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7절부터 12절까지 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아멘.
기념비적인 만남: 야곱과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의 인생에 있어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에 기념비적인 사건들이 어찌 한두 번뿐이었겠습니까? 수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던 얍복강 나루터에서의 씨름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인생 전체를 알고 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얻었던 순간,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순간, 라반에게 속아 원치 않던 결혼을 했던 순간들은 그의 인생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결정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인생 후반부에 이르러,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한 장면을 또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당대 가장 강력한 힘과 권세를 지녔던 애굽의 왕, 바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바로 앞에 선 이 야곱은 우리야 그의 일생을 잘 알지만, 당시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면 바로가 그를 알 리 만무했습니다. 야곱은 이름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이방인이었고, 게다가 나이 든 노인이었습니다. 얍복강에서 입은 부상으로 다리를 절고 있었기에 지팡이를 짚었을 것입니다. 긴 여행을 끝내고 온 터라, 비록 수레를 타고 왔을지라도 험하고 고단했던 여정으로 인해 몸에는 먼지가 많았을 것이며,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찬란한 황금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애굽은 그야말로 금으로 장식되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로 부강했습니다. 변치 않는 속성 때문인지, 금은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지닌 물질이었습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옷을 입은 바로 앞에 한없이 초라한 노인이 서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접하듯이, 이런 만남이라면 신하는 왕에게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며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인사를 올리거나, 혹은 자신들에게 거주할 땅을 허락해 준 왕에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감사의 절을 올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기에, 심지어 본문을 읽은 많은 학자들조차도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했다는 단어를, 야곱이 통상적인 문안을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어찌 피지배 계층의 낯선 노인이 당대 최고의 권세가인 바로 왕에게 축복할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해석이나 생각은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축복했다'는 이 단어의 의미를 무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축복의 진정한 의미
여기서 '축복한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라크(בָרַךְ)'입니다. 이 '바라크'라는 단어 자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동사의 어미 변화를 통해 사역형 동사처럼 쓰여서 '신의 은총을 간청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단순하게 복을 구한다는 뜻을 넘어, 대상(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간청하는 기도의 형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축복은 복을 받는 사람에게 직접 행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하나님, 이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내가 빕니다”라는 의미로, '빌 축(祝)' 자에 '복 복(福)' 자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단어는 쓰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마치 다른 신에게 무언가를 빌었다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라는 표현이 너무나 흔하게 쓰이면서, 이 단어는 일반적인 언어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로 인해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축복'의 의미 중 하나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복을 주는 것'이 등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이제는 널리 통용되는 표현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본래의 의도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다른 신에게 빌지 않으시고, 스스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야곱이 바로 왕에게 행한 축복은 바로 왕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간청하는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축복하는 자가 더 큰 자다
또한, 이 만남에는 중요한 성경의 원리가 하나 더 담겨 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라는 신비한 인물을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만남은 야곱의 때로부터도 오랜 시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평강의 왕'이라는 뜻을 가진 멜기세덱을 만난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고, 멜기세덱은 왕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며 가장 높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통해 명확한 성경적 원리를 제시합니다. 히브리서 7장 7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작은 사람이 큰 사람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것이다.”
이 말씀은 곧 축복하는 자가 축복을 받는 자보다 더 높은 자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비록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을지라도, 그를 축복한 멜기세덱이 더 높은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나아가 그 멜기세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증거합니다. 이는 우리가 만들어낸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열심히 연구하는 구약성경이 “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경은 구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야곱도, 요셉도 사실은 어떤 형태로든지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바로보다 높은 이유
어쨌든 우리는 이 성경적 원리를 통해, 바로를 축복한 야곱이 바로 왕보다 더 큰 자라는 두 번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의 원리상 야곱은 바로보다 높은 자입니다. 그러나 과연 야곱이 스스로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가 정말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앞서 묘사했듯이, 야곱은 지금 다리를 절고 있는 백삼십 세의 노인입니다. 최고 권력자의 황금 보좌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선 그가, 감히 왕에게 복을 빌어주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왜, 어떤 이유로 아브라함은, 그리고 그의 손자인 야곱은 그렇게 바로 왕에게 축복할 수 있었을까를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이야기, 이 설교를 여러 번 들으셨겠지만, 혹시 놓칠까 봐 또 하나 말씀드립니다. 야곱은 바로에게 축복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했습니다. 첫 번째 축복과 두 번째 축복은 문맥(Context)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축복을 다시 한번 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축복은 문맥상 요셉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왕 앞에 세우니, 야곱이 왕에게 축복했습니다. 이는 곧 야곱에게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지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야곱이 이 이방 신과 같은 애굽의 바로—특히 바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합니다—그 신에게 복을 줌으로써 하나님이 더 높은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이며, 출애굽기하고도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가 야곱의 축복을 수긍한 이유
하지만 저는 이 사건에서 조금 더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런 생각으로 손을 들어 축복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나는 언약의 백성인데 내가 너보다 낫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왕이 어떻게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 부분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축복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못한 경우라면 말입니다. 제가 1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교회 앞에 계신 노숙자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곳은 위생적으로도 위험하고, 많은 사람들이 안전 문제로 인해 가까이 가기를 꺼릴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험악한 분들은 아닙니다. 제가 거의 일주일에 몇 번씩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데요. 이분들이 이제 이야기를 다 마치고 “어떻게 지내냐,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분들도 다 계획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는데, 마지막에 저한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God bless you.”
