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6 26절로부터 34 까지 입니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명이니 야곱의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아멘.

 

 이제는 족하도다

오늘 저희가 함께 나눌 말씀의 설교 제목은 원래 ‘가깝게 멀어진 땅’이었으나, 오늘은 애석하게도 내용을 다루지 못하여 ‘이제는 족하도다’로 바꾸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6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크게 가지 중점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들어간 가족들의 명단, 족보가 하나 나오며, 둘째는 야곱과 요셉이 재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셋째는 그들이 고센 땅에 어떻게 정착했는지의 내용이 나오는데, 이야기는 47장과 연결되어 바로와 야곱이 만나는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원래 계획은 고센까지 살피는 것이었으나, 오늘은 야곱과 요셉이 만나는 데까지의 내용에 집중하여 제목을 ‘이제는 족하도다’로 정한 것입니다.

 

표현을 라틴어로는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고 합니다. 눈크(Nunc) 영어의 now(이제), 디미티스(Dimittis) 영어의 dismiss(풀어놓다, 떠나게 하다) 의미합니다. , 단어는 ‘이제 드디어 풀어졌도다’라는 뜻을 가지며, 성경적 의미를 담아 많은 유명한 곡들이 작곡되기도 아주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이제는 족하도다’로 하게 되었는지 배경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에 것이다’라는 대단한 확신을 주십니다. 단순히 ‘애굽에 갔다 오라’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애굽에 함께 것이고, 그리고 너와 함께 올라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거의 사백 년에 걸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미리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나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친히 형성하시고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칠십 명의 의미와 하나님의 역사

우리가 곧바로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사이에는 야곱의 자손들을 기록한 명단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칠십 명’이 애굽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숫자에 대해서는 골치 아플 정도로 많은 논문이 존재하는데, 이유는 창세기뿐 아니라 민수기나 역대상의 족보에서도 명단과 숫자가 조금씩 다르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맞는 숫자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창세기에 기록된 ‘칠십 인’의 기록은 우리가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기록 자체가 문자적으로 사람의 숫자를 맞추려고 것이 아님을 있습니다. 사실은 칠십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칠십 명으로 맞춘 것입니다.

 

실제로는 외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칠십인역(LXX) 보면 칠십 명이 아니라 칠십오 명입니다. 요셉이 낳은 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칠십이라는 숫자를 사용했을까요? 성경은 노아 이후 민족들이 흩어져 나갈 때도 ‘칠십 민족’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칠십이라는 숫자를 ‘전체’를 이야기할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가족 전체가 내려갔다”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누구도 빠지지 않고 함께 애굽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 이름 해석에 대한 주의점

물론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 혹은 어떤 이름이 빠지고 들어갔는지 , 이러한 명단이나 족보를 통해서 우리가 충분히 많은 성경적 지식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조심해야 것은,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을 추적하다 보면 자꾸 이름의 어원이나 뜻을 가지고 해석하거나 은혜를 받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무언가 의미를 찾고 감동을 받으려 하는 것은 가장 조심해야 부분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들이 물론 중요하지만, 성경은 그중 핵심적으로 중요한 이름들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 해석을 직접 줍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이렇게 바꾸셨는지, 이런 이름이 등장하는지 설명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번만 등장하는 이름들은 대부분 어원이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성경이 말하려는 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이름에서 듣고 싶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길’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사사로이’란 ‘개인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욕심과 마음으로 성경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가장 조심해야 부분입니다.

 

언약 성취를 보여주는 칠십 명의 기록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전체에 나오는 칠십 명을 모두 추적하기보다는, 이것이 ‘전체가 같이 갔다’는 의미이고, 의미가 무엇인지 찾는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명단이 나온 번째 이유는 당연히,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결국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세가 넘은 아브라함의 나이에 어떻게 아이가 태어날 있을까 싶었던, 도저히 있을 없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정말 아이를 낳을 없는 나이에 이삭을 낳게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과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정말로 복을 주시려는 것인가? 하며 추적하지만, 간당간당했습니다. 야곱 또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여기까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칠십 명의 명단을 통해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지금 지키고 계시고,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미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칠십 명이라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야곱은 지금 백삼십 세이고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는 칠십오 세였습니다. 가지 숫자만으로는 없지만, 안에 아브라함의 자녀들과 이삭의 이야기가 있었던 시간을 모두 더해보면 이백십오 년이 됩니다. 이백십오 동안 야곱의 가족은 칠십 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성장한 숫자가 아닙니다. 나중에 야곱이 열두 명의 아들을 낳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 이르러 열두 지파가 나오면서 수가 늘어나 지금 칠십 명이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이백 동안 칠십 명은 정말 미미한 숫자입니다.

