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8 12절로부터 20 까지 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이름과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요셉이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아멘.

 

보이지 않는 손길: 어둠 속에 심겨진 생명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본문은 노년의 야곱이 요셉의 아들을 축복하는 엄숙한 장면입니다. 아마 성도 여러분께서는 야곱이 손을 엇바꾸어 축복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실 것입니다. 장자인 므낫세와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힌 할아버지의 양손이 서로 교차하는 이례적인 광경 말입니다. 우리는 대목에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혹시 야곱이 과거 동생으로서 장자권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아픈 과거를 투영하여, 의도적으로 차자를 앞세우려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다른 신령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구체적인 배경은 다음 기회에 심도 있게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그보다 조금 본질적인 측면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야곱과 요셉이 있는 보이지만, 사실 요셉의 아들이 주연 배우처럼 등장하여 야곱의 복을 받는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야곱은 기력이 쇠하고 시력조차 흐릿해진 147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엄숙한 순간은 단순히 손주들을 축복하는 자리를 넘어, 야곱이 그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법적이며 영적인 절차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을 대신하여 손자가 야곱의 아들 항렬로 편입됨으로써 야곱의 직계 아들의 수가 늘어나는 특별한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 야곱은 지금 손주가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복을 비는 마음으로 그들 앞에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 보지 못하였다는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야곱은 요셉의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그들을 품에 안으며 요셉에게 마음 깊은 고백을 건넵니다. "내가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고백에는 평생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난 환희를 넘어, 그의 자녀들까지 대면하게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에 대한 경외감이 서려 있습니다.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감개무량' 순간은 야곱의 생애를 관통해온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을 증거합니다.

 

야곱의 심중이 이토록 뜨거웠던 만큼, 요셉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한때 다시는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여겼고, 아버지를 생전에 다시 뵈리라는 소망조차 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의 이름을 '잊게 하셨다' 뜻의 '므낫세' 짓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아들을 이끌고 아버지 앞에 나아와, 그들이 조부의 양자가 되는 은총의 현장을 목도합니다. 요셉이 아버지 앞에 땅에 엎드려 절하는 모습은 부친에 대한 지극한 공경인 동시에, 자신의 고단했던 삶을 완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 앞에 드리는 최고의 경배였습니다.

 

어둠인 알았던 시간, 하나님께 심겨진 시간

여러분, 요셉의 생애를 잠시 반추해 보십시오. 그의 삶은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월을 표현하기에 '암흑'이라는 단어만큼 적절한 것이 있을까요. 노예 상인에게 팔려 가던 비참한 순간, 보디발의 집을 거쳐 차디찬 감옥에 갇혔던 날들, 그리고 나갈 길을 찾았다고 믿었으나 끝내 침묵 속에 남겨졌던 기나긴 세월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당시 요셉의 상태를 가리켜 그의 혼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고 묘사합니다.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오죽하면 그가 총리의 자리에 올라 안정을 찾았을 , 첫째의 이름을 므낫세라 지으며 " 모든 고난을 잊으리라"라고 선언했겠습니까. 그는 가나안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그토록 아꼈던 아버지에게조차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과거를 망각의 심연 속에 묻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잊겠다는 다짐은, 그의 내면에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깊이 박혀 있었으며 그가 여전히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성취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통해 우리가 예상치 못한 위대한 고백을 이끌어내십니다. 훗날 형제들을 대면했을 요셉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형제들이여, 두려워 마소서. 당신들과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셨습니다." 형제들을 향한 원망이 씻은 사라지기까지, 그리고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신앙으로 수용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영적 몸부림이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절규 끝에, 그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본질을 깨닫게 것입니다. 전까지 요셉에게 시간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에 불과했습니다. 형제들과의 혈연은 끊겼고 아버지는 멀리 계신 상황에서, 그는 그저 " 잊고 애굽 땅에서 살아가리라"라며 스스로를 달랬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신앙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요셉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진리는, 그가 고통과 원망 속에 신음하던 찰나에도 하나님은 순간도 그를 떠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고 아버지를 영접하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보일 때만 곁에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감옥의 심연 속에서 일이 풀리지 않아 괴로워하며 연약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던 바로 그때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신앙을 가졌음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성경은 요셉의 삶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요셉이었지만, 역시 앞날을 없어 불안해하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애굽이라는 거대한 장벽 안에 갇혀 그대로 저물어갈 것이라 예단했을지 모릅니다. 꺼질 듯한 촛불 하나를 부여잡듯 "그래도 나는 성공했으니까, 총리가 되었으니까"라는 위안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번성' 뜻하는 에브라임이라 지으며 이방 땅에서 어떻게든 뿌리 내리려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스스로를 어둠에 갇힌 존재라 여겼던 캄캄한 시간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를 생명의 땅에 깊이 심으시던 시간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밑에서 뿌리가 견고해지고, 가지가 뻗어 올라 마침내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한 거룩한 예비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막다른 길에서, 해결할 없는 원망과 상처로 인해 "나는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구나"라고 체념하던 고통의 정점이 사실은 하나님의 '심기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맺어진 열매는 야곱과의 재회를 통해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마지막 만남은 요셉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요 격려였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의 삶에 안주하기 위해 지었던 이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야곱의 축복을 통해 새로운 영적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이제 므낫세는 단순히 애굽의 고통을 잊는 것을 넘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아들' 되었고, 에브라임은 이방 땅에서의 성공을 넘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 거듭나게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믿음

