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19절로부터 21절까지 입니다.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아멘.
상징과 비유에 담긴 야곱의 예언
야곱의 예언은 대개 상징과 비유라는 문학적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절 하나하나가 지닌 심오한 함의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이런 난해한 대목을 마주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저 유려한 문장에 취해 무심히 읽고 넘기지는 않으십니까?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저 역시 이러한 상징적 구조 앞에서 그 본연의 의미를 길어 올리는 일이 때로는 벅차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본문은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열두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자 예언입니다. 갓을 향해 '군대'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그가 훗날 용맹한 무관이 될 것을 암시하는 듯 보이고, 아셀에게 '왕의 수라상'을 예비하라고 하니 오늘날의 유명 요리사나 미식가라도 되라는 뜻인가 싶어 미소가 지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납달리를 '놓인 암사슴'이라 칭하니 그가 광야를 누비는 육상 선수처럼 활약할 것을 말하는 듯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이 세 아들의 앞날을 예견하며 전하고자 했던 핵심은 단순히 그들의 '직업'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베푸실 '복'의 성격에 관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의 통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아들을 각각 어떻게 축복하시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 축복의 엄중함을 얼마나 망각하며 사는지, 혹은 그 복의 본질과는 얼마나 상반된 길을 걷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보여줍니다. 그 비뚤어진 초상은 곧 이스라엘의 모습이며, 거울처럼 비치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지파의 기록을 넘어, 영적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금 점검하게 하는 거룩한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갓 지파의 이름과 침략의 배경
오늘 우리는 갓과 아셀, 이 두 지파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복의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갓과 아셀은 레아와 라헬이 각자의 몸종을 통해 얻은 아들들입니다. 단부터 납달리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아들이 몸종의 몸을 빌려 태어났으나,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그들은 당당히 주인의 자녀로 입적되었습니다. 이는 창세기 시대의 보편적인 가계 계승 방식이었습니다.
그중 갓은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아들입니다. 앞서 레아는 네 아들을 낳아 가문의 기틀을 세웠지만, 동생 라헬이 몸종을 통해 먼저 두 아들을 얻자 깊은 소외감과 시기심에 사로잡혔습니다. 한동안 수태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 머물던 레아는 결국 자신도 몸종을 통해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 벅찬 환희를 담아 지은 이름이 바로 '갓'입니다. '복되도다'라는 찬탄이 담긴 이름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복된 아들을 향해 뜻밖의 예언을 던집니다. "너는 군대에게 쫓길 것이며, 군대가 너를 공격할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여기서 '군대'란 정규군을 넘어선 포악한 '침략자'를 의미합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침략자들이 너를 집요하게 추격해 올 것이라는 긴박한 선포입니다.
이 대목에는 히브리어 원문의 뉘앙스를 알지 못하면 온전히 느끼기 어려운 특별한 장치가 숨어 있습니다. 원어로 이 구절을 읽으면 그 소리가 마치 거친 말발굽 소리처럼 들립니다. 우리말로 그 느낌을 살려본다면 "따가닥, 따가닥"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듯한 음유입니다. 고도의 언어유희(Word Play)를 통해 외적의 침입이 초래할 긴장감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진격해 오는 말발굽 소리입니다. 히브리어로 '가두드, 예구데누'와 같은 운율이 반복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것입니다. 지금 침략자들의 군대가 노도와 같이 밀려들고 있으며, 평온하던 삶의 터전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는 엄중한 현실을 소리만으로도 생생하게 체감하게 된 것입니다.
공격받는 지파와 신자의 삶
야곱의 예언대로 갓 지파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은 요단강 동편 지역이었는데, 이 지리적 위치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 역사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통상적으로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무대이자 우리가 팔레스타인이라 부르는 중심지는 요단강 서편입니다. 반면 요단강 동편은 훗날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며 세례를 베풀던 베다니와 같은 지역을 포함합니다. 이 요단강 동편, 즉 '길르앗'이라 불리는 광활한 대지에 갓 지파가 터를 잡았습니다. 이곳은 천혜의 목초지로 가축을 기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참으로 풍요로운 기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풍요의 이면에는 피할 수 없는 긴장이 뒤따랐습니다. 비옥한 영토는 주변 이방 족속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탈취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탐욕스러운 침략자들은 끊임없이 그 땅을 유린하려 들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예언처럼 갓 지파는 쉼 없는 공격에 노출된 '복된 자'의 역설을 살아가게 됩니다.
