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 20절로부터  27 까지 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요셉이 애굽 끝에서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아멘.

 

요셉의 토지 정책과 신학적 난해함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대할 흔히 그가 꿈을 해석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7년의 대기근으로부터 만백성을 구원한 영웅적인 면모에 집중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은 우리에게 다소 낯설고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요셉이 흉년의 때에 곡식을 베푼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거저 주어진 자선이 아니라 철저한 거래였다는 점입니다. 기근이 깊어질수록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진 돈을 내놓았고, 그다음에는 가축을, 종국에는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토지마저 바로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결국 애굽의 모든 사유 재산은 국가로 귀속되었으며, 자유인이었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땅에 매인 소작농,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유 재산권의 박탈이나 토지 국유화와 같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과연 요셉의 이러한 행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타인의 곤경을 이용하여 국가 권력을 극대화한 정책이 과연 하나님의 지혜로 칭송받을 만한 일인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생존을 위한 선택과 자유의 반납

본문 백성들은 스스로를 향해 "우리가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의 정책 결과로 그들은 자유를 잃었으나 역설적으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기근이라는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요셉은 국가 시스템을 통해 생존의 길을 열어주었지만,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모든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됨으로써 애굽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변모하였고, 백성들은 왕에게 예속된 삶을 살게 것입니다.

 

지점에서 우리는 신앙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성경이 찬양하는 요셉이 백성들을 노예화하는 앞장섰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부합하는 공의로운 치리였는지, 아니면 단지 위기 상황을 이용한 냉혹한 정치적 수완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난해한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진정한 구원의 성격이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하지 않을 없습니다.

 

성경 해석의 원리와 영원한 말씀의 적용

더욱 어려운 지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의 흐름 속에서 요셉은 분명히 선한 인물이며 그의 행보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도 요셉의 방식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에서 정책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국가를 찾아가 나의 모든 땅을 테니 이제부터는 나라가 관리해 달라고, 나는 그저 소작농이 되겠다고 선뜻 나설 분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유한 소중한 터전을 흔쾌히 나라에 바치실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요셉은 앞장서서 모든 토지를 사들였고, 그것을 바로에게 귀속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자면 자유인을 노예로 만든 셈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릅니다. “이 일은 벌써 4 전인 기원전 2 년경의 사건이니, 고대 농경 사회였던 애굽 특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세월이 이만큼 흐른 오늘날에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러한 해석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시대에 따라 이럴 때는 이렇고 저럴 때는 저렇듯 기준이 바뀐다면, 그것을 어떻게 진리라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기에 우리는 말씀을 삶에 그대로 적용하려 노력하고, 그것을 가리켜 ‘성경적’이라고 부릅니다. 대목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자칫 얼마나 잘못된 이해에 빠질 있는지를 역사가 증명해 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의 문자적인 내용을 어떻게든 현실에 그대로 옮겨 심는 것이 옳다고 믿곤 합니다.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마땅히 요셉의 방식을 본떠 국가 경제 정책을 세워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그것은 이상하다”라고 느끼지 않을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로서의 성경

성경이 시대를 초월한 책이라고 , 의미는 성경이 세상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백과사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경제 서적도 아니며, 심지어 일반적인 역사책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한 기록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해석할 반드시 기억해야 키워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구원을 위하여 성경을 선택적으로 기록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그것이 실제 역사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공자의 가르침이나 불경처럼 인간이 깊이 사색하여 깨달은 좋은 말씀들을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독특하게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성경 스스로가 증언하듯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죽어 있는 단어의 모음이 아니요 죽은 자의 말도 아니며, 오직 자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생생한 기록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철저히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체가 역사입니다. 개인의 역사도 있고 민족의 역사도 있습니다. 점을 망각하면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의 기준은 지금과 맞지 않으니 제외하자"라며 요셉의 경제 정책은 거부하다가도, 조금 뒤에 나오는 다윗의 통치 장면을 보고는 "이것은 좋으니 우리도 똑같이 하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바르게 읽기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특히 이러한 태도는 나의 이익이나 내가 원하는 바와 연관될 더욱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있어 우리를 가장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자세

성경은 구원의 역사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핵심을 빼버린다면, 오늘날에도 다윗 시대처럼 왕을 뽑아야 하고 왕이 다스리는 신정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 많은 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였던 것처럼, 우리가 사는 미국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물리적인 국가로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어떤 방식을 취하든 세상을 통째로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흔히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상의 법도가 성경대로 바뀌는 것을 우리의 지상 사명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해야 함을 있지만, 동시에 성경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이 좋아집니까? 오히려 악이 관영하고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구하되, 우리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시간과 때에, 우리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관론적 낙관주의자로 살아가기