 

미약함에서 창대함으로: 하나님의 역사

이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사백삼십 년을 머무르게 됩니다. 그동안 숫자가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전투력 있는 남자 장정만 육십만 명이 됩니다. 사백 년밖에 되었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배수가 되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로 민족을 이루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애굽이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애굽 사람이 늘어나는 속도가 이스라엘이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께서는 미미한 숫자로 시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는 약한 것을 들어 쓰시는구나! 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그다음 우리의 마음은 “그런데 그들이 육십만 명이 됐구나! 역시 하나님께서 창대하게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너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딱 맞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 오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구절은 이렇게 써먹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절은 욥기에 있는 것이고, 욥기의 배경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창대함에 대한 성경적 시각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종종 “분명히 창대해지지 않았습니까? 이게 맞습니까?”라고 묻고 싶은 궁금증을 갖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육십만 명이 되어 굉장히 창대한 이스라엘이 되었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육십만 명의 군인으로 전쟁을 이긴 적이 번이라도 있나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여리고성은 어떻게 이겼습니까? 수가 많아서 이겼나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성을 받은 그들이 얼마나 교만해졌습니까? 그래서 아이성을 자기 힘으로 공격했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코가 납작해지고 끝장날 뻔했습니다.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함정에 빠지는지를 있습니다. “아, 수가 칠십 명에서 육십만 명이 됐구나!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해졌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의도는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의도는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났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을 , 그것이 바로 ‘창대함’인 것입니다.

 

육십만 명을 가지고도 처음 가나안에 들어갔을 이스라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들 앞에 우리는 메뚜기다. 저들이 우리를 그냥 구워 먹으면 먹힐 수밖에 없다. 우리는 메뚜기다.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도 남자만 육십만 , 총인구로 따지면 이백만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삼십팔 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숫자가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대하게 하심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께서 창대하게 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생각이,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로 세우시는 , 그것이 바로 ‘창대하게 하심’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명단, 비록 칠십 명밖에 되지 않는 족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대하게 하셨다는 것은 이제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로 세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

또한, 사실상 족보를 따진다면 번째로 중요하게 살펴볼 부분은 명단을 살펴보았을 , 만약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서 천국에 간다면 명단에 있는 분들에게 혼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변변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칠십 명을 읽어보아도 딱히 흠잡을 없는 괜찮은 사람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요셉일 , 야곱조차도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르우벤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장자권을 확신하려고 얼마나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유다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레위가 나중에 제사장 집안이 되지만, 레위는 정말 잔인하게 성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창세기 49장과 50장에 나오는 야곱의 예언을 통해 모두 드러납니다. 이러한 일들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명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 결국 그를 노예로 팔아넘기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나온 사람들은 바로 명과 명의 자손들,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의 이야기입니다.

 

죄인의 집단,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

그렇다면 우리는 있습니다. 정말이지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악할 있을까, 어쩌면 이럴 있을까 싶을 만큼 죄인의 집단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성경에 기록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고 계시는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있는 것을 만들어 내시는가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서는 것은 마땅하나, 많은 경우에 ‘나는 이것도 못했습니다. 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나는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그래, 못하니까 그냥 누워 자라’라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들이 자녀들을 키울 자녀를 처음 세워 놓고 ‘이리 와’라고 일어나는 일이 매일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이리 온’ 했을 곧바로 오는 아이들은 없지 않습니까? 오다가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한두 발자국쯤 걷다가 그냥 쓰러집니다.

 

저는 이제까지 어느 부모도 넘어진 아이를 보면서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게 편해 보인다. 그렇게 살아라’ 이러는 부모를 적은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달려가서 다시 아이를 세워 놓고 여기 와서 ‘이리 온’ 합니다. 언제까지요? 걸을 때까지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않습니까? 모르십니까?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들을 세우시고, 다시 ‘여기까지 오는 거다’ 하시고, 넘어지면 ‘다시 힘내서 이리 와봐라’ 하십니다. 일이 지금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들을 데리고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멸망과 구원의 기준

