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8장 1절로부터 7절 까지의 입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낳은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오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아멘.
말씀의 배경과 시간적 흐름
우리는 지난 2024년 12월 마지막 주에 창세기 47장의 마지막 대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로부터 어느덧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때로는 불과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난 몇 년의 기억을 아득하게 만들기도 하기에, 오늘은 잠시 지난 말씀을 되새기며 기억을 일깨우는 시간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48장은 야곱의 이야기인 동시에 요셉이 중심이 되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야곱의 아들들이 아니라,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즉 야곱의 손자들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어르신들께서는 자녀들 이야기보다 손주들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가실 텐데, 바로 그 손자들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핵심을 이룹니다.
야곱이 손자들을 마주하게 된 배경은 그의 기력이 다하여 생명이 위중한 상태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 다급히 요셉을 불렀고, 소식을 들은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옵니다. 당시 야곱의 나이는 그가 생을 마감한 147세 즈음이었을 것이며, 요셉 또한 어느덧 쉰여섯이 되어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습니다. 함께 온 두 아들은 스물한 살과 스물다섯 살 정도의 장성한 청년들이었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신 노년의 아버지 앞에, 막내 베냐민 바로 위의 아들이었던 요셉이 두 손주를 데리고 병문안을 온 광경을 그려보십시오. 죽음을 목전에 둔 할아버지와 장성한 손주들의 만남,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엄하고도 애틋한 시작의 모습입니다.
야곱이 회상하는 인생의 고난과 하나님의 약속
이러한 임종의 문턱에서 야곱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지난 삶을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흔히 어르신들이 지난날을 떠올리며 과거를 이야기하듯 야곱도 입을 열었으나, 그 고백의 내용은 사뭇 특별합니다. 오늘 본문의 3절과 7절이 바로 야곱의 인생 회고입니다. 3절은 그가 가나안을 떠나 밧단아람으로 향하던 청년 시절을 담고 있으며, 7절은 다시 그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오던 중년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이 두 지점 사이에 두고, 그 중심에 두 손자의 이야기를 배치했습니다. 즉, 자신의 전 생애를 배경으로 삼아 손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손자들을 앞에 둔 할아버지라면 보통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까? 모진 풍파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혹은 과거에 얼마나 큰 성취를 이루었는지와 같은 무용담을 늘어놓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꺼낸 첫 이야기는 벧엘에서 겪었던 사건입니다. 자신이 형을 피해 도망치던 비참한 처지였을 때, 그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약속을 주셨던 일을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도 그는 돌아오던 길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때의 형편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역시 그는 도망자의 신세나 다름없었습니다. 떠날 때도 도망자였고 돌아올 때도 도망자였던, 고단하고 변함없는 시련의 연속을 요셉과 손자들 앞에서 담담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인생이 고통으로 시작되었으며, 마침내는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길 위에서 잃는 슬픔으로 점철되었음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사실 그에게는 자랑할 만한 좋은 추억도 많았습니다. 형 에서와 극적으로 화해한 일이나 거대한 부를 일구어 낸 성공담, 혹은 인생의 고비마다 경험했던 수많은 기적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랑하는 손주들 앞에서 자기가 겪어야 했던 깊은 고뇌와 고난의 세월을 가감 없이 들려줍니다.
