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28절로부터 31절,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21절 말씀입니다.
창세기 47장 28절부터 31절까지 말씀입니다.
“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아멘.
히브리서 11장 21절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아멘.
야곱의 마지막 시간과 임마누엘
험악한 세월 백삼십 년을 뒤로하고 야곱이 애굽 땅에 발을 디딘 지도 어느덧 십칠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야곱이 보낸 그 마지막 십칠 년의 순간들을 되짚어보며, 그의 모든 걸음마다 함께하셨던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히 성탄의 절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야곱의 전 생애를 붙들고 계셨던 실재적인 은혜였음을 우리는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십칠 년의 세월이 더해져 백사십칠 세가 된 야곱은 자신의 인생이 마침내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랐음을 직감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낀 그는 아들 요셉을 불러 간곡한 유언을 남깁니다. 자신을 결코 이 이방 땅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조상들이 잠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어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이 일을 반드시 행하겠다는 맹세를 받았고, 성경은 그 장엄한 순간을 가리켜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함께 읽은 히브리서 말씀은 이 장면을 조금 다르게 묘사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했다고 전하는 반면, 히브리서에서는 그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야곱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의지했던 것은 침상이었을까요, 아니면 지팡이였을까요? 우리는 오늘 이 두 표현 사이에 담긴 깊은 신앙적 의미를 추적하며, 야곱의 인생을 갈무리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입양과 열두 지파
창세기 47장 후반부부터 48장과 49장에 이르는 내용은 하나의 커다란 맥락 속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 대목을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하고 예언하는 장면으로만 이해하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이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놀라운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지파의 구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본래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으면서 수치상으로는 열네 명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자리가 두 아들로 대체되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열세 지파의 형상을 갖추게 됩니다. 훗날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레위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 자체를 기업으로 삼게 됨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열두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체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입양하며 그들을 장자인 르우벤이나 차남 시므온과 같은 반열에 두겠다고 선언한 점은 실로 파격적입니다. 이는 곧 요셉의 아들들이 장자의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의미하며, 실질적인 장자권의 축복이 요셉에게 흘러갔음을 보여줍니다. 이삭의 가문에서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에서와 야곱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장자권의 역사를 떠올려 본다면, 르우벤이 물러나고 요셉의 가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은 구속사적으로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논리로 본다면 장자의 계보를 통해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메시아는 요셉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장자권을 둘러싼 그토록 길고 험난한 여정 끝에 요셉이 그 명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메시아의 계보는 유다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신앙적 의문을 던져줍니다. 요셉을 통해 메시아가 오셨다면 구속사의 흐름이 훨씬 명쾌했을 텐데, 과연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신비롭고 복잡한 섭리의 길을 택하셨을까요?
이 깊은 영적 신비에 대해서는 차후에 더욱 상세히 살피기로 하고, 오늘은 하나님께서 왜 야곱과 요셉의 관계를 이 마지막 시점에 이토록 비중 있게 다루셨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침상 머리인가, 지팡이 머리인가
야곱의 경배 장면을 두고 지팡이와 침상 중 무엇이 맞느냐는 논의는 얼핏 지엽적인 문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성경 전승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보는 히브리어 성경인 '마소라 사본'은 이를 '침상'을 뜻하는 '미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을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지팡이'로 번역하였습니다.