제가 그 말을 들으면 한편으로는 저분도 그렇게 누구를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되게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살지도 모르는 분이 말입니다. 우리 앞에 사시는 제리라는 친구는 다리를 다쳐서 항상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다리가 안 좋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끝나고 나면 “God bless you.” 제가 목사라는 것을 다 알죠. 제가 “내가 너한테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 하고 물어보곤 하는데, 그런 경우도 우리가 말할 때 좀 어색합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이 바로 왕에게 그런 축복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극을 많이 봐서 아실 것입니다. 태종이나 태조 같은 굉장히 괄괄한 왕이 앉아 있는데, 신하가 갑자기 올라가더니 “왕이여, 내가 왕에게 복을 주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여봐라, 끌어내거라!” 반역죄 아닙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데, 바로가 가만히 있단 말이에요.
이것은 바로가 그 축복을 수긍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수긍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 전체를 반드시 기억해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바로의 말을 읽어드릴 테니, 바로가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옛날에 바로에게 “바로시여,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꿈을 알려드릴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꿈을 다 알려주고 나니까, 바로 왕이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여주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바로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즉, 바로는 요셉이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이것을 보여주셔서 애굽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요셉의 아버지가 온 것입니다. 요셉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애굽을 구원해주었는데, 이번에는 그 요셉의 아버지가 와서 더 세지지 않을까? 그 아버지가 와서 자기에게 축복하니까 그는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을 구원한 그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따라서 여기서 처음에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 축복한 사건은 바로에게 “사실은 이 애굽을 구원한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을 준다”라는 야곱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과 바로가 처음 만납니다. 그것은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가 만나는 것과 유사합니다.
세상을 살리는 교회의 역할
그리고 여러분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잘 놓치고 지나가지만, 이 애굽을 살리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애굽을 왜 살렸습니까? 야곱과 그 약속의 자손을 살리려고 살린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너무나 확실한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구글에서 일을 하든, 애플에서 일을 하든, 혹은 여러분의 가게나 어떤 직장에서 일을 하든, 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아서 내가 먹고산다고 우리가 대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반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멸망을 받지 않는 이유는 우리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복음이 전해져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은 온 인류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뜻이며, 우리는 그 일에 함께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신실함
그래서 여러분과 저에게 전도라고 우리가 대개 말을 하고, 선교라고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여러분과 저에게 있는 예수 믿으면서 가지고 있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전도도 열심히 해야지”라는 차원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전도자입니다. 전도자는 곧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에게 조그맣게 이야기하십시오. “나는 전도자다.” 목사만 전도하는 사람이 아니고, 선교사만 전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다 전도자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은사가 있어서 그 일을 전적으로 하시는 분이 있고, 목사도 그중에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여러분이 만나는 이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분을 세상의 빛이다, 또 여러분을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합니다. 소금은 짜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세상에서 일어납니까?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 뜻을 살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상식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 기질과 내 경향에 의해서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그것을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을 지나치고, 어떻게 보면 나태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정말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성경을 그래도 여러분보다 조금 더 알 가능성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미국에서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든, 성경이 가지고 있는 제 지식만으로 완전히 해결하거나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셨는지를 알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 자체가 망가질 정도로 그것에 매달리고 목숨을 걸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도 기뻐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냥 “하나님, 기도할 테니까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가치관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이 세상을 보아야 하며 이런 일에 어떻게 반응해야 될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려고 해야 합니다.
