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27절로부터 31절까지 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아멘.
임마누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뻐하며 기념하는 성탄 주일입니다. 평소라면 복음서의 탄생 기사를 나누었겠지만,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창세기 47장의 말씀을 통해 성탄의 본질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탄 주일에 야곱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오늘 설교의 제목인 ‘임마누엘’을 떠올려 보십시오. 본문과 그 배경이 되는 말씀 속에는 성탄의 핵심 메시지인 임마누엘의 은혜가 깊이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17년 전의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향할 당시, 그의 내면은 형언할 수 없는 고민과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의 남단인 브엘세바에 이른 야곱은 그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해 망설이던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환상 중에 나타나 야곱에게 소중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6장에 기록된 이 약속의 말씀으로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17년이라는 세월이 쾌속하게 흘러간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전전긍긍하던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신실한 언약은 야곱의 남은 생애를 지탱하는 소망의 닻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증거합니다.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 땅에서 이미 생육하고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의 실재가 된 것입니다. 더욱이 임종을 앞둔 야곱이 요셉을 불러 자신을 가나안 땅에 장사 지낼 것을 맹세시키는 장면은, “요셉이 네 눈을 감길 것이며 너를 다시 인도하여 올라오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가문이 이토록 번성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신 이 약속이 바로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경이로운 신비가 야곱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누린 모든 복의 근원은 그와 동행하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의 생애와 하나님의 약속
야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반추해 보십시오. 그는 장자권을 쟁취하기 위해 형 에서와 대립했고, 아버지를 속인 대가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머나먼 북쪽 아람 땅의 밧단아람이었습니다. 도망자의 신세로 벧엘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타나 약속을 주셨습니다. 당시 야곱의 어머니는 아들이 잠시 피신했다가 곧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며칠이면 에서의 노여움이 풀릴 것이라 낙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객지 생활은 무려 20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이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귀환하는 길에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형 에서와 화해하는 극적인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30여 년을 살게 되지만, 정착한 지 10여 년 만에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참척의 고통을 겪습니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비통함 속에 보낸 세월이 무려 22년입니다. 고난의 세월을 견뎌낸 야곱의 나이가 130세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애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경을 타인의 이야기로만 읽으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를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십시오. 만약 연로하신 어르신들께 낯선 타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라고 한다면 선뜻 나설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당시 야곱은 서거하기 불과 17년 전인 인생의 황혼기에 있었습니다. 노년에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이방 땅으로 이주해야 했던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는 수많은 염려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 여기서 ‘거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바로 이방 땅 애굽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야곱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하신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셨구나. 그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겠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그러했듯, “하나님,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이루시겠습니까?”라는 인간적인 의구심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 역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 앞에 자신의 노쇠함을 되물으며 막막해하지 않았습니까?
방법을 고뇌하는 야곱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듯,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고 명료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내 백성을 위해 내가 친히 동행하며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이 절대적인 약속이 있었기에, 야곱의 자손들은 척박한 이방 땅 애굽에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고난 속에 담긴 임마누엘의 신비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출애굽기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누리는 듯했지만,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중에는 모두 종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내가 너희와 함께 갈 것이며, 너희와 함께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큰 힘을 얻었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참혹한 노예의 삶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동행은 이런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애굽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거나, 요셉 이후에도 출중한 지도자가 배출되어 왕조를 세우는 식의 승전보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애굽 역사를 보면 이방 민족이 세운 '힉소스 왕조'와 같은 전례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 되지 못했을까?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씀이 우리의 기대와 처음부터 어긋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보통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라고 하면 곧장 '만사형통'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을 돌봐주셔서, 대단한 부자는 아니더라도 거처할 집이 있고 자녀들이 큰 풍파 없이 평탄하게 자라주는 그런 소박한 행복을 꿈꿉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탈하게 성장하여 제 앞가림을 하고, 우리 부부도 노년에 큰 병치레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가 이런 소시민적인 평안에 머물고자 할까요? 아직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껏 지켜본 바로는, 생각지도 못한 재물이나 세상의 권세가 주어졌을 때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애굽의 풍요 속에서 들려주시는 메시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편안한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시 애굽은 오늘날의 미국과 비견되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제가 1980년대에 미국 신학교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은 이제 겨우 컬러 TV가 보급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선배들이 물려준 낡은 로터리식 흑백 TV를 보면서도 이곳의 풍요로움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노숙인조차 치즈를 먹을 만큼 물자가 흔한 곳이었습니다.
