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7장 1절로부터 6절 까지 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에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아멘.
창세기 강해의 세 가지 부분
저희가 창세기 46장과 47장에 걸쳐서 크게 세 가지 부분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야곱 자손들의 족보였습니다. 야곱의 자손들 70명의 명단이 기록된 것을 함께 보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이 약속을 끝까지 이루어 가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야곱과 요셉이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아버지는 20년이나 죽은 줄로 알고 있었던 아들을 마침내 만나게 됩니다. 그때 야곱은 “이제 나를 놓아주셔도 나는 족합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가 어떠한 만족을 누리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그에 이어서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장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야곱과 그 가족은 현재 고센 땅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고센: 좋은 땅이지만 흙더미였던 곳
왜 하필 고센 땅일까요? 지도를 한번 보시면, 고센이라는 곳이 위치해 있는 곳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지중해가 보이실 겁니다. 다른 부분은 크게 관심 가지실 필요가 없고, 그 아래쪽을 보면 ‘고센’이라고 나옵니다. 바로 그 고센 땅으로 야곱 가족이 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그 옆의 강이 그 유명한 나일강입니다. 고센은 나일강의 삼각주 지역인데, 나일강 삼각주는 세계 문명의 발상지가 될 정도로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그중에서도 동쪽에 있는 땅이 바로 고센입니다.
이곳은 동쪽에 있는 땅이며, 사실 농경지보다는 오히려 목축에 더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히 고센 지역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지역 범위는 대략 특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를 딱 하나로 특정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 아래에는 시나이 반도가 있으며, 바로 그 고센 지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게 된 것입니다.
좋은 땅에 담긴 아이러니
그런데 이 땅의 첫 번째 특징, 즉 “왜 하필 이 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 땅이 말 그대로 좋은 땅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좋은 땅이면서도 별로 주목받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고센’이라는 이름이 언어학적으로 어디에서 왔는가를 보면, 애굽 지명이기에 당연히 이집트어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애굽의 지명이라고 해서 모두 이집트어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센’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고센’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 확정된 바는 없지만,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욥기 7장 6절에 나오는 ‘흙더미’라는 뜻의 단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좀 아이러니합니다. 바로도 “좋은 땅 중에 고센 땅이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분명히 좋은 땅인데, 이름은 ‘흙더미’입니다. 이름이 너무 안 어울리지요. 적어도 ‘메소포타미아’처럼 멋있는 이름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그냥 이름 자체가 ‘흙더미’인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당시 애굽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한 땅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땅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넘어선 신자의 삶- 고센 땅에 담긴 영적 의미
고센이라는 이 이름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삶, 신자의 삶과 너무나 가까운 단어입니다. 좋은데 별 볼일 없다는 것, 그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굉장히 좋은 땅이지만,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 땅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 즉 야곱의 자손들이 내려가서 그 땅에서 살게 될 때 좋은 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영원히 살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목적은 가나안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지가 가나안인 사람에게 이 땅은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땅이 목적이라면 여기에 모든 힘과 노력을 쏟겠지만, 목적이 가나안이기 때문에 여기에 모든 것을 투자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은 흙더미와 같은 것입니다.
바뀐 가치관이 만드는 변화
크리스천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귀중한 곳이고 좋은 것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즐거운 일도 많지요. 그러나 이곳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 우리의 최종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저도 어릴 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마’**와 **‘딱지’**였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구슬입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모든 가치를 결정하던 것들이었어요. 그것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 제 인생의 판도가 달라졌습니다. 친구들이 저를 우러러볼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에 올라가서 어머니께 용돈을 달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딱지나 구슬을 주셨다면 제가 그것을 받고 고마워했겠습니까? “어머니, 제가 아직도 어린 줄 아세요?”라고 말했겠지요. 똑같은 구슬이고 똑같은 딱지지만, 무엇이 달라진 것입니까? 제가 달라졌습니다.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받아도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화가 났을 것입니다. 왜 이런 것을 주냐고 생각했겠지요.
여러분, 지금은 돈이 최고 같습니까? 지금은 몸이 편안하고 건강한 것이 최고 같습니까?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은 바뀔 수 있고, 성경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어디에 두는 사람입니까? 이 땅에 있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알고,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려는 사람들 아닙니까? 여러분이 진짜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이 땅의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이 땅의 것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로서 무시하거나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땅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그 일로 얻은 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가족을 먹여 살리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나 최고의 가치는 아닙니다.
