벽하게 담아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과거 70인경(LXX)이라 불리는 헬라어 성경의 전통에서 기원했습니다. 헬라 시대가 도래하며 히브리 성경을 읽지 못하던 유대인 이민자들을 위해 성경을 번역할 당시, 단어를 '전능(All-powerful)'으로 옮겼고, 그것이 라틴어를 거쳐 지금의 '올마이티' 정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어의 진정한 어원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정확한 어원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단어의 사전적 뜻이 모호하다는 사실에 의아해하실 수도 있지만, 모든 언어는 문맥을 통해 본의를 파악할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말을 때도 단어 하나하나의 사전적 정의보다는 문맥 속에서의 쓰임새를 통해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서툰 외국인의 말도 문맥 안에서 충분히 소통되듯,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역시 '문맥의 ' 있습니다.

 

여호와와 샤다이, 구원과 창조의 하나님

성경의 여러 문맥 ' 샤다이' 의미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대목은 출애굽기 6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이니라"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시며,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의 하나님( 샤다이)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여호와'라는 이름의 구체적인 의미는 출애굽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선명해졌으며, 이전 족장들에게는 ' 샤다이' 당신을 나타내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시대에도 여호와라는 호칭은 사용되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진정한 신학적 의미가 모세의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 샤다이'라는 호칭은 주로 족장들의 시대, 창조와 번성, 그리고 약속의 이행을 강조하던 시기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하나님은 ' 샤다이'이시며, 이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격을 깊이 담고 있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는 '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을 실제로 성취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를 알지 못했으나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떠났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이라는 명확한 목적지를 알고 나아갔습니다. 바로 지점에 중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 샤다이'라는 이름 속에는 우리가 바를 알지 못해 방황하고 혼돈 속에 거할 ,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분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약속이 실제가 되는 곳으로 우리를 신실하게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창세기에 나타난 샤다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구원'보다 '창조' 의미에 가깝습니다.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 여호와라면,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매일 새롭게 빚어 가시는 분은 샤다이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에 새로운 창조를 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을 주관하며 우리를 붙드시는 왕의

샤다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나는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이며 우주를 주관하는 진정한 왕이다. 내가 너를 불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주었으며, 너를 통해 열방이 복을 누리게 하겠다." 세상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돌보시는 분이 바로 샤다이이십니다.

 

샤다이와 여호와는 결코 다른 신이 아닙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나 사역의 강조점에 따라 다른 이름을 취하신 것뿐입니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측면에서는 '여호와' 강조되지만, 의지할 없는 광야에서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측면에서는 ' 샤다이' 부각됩니다. 족장들이 인생의 굴곡 속에서 때로 방황하고 어리석은 길로 행할 때조차,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시는 '은혜의 하나님' 되어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손이 요셉의 활을 굳세게 하셨듯, 오늘도 여러분의 인생을 지키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순간도 놓지 않으시는 은혜의 하나님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붙들고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손과 어깨는 누구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까? 인생의 과녁을 향해 새로운 활시위를 당기는 지금, 활을 지탱해 주는 분이 누구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만약 자신의 힘만으로 활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만 일어서야 한다고 믿는 우리에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평탄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와 고난의 현장까지도 그분이 붙들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거신 목자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약속이자 말씀이 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특정 말씀에 깊은 위로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향한 살아있는 말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순간에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인생을 놓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순간도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향해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겠다" 선포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 가장 귀한 아들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그분이 우리 인생을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야곱의 전능자를 온전히 신뢰하며 담대히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샤다이 하나님은 여러분을 오늘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향해 "나는 절망적인 존재"라고 자책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갑옷은 결코 뚫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어제와 다른 존재이며, 오늘 나에게 걸음 가까이 다가온 존귀한 존재다. 내가 너를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라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처럼 보일지라도, 안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가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그저 밥을 먹고 일하러 가며 잠드는 무의미한 굴레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무리 사소한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롭습니다. 왜냐하면 샤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순간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섭리 안에서 우리 인생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광채를 얻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오늘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왔습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니, 자리에서 오직 주님만을 다시 한번 찬송하며 기억하게 하옵소서.

 

나의 목자이시며 나의 전능자이신 샤다이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내가 이미 복된 자임을 깊이 깨닫고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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