애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훗날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 "애굽에서는 양파를 마음대로 먹었는데 여기는 없다"고 불평했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양념 거리가 없다고 불평할 만큼 애굽은 모든 것이 풍족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풍요에 기대어 사는 것이 얼마나 안락했겠습니까?
이런 배경 속에서 하나님이 던지시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여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돌이켜 나를 기대는 삶으로 나아오너라."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안락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하자는 초대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그 깊은 의미를 다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셨습니다.
창조 언어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창세기를 면밀히 읽어보신 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서두부터 선포된 ‘창조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 복을 가장 먼저 주셨고, 홍수 이후의 노아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에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단순히 “너희가 이방 땅에서 고생할 것이니 내가 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차원의 위로가 아닙니다. “네가 그곳에 가면 지금보다 훨씬 차원 높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고귀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민을 온 이유도 이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이곳에 기회가 있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었기에, 이민 1세대들은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이 땅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마주한 이곳은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롭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삶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애굽이 풍요로운 땅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가겠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 풍요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임마누엘’은 더욱 깊은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창조 언어를 통해 번성하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애굽이 더 이상 단순한 이방 땅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그곳은 에덴과 같은 처소가 되고, 가나안과 다름없는 약속의 땅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동행하시기에 세상에 속한 애굽 한복판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과 소생의 임마누엘
그렇다면 임마누엘의 참된 정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는 목적을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안락에 두곤 합니다. 인생의 파고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도구화하고, 하나님이 내 뒤를 보살펴 주셔서 계획한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면 그것을 복이라 여기며 감사해합니다.
하지만 임마누엘의 본질은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진정한 의미는 세상을 향했던 의존성을 거두고, 오직 내가 의지할 유일한 분이 하나님임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만족을 약속하시며, 고통과 눈물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선취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수많은 유혹과 우상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결코 우리를 환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애굽에서 환난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시 환영받는 듯했으나 실상은 혹독한 노역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척박한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본다는 것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결국 승리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괴로워할 때, 주님은 “내가 너의 영원한 만족이 되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덮어주시는 영원한 생명
우리가 연약함으로 흔들릴 때, 주님께서는 “나의 사랑으로 너를 덮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세상이 그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흔들지라도, 심지어 타인과의 비교와 깊은 절망 속에 마음이 갈가리 찢겨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살까” 하며 탄식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듭된 실패도, 마음을 짓누르는 절망감조차도 결코 임마누엘의 신비를 압도할 수 없습니다.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아 “주님, 이 고난이 도대체 언제 끝이 납니까?”라고 부르짖는 기도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위대한 신앙의 선배인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시편 곳곳에서 “하나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저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라고 처절하게 호소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극심한 절망 가운데 있다면, 그 절망이 결코 임마누엘을 이길 수 없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마주한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막아설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이 애굽에서 보낸 마지막 17년의 세월이 단 한 줄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애굽 땅에 17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147세라.” 요셉이 겪었던 파란만장한 세월은 그토록 상세히 기록되었는데, 왜 야곱의 이 소중한 17년은 이토록 간략하게 서술되었을까요? 성경은 창세기 46장에서 17년 전의 상황을 보여준 뒤, 47장에서 어느새 17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버립니다.