더욱 치명적인 위협은 군사적 침략보다 교묘한 문화적·신앙적 침투였습니다.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여 살아가던 갓 지파는 그들의 우상 숭배와 이교적 습속에 서서히 물들어갔습니다. 통혼과 교류를 통해 신앙의 순수성이 희석되는 영적 혼합주의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갓 지파가 직면했던 가장 본질적이고도 위험한 침략이었습니다.
반격의 서사: 발뒤꿈치를 쫓는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갓 지파가 그 침략에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본문은 "도리어 그가 침략자의 뒤를 추격하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다 선명하게 직역하자면, "갓은 공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는 침략자의 발뒤꿈치를 공격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매우 익숙한 상징인 '발뒤꿈치'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됩니다. 발뒤꿈치 하면 단연 떠오르는 인물은 야곱 자신입니다.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그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타인의 것을 가로채고 속이는 '탈취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갓의 뒤꿈치 공격 역시 야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지난주 단 지파를 묵상하며,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려다 좌절했던 단의 생애가 야곱의 옛 모습과 닮아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갓의 서사는 그 결이 전혀 다릅니다. 야곱의 생애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 시작하는 능동적인 탈취의 역사였습니다. 그가 먼저 속였고, 그가 먼저 움켜쥐었으며, 그가 먼저 쟁취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갓은 '공격을 받는 자'로 시작합니다. 예기치 못한 환난이 먼저 찾아오고, 그 고통스러운 침입에 대응하여 비로소 반격을 개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건의 발단뿐만 아니라 고난에 대처하는 신자의 실존적 양식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조명해 줍니다. 갓의 반격은 자신의 욕망을 위한 선제 공격이 아니라, 주어진 복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영적 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장애물과 정죄의 공격
갓의 서사에는 야곱의 생애와 대비되는 두 가지 독특한 지점이 존재합니다. 그 첫째는 앞서 언급했듯 '공격의 선행성'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한 신자의 삶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를 향해 진지한 마음을 품고 "이제는 정말 제대로 믿어보리라" 결심하는 찰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신이 무수한 공격에 노출되어 있음을 직시하게 됩니다.
공격의 양상은 실로 다층적입니다. 신앙의 깊이를 더하려 애쓰고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려 할수록, 도처에서 예기치 못한 장애물이 불거집니다. 선한 사업에 힘쓰는 이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협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경계하듯, 그것은 바로 '낙심'입니다. 선의를 베풀면 박수와 갈채가 따를 것 같지만, 현실은 오히려 냉담하거나 비아냥 섞인 비난이 돌아올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진 수욕을 참으시며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권면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외부의 핍박보다 거센 내면의 공격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순간,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는 집요한 참소가 들려옵니다. "네가 그러고도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 "지금 네 모습으로 감히 천국을 소망하느냐?" 타인의 비난은 무시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면에서 고개를 드는 이 날카로운 자책은 우리를 속수무책으로 만듭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내밀한 목소리를 가리켜 '정죄의 공격'이라 정의합니다.
자기 성찰의 한계와 십자가의 답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향해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결코 정죄하지 않으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유혹의 가장 강력한 도구인 정죄를 휘둘러 우리를 절망의 심연으로 끌어내리려 하지만, 그 고소는 결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모든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법정에서는 고소가 접수되더라도 요건을 갖추지 못해 기각되는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신자를 향한 사탄의 고소 또한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완벽한 변증 앞에 사탄의 청구는 아예 재판석에 오르지도 못한 채 기각됩니다. 물론 사탄은 교묘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마음을 어지럽힐 수는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파괴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평안을 빼앗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려 드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가 신앙의 정체기를 겪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지켜보면, 상당수가 자기 자신의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이 죄를 반복하는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자신을 뒤집어보고 분석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구조가 아닙니다.
물론 자아를 성찰하고 과오를 반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깊은 성찰 끝에도 인간의 자아 안에는 구원의 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분석할수록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더 선명해질지 모르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오직 외부에 있습니다. 답은 오직 십자가에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시선을 주님이 아닌 자신에게만 고정할 때, 영혼은 우울에 침식되거나 자포자기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죄의 공격이 의도하는 비극적 결말입니다.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신앙
시선이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에게 고정될 때, 성도는 신앙생활의 본질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마땅히 영혼의 환희가 넘치고 말씀 앞에 가슴이 뜨거워져야 함이 마땅하나, 실상은 무거운 자책만이 어깨를 누릅니다. 말씀을 대할수록 "나는 왜 이토록 무력한가", "왜 기도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성경조차 읽지 못하는가"라며 스스로를 영적 궁지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은 신앙의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배제된 자기 성찰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복음의 은혜가 없는 반성은 자신을 스스로 정죄의 감옥에 가두는 행위와 같습니다. 이는 마치 이념의 굴레 속에서 자행되던 '자아비판'처럼 영혼을 옥죄고 파괴할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율법주의적 방식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저변에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갈망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면, 그 성찰의 끝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갈구와 하나님께로의 회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께 나아가는 대신 자기 연민의 수렁으로 침잠합니다. "내가 왜 이 모양인가"라는 자책에 함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격받는 갓 지파의 모습이자, 동시에 우리들의 초상입니다.