70인역의 번역 시기는 대략 기원전 100년에서 200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면 우리가 현재 보유한 히브리어 마소라 사본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기원후 1000년경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연대순으로 볼 때 어느 것이 더 원형에 가까울까요? 비록 번역본이긴 하나 70인역이 마소라 사본보다 천 년 이상 앞선 시기의 기록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모세가 기원전 1500년경에 기록한 성경이 25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지나오며 그 내용이 변질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48년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구약 사본들은 이 논란을 단번에 잠재웠습니다. 기원전 혹은 예수님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본들이 천 년 후의 마소라 사본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 속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보존되어 왔는지를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마소라 사본의 특징입니다. 본래 히브리어는 모음 체계 없이 오직 자음으로만 기록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히브리어 사용이 점차 사그라들자, 후손들이 성경의 정확한 발음을 잊지 않도록 자음에 모음 부호를 덧붙여 완성한 것이 바로 마소라 사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히브리서가 야곱의 경배를 '지팡이'로 기록한 것은 70인역의 전승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이며, 우리말 구약 성경은 마소라 사본을 근거로 번역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오래된 판본'과 '원어인 히브리어' 중 무엇이 더 권위가 있을까요? 사실 사본학적으로 이를 명확히 판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70인역 역시 번역 과정에서의 실수가 개입될 여지가 있는 번역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며 70인역의 '지팡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데에는 분명한 영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자음 체계에서 '침상'을 뜻하는 '미타'와 '지팡이'를 뜻하는 '마타'는 표기상 동일합니다. 모음이 없던 시절,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두 가지로 모두 해석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가 헬라어로 기록하며 '지팡이'라고 명시한 것은, 그 단어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신약의 재해석과 성경의 섭리
지팡이와 침상의 차이에는 사본학적 논의를 넘어선 또 하나의 중대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다가 신약을 보다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이르되’와 같이 구약을 인용하는 구절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본문을 나란히 대조해 보면, 분명 인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모세가 공주의 집에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뒤로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곧 살피게 될 출애굽기 본문을 보면, 모세가 광야로 몸을 숨긴 직접적인 이유는 자기 동족을 치던 애굽 사람을 살해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텍스트 자체에는 모세가 보화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했다는 식의 직접적인 묘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약의 저자는 그 사건을 영적으로 재해석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의 기록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옮겨 적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약 사건의 이면에 담긴 진정한 영적 의미를 ‘재해석’하여 그 본질을 밝혀 보여주곤 합니다. 문자적인 인용을 넘어, 그 사건이 구속사적으로 지니는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야곱의 경배 장면을 대할 때 사본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약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혹자는 “우리가 왜 이런 복잡한 학술적 배경까지 알아야 하는가”라고 물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과학적 이성과 고고학적 지식이 발달한 시대에,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성경을 어떻게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과제입니다.
제가 특별히 시간을 내어 ‘침상’과 ‘지팡이’의 차이를 상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깊이를 더해주는 대목입니다. 신약이 ‘지팡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나아가 왜 구약의 ‘침상’이 신약에 이르러 ‘지팡이’로 명명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피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대하는 훨씬 유익하고 신앙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타’와 ‘마타’라는 단어의 유사성으로 인해 필사나 번역 과정에서 차이가 발생했다는 견해 또한 충분히 타당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 역사적 내막을 완전히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이 기록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주셨는지를 ‘섭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 안에는 더욱 심오한 신학적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의 역사적 사실들이 신약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통과하며 어떻게 더 풍성한 생명의 의미로 꽃피우는지, 우리는 두 성경을 대조하며 그 신비로운 은혜의 경륜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평안보다 보이지 않는 약속을 붙잡다
긴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본질은 이것입니다. 야곱이 '침상 머리에 앉았다'고 할 때, 성경 문맥에서 '침상'은 과연 무엇을 상징할까요? 가장 대표적인 의미는 풍요와 안위입니다. 침상에 누워 쉬거나 머문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삶이 부유하며, 신변이 매우 안전하고 평안한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침상은 아무런 걱정이 없는 야곱의 노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그는 애굽의 고센 땅에서 보낸 십칠 년 동안, 외부의 적도 없는 평화로운 일상을 누렸습니다. 당시 상황을 복기해 보면, 칠 년 기근 중 이 년이 경과했을 때 야곱 일가가 애굽에 들어왔고 그 후로도 오 년간 기근이 지속되었습니다. 그 참혹한 기근 속에서 애굽의 모든 땅은 바로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기근을 통해 모든 사유지가 국가에 귀속되었던 그 사건 말입니다.