소생과 회복의 17년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 이 17년은 요셉을 잃고 슬픔 속에 지냈던 과거 22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간이었습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났을 때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그는 “이제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의 인생에서 이 마지막 17년은 이전의 고통스러웠던 세월과는 궤를 달리하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17년을 거주하였으니”라는 우리말 번역이 원어의 깊은 함의를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보통 ‘거주’라고 하면 특정 장소에 머물러 산다는 물리적인 의미로만 이해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거류’나 ‘거주’는 임시 혹은 정식으로 거처를 정해 사는 레지던트(resident)의 개념이 강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하야($hayah$)'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live’, 즉 ‘살다’ 혹은 ‘존재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장소에 머무는 것을 넘어선 생명력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야곱의 다른 기사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하야’는 아담의 아내 ‘하와’의 이름과 어원이 같습니다. 하와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산 자의 어머니”입니다. 이와 동일한 단어가 창세기 45장 27절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요셉이 아버지를 모셔 오기 위해 수레를 보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전까지 야곱은 아들들을 향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우리가 정말 이 땅을 떠날 수 있겠느냐”라며 깊은 탄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요셉이 보낸 수레를 확인한 순간, 성경은 “야곱의 기운이 소생한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소생하다’가 바로 ‘하야’입니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연명하거나 어느 장소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죽었던 기운이 다시 살아났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야곱이 애굽에서 보낸 17년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앉아 있었던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기간에 진정으로 ‘소생’하였고, ‘회복’하였습니다. 17년의 세월 동안 그의 깊은 상처가 아물고, 마른 눈물이 다시 생명의 소생으로 바뀌었으며, 아픈 살이 돋아나듯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치유되는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임마누엘: 영원한 만족으로의 초대
임마누엘은 단순히 우리 곁에 정적으로 머물러 계시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냐”라며 곁에서 위로만 건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실재적인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능동적인 임재입니다. 야곱의 생애 속에서 드러난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회복시키고, 소생케 하며, 다시 살려내신다는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탄의 계절에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주님께서 임마누엘로 오셨다는 선포는 단순히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사실 보도를 넘어, 우리를 모든 근원적인 고통으로부터 건져내어 소생시키시겠다는 구원의 의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통해 야곱에게 참된 만족을 주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심령에 거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정말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관념적인 대답이 아니라, 이 말씀의 무게를 진지하게 숙고해 보시기를 권면합니다. 우리에게는 직장과 건강, 양식과 물 등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 모든 결핍을 뒤로한 채 오직 예수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오히려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직시하며 깊이 고민하는 분들에게서 저는 더 깊은 신앙의 진정성을 발견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주님은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목마르냐?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배고프지 아니하리라.” 사마리아 여인도 처음에는 이 신령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더 이상 물을 뜨러 오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생수만을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해 주시면 다시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라며 당장의 결핍을 채울 떡만을 구하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떡은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보존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만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성경이 선포하는 임마누엘의 핵심은 바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침묵 정진: 앞으로 나아가는 임마누엘
우리는 지금까지 임마누엘의 은혜를 세 단계로 묵상해 왔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언약을 성취해 나가는 삶이며, 둘째는 이 땅에서 하늘의 생명과 기쁨을 선취하는 하나님 나라의 경험이고, 셋째는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치유하시는 회복의 은혜입니다. 이제 여기에 한 가지 본질적인 의미를 더하고자 합니다.