갓 지파의 서사에는 주목해야 할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반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발뒤꿈치를 잡는 반격'이라 묘사합니다. 적의 뒤를 쫓을 뿐 정면으로 승부하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싸울 능력이 부족하거나 두려움에 압도되어, 혹은 자신감을 잃어버려 당면한 문제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픈 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기에 그저 주변부만 맴돌 뿐입니다.
발뒤꿈치를 잡는 것은 부분적인 성과처럼 보일지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실패한 승리'에 불과합니다. 상대를 제압하려 옆차기를 날렸으나 허공을 갈라 땅을 치는 바람에 제 발만 상하는 격입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주님이 누구신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한 채 자기중심적인 싸움에 매몰될 때 이와 같은 실효 없는 분투에 그치고 맙니다.
그 결과,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영적 야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무엇을 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태도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보다 그분의 눈치를 보며 마음에 들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결국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패배주의적 결론에 도달하며 다시금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 죄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승리할 수 있다는 정체성, 그리고 완전한 용서에 대한 확신을 망각한 탓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가장 교묘한 전략입니다. 성도를 오직 '문제' 자체에만 매몰되게 하여, 그 문제를 딛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은혜의 통로를 원천 봉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
성도 여러분, 인생의 모진 풍파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며 가슴을 치는 그 모든 순간조차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 아래 있음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우리의 삶이 창조주의 선하신 섭리 안에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의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이 열매 맺을 것임을 확신하십니까?
만약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지금 마주한 환난이 결코 인생의 마지막 장이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이 성취될 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반응은 낙담이 아닌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었음에도 그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구원의 확신 속에서 매일의 삶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나를 구원하신 은혜로 인해 기뻐하고 계십니까?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비록 하루의 삶이 온전치 못했고 수많은 실수를 반복했을지라도 그 모든 순간 나를 인도하고 지키신 하나님의 손길을 고백하며 안식하십니까? 이것이 성도가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입니다.
사탄의 공격은 결코 우리의 구원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 즉 성도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나는 주님으로 인해 기쁘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난의 자리에 처하면 오직 '탈출'만을 갈망합니다.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며 상황을 부정하고 회피하기에 급급합니다.
조금 전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아멘'으로 화답했던 입술로, 정작 현실의 시련 앞에서는 도망칠 궁리만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시험과 고난으로, 또 때로는 눈물과 기쁨으로 다가오는 모든 순간이 나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정임을 신뢰하십시오.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함께 누리는 인생
고난의 현장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상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이 상황을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기를 원하시는지, 그리고 이 연단의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떻게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인지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생사를 함께한 전우나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온 부부는 서로에게 단순한 동료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말에 고생을 함께한 아내를 일컫는 '조강지처'라는 표현이 있듯, 고난을 통과하며 쌓인 신뢰와 사랑은 그 무엇보다 견고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주님과 그러한 사랑의 역사를 써 내려온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여러분의 곁을 지키시는 조력자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고, 인생의 모든 여정 속에 일어나는 그분의 역사하심을 함께 누리도록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편에서 본다면, 여러분은 고락을 함께한 조강지처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여러분을 바라보며 지극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야말로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고 여기십니다. 함께 아파했고, 함께 눈물 흘렸으며, 그 칠흑 같은 고난의 터널을 함께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애 속에 우연히 일어난 사건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그 눈물조차 결코 홀로 흘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곁에서 함께 눈물 흘리셨으며, 그 통곡의 자리에 주님은 늘 함께 계셨습니다. 비록 감당하기 어려운 기막힌 일들이 우리를 엄습할지라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이 지고한 진리를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소중한 사실을 너무나 자주 망각하는 것이 우리 영혼의 가장 큰 질병입니다.