최고 가치, 하나님의 나라와 의
여러분의 최고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우리의 최고 가치입니다. 가치가 바뀌면 삶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때때로 속상하게 만드는 지점입니다.
제가 딱지를 가장 가치 있게 여기던 때와, 나중에 한국 은행권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을 때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를 믿었는데도 가치가 바뀌지 않은 것처럼 살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영원한 것을 알고 있고, 그에 따라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엄중하게 말씀하시겠죠. “너는 분명히 모든 것이 바뀌었고, 장성해졌고,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데, 왜 여전히 세상과 눈앞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느냐?” 하나님께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속상하고, 답답해하고, 왜 나는 안 되나, 왜 풀리는 게 없나, 왜 어려운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로 추구해야 할 것을 추구하지 않고 다른 것에 흔들리며 살기 때문에 당연히 힘든 것이죠. 안 그렇겠습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딱지를 주머니에 넣고 고등학교에 가서 “야, 이거 딱지다. 얼마나 비싼 줄 아냐?”라고 하면 맞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누가 제 친구가 되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옛날과 똑같다면—“나 이번에 이렇게 됐다,” “이게 잘 풀렸다,” “이게 나에겐 성공이다”—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더 귀중한 보배,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고센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좋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곳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하신 곳이니까, 우리는 성실하게 살며 주신 달란트와 재능을 사용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바뀌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이것이 목적이었지만, 이제는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 우리의 가치가 변합니까? 더 귀중한 보배를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구약에서는 그것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보배로운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고, 그분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가까이 하소서: 고센의 두 번째 의미
이것이 첫 번째 의미였고요, 이제 고센 땅에 대한 두 번째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다섯 가지를 이야기할 예정인데, 갈수록 조금씩 난이도가 올라가니 처음에는 편하게 들으셔도 되지만, 뒤로 갈수록 집중하셔야 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정말 조금 어려운 내용이므로, 놓치지 않도록 잘 따라오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 고센이 왜 중요한가, 이 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문맥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이미 다루었던 부분이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아뢰십시오. ‘이제 당신의 모든 가족이 내려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그리고 ‘흉년이 아직 다섯 해나 남았으니, 제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봉양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전하십시오.” 요약하면,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이 문맥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고센’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깝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까지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고센 땅에 오소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가 같은 문맥 안에서 연결되어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을 우리 식으로 정리하자면, 고센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자리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자리입니다. 첫 번째 의미가 “좋지만 별 볼일 없는 땅”이었다면, 두 번째 의미는 **“가까이 함, 그리고 부족함 없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집이 센 곳
이 두 번째 의미에 대해서는 이전의 *“가까이 하소서”*라는 제목의 설교를 다시 들으셔도 좋습니다. 어쨌든 고센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도록 하신다는 점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고센은 **‘하나님의 고집이 센 곳’**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겠다. 내가 그들을 그곳에서 돌보며 채우겠다”고 직접 약속하신 자리입니다. 그 약속을 누구에게 주셨나요? 바로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먼 곳, 고센
세 번째는요, 분명히 그렇게 가깝고, 그래서 하나님이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먼 곳입니다. 누구에게 먼 곳이냐? 애굽인들에게 먼 곳입니다. 애굽인들은 목축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 살게 함으로써 애굽인들과 구별되게 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센, 즉 애굽 땅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별한다’, **‘거룩하게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세상과는 멀리, 하나님과는 가까이
그래서 하나님과는 가깝지만, 동시에 애굽인들로부터는 먼 곳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에는 가깝고, 어디에서 멀어졌습니까? 세상으로부터는 멀어진 곳이 되었습니다. 분별된 곳, 구별된 곳이지요. 이는 신약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도 정확히 부합합니다.
“너희는 이 세상,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은 너희는 세상과 구별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별된 자에게 성경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여기서 ‘내게’는 바울입니다—“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모든 것에 따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아는 척하지 말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즉, 겸손하게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구별된 자의 겸손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것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별하셨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참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심지어 “너희는 다 틀렸다”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자신들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부분을 지적하실 때도, 그들은 교만을 지적받으면서도 그것을 깨닫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고센 땅의 의미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에는 가깝고 세상으로부터는 구별되는 먼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고센은 하나님께 가깝고, 세상에서는 구별된 곳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겸손한 자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고센의 세 번째 의미입니다.
