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6장 1절로부터 6절 까지 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아멘.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실
오늘 본문은 야곱과 그의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야곱의 마음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 아들을 봐야겠다"라고 말하는 야곱의 모습은,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벌떡 일어날 만큼 기쁨과 의욕에 찬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을 잃은 후 오랜 세월 동안 의기소침하여 회색빛 삶을 살았던 야곱은,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다가 아들의 소식을 듣고 비로소 큰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동양 문화권에 살기 때문인지, 혹은 한국인의 정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셉이 애굽에서 그토록 높은 지위에 올랐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뵙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다소 동양적인 관점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으나, 성경 곳곳을 살펴보면 야곱이나 이삭 모두 아버지를 찾아 문안드렸던 모습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요셉은 직접 오지 않고 도리어 아버지를 오라고 요청합니다.
구원 역사의 시작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본다면, 이는 가나안 땅에 극심한 기근이 닥쳐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근으로 인해 생존을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너무나도 합당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은 이미 창세기뿐 아니라 출애굽기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단지 기근 때문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눈에 보이는 현실(사실)이 있는 동시에, 그 현실을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실이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기근이 있었고 어려움이 닥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 애굽으로 내려오십시오. 고센 땅에서 저희가 잘 살도록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요청한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놓인 진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이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는 섭리적인 과정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우물, 브엘세바
야곱은 헤브론에서 출발하여 애굽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먼저 브엘세바라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헤브론은 사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우물'을 뜻하는 단어와 '약속'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말로, 그 의미는 곧 ‘약속의 우물’입니다. 또한 '세바'가 숫자 7을 의미하기에, 이를 ‘일곱 개의 우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브엘세바는 야곱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야곱이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기 위해 가나안 땅을 떠나고 있으나, 사실 가나안을 떠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전에도 한번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바로 하란 땅, 밧단아람이었습니다. 형 에서에게 쫓겨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도망쳤으며, 그곳에는 외가 식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오랜 과거의 일입니다.
그때 야곱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하란으로 도피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힌트를 드렸기에 눈치 빠른 분들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이 처음으로 북쪽으로 도망갈 때 출발했던 곳이 바로 이삭이 살던 브엘세바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애굽으로 가기 위해 가나안 땅을 떠날 때도 그는 다시 브엘세바에 이릅니다. 이쯤 되면 브엘세바가 야곱에게 얼마나 깊고 중대한 의미를 지닌 장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의 경계를 말씀하실 때, 그 땅의 범위를 보통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표현합니다. 북쪽 끝이 단이고, 남쪽 끝이 브엘세바입니다. 그러니 브엘세바는 약속의 땅의 가장 남쪽 경계인 것입니다.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기 직전에 그 경계선인 브엘세바를 찾았습니다. 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곱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의 제사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일 수 있으나,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제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멀리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세겜이나 다른 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제사를 드리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쌓는 장면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보통 언제 드려집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다든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행하셨다든지 하는 일이 있은 후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입니다. 즉,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면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반응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패턴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야곱의 제사는 다소 예기치 않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제사가 끝나자마자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곧바로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시고 야곱이 “하나님 말씀에 감사합니다” 하며 제단을 쌓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야곱의 제사가 먼저입니다.
야곱이 제사를 드린 이유: 감사와 화목
그렇다면 야곱은 왜 하나님의 말씀보다 먼저 제사를 드렸을까요?
한글 성경에서는 이를 ‘희생제사’라고 번역하였으나,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제바($zebah$)'는 사실 희생제사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제사, 특히 화목제사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용어입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이 단어는 단 두 번만 등장하여 다른 제사를 지칭하는 단어와는 구별됩니다.
한 번은 오늘 본문(창 46:1)에 나오며, 다른 한 번은 창세기 3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zebah$),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냈더라.” (창 31:54)
이 제사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화목제사의 형태입니다. 제사가 끝난 후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화목제사는 하나님과의 교제, 평화, 그리고 감사의 의미를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떡을 나누어 먹었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워스케(Wenham)나 해밀턴(Hamilton)과 같은 구약학자들은, 이 문맥에서는 죄에 대한 희생이나 속죄의 의미보다 요셉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와, 기근 속에서도 지켜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훨씬 크게 드러난다고 분석합니다.