이러한 정세 변화는 역설적으로 야곱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더 이상 땅의 소유권을 두고 다툴 일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고달팠던 문제는 우물과 땅을 둘러싼 분쟁이었습니다. 가나안에서 블레셋 땅으로 옮겨갈 때마다 우물을 빼앗겼고, 양 떼를 먹이려 하면 현지 목자들이 나타나 경계를 긋고 그를 쫓아냈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투쟁하며 살았던 야곱이었으나, 이제는 모든 땅이 바로의 것이 되었기에 분쟁의 씨앗 자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게다가 거대한 나일강이 곁에 있으니 우물을 파기 위해 고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통틀어 아마 처음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이 시기의 삶은 평화롭고 안온했습니다. 무엇보다 고센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가 너와 함께하며 그곳에서 너를 보호하겠다”라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이곳은 평생에 겪어보지 못한 최상의 안식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고집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온 자리였기에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저 이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고백해도 무방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지점에서 뜻밖의 유언을 남깁니다. “이 평안한 침상이 아니라, 내가 험난하게 살았던 저 가나안 땅에 나를 묻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야곱이 인생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자,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신앙의 태도입니다.
대개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행복하기를 갈망합니다. 고난은 적고 만사는 형통하여, 타인에게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모든 일이 잘 풀릴까”라는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결코 인생을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겠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민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왜 미국에 오셨습니까? 학업을 위해, 혹은 새로운 정착을 위해 오셨겠지만, 만약 한국이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발전된 나라였다면 굳이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을까요? 1970년대 당시에 미국 사람이 한국이 더 살기 좋다며 이민을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 더 많은 기회가 있고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기에 미국으로 왔습니다. 실제로 와 보니 미국은 평안했고 살기에 좋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간증을 얻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도와주셔서 사업이 일어났고, 병들었을 때 지켜주셨으며, 생각지도 못한 길로 인도하셨다”라는 고백들이 우리에게도 풍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의 성장을 보며 “참 미국에 오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인생
그러나 지금 야곱은 세상의 안락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을 보십시오. 애굽에 정착한 이후 그에게는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없었습니다. 꼬였던 문제들이 풀리고, 고단한 일이 생길 법하면 아들 요셉이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아들을 부르면 즉시 달려오는, 참으로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결코 그 안위함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환경이 아닌 본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고 있으며, 내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기에 내 인생이 복되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그가 얼마나 편안하게 잘 살고 있는지, 혹은 말년에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분께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소망하게 하시기 때문에 진정으로 평안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를 가리켜 ‘믿음으로 그가 그것을 보고 있다’고 증언합니다.
여러분, 저를 포함하여 우리는 왜 이토록 자주 흔들리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 그 자체보다 세상적인 형편이 괜찮아 보일 때 비로소 복을 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기복 신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깊다고 자부하는 우리조차 인생을 평가할 때 "참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셨고, 날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왔지"라며 눈에 보이는 증거를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결국 우리는 여전히 보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을 판단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의 건강과 물질, 이 땅에서 누리는 편안함이 인생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것이 기준이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준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지,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기대어 살고 있는지에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는지,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는지, 나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지의 여부가 인생을 보는 참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증거를 붙드는 삶
우리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은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상들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만 마음을 놓곤 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좋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대개 “예수님을 믿어보라, 그러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언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는 형편이 나아지고, 소유가 늘어나며, 누리는 것이 많아지거나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들을 우리는 먼저 떠올립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고난만 주시고, 기도는 응답되지 않으며, 풀리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필요를 아시고, 힘든 순간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도우실 것입니다. 아멘 하셔도 좋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누리고 있기에 이러한 은혜가 내게 주어졌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질병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마땅하고 귀한 일이며, 저 역시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의 질병을 깨끗하게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간절히 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릴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셔서 형통할 때도 감사하지만, 설령 그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의 건강과 물질,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복은 결국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가시적인 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려는 배려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결코 무너지지 않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려는 섭리입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을 누가 평가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평가하실 때, 우리 인생은 세상이 재는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는 절대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 속해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깊이 깨닫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은혜의 부르심
여러분, 저를 포함하여 우리가 왜 스스로 믿음이 작다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모든 진리를 이미 알고 있고, 제가 설교할 때 고개를 끄덕이거나 속으로 아멘 하며 동의하지만, 막상 실제 삶 속에서는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작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믿음이 작은데도 우리를 꾸역꾸역 이 자리에 부르신다는 사실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중 그 누구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우리가 하나님께서 포기하실 만한 생각과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이 자리로 부르십니다.