고센: 영원한 성을 바라는 나그네의 증거
네 번째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의미입니다. 고센을 설명할 때 항상 함께 올 수밖에 없는 말이지요. 고센은 나그네의 땅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한번 함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이것이 요셉의 형들이 바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6절에서 바로가 한 말을 한번 보세요. 6절입니다.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이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여러분이 그냥 읽었는지, 잘 읽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게 쓰인 단어가 있습니다. 4절에서는 “거류”, 6절에서는 **“거주”**입니다. 히브리어로도 다른 말입니다. ‘거류’는 임시로 거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형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서 영원히 살려고 온 게 아니다. 우리는 잠시 있으러 왔다.” 반면 바로는, “너희 여기서 계속 살아라. 우리 중 한 사람처럼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바로와 이스라엘, 즉 야곱의 자손들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이들은 애굽 땅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몸은 들어왔지만 ‘우리는 여기에 속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나그네다.’ 그래서 고센 땅의 네 번째 특징은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나그네의 패턴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이끄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창세기 마지막 부분과 출애굽기 시작을 다루면서 제일 어려워했던 부분 중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십니까? 가나안에 있다가 그곳에서 부침을 겪으면서 독립군처럼 힘을 길러 들어가서 나라를 차지하면 멋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애굽까지 내려보내셨다가 거기서 인구를 늘리고, 다시 끄집어내어... 애굽을 그냥 먹어버리면 되잖아요? 아니면 그 좁아 터진 가나안에 바로 데리고 가서 시작하면 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그런데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렇게 하셨고, 심지어 이삭도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이러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의도가 있으시다는 뜻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왜 하필 그렇게 하시는가? 왜 이 나그네의 삶을 가르치시는가?
영원한 성을 바라보게 하심
심지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하게 가르치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그 땅이 끝이 아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어땠습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이었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착한 첫 해에 기근이 들었고, 그 기근은 한 번이 아니라 이삭 때도 있었고, 야곱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땅에 왜 살아야 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땅이 약속의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게 하십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아, 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이 땅이 끝이 아니구나.”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아주 명확하게 해석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약속의 땅에서도 **‘거류’**했다는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조차도 임시 거처라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땅이 영원한 나라였다면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영원히 살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를 만나줘야죠. “아, 하나님께 택함받은 사람은 2천 살, 4천 살까지 사는구나!”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해야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땅은 영원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정한 약속의 땅이 아님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게 하셨으니…”
그리고 10절, 가장 핵심이지요.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거룩한 성을 바라게 하심이라.”
영원한 나라, 그 성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도 이방인처럼 살았고, 애굽에서도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을 바라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바라보는 삶의 계획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결국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누리고, 여기서 행복을 취하고,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제 생각에는 여러분은 예수님을 꼭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좋은 것을 찾으시려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돈을 약속하는 곳을 가시든지, 건강을 준다고 하는 곳을 가시든지, 그런 약속을 하는 곳을 가시면 됩니다.
영원한 복의 개념 변화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구약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일부러 약속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영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자식이 많은 것이 하나님께서 자손을 번성하게 하여 복 주시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아, 자식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의 복을 설명해 주시는 방식이구나”라고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여러분이 누려야 할 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진짜 복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영생의 복이라고 말하는 그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의 복에 대한 개념과 가치 판단의 기준이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없어질 것들에 마음을 다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것들을 내 인생의 목적처럼 붙잡고 살지 않는다고요. 그래도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행복하고,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왜요? 여러분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까요.
영원을 계획하는 사람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땅이 전부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도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착하게 살고 나중에 혹시 하나님이 계시면 천국이라는 곳에 가려는 거다.” 이런 생각으로 예수를 믿으신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건 일종의 ‘짬뽕 종교’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훨씬 뛰어넘고,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금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100세를 생각하며 여러 가지 은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십니다. 잘하시는 겁니다. 성경도 앞일을 준비하고 자녀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시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실제로 100세 시대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120세 시대도 아니고, 90세 시대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시대는 ‘영원한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계획할 때, “나는 이제 좀 있으면 하나님이 부르시면 갈 텐데, 내가 뭘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하실 게 아니라, 영원한 삶을 계획하는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은퇴 계획만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을 유업으로 받을 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입니다.