야곱이 이처럼 손자들을 아들로 삼아 축복한 사건이 지니는 영적 무게는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믿음의 장’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대개 야곱의 생애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벧엘의 환상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늘에 닿은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던 압도적인 광경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했던 사건 말입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11장에도 “믿음으로 야곱은 벧엘에서 기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을 법하지만, 성경은 의외로 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어낸 얍복강 사건은 어떠합니까? 역시 불후의 신앙 고백으로 손색이 없으나 히브리서 기자는 침묵을 택합니다. 대신 성경은 야곱의 믿음을 문장으로 정의합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하고. 장면이 야곱의 생애를 아우르는 믿음의 정수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가볍게 지나쳐서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유명한 사건을 제치고 하필 축복의 장면이 선택되었는지 신앙적 가치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은 이제 요셉의 아들들이 르우벤이나 시므온과 같은 반열에 것임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요셉의 몫을 계승하며 야곱의 실질적인 장자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역대상 5장에 따르면 유다가 형제보다 뛰어나 주권자가 그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 장자의 권위가 요셉의 아들을 통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중심에는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있습니다. 섭리 안에서 에브라임이 앞세워졌고, 훗날 이스라엘 북왕국의 주류는 바로 에브라임 지파에서 배출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부르실 “유다야, 에브라임아”라고 부르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유다를 대표하는 다윗 왕조와 북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에브라임 지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의 거대한 역사를 친히 경륜해 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은 축복의 위엄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대대로 이어질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를 축복할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빌어주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토록 중차대한 사건을 마주하고 있다면, 도대체 축복의 실체는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을 없습니다. 야곱의 입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고백을 15절과 16절을 통해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이름과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동행하시는 하나님: 코람데오의 친밀함

야곱의 위대한 고백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과 함께 손자들이 믿음의 계보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지점은 야곱이 단순히 복의 목록을 나열하는 그치지 않고, 복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근거로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이 바로 15절의 표현입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여기서 “섬기던”이라는 표현의 뉘앙스를 세심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를 예배나 봉사의 의미로 이해하기 쉽지만, 원문에는 훨씬 강렬하고 역동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단어는 창세기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진 에녹의 삶을 설명할 쓰인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라는 표현과 궤를 같이합니다. ‘동행’의 영성은 노아와 아브라함, 이삭을 거쳐 모세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동행이란 단순히 나란히 걷는 행위를 넘어, 생을 함께 공유하는 지극히 깊고 친밀한 연합을 뜻합니다.

 

친밀함의 저변에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준엄한 신앙적 태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약속을 따라 사는 , 후대인들은 이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 칭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과 더불어 성도의 평생 지표로 삼았던 가치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마주한 여러 위기의 본질은 우리가 이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이 식었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실재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불신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코람데오의 삶이란, 내가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하고 나의 연약함을 정직하게 대면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거룩한 경건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우리를 억누르는 공포나 감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살피심은 우리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렸다가 책망하시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시선이 참된 위로가 되는 이유는 ‘동행’이라는 친밀함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시하는 감독관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곁에 계십니다. 유혹 앞에 흔들릴 우리를 보호하시고, 기력이 다해 기도조차 나오지 않을 성령의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참된 친구이신 주님이십니다.