그렇다면 어차피 세상이 나빠질 것이니 우리도 대충 악하게 살면 될까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아라"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온전히 이루실 때까지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이를 두고 기독교인을 '비관론적 낙관주의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이 결국 심판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는 비관적이지만,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복을 누리며 기쁘게 살아가기에 낙관주의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요셉이나 다윗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들 같은 왕을 뽑으려 애쓰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 주변의 우상 숭배자들을 몰아내는 것도 우리의 사명이 아닙니다. 바울이 아덴에 갔을 밤에 몰래 나가 우상들의 목을 치고 동상을 뒤집어엎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을 내가 알게 하겠다" 복음을 전하는 접촉점으로 삼았습니다. 땅의 모든 우상을 물리적으로 부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서 우상을 타파하는 모습을 보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라고 오해해서는 됩니다.

 

우리는 혁명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엎고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약한 같고, 당하는 같으며, 아무것도 없는 자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자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신자의 삶은 이처럼 역설적입니다. 죽어야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법입니다.

 

신앙적 열정과 복음의 참된 목적

우리가 땅에 살아가며 부분을 조심하지 않으면 됩니다. 과거 한국에서 가끔 신문에 보도되었던 일인데, 너무나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청년들이 동네에 세워진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 같은 우상들을 몰래 부수고 잘라버려 문제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순수한 신앙적 열정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신자가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을 오해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내쫓고 잘라내야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바르게 깨닫도록 초대해야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와 관련해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거룩한 전쟁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들고 나가고 상대는 무슬림이니 당연히 이길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뜨거운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까지 사랑하시며 어떤 이들까지 참아내고 인내하시는지를 비로소 조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행위들은 순수한 열정보다는 자신들의 욕심과 이익을 위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성경의 표적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성경의 사건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구약 이야기는 모두 구원의 역사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거듭 “예수를 보아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구원 역사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빼면 구원의 역사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모든 성경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은, 구약의 모든 내용이 마치 표적이나 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은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요셉의 사건이든 다윗의 사건이든, 그것 자체를 문자적으로 우리 삶에 적용할 것이 아니라 너머의 예수님과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정책 또한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지침이 아니라,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무엇을 표적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방대한 내용 중에서 간단하게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신자나 불신자, 혹은 이방인에게조차 항상 알려주시는 기본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특별히 우리 신앙인들이 알아야 원리에 대해 함께 나누겠습니다.

 

번째 원리: 생명의 원리

번째는 사실 우리가 이미 여러 이야기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했던 일은 결국 그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 여러분과 제가 세상을 살아가며 어떤 일을 결정하고 실행할 , 과연 내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지는 결정을 내리는 있어 굉장히 중요한 요건이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원리'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들도 살리고 이스라엘도 살리기 위해 일을 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생명의 원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자신이 처한 고대 애굽 사회라는 상황 속에서 동원할 있는 최선의 지혜를 찾아내어 '살리는 방법'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가 사용했던 구체적인 수단은 시대에 따라 변할 있을지 몰라도, 그가 보여준 생명의 원리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사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장을 찾는 사람들을 과연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계시는지요? 제가 한국에 있을 , 동네 골목에서 붕어빵과 호떡을 파시던 아주머니 분이 계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 셋을 잃고 홀로 아이 하나를 키우며 리어카를 끄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붕어빵을 먹는 것은 단순히 간식을 먹는 행위를 넘어 그분의 가정을 살리는 일이 됩니다. 그분 또한 저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노동을 통해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살리는 '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살리는 일을 너무 거창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따뜻한 미소 , 그리고 물건을 사고팔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해 주는 작은 행동들이 서로를 살리는 일이 있습니다.

 

작게는 그렇고, 크게 보면 우리가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지도 설명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방어를 위한 목적 외에 공격적인 전쟁에 항상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생명을 살리는 원리 때문입니다. 또한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무엇을 결정하든 우리 마음속에 생명의 원리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번째 원리: 자비의 원리

번째 원리는 요셉이 자신의 위치와 능력, 그리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결코 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모든 일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만약 요셉의 목적이 그저 왕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그는 충분히 다른 방식을 사용할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의 토지 개혁 명령처럼 "이제 모든 토지는 왕의 것이니, 와서 일하고 먹을 것을 가져가라" 일방적으로 선포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토지를 가지고 와서 간곡히 부탁한 이들은 애굽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토지를 안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땅은 황폐해질 텐데, 제발 땅을 왕의 소유로 삼아 주시고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 우리가 땅을 계속 일구며 있게 주십시오."