영원을 위한 삶의 태도
그래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베풀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영원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준비입니다.
왜 우리가 누구와 싸우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며 사는가? 여러분, 제가 왜 여러분 눈치를 보고 사는지 아직 모르시나요? 저도 제 어머니에게는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눈치 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소유를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삽니다.
백세를 산다면, 왜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왜요? 영원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영원을 염두에 두고 인생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을 것을 생각하고, 여기 쌓아두는 것들이 다 사라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왜 화가 나는 줄 아세요? 자기들과 똑같이 100세 시대만 생각하며 바둥거리다가, 죽은 다음엔 천국 간다고 우기니까요. 그러니까 답답한 거죠.
여러분, 지금부터 영원을 생각하면 가진 것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정말 좋으신 분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조금 남은 재산은 애들이 서로 니 거다 내 거다 하는 거 보기 싫으니 다 쓰고 죽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어떻게 인생을 100세에 끝날 것처럼 사십니까? 영원을 생각한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은 것이 있다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남아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남은 건강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할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나를 위해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태어났고, 여러분이 잘되고 건강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을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죠. 여러분이 왜 부름을 받았는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적 시간과 약속된 미래- 430년이 된 5년의 계획
그러면 이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여기서 어떻게 살게 하셨느냐, 고센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셨느냐? 여러분, 우선 이것을 꼭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요셉이 이들을 고센 땅으로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5년만 살게 하려고 불러왔어요. 아까 읽어 드렸잖아요. “앞으로 기근이 5년 동안 있을 테니까, 아버지를 모셔서 살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몇 년이 된 줄 아세요? 430년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알았을까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예언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자기 때일 줄은 몰랐겠지요. 설마 내 때일까? 아브라함도 애굽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거든요. 이삭도 들어올 뻔하다가 아니었거든요. 요셉이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있나요? 그냥 이 기근만 지나자 하고 불렀는데 그게 430년이 된 것입니다.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경에서는요,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 시간은 반드시 끝이 있는 시간, 마지막이 반드시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 그 시간이었어요. 요셉에게 그 시간이었어요. 그것을 종말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땅에서 지금 살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 이 긴 시간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우리는 잘 몰라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던 시대에도, 모두가 “내일 오시지 않을까?” 하며 기다렸어요. 그래서 베드로에게 묻잖아요. “도대체 언제 오시냐?” 베드로가 말한 것 아닙니까? 너희가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너희 인생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알아라. 그래도 계속 따지니까 뭐라고 했어요?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라고 한 거잖아요.
여러분, 그 시간을 그래서 종말적 시간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마지막이 있다는 걸 분명히 압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이 땅은 심판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끼리만 믿는 게 아닙니다. 과학자들도 태양이 영원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태양계가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소멸될 것이라는 건 물질 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더 정확하게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마지막을 분명히 정해 놓으셨다는 것을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는 거예요.
시초부터 계획된 종말
두 번째로 여러분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 마지막이 나에게 약속된 미래라는 것입니다. 흔히 “언젠가 예수님이 오셔서 좋은 일이 오겠지, 그때 가면 파라다이스 같은 천국이 펼쳐지겠지”라고만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게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이사야서 46장이 본문이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세요?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거죠. 그렇지만 46장이었습니다. 샘 목사님이 그 본문을 다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중에 10절이 오늘 말씀과 아주 중요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읽어 드릴게요.
이사야 46장 10절입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였다.”
시초라는 것은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종말을 알렸다는 말이에요. 이게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시작점에서부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제 뜻대로 살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를 구원하겠다”는 그 모든 계획이 이미 진행되었고, 하나님 안에서는 그 모든 시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시니까요.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구원의 일이 시작될 때 이미 구원의 마지막인 종말도 함께 계획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생각 없이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여러분을 향해서도 시초부터 종말까지 모두 계획하고 계신 거예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종말은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할 수 있지만, 그 미래가 실제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이루실 일이 이미 시초에 함께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죠. “종말은 우리의 구원보다 앞선다.” 조금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굳이 외우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이것이 여러분의 현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말씀드리기 위해서예요.
내일 일을 아는 사람들
우리가 예전에 좋아하던 찬양 중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가 있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고백이죠. 참 귀한 찬양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말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장래가 어떨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압니다. 내일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내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선하게 이끄십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약속한 말씀입니다.