여러분은 그저 ‘오늘 주일이니까 교회에 가야지’라고 생각하며 이 자리에 오셨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배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고, 성경을 읽는 것보다 드라마 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기도하는 것보다는 골프나 테니스를 치며 즐겁게 노는 것을 훨씬 좋아합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본래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주로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본성을 가진 제가 여기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영원한 것을 소유했기에 인생 자체가 세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배워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 배웠다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통달했다는 뜻도 아니며,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여러분, 여기서 조금 더 깊이 나아가 보면 ‘왜 성경은 침대에서 멈추지 않고 지팡이까지 언급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야곱에게 지팡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는 일찍이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도망치듯 집을 떠날 때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은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 비록 20년이 지나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으나, 지팡이는 본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의 비천한 출발점을 상징합니다.
제가 왜 구약의 내용을 신약이 재해석한 것이라 말씀드렸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구약의 ‘침상’은 모든 것을 소유하여 풍요를 누리는 야곱의 겉모습을 보여주지만, 신약은 그 이면을 들여다봅니다. 그가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누린 듯 보이나,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와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보잘것없는 지팡이에 기대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로만 설명하니 아직 마음으로 와닿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제가 성경 말씀을 읽어 드릴 테니 한번 들어보십시오. “보라,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벌을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누가 그렇다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자신이 없으십니까? 누가 그렇습니까? 아직 믿어지지 않으시나요? 이 말씀의 마지막은 이렇게 맺어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나 자신 있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으나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입니다.
장례식에 많이 가보신 분들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저 또한 수많은 장례를 집례하며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지만, 손에 무엇 하나라도 쥐고 가시는 분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누우실 때, 1.5평 이상의 땅을 차지하시는 분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누우신 그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전부입니다. 묘역이 아무리 넓어도 실제로 누운 자리는 그뿐입니다. 그 이상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야곱이라고 달랐겠습니까? 그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짚고 서야 할 지팡이 하나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따른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안하다 고백할 수 있었고, 진정으로 모든 것을 가졌노라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가 왜 여기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가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을 육신의 눈으로만 본다면, 여러분은 직업이나 통장 잔고에 의해 정의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불러주는 평판이나 자녀의 성공 여부로 규정되는 존재, 혹은 학력이나 실력, 과거의 경력으로만 자신을 설명하려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왕년’의 사람들 아닙니까? “내가 옛날에는 이만큼 대단했던 사람이야”라는 기억 외에는 자신을 규정할 것이 없는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자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여러분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품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분들입니다. 셀 수도 없고 측량할 수도 없는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여러분의 기업입니다.
혹시 ‘내 부모님도 남들처럼 작은 유산이라도 좀 남겨놓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없으시겠지만, 제가 최근에 부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한국에 들어갔을 때 만난 친구의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나름대로 남부럽지 않게 사는 친구였는데,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야, 요즘 우리 집이 난리도 아니다. 어머니가 선산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땅 때문에 우리 4남매가 다투느라 정신이 없어.”
제가 그 친구를 잘 아는데, 사실 예전에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산 때문에 그런 분쟁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버려두었던 땅이 갑자기 재개발되면서 땅값이 크게 오르자 자녀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친구 말로는 자기 형제들끼리는 서로 양보하려 하지만, 각자의 배우자들 의견이 달라 그렇게 싸운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서 그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더 받으려고 말입니다.