 

과정에서 요셉은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인 방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나중에 애굽 사람들로부터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라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 요셉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은혜를 입었다' 표현합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까? 이것은 백성들이 요셉에게 보내는 존경과 존중,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땅을 국유화한 요셉의 모습이 부당해 보일 있습니다. ' 개인의 땅을 가져가는가'라는 의문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목적을 잃지 않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자비의 원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힘이 있거나 결정권이 있는 자리에 있을 , 자신의 권력과 힘을 남용하지 않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방향을 향해야 합니다. 경제 활동이나 사업, 혹은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칠 때도 모두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성경은 원리를 변하지 않는 진리로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이 상전과 종의 관계를 권면하며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말한 것과 같습니다. 위에 있다고 해서 힘을 남용해서는 된다는 뜻입니다.

 

원리는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기본 원리입니다. 권력이 어디서 왔는지,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힘을 남용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당파나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셉은 토지를 강제로 빼앗지 않았고, 어떤 이데올로기를 앞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실체도 없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6.25 전쟁의 영향 아래 살고 있습니다. 분단국가이기에 여러 정책에 제약이 있고 비상계엄 같은 제도도 존재합니다. 모든 아픔의 출발은 바로 전쟁이었고, 정권과 이념의 싸움이 낳은 결과는 비참함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요셉이 진정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는 비록 왕은 아니었지만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려 했고 최선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더라도 이런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가진 힘을 절제하며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려는 태도, 그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교회는 낮아지기 위해, 겸손해지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합니다.

 

번째 원리: 왕의 원리

여러분, 에베소서 6장은 제가 말씀드리려는 번째 원리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제가 9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너희가 앎이라.

 

다시 말해, 네가 지금 주인이고 보스인가, 네가 일의 최고 위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대답합니다. “아니다. 너의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바로 ‘왕의 원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진정한 왕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위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 욕심과 이익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업장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녀 앞에서 마치 내가 최종 결정권자인 , 자녀의 인생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말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부모이기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우리는 자녀 위에 누가 계신지를 잊어서는 됩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아, 내가 자녀를 힘과 뜻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아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키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자녀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시지 않습니까? 자녀가 부모 마음대로 커주는 경우가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명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데, 혹시 손들 분이 계실까 조심스럽습니다. 적어도 저희 집에는 없습니다. 비슷하게도 자라지 않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면 “아, 내가 자식인 줄만 알고 마음대로 하려 했던 적이 많았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왕의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첫째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땅에 왔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살리고, 어떻게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들을 살려야 합니다. 직장 생활이나 경제 활동을 때도 살리는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비의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행해야 할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번째는 방금 것처럼 왕의 원리입니다. 위에 항상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말하는 모든 위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행하는 태도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지 원리가 우리 삶의 기초가 된다면,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가장 본질적인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신자들이 인생 끝까지 붙들어야 '은혜와 구원의 원리'입니다.

 

번째 원리: 은혜와 구원의 원리

모든 원리가 중요하지만, 마지막으로 가지만 여러분과 나누려 합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 신자들이 붙들어야 원리입니다. 명명하기가 어려웠는데, '은혜의 원리'라고 수도 있고 '구원의 원리' 혹은 '십자가의 원리'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요셉을 보면 그는 당시 상황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의 사역은 애굽 사람들을 기쁘게 했고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결책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사실 당시에도 그것은 완전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결국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게 되고, 집중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결국 백성들은 억압받고 착취당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일은 번의 예외 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역사 내내 이러한 부조리와 싸워야 했고,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구조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낳고 사람들이 자유를 잃게 만듭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으며, 미국이 독립 전쟁을 했겠습니까? 이면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정책이나 제도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요셉이 정책을 시행했을 사람들은 만족하고 감사하며 은혜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노예가 됩니다. 애굽인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으며 고센 땅에 살던 이스라엘이었지만, 결국 요셉을 모르는 바로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반전됩니다. 여기서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인물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불공정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그들은 착취당하고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방인으로 살던 이스라엘이 노예가 정도였으니 일반 애굽인들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출애굽 때까지도 요셉이 세웠던 제도는 남아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의 종이 되어 벽돌을 구워야 했습니다. 처음 정책이 나빠서였을까요? 정책 자체에도 허점이 있었겠지만, 문제는 체제를 운영하는 인간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나누는 이야기지만, 해방 전후 한국에서도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 공산주의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사도행전에서도 자기 것을 내어놓고 서로 나누어 쓰는 모습이 나오듯, 당시 인텔리들에게 이상은 높게 평가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타락한 인간의 손에 들어가면, 그것은 오히려 무서운 독재와 살육의 도구가 되고 민족을 동강 내는 비극을 낳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완벽할까요? 여러분도 몸소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 나는 작은 차를 타는데 사람은 크고 좋은 차를 탈까?", "우리 집은 소박한데 누군가는 수천만 불짜리 저택에 살까?" 이런 빈부격차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아픔입니다. 제가 아마존 선교를 가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을 예전 방식대로 살게 두었다면 조금 불편할지언정 지금처럼 살인적인 경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이 유입되면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전에는 비슷하게 먹고살았는데, 이제는 누가 가스 곤로를 쓰느냐가 부의 상징이 되고 행복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자본주의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를 담고는 있지만, 안의 인간은 끝없이 욕심을 부립니다.