더 멀리, 장래의 마지막을 이야기해 볼까요? 여러분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온전히 닮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욕망과 싸워야 하고, 갈등도 있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고집도 부리고, 내가 가진 것으로 내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려 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의 여러분은 다릅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존재, 온전히 정의로운 존재, 내가 하는 말 때문에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모두가 이해하고 기뻐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입니다. 지금은 잘 믿기지 않지만, 성경은 그것이 여러분의 마지막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영화(glorification)' 라고 합니다. 빛이 나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지요.
그것이 여러분에게 약속된 미래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시초부터 이미 있었느니라.” 여러분에게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 미래의 확실한 현실이 여러분의 오늘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종말적 진실이 오늘에 미치는 영향
여러분, 일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저는 잘 모르지만, 옛날에 한국에서는 주택 복권을 금요일에 추첨했습니다. 여러분이 금요일에 추첨되는 주택 복권의 번호를 확실하게 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복권 사요, 안 사요? 모를 때는 돈 낭비죠. “그게 말이 되냐, 확률적으로 말도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번호를 확실히 안다면요? 그건 안 사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예를 드는 제 마음의 안타까움을 좀 생각해 보세요. 겨우 복권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이 상황…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우리가 지금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요.
확실한 약속이 바꾸는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분명하게 약속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약속 때문에 여러분의 오늘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너무나 확실한데요.
“나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구나.” “나는 죄와 상관없이 영원한 자유를 누릴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지금 어떻습니까? 죄와 싸울 수 있구나. 죄에게 지지 않겠구나. 죄 앞에서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겠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따라 살겠구나. 너무나 분명하니 이것이 여러분을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말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고 흔들리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그것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쳐서, 혹시 내가 잘못했다면 어떻게 해요? 기분 좋게 사과할 수 있잖아요. 기분 좋게 바로잡을 수 있잖아요.
“아, 내가 이런 사람인데 오늘 내가 말을 잘못했네.” 그것을 인정하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왜요? 나는 내가 누군지 아는데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될 줄 아는데, 무엇이 여러분을 막겠습니까?
우리가 뭔가 하다가 잘못되어 몽땅 깨졌다, 작살이 났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왜 망한 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예요? 다 무너진 게 뭐가 문제예요? 나는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유업을 받을 사람인데.” 그러니 다시 일어설 수 있잖아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처럼, 모든 게 실패한 것처럼 살아갈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미래를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도 우리의 내일을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장래를 모르는 사람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종말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고센은 그 진실을 바라보는 종말적 땅입니다. 그곳이 마지막이어서 종말적인 게 아니라, 가나안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땅이기 때문에 종말적인 것입니다.
출애굽: 홍해를 가른 모세의 노래
430년이 지나, 그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긴 시간을 지나 드디어 가나안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때 홍해를 가르고 그 길을 걸어간 모세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오.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애굽 군대가 모두 수장된 장면을 찬양하며, 그는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오.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즉, 고센 땅에서 430년을 보내던 그 시간의 종말이 마침내 온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종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0년이 지나, 그들은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바다가 갈라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도 반드시 그들을 안전하게 건져내신 것이지요. 만약 그들이 우주 속에서 미아가 되었더라도, 하나님은 이 우주를 가르셔서라도 그들을 반드시 그곳에서 끄집어내셨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며, 그 바다를 가르시고 그의 백성을 건져내셨도다.”
그 놀라운 일을 기념하며, 모세는 찬양한 것입니다.
계시록: 유리 바다 가의 어린 양의 노래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모세의 이 노래가 끝이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말하는 종말은 결코 홍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완성된 구원의 장면, 유리 바다
요한계시록 15장을 보면 다른 바다가 등장합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 그리고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그 유리 바다 앞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찬양합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성경은 이 유리 바다를 이야기합니다. 홍해가 출애굽기의 종말이라면, 유리 바다는 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종말, 즉 완성된 구원의 장면입니다.
그때도 유리 바다 그곳은 불에 타고 모든 것이 우리를 공격하는 듯 보이는 장소입니다. 짐승의 수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붙잡고 있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가르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십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
그리고 이어서, 누가 노래를 부르나요? 모세의 노래가 아니라 어린 양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렇게 선포됩니다.