이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지, 내가 ‘아, 나는 정말 자신이 봐도 죄인이다’라는 사실 때문에만 멸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죄인’이라는 단어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단어는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말을 제가 그냥 ‘여러분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여러분이 속으로 ‘뭐, 나만 죄인이냐? 너도 죄인이지! 그렇게 생각하게 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제발 말씀대로 사십시오’라고 한다면 ‘당신이 말씀대로 살면 나도 조금 살아볼게’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니까 저는 말이 맞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충분히 그렇게 말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저도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매일 쓰러지고 엎어지면서, 앞에서 ‘이리 오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일어나서 달려가는 사람 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포기하지 말고 다시 달려와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여기서 너를 부르고 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내가 너를 고치겠다. 그러므로 너는 죄인인 , 그리고 의인이 아니라 진정 부족한 자라는 , 자신을 부끄러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니까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십니다

거기에는 동시에 어떤 의미가 들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이렇게 부르시고 공동체로서 부르시지만, 동시에 사람 사람의 이름도 분명하게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있습니다. 사람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연약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세우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분명한 위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을 읽다 보면 창세기는 물론이고 출애굽기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 하나가 ‘바로’입니다. ‘바로’는 파라오, 애굽 왕들의 칭호를 뜻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투탕카멘, 아멘호테프 수많은 왕조의 왕들의 이름이 있지만, 바로의 이름은 성경에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바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어나자 애굽 왕이 ‘안 되겠다. 저들에게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죽여라’ 하고 산파에게 칙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산파는 이야기를 듣고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아이들을 살려준 산파가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아시죠? 산파는 이름이 나왔을까요? 나왔을까요?

 

많은 바로의 이름은 성경에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산파들은 성경에 번이지만, 그때 나타난 이유 하나로 이름이 나왔습니다. 바로 십브라와 부아, 명의 산파 이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구원의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기억하십니까? ‘나는 너를 너의 이름으로 아노라.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도 무엇으로 아실까요? 바로 여러분의 이름으로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의 공동체로 부르심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이름 앞에 ‘성()’자가 붙기 때문입니다. ‘거룩할 ()’자가 일단 이름 앞에 붙는 것입니다. 뒤에 붙는 이름은 물론 우리 고유의 이름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인식하시는 이름이 붙을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상상해 보기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름들이 있지 않을까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듯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았듯이, 우리는 어쩌면 천국에 맞는, 천국의 영광스러움을 대변하는 놀라운 이름들을 함께 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러한 내용이 명확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기억할 아니라, 이름을 그분의 마음에, 그분의 손에, 그분의 책에 쓰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은 이름은 너무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거의 비슷합니다. 천국에 가면 전부 , , 씨가 제일 많을 것입니다. 어떤 이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우리의 이름으로 아십니다.

 

칠십 공동체를 통한 은혜

나의 믿음은 작으며 나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주님은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나의 죄는 여전히 깊지만,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 용서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자로 주님께서 불러주십니다. 이름은 결코 작은 이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어쩌면 글자 하나하나가 겨자씨보다도 작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을 어느 누가 자랑할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에게 부어진 은혜는 여러분이 가진 믿음보다 크며, 여러분의 인생보다 크며, 여러분의 생명보다 큽니다. 성경은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귀하다’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은혜가 여러분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여러분의 이름은 작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칠십 모두가 내려간 것처럼 신약 시대에도 모두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습니다. 안에는 르우벤도 있고, 유다도 있고, 야곱도 있고, 요셉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길을 가자’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서로가 서로를 팔아넘기려는 자도 있고, 배신하려는 자도 있으며,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모든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공동체로서 칠십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며, 주님께서 길을 걷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믿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용서와 회복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희 집에는 식구가 넷입니다. 가끔은 넷도 하나 되기가 어려워서 무엇 하나만 있으면 서로 잘났다고 다투며 사는데, 여기 있는 성도들이 하나가 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특히 서로 알게 되고 서로 친해질수록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때부터 예의가 점점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냥 선을 타고 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면 서로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힘드냐? 르우벤이 있었지만 칠십 명이다. 힘드냐? 레위가 있었지만 칠십 명이다. 힘드냐? 이름을 도둑이라고 지었던 야곱도 있었지만, 그러나 모두가 함께 길을 걸었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에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도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길을 같이 가야 되는 사람들이구나! 우리가 천국에서 만날 사람들이구나! 영원히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압니다. 어렵습니다. 눈을 감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돌리고도 싶습니다. 어떤 때는 다시 보면 편할 같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칠십 인을 부르셨습니다. 놓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길을 걸어갈 시간은 느릴 있으며, 어떤 때는 상처를 치유해야 하고,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무릎 꿇고 정말 주님께 울부짖고 기도해야 하며, 말씀 앞으로 자꾸 나아가서 자신을 치유하도록 힘을 다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길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 칠십 명단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살피자마자 이제 곧바로 야곱과 요셉이 만나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명단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일어날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명이 요셉을 팔아넘겼고, 서로 팔고 파는, 그리고 서로 죽이고 죽일 있는 그러한 사람들끼리 모인 집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죽이려고 했고 죽은 알았던 요셉 때문에 위에 있던 칠십 명이 모두 살게 것입니다. 도저히 상상할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성경을 읽을 ‘칠십 명이 나왔구나, 요셉과 야곱이 만나는구나’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칠십 명단을 적어놓고 이들이 ‘요셉 때문에 살았다’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아니겠습니까?