보이지 않는 약속을 유산으로 주는 믿음
보통의 경우라면 고난 가득했던 자신의 인생을 회상한 뒤에, "나는 비록 힘들게 살았지만 너희만큼은 이런 고생을 겪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자녀들에게 고생담을 들려줄 때는 "너희는 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꼭 성공해야 한다"는 바람을 담곤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축복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는 자신이 오래전 받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꺼내 놓으며, 그 약속이 손자들의 삶에 그대로 이어지기를 빌어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야곱이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 중 그 당시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이루어진 것이 있었을까요? 냉정하게 살펴보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나 야곱은 끝내 그 땅의 주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 또한 70명의 가족을 이루기는 했으나, 하나의 민족이라 부르기에는 여전히 미약한 수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니라 타국인 애굽이었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면목이 없어서라도 그런 축복을 하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당장 눈앞에 보여줄 실체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자칫 공허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태도는 오직 한 가지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비록 지금은 가치 없어 보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훗날 거대한 가치를 지니게 될 땅 문서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을 때입니다. 마치 "지금 너희 눈에는 이 종이가 보잘것없어 보이겠지만, 사실은 가장 요지에 있는 땅의 문서란다. 훗날 여기에는 가늠할 수 없는 가치가 담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지금 손주들에게 전해주는 이 약속이 겉으로는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애 가장 귀한 유산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보화보다 귀한 하나님의 약속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통과 아픔, 그리고 세속적인 관점에서의 작은 성공이나 성취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것을 자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야곱이라는 인물의 훌륭함을 치켜세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야곱의 이러한 행보를 분명하게 해석해 줍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야곱의 이 축복은 단순한 할아버지의 유언이 아니라 철저히 믿음에 근거한 영적 행위였다는 점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세상의 모든 보화나 성공보다 훨씬 귀하게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현실은 실패와 고난의 연속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만큼은 그 모든 어려움을 압도하는 위대한 승리임을 그는 확신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그것이 가장 큰 힘이며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그 약속이야말로 후손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그들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핵심이 된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의 희망보다는 오늘 내 손에 쥐고 있는 결과물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우리가 소유하고 있음에도 그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정말 귀한 보석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가치가 너무나 대단해서 자손만대까지 이 약속을 붙잡고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비유처럼, 지금은 비록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배추밭일지라도 그것이 훗날 가장 번화한 요지가 될 땅 문서라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담대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훗날 이 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열두 지파의 시작
야곱은 지금 손자들을 앞에 두고 요셉에게 담대히 요구합니다. “너의 두 아들을 나에게 달라”는 이 선언은 구속사적으로 요셉의 시대가 일단락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와 민족을 이루고, 훗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미 그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였고,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요셉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우리가 잘 아는 열두 지파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요셉 아래에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두 지파가 형성됨으로써 이스라엘은 실제적으로 열세 지파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중 레위 지파를 “나의 것”이라 칭하시며 예배를 위해 온전히 구별하셨습니다. 결국 레위 지파를 제외한 열두 지파가 약속의 땅을 분배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루우벤 대신 요셉을 장자로 대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두 아들을 통해 두 몫의 기업을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면면히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 야곱을 통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부르심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이때 야곱에게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있는지 애굽에 있는지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 혹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자손들을 위해 무언가를 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었습니다. 육신이 얼마나 쇠약한지, 지난 세월이 얼마나 고달프고 파란만장했는지 또한 그에게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은 이를 철저히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모습을 통해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 약속을 자기 생애의 전부로 신뢰했는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의미입니까? 그 약속이 진정 인생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고 계시는지요.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약속이 여러분과 저에게 진정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의 인생 속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 그 약속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중하게 다가오고 있는지요.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약속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그토록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의 감정과 판단, 처해 있는 환경과 여러 상황이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풍파가 우리를 평안의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하며, 때로는 두려움에 떨게 하고 깊은 근심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전혀 없을 수는 없으며,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무조건 "괜찮다"라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삶은 참으로 고단한 법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다윗조차 늘 즐겁게만 찬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때로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노래했고, 답답한 마음에 원수를 갚아달라 호소할 만큼 처절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흔들리는 고통 속에서도 다윗을 끝까지 붙들어 주었던 것은,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이시며 주를 바라볼 때 주께서 영원한 거처가 되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야곱의 고백이 단지 가나안 땅이라는 지리적 경계 안에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를 영원히 붙잡아주실 하나님 나라, 즉 영원한 도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두 아들을 그 자리에 세우심으로써 새로운 두 지파의 시작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그 중심에 바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므낫세: 애굽을 잊고 하늘의 기업을 얻다