반대로 또 다른 어떤 친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살다가 수십억 원의 가치가 있는 땅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무엇이라 했겠습니까? 겨우 밥 한 끼 산다고 했겠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야, 너 한국 들어와라. 내가 너 책임져 줄게”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저 기분이 너무너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내 것이냐 남의 것이냐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기분이 정말 좋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상속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은 자로 잴 수도 없으며, 그 기업의 영광은 측량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여러분이 영원히 살 나라이며, 그곳에서 여러분은 영원히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나라를 여러분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나라가 여러분의 것인데, 야곱이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지팡이 하나 짚고 있다고 해서 그가 왜 주눅이 들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내 인생은 겨우 이것뿐인가, 난 별로 한 일도 없는 인생이다”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물론 스스로를 겸손하게 표현하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말은 하나님께 참으로 마음 아픈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까지 그토록 애써 키워오셨고,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자로 당당히 세워 놓으셨는데, “내 인생은 별 볼 일 없었다”고 하신다면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키우신 인생의 가치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때 키가 159cm였습니다. 반에서 번호가 10번일 정도로 작은 키였죠. 그런데 고3 한 해 동안 16~17cm가 훌쩍 컸습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키는 아니지요? 그런데 키가 갑자기 크는 동안 제가 영양 섭취를 제대로 못 해서인지, 어느 날 학교 조회 시간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깨어나 보니 옆에서 어머니께서 막 울고 계시더라고요. 그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의사 선생님이 네가 영양실조란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하시며 그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예수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영생을 얻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주셔서 이 자리까지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러분이 쓰러졌을 때 그 원인이 ‘영적 영양실조’라면 하나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말씀을 하셔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담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내 인생은 참으로 하나님 안에서 만족스러우며,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이다.” 야곱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았기에, 자신이 무엇을 가졌으며 앞으로 무엇을 받게 될지를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의미
그래서 여러분, 예배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처럼 단순히 마음을 비우는 행위가 아닙니다. 많은 분이 예배를 통해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고 말씀하시는데, 내려놓는 것 자체는 좋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배는 사실 내려놓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두 손으로 십자가를 굳게 붙잡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빈 마음을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누구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냐고 물으면,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맞지만, 여기에는 큰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만 무엇인가가 더해지거나 보충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찬양을 많이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높아지시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열심히 듣고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대단한 분이 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자가 되시는 것 또한 결코 아닙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기억해 보십시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쉬라고 하셨으니 무조건 쉬어야 한다며, 쉬지 않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의 시작과 출발이 잘못되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오직 여러분을 위한 시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의 비위에 맞추겠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하늘의 은혜를 가득 부어주시는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는 욕심을 없애는 종교가 아니라, 욕심의 방향을 바르게 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안에는 갈망이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이제 모든 욕심을 버렸고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 인생에서 누려야 할 기쁨과 즐거움, 하나님과 함께 누릴 풍성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물론 “하나님, 제 욕심을 내려놓습니다”라는 고백은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오해하여 무소유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곧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소유로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해야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에 소유할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빈 잔에는 먼지밖에 쌓이지 않습니다. 잔을 아무리 비우고 또 비워도, 그 안에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으면 결국 더러워질 뿐입니다. 아무리 깨끗이 청소해도 먼지는 계속 쌓이고 공허함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잔에 물이 가득 차면 깨끗하고 시원한 잔이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잔에 성령 하나님이 가득 차고, 십자가가 가득 차고, 예수가 가득 차면, 그때 비로소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아,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구나. 이래서 나를 복되다고 하시는구나.”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예배
그러므로 예배를 ‘바치고 드린다’는 표현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배를 제정하시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예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더 이상 높아지실 수 없는 지존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부모의 마음을 잘 알지 않습니까? 자녀를 위해 정성껏 식탁을 준비했는데 자녀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노래를 준비하셨는데 우리가 찬양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말씀을 준비하셨는데 우리가 그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야곡이 경배하였다”는 이 말씀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내 인생의 기반을 하늘의 것으로 삼겠다는 결단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내 인생의 의미를 삼겠다는 고백입니다. 돈이나 성공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령의 열매로, 주님 자신으로 살겠다는 당당한 선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누리고 체험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그러하시듯, 저희 어머니도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힘이 닿는 한 꼭 만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어머니, 힘드신데 안 하셔도 돼요”라고 말씀드려도 기어이 준비하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제는 어머니의 음식이 예전만큼 맛이 있지는 않습니다. 연세도 드시고 입맛도 변하셔서, 어떤 때는 사 먹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을 받을 때 자식 된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 맛없으니 그만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육신의 부모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때로 ‘쓴 잔’을 주셨다고 해서 “하나님,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원망한다면 하나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그 쓴 잔조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결국 우리 인생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며, 그렇기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정확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가치는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수양을 쌓아 죽음을 초월했느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부활이 내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를 누릴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하기에, 우리 자신을 보는 눈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참된 실상이요 증거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의 잣대나 눈에 보이는 형편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나 혹은 잃어버리는 모든 순간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세상의 헛된 것에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굳게 붙잡고 담대히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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