 

정말 야곱도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고, 형제들은 물론 당연히 기대한 적도 없습니다. 요셉이 죽은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그곳에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하나님의 은혜가 말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그래서 신약에서는 바울이 똑같은 내용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에베소서 3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넘치도록 능히 우리에게 주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 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구하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야곱과 형제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여기에서 설마 이렇게 구원을 받을 줄이야? 이곳에서 우리가 살게 줄이야? 지금 기근 때문에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줄이야? 그것도 팔아버린 요셉 때문에, 죽은 알았던 요셉 때문에’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작은 섬김과 공동체의

여러분,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지나갔던 일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저 생각지도 못하고 던졌던 한마디 말들이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알고 그저 ‘자, 우리 힘냅시다. 힘든 시간이지만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 아니십니까?’라고 함께 웃으려고 했던 이야기가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알고 ‘우리 한번 같이 먹읍시다’ 해서 먹으면서 같이 웃었던 순간이, 형제 명의 마음에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나를 모두 잊어버린 것은 아니구나! 나는 정말 공동체의 사람이구나!’를 깨닫게 해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주님의 백성인 것을 깨닫게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별것이 아니며, 우리가 보기에 눈에 거슬리는 일이지만 어떤 때는 그것을 함께 참아내며, 같이 걸어가며, 같이 고쳐가며,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길이구나!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것을 교회의 공동체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조그마한 일로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에 한번 말씀드린 이야기지만, 제가 대학 다닐 시절, 여러분도 대학 다닐 고민 많이 하시던 시절이었을 테지만 저도 휴학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사실 저희 시대에 공부 제대로 사람이 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정도로,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믿는 것도 너무너무 힘든, 가슴이 답답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청년부 예배가 끝나고 뒤에 앉아서 힘없이 ‘인생은 무엇이고, 나는 어떻게 살고,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방금 좋은 말씀을 들어놓고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을 혼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매가 저에게 와서 저를 보더니 ‘형제님, 어려운 일이 있어요? 하고 물었고, 제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더니, 자매는 다른 없이 초코파이 하나를 꺼내 가지고 주더니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다음에도 아무 말도 저한테 했습니다.

 

그런데 초코파이가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그렇게 감사했나 하면, 그것 하나를 이렇게 주고받는 순간에 ‘내가 여기 군중 속에 홀로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연결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갑자기 울컥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자매는 아마 지금 전혀 생각도 하고 기억도 것입니다. 저도 자매의 이름조차도 기억 못하지만,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았던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다시 한번 돌이키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요셉의 영광과 겸손한 재회

여러분, 야곱은 그렇다 치고 요셉의 등장은 놀랍습니다. 요셉의 등장은 구절로 묘사되지만, 성경에 나오는 모든 등장 장면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라고 있습니다. 아마 영어로 친다면 가장 멋있는 남자 주인공의 등장 장면 하나일 것입니다. 제가 읽어드릴 테니 얼마나 멋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아니, 정도 가지고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할까 생각하실 텐데, 제가 여러분에게 이것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요셉이 자기 수레를 탔다고 합니다. 자기 수레를 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왕이 그때 요셉에게 수레를 주면서 수레를 타면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타고 지금 자기가 있던 곳에서 고센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는 동안 길에서 전부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고센에 도착해서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 간에는 전부 아마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혼자 가지 않았고 아마 많은 자기 부하들도 같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수레를 타고 사람들이 엎드려서 절하는 상황 속에서 요셉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의 뒤에 그냥 광채가 났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가 먼저 가서 야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과 자기 가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이고’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보이고’라는 단어가 영어로 ‘그에게 내가 나를 아버지에게 보여주었습니다’라는, 보통 우리가 쓰는 see show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영어는 주로 이것을 present라고 번역하는데, 단어가 언제 쓰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기 영광을 드러낼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셉이 나타나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어떻게 묘사하고 싶으신 거냐 하면, 엄청난 수레와 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사람들이 절하고 있는 모습에서 그가 야곱에게 ‘보이며’ 뒤에 진짜로 광채가 나는 듯한 영광 중에 아버지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요셉을 보면서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장면을 누군가 영화로 만들어 묘사한다면 요셉 이야기 가장 멋있는 장면일 것입니다. 요셉이 나타나면서 한마디로 엄청난 카리스마가 보여지는 장면인 것입니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의 포옹