 

좋은 친구는 때로 귀찮을 정도로 수시로 안부를 묻고, 일상의 사소한 것까지 나누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길을 잃었을 단순히 정답지만 던져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혜의 길로 인도하시되, 과정 속에서 우리를 직접 빚어가십니다. 사랑과 인내, 온유를 구하면 그것을 단번에 주시기보다 그것을 배울 있는 갈등과 인고의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사람을 곁에 두어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성도가 누구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침에 눈을 때부터 잠자리에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여러분은 최근 주님과 얼마나 친밀한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간곡한 청원 기도는 익숙할지라도, 친구에게 하듯 사소한 일상을 주님께 조잘대며 나누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단지 소원을 들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 여러분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시는 인격적인 친구이십니다. 야곱이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신앙의 번째 정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하나님과 동행하라. 히브리어로 ‘여호와 레이’, “여호와는 나의 친구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누구보다 아끼시는 가장 친밀한 친구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족함 없는 사랑의 목자

야곱이 고백하는 번째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며, 성도가 평생을 의지하며 누려야 분입니다. 야곱은 그분의 이름을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칭송합니다. 여기서 ‘기르셨다’는 표현은 원문의 의미를 참으로 깊게 반영한 번역입니다. 이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양육을 넘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나의 목자가 되셨다”라는 고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란 어떤 존재입니까? 양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아니라, 양의 삶에 결핍이 없도록 돌보는 이입니다. 시편 23편의 유명한 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역시 바로 목자 되신 하나님을 향한 노래입니다. 목자는 양을 때를 따라 만한 물가로, 때로는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다. 물론 길이 언제나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험준한 산길을 넘어야 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어둠을 지나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은 고난의 순간에도 우리를 결코 부족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인자하심과 선하심으로 우리를 끝까지 추적하여 붙드시는 하나님, 야곱은 지금 자신의 생애를 지탱해온 목자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 중에 종종 자녀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가족들은 “제발 이야기는 그만해달라”며 당부를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아끼려 노력하지만, 저도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장성하니 지나간 세월의 조각을 나누는 것이 성도님들께도 유익이 되리라 믿어, 제게 울림을 주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아이를 키울 때는 다들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여유도, 마음의 갈피를 잡을 시간도 부족해 정신없이 살다 보니 정작 아이에게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합니다. 특히 목회자의 삶은 좋은 아빠가 되기에는 참으로 고단한 환경입니다. 주말이면 아이의 곁을 지키기는커녕, 중요한 행사가 있어도 주일 사역과 심방 때문에 번도 함께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이의 처지에서 본다면 “내가 아빠를 가장 필요로 곁에 없었다”라는 서운함이 남을 수밖에 없으니, 참으로 좋은 아빠라는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은 직업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형편이 넉넉하여 사고 싶은 것을 사주고 용돈을 듬뿍 주는 일도 제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의치 않은 사정 때문에 해주지 못한 것이 많아,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내가 부족한 부모였구나’ 하는 미안함이 앞섭니다. 그러던 큰아이가 서른 살쯤 되었을 무렵, 가족 모임 자리에서 마음속에 깊은 감동이 있어 아이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습니다. “아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네가 나를 필요로 주말마다 교회 일로 곁을 지켜주지 못했던 것이 가슴 한구석에 짐으로 남아 있구나. 네가 필요했던 것들이 많았을 텐데, 아빠가 너무 몰랐던 같아 정말 미안하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제게 예상치 못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빠, 비록 저희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셨지만, 설교하실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요. 그게 아빠가 평생 해오신 말씀이잖아요. 그러면서 자기는 신기하게도 지난 삶을 돌이켜볼 부족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참으로 귀한 신앙의 고백이지만, 사실 입장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아들이 자라던 시절이 얼마나 결핍된 환경이었는지 제가 누구보다 알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 운동화 켤레 제대로 사준 적이 없고, 흔한 가족 여행조차 기억에 남을 만큼 다녀온 적이 없습니다.