임마누엘은 ‘정지’가 아닌 ‘전진’을 의미합니다. 본문 앞장인 창세기 46장에서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가게 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이끄시고 목적지를 향해 역동적으로 나아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 도서관 벽면에는 두 개의 표지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하나는 정숙을 권고하는 “조용히 하시오”였고, 다른 하나는 당시 교장이셨던 박윤선 목사님이 친필로 쓰신 사자성어 “침묵 정진(沈默精進)”이었습니다. 고요함 속에서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그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임마누엘의 신비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곁에서 힘을 북돋아 주시는 조력자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과거의 회한을 뒤로하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동행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멀리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박수만 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혼자 가보아라”라고 방관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우리 인생의 장애물을 뚫고 문제의 핵심부로 함께 뛰어들어 그 환난을 부수시는 분입니다. 내 인생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사시며, 우리와 함께 험한 길을 정진해 나가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너무나 쉽게 망각하곤 합니다. 임마누엘은 단순한 치유와 회복을 넘어, 우리를 목적지로 이끄시는 역동적인 전진입니다. 우리의 상처와 상실, 아픔과 눈물을 거두시고 그 자리에 기쁨의 관을 씌우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우리 심령에 허락하시겠다는 이 약속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은혜를 삶에서 누리고 계십니까? 이 언약이 진정 여러분의 것이며, 이를 전적으로 신뢰하십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복을 현재로 누리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의 가사를 삶으로 구현해 내는 복된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이 약속 앞에 놓인 수식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마치 도장을 찍어 보증하시듯, "반드시"라는 단어로 언약의 확실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신비로운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회의와 불신으로 흔들릴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요동하는 우리를 붙드시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왜냐하면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애굽에 속하지 않은 자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른 야곱이 아들 요셉을 부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장차 자손들이 가나안으로 귀환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아울러 이곳 애굽에서 요셉의 손에 의해 자신의 생이 마감될 것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단순히 "나를 가나안에 묻어다오"라고 부탁하는 수준을 넘어, 엄중한 맹세를 요구합니다. "나를 이 땅 애굽에 매장하지 말고, 조상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잠든 가나안 땅의 묘실에 반드시 장사하라. 이를 내게 맹세할 수 있느냐?"
이 간절한 청탁이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사후에 시신이 어디에 머무느냐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이 유언으로 인해 요셉은 훗날 가나안까지 먼 길을 왕복해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야곱이 굳이 이러한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후손들에게 남길 영적 메시지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손들의 가슴에 다음과 같은 진리를 새기고자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이곳 애굽에 머물고 있으나, 결코 정체성을 혼동하지 말라.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애굽이 아니다. 너희가 이 땅에 거주할지라도 너희는 결코 애굽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는 조상들이 그러했듯 자신 또한 약속의 땅에 믿음으로 묻히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장차 너희는 애굽에서 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곳에 속한 자가 아니며, 애굽은 결코 나를 붙잡아둘 수 없다." 야곱은 이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자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묶으려는 세상의 올무
애굽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집요하게 붙잡았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결국 그들을 종으로 삼아 결박하고, 오직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해 부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본질이며, 애굽이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오늘날의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세상적 가치에 묶어두려 합니다. 재물이라는 사슬로 우리를 옭아매기에, 우리는 자주 물질의 결핍이나 탐욕에 매여 살아갑니다. 때로는 권세의 달콤함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타인이 내 말에 복종하고 내 뜻대로 상황을 움직이는 그 짜릿한 권력의 맛은 참으로 강력한 중독성을 지닙니다.