그런데 장면이 진짜 멋있는 이유는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가진 요셉이 모든 것을 끌고 왔을 , 우리 생각에는 ‘아버지한테 얼마나 성공했는지 보여주고 싶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그는 수레에서 내려와서 아버지에게 나아가 ‘목이 어긋나게 맞췄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자기 목을 떨어뜨려 아버지의 목에 눕혔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있고 자기는 목을 아버지의 목에 기대어 붙잡고 울었다는 뜻입니다.

 

가장 멋있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에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갑자기 떨어지는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면이 엄청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면이야말로 요셉의 인생 전체를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것이야말로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자로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가진 그분이 우리와 만났을 우리의 형상을 가지고 우리와 같이 되어서 우리와 함께 앉고, 우리와 함께 울고, 우리와 함께 웃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지금 모든 것을 가진 2인자인 요셉이 아무것도 아닌, 가나안에서 겨우 칠십 명을 데리고 자리에 ,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난민과 같은 무리 앞에서 직접 내려가 그중 사나이를 붙잡고 그가 고개를 아버지의 목에 떨구고 우는 것입니다.

 

그때 요셉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이야기를 성경에 적었다면 아마도 성경이 지금 육십칠 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그때 자기가 생각하는 감정을 성경에 적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 육십팔 권을 읽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같이 목을 어긋나게 하면서 울고 있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안에 들어 있었겠습니까?

 

말씀대로 이루어지니 족하도다

그런데 울음을 멈춘 사람이 요셉이 아닙니다. 요셉이 아버지를 맞았으니 ‘아버지, 진정하세요. 이제 제가 아버지를 편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것이 아니라, 먼저 말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는 표현이 바로 제가 설교를 시작할 말씀드린 라틴어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입니다. 눈크(Nunc) ‘지금, 이제(now)’이며, 디미티스(Dimittis) ‘사라져도 좋다(dismiss)’는 뜻입니다. 이야기는 우리나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중요한 장면으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고백과 시므온의 노래

제가 보기에 야곱의 말은 신약의 구약판과 같습니다. 신약의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유명한 고백은 ‘시므온의 노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므온은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하며, 배경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만에 할례를 받으러 성전에 가셨을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의 이름이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부르는 노래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주제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우리나라 성경은 이것을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번역했지만, 어려운 번역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 주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만족합니다’라는 뜻입니다.

 

말은 ‘이제 죽으러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의미가 조금은 있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닙니다. 말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이 지금 앞에서 이루어졌으니 나는 드디어 만족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야곱이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야곱도 아들을 보고 ‘야, 이제 죽어도 되니까 죽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정말 이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나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인도하셨고,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약속의 땅으로 같이 것이라는 것을 내가 너를 만나는 순간 알겠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도 알고 있습니까? 요셉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를 먼저 보내신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라고 했던 요셉의 말을 야곱도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가족의 구원자인 요셉을 보면서 ‘이제 우리는 만족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므온의 노래는 그것보다 놀라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

여러분, 요셉의 꿈을 보면 해와 달이 절하지 않습니까? 야곱이 와서 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절을 것이 아니고, 지금 요셉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당신을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삼으시고 있다. 이것을 신약에서 시므온은 어떻게 말합니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말이지만, 지금 요셉을 향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요셉의 영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요셉을 얼마나 높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요셉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은 ‘나는 이제 만족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만족합니다. 인생의 죽음조차도, 그리고 인생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내가 가진 어떤 것이, 그리고 내가 소유한 어떤 것이, 모든 인생의 어떤 순간이 없어진다고 해도 나는 만족할 있습니다. 죽어도 만족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이루어져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

여러분, 말씀이 요셉에게만, 야곱에게만, 시므온에게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도 같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 다른 사람에게만 말씀입니까?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느냐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이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믿는 자여, 그대가 아니면 세상을 이길 있는 자가 누구리오?