길르앗의 유향과 참된 치료자
갓 지파가 정착했던 길르앗 땅의 형편을 통해 이를 증언한 이가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서 8장에서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당시 길르앗은 귀한 약재였던 향료 '유향'의 주산지였으며, 실력 있는 의사들도 많았습니다. 병이 들면 의사를 찾아 유향으로 처방받으면 그만인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이미 소유한 복이 무엇인지, 자신들의 정체성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본질적인 목적은 "나의 기쁨이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려 함"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기쁨을 온전히 향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과 함께 누려야 할 신앙의 모든 여정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와 봉사, 성경 읽기와 기도가 어느덧 버거운 '숙제'나 '의무'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닙니까?
은혜를 망각하면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생명력이 마르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신음할 때, 하나님께서는 "길르앗에 의사와 유향이 있지 않느냐"며 그들을 독려하셨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진정한 의사가 누구인지 직접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참된 치료자는 하나님이시며, 치유의 유향 또한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찾지 않느냐고, 왜 내게로 돌아오지 않느냐고 안타깝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았으면서도 그 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손에 쥔 '복' 그 자체에 집착하거나 혹은 자신이 입은 '상처'만을 응시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아픈가, 왜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라며 상처에 매몰될수록 영혼의 통증은 가중될 뿐입니다. 복을 선물 상자에만 넣어둔 채 사용하지 않고 겉모양만 자랑하는 신앙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시선을 돌려 우리 가운데 계신 진정한 왕, 참된 의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의 주인을 잊어버린 신앙적 빈곤
상자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조차 관심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그 상자를 열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백만 불이라는 거액이 들어 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한 번도 꺼내어 써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그저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준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복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도, 정작 그 복을 주신 이는 망각하고 있구나." 이는 복은 받았으되 복의 주인을 상실한 영혼의 비극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 그 자체보다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은 바로 그 복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정작 주님을 향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상처 입어 신음하며 답답해하는 이여,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묻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스스로 지혜롭다 자부하며 그렇게 많은 것을 안다고 똑똑한 체하면서도, 어찌하여 돌이켜 회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수없이 맹세하지만, 우리의 실상은 참으로 초라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발뒤꿈치만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와 싸워야 한다는 당위성은 알지만, 그 대처 방식이라는 것이 고작 '무엇을 안 하는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남보다 조금 더 선하게 사는 것,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등 외적인 행위들로 자신의 신앙을 치장하고 증명하려 합니다.
이 얼마나 빈곤한 신앙입니까? 이는 죄의 뒤꿈치만 물고 늘어지는 형국이며, 결코 진정한 복을 향유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곁에 신령한 유향과 참된 의사가 있음에도 그 치유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며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답은 명료합니다. 제발 자신의 상처에만 함몰되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고통을 아실 뿐 아니라 그 상처를 몸소 함께 짊어지신 분, 여러분을 온전케 하실 수 있으며 이를 위해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을 보십시오. 가슴에 난 상처가 너무 깊어 피가 흐른다고 절규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을 진정으로 살리시는 유일한 생명이십니다.
아셀의 행복과 비옥한 축복
갓 지파에 이어 아셀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운 통찰을 줍니다. 아셀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행복(Happiness)'을 의미합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아셀은 매우 비옥한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본문이 아셀의 소산물로 만든 음식이 기름지다고 표현할 만큼, 그 땅은 실로 풍요로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실제로 아셀 지파는 훗날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평야 지대를 분배받았습니다. 그가 그 땅의 소산물로 실제 왕의 수라상을 차렸는지에 대한 사료적 기록은 미미하지만,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려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행복자'라는 이름을 가진 아셀이 어떠한 복을 받았으며, 그 복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구현했는지를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모세의 축복에 따르면 아셀은 실로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야곱의 아들 중에서도 더 복을 받으며, 형제들에게 기쁨이 되고, 그 발이 기름에 잠길 것이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넘치는 복은 감당하기 녹록지 않은 것입니다. 누군가 독보적인 복을 누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많은 가문에서 부모가 유독 한 자녀만 편애하거나 더 많은 유산을 물려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요셉의 사례처럼 형제들에게 팔려 가거나 극단적인 반목에 휩싸이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서너 명의 자녀 사이에서도 유산 배분에 차등이 생기면 평생 원수가 되어 "아버지,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것뿐입니까?"라며 통곡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아셀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은 놀라운 조화를 이룹니다. 그가 남다른 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형제들이 기뻐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아셀은 비범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홀로 거대한 복을 누리면서도 모든 형제에게 기쁨의 근원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요셉과 비교해 보더라도 아셀의 삶은 경이롭습니다. 