 

용돈을 넉넉히 쥐여준 기억은 더더욱 없습니다. 돌이켜보니 용돈을 챙기기에도 급급했던 시절이라 아이의 필요를 채워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말한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은 물질적인 결핍이 없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유행하는 운동화는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빈자리를 인내의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는 지혜로 채워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한 아쉬움은 가족이 함께 고난을 견디며 사랑을 나누는 가치로 채우셨을 것이며, 넉넉지 못한 용돈 대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몸소 배우는 과정으로 부족함을 메워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이의 영혼 속에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인장처럼 새겨진 것이겠지요. 저의 목회 여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목회와 신앙의 길을 걷는 동안 어찌 부족함이 없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이 원망스럽게 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삶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고, 제가 바랐던 일들이 이토록 풀리지 않는데 어찌 부족함이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항변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그로 인해 성도들이 아픔을 겪는 것을 때면 마음도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정부에서나 법한 일이지만, 제가 목회하는 동안 번도 “목사님, 올해는 예산이 남으니 여유 있게 쓰십시오”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슬아슬하고 부족하여 매일 주님 앞에 “부족합니다”라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손길을 복기해보면, 역시 동일한 고백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시니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평안과 가시적인 넉넉함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채우심은 우리의 계산과 다릅니다. 야곱의 삶을 보십시오. 만약 그가 밧담아람에 안주하며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재산은 넘쳐났고 자식들도 많았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부족함이 없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얍복강에서 그를 만나 “너의 인생은 여전히 부족하다”라고 일깨우셨습니다. 네가 여전히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도권을 놓지 못한 씨름하고 있는 , 그것은 본질적인 결핍을 안고 있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게 하셨고,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한 근원적인 부족함을 당신으로 채우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바라볼 때도 “우리 교회는 이런 면에서 넉넉하다” 혹은 “저런 면에서 부족하다”라고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한지, 인내가 부족한지 주님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부족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가는 거룩한 섭리 속에 우리를 동참시키십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 법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완벽히 채웠다고 해서 하나님이 비로소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증명해 내시는 신비로운 지혜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시는구나. 우리의 빈자리를 이렇게 채워 가시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정리하자면, 야곱이 고백한 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레이’, “나의 친구 되신 여호와”입니다. 번째는 지금 우리가 나눈 ‘여호와 로이’, “나의 목자 되신 여호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번째는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는 여호와의 사자”, 우리를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나의 구원이 되시는 여호와”입니다. 가장 환난의 골짜기에서 가장 놀라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힘으로 버티려 했던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고, 부족함을 어떻게 당신의 은혜로 채우셨는지 야곱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상처를 통과하는 은혜의

성도 여러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간곡히 권면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짙은 어둠만이 가득하고, 스스로가 흑암 속에 영영 갇혀버렸다고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둠 속에 유폐된 것이 아닙니다. 어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생명의 땅속 깊은 곳에 심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어둠을 뚫고 반드시 싹을 틔울 것이며 장차 풍성한 열매를 맺게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의 삶은 산산조각 났고, 내가 믿었던 기초가 흔들렸으며, 인생은 치유할 없는 상처로 얼룩졌다”며 낙심하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깨어진 그릇이라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드는 법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깨어진 상처의 틈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여러분의 삶으로 침투하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그때 비로소 어둠에 잠겨 있던 우리의 존재가 참된 빛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깨어지고 상처 입었다고 느껴지는 바로 순간, 깨어진 삶의 고통을 친히 겪으시고 우리를 위해 무게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안으로 힘차게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형언할 없는 사랑을 입은 존재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규정하든, 역사의 물줄기가 여러분을 거스르든 결코 요동하지 마십시오. 설령 지구가 반쪽이 나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가며, 모든 바닷물이 증발하고 우주의 별들이 떨어져 세상이 암흑 속으로 침잠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어떤 환난보다 안전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보배로운 자녀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결핍을 어떻게 채우시며, 부족함 속에서 우리를 어떤 영광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소망의 항로를 함께 걷는 동행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을 담보로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이미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한숨밖에 나오지 않고 너무나 쇠잔하여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안에는 여전히 꿈틀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음을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생명력은 반드시 어둠의 지표를 뚫고 나와 찬란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결코 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일생 속에서 세상이 없는 하나님의 확신과 소망, 그리고 하늘의 기쁨을 끝까지 붙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측량할 없는 은혜 안에 거하는 자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야곱이 인생의 황혼에 고백했던 하나님의 이름이,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의 진실한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친구이시며, 나의 영원하신 목자이시며, 나의 영원하신 구원이심을 다시 한번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나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깊은 상처와 아픔, 그리고 부족한 삶의 조각들을 목자 되신 주님 앞에 온전히 내어놓사오니, 저희의 입술에서 원망 대신 감사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결국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믿음의 선포가 우리의 생애를 이끌어 가기를 간절히 원하오며,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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