“나의 주는 전능하신 분, 크고 놀라운 일을 나에게 행하셨습니다. 그 길이 의로우시며 참되십니다. 이 주님을 누가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누가 찬양하지 않으리오. 오직 주님만이 거룩하십니다. 주님의 의로운 일이 나타났으니, 모든 민족이 주님께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즉, 계시록에서 보여지는 유리 바다와 어린 양의 노래는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이 예시하는 종말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며, 모든 민족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드러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영화로움
여러분, 성경에 다윗도 그렇고요, 바울도 그렇고, 요한도 그렇고, 우리랑 똑같은 말을 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이 있는 하나님.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는 전능과 능력은 그저 힘이 좋고 또 모든 걸 하실 수 있으니까 이런 일들을 다 해결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다윗이 말하는 전능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 안에는 그의 인생의 모든 상처가 있어요. 그가 겪어왔던 인생 속에서 혼자 걸어가야 했고, 사울의 핍박을 받아야 했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망다녀야 했던 그 인생의 아픔과 어려움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그 모든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내가 너를 잊지 않고 어디에 있든지, 심지어 홍해 바다를 갈라서라도 모세여, 이스라엘이여, 내가 너희를 건져낼 것이다”라고 하셨던 그때, 다윗이 고백하는 거예요. “정말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저를 여기까지 오셔서, 이 바닷속까지 오셔서 나를 건져내셔서 여기까지 살리십니까?” 그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그저 하나님께 붙이는 이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혼자 외로웠던 시간, 아파서 힘들었던 인생,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그 많은 일들, 그래서 속상했던 시간들—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들 때문에 주저앉고 쓰러졌던 적들—그 모든 것 속에도 주님이 반드시 찾아오셔서 “내가 바다를 가르고라도 너의 인생을 건지겠다”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는 거예요.
영화로운 미래,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마지막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나를 의롭고 참된 길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찬양 안 하냐는 거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나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내 인생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제가 어느 날 주님 곁에 갈 때, 글쎄요… 제가 이 교회를 은퇴하고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 한국에 가서 혹시 죽었다면, 여러분이 거기까지 와서 장례식에 참여하시겠어요? “어, 한 목사 죽었대.” 그러고 끝이겠지요. “그래, 우리가 참 같이 신앙생활 잘했지.” 그것만 기억해 줘도 고맙죠. 아니겠어요? 제가 무슨 이름이 있겠습니까? 저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는 인생이 그리 대단하겠어요? 제가 세상에서 무슨 노벨상을 받을 만큼 큰 일을 했습니까? 한강 작가처럼 유명한 소설을 썼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저 저희 두 아들을 키우고, 저도 그래도 부인이 있었다는 것. 여러분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을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요,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지. 바닷속 가장 낮은 곳에서도 반드시 잡아서 건져내고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여러분, 제가 별거 아니지만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왜 행복한 줄 아십니까? 세상에는 다 죄 짓는 사람만 있거든요. 제가 아는 사람들은 다 죄 짓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아는 훌륭한 목사님들도 다 죄 짓는 사람들이고, 전부 다 말하면 실수하거나 다른 사람 속상하게 하거나, 설교하면서도 죄 짓는 사람들이에요. 저까지 포함해서요.
그런데 제 마지막은? 저는 죄 짓지 않는대요. 그게 저랍니다. 그게 제가 누릴 영광이랍니다. 성도들과 함께 만나서 얘기하는데 모두 다 즐거워할 거래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제일 답답한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말이 안 통한다는 거예요. 설교도 안 통하지만 그냥 말도 안 통해요. 제가 못 듣기도 하지만, 제가 얘기하는 사람도 제 말을 못 들을 때가 많아요. 서로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고집을 부려요.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그런 일이 안 생긴대요. 이야기를 하면 딱딱 통한대요. 시원하대요.
그 인생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나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왜 그것 때문에 다르게 살 수 없단 말이에요? 그것을 내가 누릴 것인데, 지금 그것이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왜 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어야 합니까? 그럴 필요 없잖아요.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 길을 가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 길 속에 있으니, 내 형제들도 내 자매들도 그 길 속에 있으니 우리가 함께 그 길을 가겠습니다.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무한히 뛰어넘으시는 주님,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이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건, 아니면 너무나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건,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로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 오늘 우리가 어찌 세상과 똑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영원을 품은 우리들이, 우리의 완성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 어찌 오늘 힘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주여, 오 주님이시여, 성령 하나님이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깨닫게 하시고, 그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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