 

어릴 만화가 생각납니다. 요즘은 AI 로봇 때문에 직장을 잃을까 변호사들까지 걱정하는 시대지만, 제가 어릴 만화는 지능 높은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면 가족이 여유롭게 놀러 다니는 세상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많이 갖고 싶어 하고, 적은 비용으로 생산성을 높여 큰돈을 거머쥐려 하기에, 좋은 체제가 있어도 혜택이 고루 돌아가지 않습니다. 체제가 아무리 좋아도 속의 인간이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는 어렵습니다. 성경이 복음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누구인지 가장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동시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진정한 구조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체제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땅에 살고 있기에 힘들고 고단합니다. 어떤 '주의(-ism)' 우리를 온전히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땅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진정한 표적,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이러한 행동과 정책 또한 사실은 하나의 표적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에 이르면 모든 체제가 실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 울부짖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내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얼마나 오묘하고 흥미로운 책인지 모릅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들어왔던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먹을 것이 없는 광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먹이시는데, 바로 '만나' 그들을 살리십니다.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만나를 통해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표적이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멈췄다면 역사는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시고 만나로 영원히 살게 하셨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 어린아이가 사나이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앞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 그것으로 광야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게 됩니다.

 

이것조차 끝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날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인류여, 내게로 오라. 내가 영원히 먹게 하리라"고만 하셨다면 상황은 단순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분만 왕이 되면 먹고사는 문제는 없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들은 표적 너머의 본질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건 또한 표적이었습니다. 사건은 결국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셨을 , 수많은 사람이 사도들의 앞에 자기의 모든 재산을 가져다 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분은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아니냐고 묻곤 합니다. 재산을 교회에 바쳐야 하는 아니냐고 말이지요. 예전에는 그런 설교도 많았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박태선 씨였습니다. 신앙촌이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저희 집에도 신앙촌에서 만든 카시미론 이불이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니 사주어야 한다" 하셨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려면 재산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나중에 대사기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당시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에 속은 것입니다. 사도들 앞에 재산을 내놓고 함께 나누던 모습조차 하나의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였다면 역사는 거기서 멈추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나라가 장차 임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나라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음

여러분, 그렇기에 사도들의 앞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렸던 모습조차도 하나의 표적입니다.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가 가진 면류관까지도 모두 내어드리는 성도의 모습이 비로소 완성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날이 옵니다. 반드시 그날이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표적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앞에 온전히 두는 그날, 영원한 찬양 속으로 들어가는 그날,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영광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놓이는 그날,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셔서 생명이 되시고, 발이 되시고, 눈물과 한숨이 되셨던 , 또한 기쁨과 입술의 노래가 되시고 상처까지도 함께 짊어지셨던 그리스도를 영원히 노래하게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드디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완성을 이루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 오늘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분께 여러분 자신을 내어놓읍시다. 만약 여러분 중에 “나도 내려놓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느끼는 분이 계신다면, 오늘은 그저 입술의 고백부터 시작합시다. “주님, 제가 잘은 모르지만 놓으라 하시니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제가 놓겠습니다”라고 말만이라도 해봅시다. 그렇게 시작합시다.

 

예수님께서 만약 여러분에게 물어보신다면, 제가 알려드릴 테니 이렇게 대답해 보세요. “주님, 제가 부족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내려놓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나보다 예수님이 훨씬 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예수님 앞에 놓여서 귀한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나보다 귀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귀함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그곳에 여러분 자신을 두십시오. 여러분의 생명과 기쁨, 그리고 나의 하루가 되신 ,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귀하신 주님께 안기십시오. 주님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은 상처가 되어 주시고, 눈물이 되어 주시며, 나의 영광이 되어 주시는 바로 그분입니다.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명까지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있는 것은, 생명보다 귀하신 주님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왔사오니,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주님 앞에 있는지를 깊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 전체가 오직 주님의 따스한 품에 안겨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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