성경의 기록만으로도 그는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그가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구가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발목이 기름에 잠길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았으니, 그는 명실상부한 '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의 방식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기름을 사러 갈 때면, 가장 귀했던 참기름은 박카스 병 같은 작은 용기에 소중히 담아오곤 했습니다. 반면 낙화생 기름은 커다란 병에 가득 채워도 그리 비싸지 않았기에, 어린 마음에는 "똑같은 기름인데 왜 이토록 가격 차이가 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평범한 우리네 인생에서 그 값싼 낙화생 기름으로 발가락 하나 적셔보는 일조차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사치였습니다. 혹여 심부름 길에 참기름 병이라도 깨뜨려 흙바닥에 쏟는 날에는, 흙 묻은 윗부분이라도 필사적으로 긁어 모아야 할 만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셀이 누리는 복을 두고 '그 귀한 기름에 발목이 잠길 정도'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그가 누리는 풍요가 단순히 넉넉한 수준을 넘어,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혜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토록 기름진 복의 향연 뒤에, 야곱은 예언의 정점을 찍는 '펀치라인'을 덧붙입니다. 아셀의 소산이 기름질 것이라 선포한 뒤,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좋은 음식을 왕에게 진상하라는 지침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진정한 함의는 "아셀이 이 모든 복을 누리되, 그의 인생 위에는 분명한 '왕'이 계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가 주권자이신 왕을 모시고 살았다는 사실은 형제들과의 화평과도 직결됩니다.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한 자녀가 형제들과 우애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모든 것은 내 소유가 아니니, 형제들과 함께 나누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셀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비옥한 땅과 풍성한 소산을 허락받았으나, 그것을 자신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왕의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자신 위에 진정한 왕이 계심을 고백했기에, 그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아닌 형제들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왕이 있는 인생과 왕이 없는 인생은 그 궤적부터가 다릅니다. 우리가 이토록 주님의 주인 되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취약하며 오해하기 쉬운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지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고백이 내 삶의 방식과 소유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사유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주인이 계신다면 어찌 그 면전에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주인의 소유를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겠습니까? 무릇 모든 일에 주인의 의중을 먼저 여쭈어보는 것이 종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의 책임과 안식
훌륭한 종의 지상 과제는 주인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려 그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은 무엇보다 주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목적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지식을 과시하거나 타인보다 신앙적 우위에 서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나는 주님의 종이기에, 주님의 뜻을 알아야만 그 길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 배움의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한 '종의 의식'을 갖출 때,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변화합니다. 내 소유이기에 고민하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것이기에 거룩한 책무를 느끼게 됩니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려 안간힘을 쓰는 고단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며 그분 앞에서 선한 청지기로서 정성을 다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었구나"라는 깨달음은 우리의 사는 방식과 내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짓누르는 근심은 누구의 몫입니까?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그 근심마저 주권자이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종들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집을 지키는 최종적인 책임이 주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적이 침입할 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는 종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이유도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당신의 소유로 인치시고, 영원한 길을 동행하시며 마침내 당신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통치자이신 왕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생은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아래 보호받습니다. 부당한 공격을 당하거나 깊은 상처로 신음할 때도, 예기치 못한 환난으로 속절없이 무너질 때도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가난과 질병의 그늘 속에서도, 혹은 부요와 건강의 정점에서도 우리는 변함없이 왕의 통치 아래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왕, 살아계신 나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는 법
우리가 다윗의 생애를 경탄하며 바라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거구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다윗이 내뱉은 사자후를 기억하십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 위대한 선포의 비결은 결코 다윗의 혈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고백은 수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한 자의 겸손한 의탁이었습니다. “나는 이 전쟁을 감당할 자격도, 능력도 없는 미약한 존재이나, 나의 왕이신 그분의 권위를 힘입어 나아간다”는 절대 신뢰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왜 이토록 무력한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까? 입술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왜 그 이름이 지닌 가슴 벅찬 능력과 환희를 누리지 못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찰나, 우리의 심장은 요동쳐야 마땅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호흡하며 그분의 거룩한 뜻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깊은 괴리가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이 성장을 멈춘 결정적인 이유이며, 복음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지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풍파를 초월하여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호언장담하며 모든 고난을 대충 넘길 수 있는 강철 같은 인간을 만드는 곳도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세월이 흘러도 자존심 하나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초라함을 직시하는 곳입니다. “이만큼 믿었으면 이제는 좀 온전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같은 자리에 걸려 넘어지는구나”라며 연약함을 통렬히 자각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망의 끝에서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언제든 돌아가 안길 수 있는 ‘십자가’의 품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스스로에게조차 실망스러운 인생일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나의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생의 한복판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매듭지어진다면 그 얼마나 불안한 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생애가 고작 묘비에 새겨진 이름 석 자로 끝나버린다면 그 얼마나 가난하고 허망한 인생이겠습니까?