신앙 양심의 자유와 존중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에게 참 많은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부지런히 살피는 동시에, 신앙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결정할 수 있고, 나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모든 것을 다 한 방향으로 똑같이 여겨서 이쪽은 이쪽, 저쪽은 저쪽으로 나뉘어 가는 그런 모습은 사실 기독교 안에서 그렇게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세상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가지고 있는 이론도 없고, 그런 정치 이념도 없습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좋다는 것도 공산주의와 비교 우위에 있을 뿐이지, 이것이 진짜로 모든 것을 해결할 문제라면 여기가 천국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약점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하게 그것들을 잘 살피고, 우리 신앙의 양심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 속에서 결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대단한 결정을 했느냐, 내 결정이 얼마나 옳고 절대 틀리지 않느냐, 거기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결정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과 이 시대적 사명 속에서 내가 무엇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가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그저 주일에 한 번 와서 설교를 듣고, 그리고 가끔 유튜브를 통해서 설교나 강의 같은 것 하나 듣는 것만으로는 이 엄중한 하나님의 사명을 이 땅에서 도저히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를 길러야 하는 사명, 교회를 섬겨야 하는 사명,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명, 이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정말 말씀을 배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도록, 간단하고 단순하게 가지 마시고 “아, 내가 정말 하나님이 주신 숙제를 열심히, 진지하게, 깊이 있게 알고 행동해야 되겠구나” 여기에 여러분의 마음을 더 쏟으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신실함
하나님이 그것을 물어보실 것 아닙니까? “너는 신실했느냐?” 이것을 물어보십니다. “얼마나 잘했느냐”는 것을 안 물어보시고,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가 아니라 “너는 신실했느냐”를 물어보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좀 똑똑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참 이성적인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다 다른데 하나님께서 똑같이 “다섯 개 내놔라” 이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열 개가 있는 사람에게 구하시는 것이 있고, 다섯 개가 있는 사람에게 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여러분이 충성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곧 faithfulness, 신실함입니다. 내가 얼마나 나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신실하게 반응했느냐입니다.
우리가 올바르지 못하게 반응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다 잘하고 싶지만, 우리가 오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판해서 “당신은 한 번 오판했으니까 당신의 인생은 끝이다” 이런 일이 없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사회의 어떤 문제든지, 혹은 내 개인적인 가정의 일이든지,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정말 진지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이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나의 신앙의 양심에 따라 온 힘을 다하겠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그러한 결정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나의 형제와 자매로 여기며 존중하고 사랑하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연합할 수 있는 좋은 것을 찾아 나가겠다. 쉽지 않겠죠.
인류 기독교 역사에 그 일이 쉽게 된 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전에 여러분께 말씀을 안 드렸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너무나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 청교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청교도 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물론 그분이 웨스트민스터 디바인(Divines)은 아니었지만,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렸을 때 직접 참관했던 사람 중 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또 잘 알고 있는 리처드 박스터라는 분이 계십니다. 목회론이라든지, 혹은 “목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 또 많은 경건 서적을 쓴 분입니다. 두 분은 같은 시대에 살았고, 두 분 다 많은 존경을 받았던 훌륭한 학자요 청교도였습니다.
두 분이 엄청 싸운 것을 아십니까? 끝까지 싸웠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저걸 가지고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문제였고, 성격도 너무 달랐고, 생각도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끝까지 인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한 형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두 분은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의 본질: 세상을 축복하는 공동체
여러분과 저도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 우리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고 있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신앙의 양심에 충성하고 있는가? 나는 어떠한 다른 가르침이나 내 상식이나,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이나,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이나 학자나, 혹은 내가 좋아하는 어떤 사람—그것이 칼빈이 되었든 웨슬리가 되었든, 혹은 어떤 특정 정치인이 되었든—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가? 꼭 기억해 주십시오.
교회는 세상에 의하여 절대 나누어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가 야곱을 만났을 때 누가 축복했습니까? 교회는 세상에게 복을 줄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걱정하고, 세상을 위해 복을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의가 일어나고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 자신도 그에 맞게 살려고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이 하도 어수선하여 여러분도 말씀을 들으면서 혹시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아플까, 또 많은 국민들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면서, 여러분, 우리가 정말 고국을 위해서—밖에 나오면 다 애국자이지 않습니까—함께 기도해야 할 그런 일들인 것 같습니다.
험악한 세월과 나그네 길
이제 여러분, 우리가 앞서 다룬 내용을 이해했다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야곱의 축복은 끝났고, 이제 바로의 물음에 집중할 차례입니다.