 

이것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십니까?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고백하는 아니겠습니까? 신약으로 부족하십니까? 구약에 뭐라고 얘기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대로 여러분의 인생은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어찌 우리는 이렇게 반드시 아멘을 해야 하는 곳에서 아멘을 하십니까? 이건 하셔야 되는 부분 아닙니까? 이것은 목회자인 저에게 ‘목사님, 목사님 말씀 좋네요. 하지만 저를 위한 말씀은 아니네요’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하겠다.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야곱이 얘기하잖아요. ‘말씀대로 이루어지니 나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까? 아멘. 여러분과 주님이 함께 동행하며 여러분의 인생을 같이 가시겠다는 약속을 주님이 어기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히 같이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능력이 일을 이루시고 계시니까요. 말씀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

여러분,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목사님 아들 되시는 분들이 계셔서 혹시 자기 얘기 아니냐고 그럴까 제가 말씀드리는데,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하지만 여러분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의 아들이 방황을 했습니다. 어느 해가 지나는 마지막 , 12 31일에 그날도 교회나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 않아야 곳에 있었습니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너무 죄악된 삶을 사니까 아버지인 목사님도 너무 걱정이 되고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수치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혼자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친구들과 마시고 있었고, 명가량의 친구들이 마시고 있는 자리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친구는 친구들 중에서 제일 비꼬는(sarcastic) 친구였습니다.

 

친구가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야, 오다 보니까 교회에서 예배하던데”라며 해의 마지막 날이니 아마 예배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철야 예배하는 같던데, ,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 우리도 기도할까? 이렇게 비꼬듯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중에 친구가 받아 가지고 “그래, 우리도 기도하자. 기도만 아니라 찬송도 부르자” 하며 놀다가, 친구가 마침 목사 아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야, 그럼 네가 설교하면 되겠네. 네가 설교를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친구가 당황해서 “난 한다, 한다” 하자, 옆에 있는 친구들이 “야, 네가 목사님 아들이니까 설교해야지” 하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것을 주제로 설교를 해라” 하고 본문까지 주었습니다.

 

친구가 말씀을 받고 “아니, 한다”고 하다가 결국 많은 친구들이 하라고 하니까 “그래, 알았어” 하고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육신이 약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멸망하는 아니냐!”라고 합니다. 들은 풍월이 있지 않습니까? 식당 개는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데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설교 비슷하게 말을 하니 친구들이 그것을 듣더니, “오,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 바보인 알았더니 대단하다” 이러면서 비꼬았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 아버지가 설교했던 부분도 조금 생각나고, 어머니가 알려줬던 성경 구절도 조금 생각나고, 그러면서 “야, 육신대로 살면 우리는 죽는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야기에 무게가 실렸습니다. 죽는다는 얘기니까 친구들이 시끄럽다가 갑자기 조금 조용해지면서 얘기를 듣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울리기 시작한 말씀

그런데 얘기를 듣는 사람이 친구들만이 아니라,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던 목사님 아들도 이야기가 자기에게 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내가 육신을 따라가면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이렇게 살았는가? 점점 말씀이 자기에게 들리면서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친구들아, 만약 말씀이 사실이면 우리 모두 멸망하게 되는 거다. 하나님께 지금 용서해 달라고 자비를 구해야 되지 않겠냐? 그러고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친구들 중에 명이 그날 무릎을 꿇고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 나오는 길에 마침 철야 기도를 끝내고 오시는 아버지와 마주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상상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자리에서 아들을 붙잡고 울었을 것입니다. 아들도 울었습니다. 뭐라고 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말씀대로, 말씀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말씀

여러분, 그저 여러분이 매주마다 번씩 듣는, 또는 여러분이 가끔씩 읽는,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그래, 이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라고 생각하는 그냥 속에 있는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조금 지혜와 감동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 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움이 되는 글이구나. 우리 인격을 형성하는 좋은 글이구나. 이대로 하면 교양 있고 괜찮고 착한 사람으로 있구나! 하는 그런 성경 구절이 아니라, 생명을 주더란 말입니다. 생명을 살렸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일이 무엇대로요? 말씀대로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야곱도 이야기합니다. 말씀대로 주께서 나를 만족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을 말씀대로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멸망 외에는 어쩌면 아무것도 있을 없는 저희들을 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귀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이름을 주님의 품에 담으셨고, 주님의 손바닥에 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의 이마에 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거룩한 이름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주여,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어찌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저희가 계속해서 마음에 부족함을 느낀다면, 주님, 돌이켜 모든 만족이신 주님을 다시 붙잡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모든 되신 주님을 다시 붙잡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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