요셉은 창세기 41장에서 장남의 이름을 지으며 그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므낫세’라는 이름에 담긴 뜻입니다. 요셉은 이 이름을 통해 자신의 아픈 과거와 가나안에서의 고통을 드디어 씻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애굽에서의 삶에 안착하여 새로운 안식을 시작하겠다는 다짐이 그 이름 속에 서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애굽에서 태어난 요셉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합니다. 므낫세를 야곱 자신의 아들로 입적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곧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이름의 의미는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전에는 가나안의 고통을 잊게 하셨다는 뜻이었으나, 이제는 “너는 더 이상 애굽에 속하지 않았으니, 이제 애굽을 잊어버려라”라는 뜻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므낫세가 바로 출애굽 역사의 서막임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므낫세라는 이름을 그대로 둔 채, 그 이름을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영역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제 므낫세는 ‘가나안을 잊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애굽이 나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애굽을 잊어버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이 준 안락함과 세상적인 보상들을 기꺼이 뒤로하고, 야곱의 아들이 되어 약속의 유업을 잇는 자가 되겠다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애굽의 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이를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로마서의 말씀과 맞닿아 있습니다. “너희는 더 이상 세상과 죄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과 의의 종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이 된 상태를 진정한 ‘자유’라고 부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라운 특권과 유업
야곱과 므낫세의 이야기는 단순히 "너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다"라거나 "더 이상 애굽에 속한 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야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다"라고 선포합니다. 이를 신약 성경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바로 ‘양자됨’의 은혜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아들과 딸로 입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종의 신분을 벗어난 존재를 넘어, 하나님의 가족인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놀라운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누리셨던 가장 고귀한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존귀한 이름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신성한 권위나 능력에 이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누리셨던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의 자리에 우리도 초대를 받았으며, 한 식탁에 앉아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온전히 나누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놀라운 신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더 이상 애굽의 것을 기업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의 것을 유업으로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점은, 이토록 엄청난 영적 진리를 마주할 때 정작 우리는 너무나 평온하고 담담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귀가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먼 친척으로부터 수천억 대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가빠지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이것이 사실인가?” 하며 몇 번이고 확인하고, 그 놀라운 소식에 어쩔 줄 몰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은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놀라운 신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무한한 기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물려받을 수 있는 재산이 얼마이든, 그것이 아무리 거대하다 한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유업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름뿐인 자녀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것을 너와 함께 나누겠다”라는 분명한 약속과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풍성함을 여러분의 기업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상속자의 삶
그 기업의 정점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을 너와 함께 누리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요한일서 3장은 이 신비를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 사랑을 깊이 묵상해보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기에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새겨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확증하며, 세상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장차 무엇을 누릴 사람인지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줄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안타까움은 하나님이 주실 유업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 가치가 얼마나 놀라운지 들어도 그저 덤덤하게 미소만 지을 뿐입니다. 마치 "수천억의 유산이라니 참 좋겠구나"라며 남의 일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는 매우 밝습니다. 돈을 세는 데는 익숙하고 소유물의 가치는 정확히 계산할 줄 알지만, 하늘에 쌓아 둔 보화가 얼마큼인지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세상적인 유익에 대해서는 소식만 들어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지만, 하늘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마치 낯선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생경해합니다. 영원한 가치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으셨는지,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육신의 아버지도 지독한 가난 속에서 자식에게 먹일 것이 없으면 자신은 굶주림을 견디며 소금으로 배를 채울지언정 자식은 어떻게든 먹이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자녀를 살리기 위해 친히 죽음을 삼키신 분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아픈 자식을 살리려 십 리 길을 업고 뜁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업고 저 천국까지 뛰어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 영적으로 병들어 누워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어이 업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달려가시는 참된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자녀가 아파할 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라, 괜찮다"라며 위로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아끼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나에게 말해라.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내게 고해라" 말씀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당신의 몸을 직접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때로는 그토록 훌륭하고 간절한 육신의 부모조차 자식을 감당하지 못해 놓아버릴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위로의 말씀이 이사야서에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세상의 가장 숭고한 사랑조차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결코 변치 않고 우리를 끝까지 붙드십니다.
영광스러운 인생: 하나님의 에브라임이 되어
이것이 우리에게 쏟아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루 종일 지치고 힘든 일들,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과 걱정,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갑니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라 낙심하기도 하고, 하루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너무 버거워 지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잠을 설치고, 마침내 쓰러져 죽은 듯이 잠든 그 순간에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여러분을 지키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십니다. 세상 어느 누가 이토록 여러분을 사랑하며, 그 깊은 아픔까지 함께 나누어 주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이 사랑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바로 ‘야곱의 므낫세’이자 ‘하나님의 므낫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애굽을 잊은 사람들이며, 동시에 애굽을 잊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알아가는 자들이며, 그 거룩한 영광을 함께 누리기 위해 길을 걷는 상속자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인생을 사는 분들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을 수 있고,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친히 부르시며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이토록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시며 이 영광스러운 길을 함께 걸어주십니다. 아버지가 어찌 자기 손에 있는 자식을 귀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온전히 쏟아내고 계십니다.