성경적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결박합니다. 더 높아지려는 욕망,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갈망, 그리고 칭송받고자 하는 허영심이 우리를 옭아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치명적인 결박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불투명한 내일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마비시킵니다. “애굽을 떠나는 것은 좋으나, 당장 광야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릴 것인가?”라는 현실적 불안이 엄습합니다. 눈앞의 바로가 제공하는 일시적인 안락에 마음을 빼앗겨,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실패에 대한 공포, 무시당하거나 비난받을 것에 대한 염려, 그리고 고통에 대한 직면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해야 합니다. “주께서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가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애굽의 올무를 끊어내고, 우리를 진정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임마누엘의 십자가와 생명의 양식
사냥꾼의 올무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바로의 노역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지극히 역설적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이나 화려한 권세가 아니라, 아무런 방어 능력도 없어 보이는 연약한 어린 양 한 마리였습니다. 그 어린 양의 피가 애굽 전역에 심판이 임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여 구원했습니다. 우리는 훗날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거룩한 표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듯 보이는 황량한 애굽 땅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처소였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모든 두려움과 수치, 비난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홍해의 위기 속에서도, 메마른 광야의 여정 속에서도 실상 그들을 지켜낸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은혜였습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셨으나, 만일 그것이 단순히 육신의 허기를 채우는 양식에 불과했다면 그들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만나와 반석의 물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생명의 양식임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가 이미 그들의 일상 속에서 만나와 생명수가 되어 주셨음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수라.” 주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임마누엘로 동행하셨습니다. 애굽과 세상이 결코 이스라엘을 영원히 붙잡아둘 수 없었던 절대적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현존 앞에서 세상은 마땅히 우리를 놓아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임마누엘
세상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거대한 폭풍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를 덮쳐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뒤를 쫓던 애굽 군대처럼, 세상은 끝까지 우리를 추격하여 절망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으려 합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신비는 바로 그 위기의 현장에서 빛을 발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위험한 그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셨으며, 친히 십자가가 되어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주변 열강들이 이스라엘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 때,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8장을 통해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온 나라들아, 너희가 함께 계획을 세워보아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모여 의논하고 호언장담해 보아라. 너희의 그 어떤 계획도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사야가 이토록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된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때에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소망 없는 곳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선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사랑의 확증입니다.
말구유에 누워 있던 그 어린 아기가 장차 우리의 모든 아픔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을 대신 흘려주실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우리의 죄와 고통을 담당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고, 예배하는 이 순간부터 우리가 숨을 쉬는 매 찰나에 이르기까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여 고개 숙일 때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앞에 좌절할 때도, 그분은 변함없이 우리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십자가로 증명된 승리와 평안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심판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며, 그가 죽음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세상은 알지 못했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매번 흔들리고, 이웃 한 명을 온전히 사랑하거나 용서하는 것조차 버거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와 안식을 주실 분이 바로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절망의 심연에 있다면 그 깊은 곳으로, 아픔의 한복판에 있다면 그 고통 속으로 찾아오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의 회복과 소생이 되시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주님은 단순히 곁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정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푯대를 향해 달려가며, 그 여정의 끝에 반드시 도착하게 하겠노라 약속하시는 신실한 동행자이십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본래 폭풍과 화산 같은 위엄을 지니신 분입니다. 시내산의 불꽃과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을 때, 백성들은 그 거룩한 두려움 앞에 감히 서지도 못했습니다. 시편의 고백처럼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사 바다를 가르시고 마른 땅을 드러내시는 능력의 주권자이십니다.
세밀한 음성으로 안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이토록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지치고 곤비한 자녀를 대하실 때는 지극히 세밀하고 따뜻한 분이 되십니다. 천하를 호령하시는 분이 우리 앞에서는 혹여나 자녀가 깰까, 상처 입을까 노심초사하며 가만히 품에 안으십니다.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세밀한 음성으로 우리 귀에 속삭이십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 임마누엘,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이사야와 신앙의 선조들이 외쳤던 그 위대한 승리의 함성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십시오. 이것은 성도 된 여러분의 마땅한 권리이자 선언입니다.
“세상아, 나를 괴롭히던 과거의 상처들아, 나를 흔들려는 모든 유혹과 시련들아, 나의 눈물과 절망과 실패들아, 어디 한 번 힘껏 불어보아라. 폭풍우처럼 나를 위협해 보아라. 그러나 너희는 결코 나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이는 임마누엘, 십자가의 하나님, 어린 양 예수가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우리는 지금 삶의 어느 지점에서 십자가를 붙들고 있습니까? 임마누엘 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를 전진하게 하시고, 위로와 회복을 주시는 그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보다 여전히 나의 고집과 염려 속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오 주님, 임마누엘의 빛을 우리 심령에 비추어 주옵소서.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이 영광스러운 복을 깨닫게 하시고, 그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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