바로가 뭐라고 질문했습니까? “당신 나이가 얼마요?”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상대방의 나이를 먼저 물어봅니다. 그래야 나이에 맞춰 말도 하고, 대충 대해도 되는지, 아니면 존댓말로 공손하게 말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 자체가 그렇기에,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야, 일단 민증부터 한번 열어봐라”라고 묻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본인이 먼저 밝히지 않았는데 나이를 직접 물어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단순하게 숫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인생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부분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기에, 우리가 이해를 돕기 위한 약간의 상상력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물론 이것은 주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상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까?”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만약 노숙자 형제가 제 앞에 와서 저를 축복했다고 가정합시다. 얼굴을 보니 때가 잔뜩 묻어 있고, 완전히 엉망진창입니다. 그래서 제가 묻는 거죠. “아니,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하며 살아오신 겁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지금 바로가 보는 야곱의 모습이 그와 같습니다. 바로는 야곱에게 축복을 받았으니,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 분입니까? 애굽을 구원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보니 “정말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 맞아? 어떻게 저렇게 꾀죄죄할 수가 있나? 어떻게 다리 하나를 못 고쳤나?” 이런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애굽을 구원한 하나님이, 왜 당신 다리 하나는 고쳐주지 않았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까?” 바로는 야곱의 인생이 궁금한 것입니다.
나이를 듣는 순간, 당시 애굽에서는 110세를 최고령으로 여겼기 때문에, 130세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는 야곱에게 상당한 존중의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은 남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러분, 바로는 어쩌면 존경의 눈으로 야곱을 보았을지 모르지만, 만약 제가 야곱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비록 내가 이렇게 꾀죄죄해 보이지만, 나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간증을 하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바로여,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그네 길의 세월”
그런데 야곱의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오히려 이렇게 들립니다. “내 인생은 험악했고, 매우 힘들었으며, 게다가 비교적 짧았습니다.” 전부 다 긍정적이지 않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야곱이 말하고자 했던 전부일까요?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첫째, 야곱은 바로 이전 장면에서 요셉을 만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나를 놓아주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이제 죽음도 만족합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이 지금 와서 “나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끝냈을까요? 더 이상한 것은, 이 말을 한 뒤에 또다시 바로를 축복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고생했고, 험난한 세월을 살았고, 자신을 별것 아닌 존재로 여긴다면 어떻게 다시 축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까는 내가 축복했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시오. 당신이 나보다 훨씬 잘된 것 같소”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을 받아야 할 것처럼 보이는 야곱이 아니라, 바로가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47장 9절입니다.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제가 지금까지 백삼십 년, 험악한 세월, 나이가 많지 않다는 것은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나그네 길”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을 “나그네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나그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난주에 고센 땅을 이야기하면서 형제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가는 것은 나그네로 거류하려는 것입니다. 거기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류하는 자들입니다.”
나그네란 무엇을 바라보는 사람입니까? 바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을 조금 풀어보면 이런 뜻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죄와 욕심으로 장자권을 가지려 했고, 형을 속였고, 아버지도 속였다. 그래서 죽을 뻔했고, 도망자가 되어 약속의 땅을 떠나 멀리 도망쳤다.
그런데 도망가는 길, 죽을 수도 있었던 그 길에서 하나님이 벧엘에서 나를 만나주셨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험한 여정을 거쳐 외삼촌 집에 갔고, 이름 그대로 ‘속이는 자’였던 내가 그곳에서 오히려 속임을 당했다. 전문 사기꾼이 가장 괴로울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자기가 사기를 당할 때입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그렇게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가정을 이루었고, 자녀들을 얻었으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떠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려 할 때,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 속에서도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중,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에서를 두려워하던 나에게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이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의 축복
지금 제가 야곱의 인생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노년에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그것은 요셉을 키우는 일이었는데, 그 요셉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셉을 잃은 줄 알았는데, 이제 드디어 기근이 와서, 기근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미리 준비해 두셨더라는 사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객관적으로 본다면 야곱의 인생은, (이렇게 말하면 제가 야곱을 만나면 혼날지도 모르겠지만,) 자기가 판 구덩이에 자기가 들어간 인생입니다. 그는 늘 죄 짓고 욕심 부리고, 이것을 이루려고 자기 힘으로 하고, 뭐든지 자기 머리를 써서 하다가 자기가 판 구덩이에 자기가 빠지고, 하나님이 조금 건져내 주시면 숨만 쉴 틈이 날 때 또 딴짓하다가 다시 그 구덩이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그의 인생은 광야에서 무덤도 찾지 못하고 뼈가 묻힌 채 끝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내가 지금 여기 와서 당신에게 복을 빌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고 끝까지 나를 지켜주셨으며, 정말 나는 받을 자격이 없는 놀라운 것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은혜라고 말합니다. 나는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알기 때문에 당신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이 은혜를 이렇게까지는 잘 모릅니다. 그들은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꽤 순종한 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토록 거부하고, 거절하고, 도망치고, 내 마음대로 사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그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는 나를 끝까지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복을 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축복하는 이유
당신보다 내가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것이 사실상 이 복을 드리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십시오. 무엇이냐 하면, 그래도 내가 당신에게 복을 빌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위대한 땅 애굽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나는 당신이 허락해 준, 애굽의 손바닥만 한 땅, 사실 애굽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작은 땅에 빌붙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나는 이방인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 땅은 내 땅이 아니며, 나는 나라도 없습니다.