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새기셨다고 말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자신의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완성됩니다. 아셀이 위대한 것은 바로 자신의 삶 위에 진정한 ‘왕’이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세상의 복과 타협의 경계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셀이 향유했던 그 풍요로운 기름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정착기에 들어선 아셀 지파는 자신들에게 허락된 비옥한 해변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군사력이 부족하여 주변 지파의 도움 없이는 이길 수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명하셨습니다. “이 전쟁은 네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내게 속한 것이니, 내가 너를 대신하여 싸우리라.” 승패의 관건은 무력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깊이에 달려 있었음에도, 그들은 변명을 앞세워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실상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광야의 사십 년 유랑 끝에 마주한 가나안의 화려한 농경 문화와 청동기 문명, 풍요롭게 차려진 이방의 식탁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고 화려하게 치장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이 거룩한 사명을 잠식해 버렸습니다. 이 부적절한 타협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반복되는 비극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의 혼인과 우상 숭배라는 영적 간음으로 이어졌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 속에 시작된 그들의 인생은 끊임없이 뒤엉키고 꼬이게 되었습니다. 복의 주인을 잊고 복 자체에 매몰될 때, 그 풍요는 오히려 영혼을 침몰시키는 독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셀 지파의 안나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
사사기가 남긴 엄중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아셀의 서사는 비극으로 매듭지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신약의 문턱에서 아셀의 이름은 다시금 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구원의 감격을 노래했던 시므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시므온과 함께했던 또 한 명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시므온의 가계는 침묵하지만, 안나에 대해서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이라고 그 출신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셀 지파의 후예인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가 곧 온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왕좌에 좌정하셔서 거룩한 기름을 부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는 이 복음의 진리를, 발목까지 기름이 찼다던 아셀의 예언과 대조해 보십시오. 물가에서 발만 살짝 적시고는 수영을 다 했다고 자만하는 이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깊은 물속에 잠긴 이 중 누가 진정으로 그 신비로운 깊이를 알겠습니까?
흔히들 목회자만이 특별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짜리 정답에 불과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들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발목을 적시는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름 부음 받은 자’, ‘구별된 성도’, ‘보배로운 자녀’로 인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었으며,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겨우 발목을 적시는 얕은 신앙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적군의 발뒤꿈치를 잡는 정도의 미약한 승리에 만족하며 머물러 있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와 영원한 축복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사도 요한 역시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증언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세상을 이기는 권세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말라”는 약속을 가슴에 품고도, 정작 가나안 땅에서는 여리고성 하나를 무너뜨린 성과에 도취해 버렸습니다. 직접 가보면 아시겠지만, 여리고성은 그저 한 바퀴 돌면 끝날 만큼 작은 성읍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장하는 약속은 그보다 훨씬 장엄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작은 성 하나를 함락하는 수준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이기는 자들입니다. 삶을 짓누르는 슬픔과 눈물,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 그리고 신앙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치열한 내면의 갈등조차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가정과 직장의 시련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담대하라.”
우리가 바로 그러한 승리자들이기에, 성경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열두 지파를 향한 축복을 마무리하며 신명기 33장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이 위대한 선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영혼의 음성으로 함께 받기를 원합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놀라운 복을 제발 가방 속에만 가두어 둔 채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 복을 그저 세상 사람들에게 과시할 장식품으로 전락시키지 마십시오. 대신, 그 복을 주신 분과 함께 걸어가십시오. 복의 근원이신 그분께 생명줄을 대고, 오직 주님만을 응시하며 사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누리는 복은 비로소 낡아지지 않는 영원한 복이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손에 쥔 복만을 바라보며 그것을 향유하는 데만 급급하다면, 그 복은 이 땅의 짧은 생애와 함께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영원한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신령한 하늘의 복을 허락하셨기에, 저희가 오늘도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간절히 구하옵나니, 저희의 삶이 지금 무엇에 걸려 넘어지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베푸신 그 풍성한 복과, 그 복을 주신 진정한 주인이신 주님을 저희가 온전히 알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찰랑거리는 발목의 은혜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의 길을 따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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