므낫세와 함께 부름받은 에브라임의 이름에는 ‘이중으로 열매를 맺다’, 즉 ‘풍성한 결실’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이 이름을 지으며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에게 ‘수고한 땅’은 애굽이었지만, 이 이름이 야곱의 약속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의미는 영적으로 확장됩니다. 이제 그 풍성함은 애굽이 아닌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에서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번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풍성함을 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기업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조차 이 땅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 본향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상급을 향해 쌓여가고 있음을 조금씩 깨달아 갑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 영광스러운 유업을 소망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영원한 도성과 생명수이신 그리스도
우리는 지금 바로 그러한 약속의 삶 가운데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업, 우리가 장차 받게 될 참된 유업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만이 자신의 방패이시며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심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기업은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을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성경이 증언하는 진정한 유산이자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시기에 그 가치는 생명보다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어 찬송가에서는 이를 ‘나의 영원한 소유(My everlasting possession)’라고 더욱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을 정의하는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십니다. 만약 누군가 내 인생의 가치가 얼마냐고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기준이 되신다고 담대히 답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바로 그 존귀한 신분으로 존재합니다. 요한일서는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를 볼 것이기 때문이니.” 장래에 우리가 입게 될 영광스러운 몸이 아직 다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그분과 같은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것임을 믿음으로 압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그 영광의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현재의 자신에 대해 크고 작은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목회자로서, 설교자로서, 혹은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볼 때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 때가 많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실수하며, 앞으로도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너는 왜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인간적인 마음에 상처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요, 나는 하나님의 귀한 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딸입니다.” 나의 인생이 겉보기에는 찌그러진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 손에 들린 예술품임은 변함이 없으며, 흔들리는 것 같아 보여도 영원히 하나님께 붙잡혀 있는 견고한 반석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질 인생처럼 보여도, 실상은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찬의 약속과 상속자의 길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는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그러하다면, 이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성경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실재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장차 임할 완성된 삶의 모습을 기억하며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계시록의 말씀에 따르면, 장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삶은 생명수 시내가 흐르는 곳에서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는 강을 이루고, 그 강가에는 달마다 무수한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생명수의 물을 마시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온전케 회복시키며 끊임없이 새 힘을 공급하여,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영원하게 할 영적 실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수와 생명 떡의 실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은혜를 먼 미래의 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에 초대받을 때마다 이미 그 생명의 잔치를 맛보고 있습니다. 성찬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대하며, 우리는 영원한 생명수이자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십니다. 이것은 영원한 나라에서 누릴 풍성한 삶이 이미 이곳에서 시작되었음을 고백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정한 양식이자 힘이 되시기에,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어떠한 악에서도 건짐을 받으며 어떤 시련 속에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인생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애굽의 안락함을 잊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므낫세이며, 내 힘으로 일군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풍성함을 누리는 에브라임으로서 영적 출애굽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길 위에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이 말라 소리치는 고통의 날도 있을 것이나, 주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를 터뜨려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매일 아침 내리는 만나처럼,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신선한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이며,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신뢰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이들은 반드시 그 생명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 길은 결코 평탄하기만 한 길은 아닙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자 그리스도 함께한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이 길을 통해 우리는 정결해지며 거룩을 완성해 나갑니다.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세상의 헛된 곳에 한눈팔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까" 혹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를까"라는 자기중심적인 관심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 얼마나 더 많이 가지고 더 편하게 살 것인가를 인생의 첫 번째 목적으로 삼지 마십시오.
대신 우리는 "나는 애굽의 므낫세나 에브라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므낫세이자 하나님의 에브라임이다"라고 담대히 고백해야 합니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어렵고 힘겨운 순간들의 연속일지라도, 주님만이 나의 인생의 진정한 의미이심을 믿으십시오. 주님의 성품이 내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너무나 선명하지만, 그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을 만큼 강하신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보석이며, 하나님의 영광이자 하늘 열두 문의 주인공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수놓은 보석과 같은 고귀한 이름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그 아름다운 생명의 길, 참된 신앙의 길을 끝까지 경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토록 크신 주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이 거룩한 길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받은 기업이 무엇인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있다면,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이를 온전히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저 지식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약속의 길 위에 굳건히 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막연한 앎이 아니라, 나의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실제적인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사실이 내 삶에 얼마나 큰 힘과 능력이 되는지를 깨달아, 매일의 일상 속에서 참된 위로와 격려, 그리고 꺾이지 않는 새 힘을 얻으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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