내 인생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자식들 가운데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요셉 하나쯤 내세울 수 있을까 싶어도 사실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둘을 놓고 보면 누가 실패자입니까? 누가 인생을 헛살았습니까? 한 사람은 왕이 되어 왕좌에 앉아 필요한 땅을 내어줄 수 있는 자이고, 한 사람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애굽 한 귀퉁이에서 겨우 땅을 얻어 살아가야 하는 자요, 나그네 중의 나그네입니다. 심지어 약속의 땅도 다시 밟지 못할 사람입니다. 우리가 고생은 해도 마지막에 낙이 있다면 그래도 견딜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에 가나안으로 돌아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셨다면, 잠시 나를 낮추고 참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내 인생을 회복할 기회가 다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약속의 땅의 주인으로 다시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시 누리게 되는 상황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빼도,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복을 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잃더라도 내 인생을 단 한 번도 부인하지 않으신 그 하나님을 내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증이요 나의 찬송일세
아무것도 없는 자로 내 인생이 끝난다 하더라도 나는 그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그래도 나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니, 그래도 나는 당신을 축복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로 말하자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입니다.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 세상에 누가 있어서 이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신이 있어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가며, 내 인생에 내가 그 먹물을 뿌리고, 내가 구덩이를 파고, 내가 잘난 척하고, 내 중심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그렇게 뻔뻔스럽게 불러대던 그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붙잡을 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신약으로 따진다면, 그러한 나를 위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 와서 나의 발을 씻기시려고 하시는 이러한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 하나님을 내가 어찌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나를 심판대 앞에서도 그 못 박힌 손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하나님께 보이시며, “아버지여, 내가 그를 위하여 이렇게 못 박힌 손으로 죽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위해 변호해 주실 그 예수를 내가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인생인데,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주님께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정말 이 우주를 따진다면 좁아터져 버린 이 지구에서 우리는 여전히 꿈틀댑니다. 다 살아보겠다고, 거기서 거기인데도 누구보다 조금 더 올라가려고 다른 사람 머리를 밟으면서 올라가며 삽니다. 우리가 조금 더 괜찮은 인생을 살아보려고 남들 안 하는 것을 하느라 참 애씁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 마음을 아시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 그때 내 아픔을 아시고 “아니야, 너는 너무나 귀중한 나의 아들이고 나의 딸이야”라고 그렇게 붙잡아 주시는 분, 우리를 절대 지나치지 않으시는 분, 내 고통을 아시는 분,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정말로 아시는 분, 그리고 나를 절대 부인하지 않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죄와 욕심 속에서 어찌 살아야 할지 매일매일 놓치고 쓰러질 것 같아 힘들어하는 그 우리를, 입술로는 매일 하나님을 부르지만 사실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수도 없이 부인하고 있는 바로 그 우리를, 그런데도 결코 부인하지 않으시고,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으시며, 결코 지나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 그 예수 그리스도, 내가 그를 어찌 잊겠습니까. 여러분, 그분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분을 어떻게 우리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하나님의 딸이며,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마음 놓고 외치십시오. “세상이여, 나의 축복을 받으라!” 하나님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이 사랑을 세상이여 받으라! 세상이여, 썩어 문드러지고 냄새나는 곳에 소금으로, 빛으로 내가 살려고 하니, 이 세상이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
기도합시다.
세상이여, 내가 너를 축복하노라.
주님, 우리가 주의 은혜로 입은 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나의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놓치지 않게 도와주시고, 나의 조그마한 불평과 불만 때문에 놓치지 말게 해 주시며, 나의 무관심 때문에 놓치지 말게 해 주옵소서.
그저 또 오늘도 힘들게 살아가는 나에게 온통 빠져서 내 눈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느라 진짜 보물을 놓치지 않게, 주님,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영원하신 기업이시여,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우리의 복임을 다시 고백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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