구약의 화목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서원을 위한 서원제가 있고, 둘째는 감사제이며, 셋째는 화목하며 기쁨과 교제를 나누는 화목제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제사 모두 속죄나 대속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반응으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요셉을 살리신 하나님, 기근 속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제사를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애굽으로 떠나기 직전에 브엘세바에서 제사를 드린 이유입니다.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제사를 깊이 살펴보면, 그 의미가 단순히 감사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창세기 46장 1절의 마지막을 다시 주목해 보십시오. 야곱이 제사를 드릴 때, 성경은 그 대상을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야곱이 드리는 제사라면 마땅히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해야 할 터인데, 굳이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드렸다고 언급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 창세기 46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네 아버지”라고 언급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아버지’는 당연히 이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도 야곱의 제사에 응답하시면서 굳이 이삭의 하나님을 언급하신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 하필 이삭의 하나님을 이야기하셨을까요?
야곱의 두려움: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에 대한 염려
하나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야곱의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마음이 평안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주를 한다는 것, 곧 이방인의 나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매우 큰 부담입니다. 우리 모두 이민을 경험하셨기에 잘 아실 것입니다. 이민 오기 전날 밤, 설레는 마음도 있겠지만,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들은 가서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수많은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냅니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로 애굽으로의 이주를 앞두고 엄청난 염려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삭의 경험, 그리고 브엘세바의 의미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순히 낯선 이방 땅으로 향하는 두려움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지금부터 이삭이라는 인물이 언급된 이유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이삭에게도 기근이 닥쳐 가나안 땅을 떠나야 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또한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흉년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창세기 26장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어, 이에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창 26:1~2, 요약)
이삭은 기근을 만났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삭은 애굽에 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계시를 받은 곳인 그랄은 바로 브엘세바가 위치한 지역과 인접한 동네입니다.
지금 야곱은 이삭과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브엘세바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제사가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삭의 하나님을 언급하시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야곱의 두려움이 우리가 짐작하는 단순히 낯선 이방 땅으로 가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 두려움은 곧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삭에게 명하셨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명령을 자신이 어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영적인 염려였을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는 두려움
야곱의 두려움이 단순한 이주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는 증거는 더욱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생존을 위해 낯선 땅으로 가야 했기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야곱은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야곱이 애굽에 가면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바로 요셉이 있습니다. 바로 왕이 직접 마차를 보내왔고, 엄청난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애굽의 제이인자인 총리의 아버지로서 최고의 예우를 받게 될 것이며, 심지어 가장 좋은 땅 가운데 하나인 고센 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생계나 생존을 염려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애굽으로 갈 때, 그러한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삭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던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버지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는 것을 막으신 적이 있습니다. 왜 막으셨습니까? 바로 이곳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깊이 번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두려움은 사실 그가 처음 가는 땅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 때문에 비롯된 두려움이었습니다.
약속을 포기할 수 있는가
야곱은 지금 130세입니다. 그의 긴 생애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형 에서로 인해 고난 속에서 보냈으며, 그 나머지는 요셉을 잃고 회색 시대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모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결코 놓지 않고 붙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인생 전체는 장자권을 얻으려 했던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왜 장자권을 가지려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고, 그 풍성한 복을 장자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 복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130년 인생 대부분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그의 생애의 목적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받았는데, 이제 그 땅을 떠나야 하니 그는 깊이 숙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약속의 땅을 떠나도 되는 것인가? 내 인생 전체를 걸고 살아왔던 목적이었는데, 이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아버지 이삭에게는 분명히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 그는 요셉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야곱은 본래 자기 뜻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자기 식으로 만들고 성취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이제 하나님께 길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애굽으로 가는 이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맞습니까? 이곳을 떠나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내 인생 전체가 그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이 가나안을 떠나야 한다면 나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야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요셉이 불렀다고 하여 ‘오, 그래’ 하고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의 130년 인생이 걸려 있는 결정입니다. 그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주저하며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아, 야곱아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 야곱에게 나타나셨는데,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야곱아, 야곱아.”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신 것입니다. 이처럼 급박하게 이름을 두 번 부르신 때를 기억하십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손을 그 아이에게 대지 말라”고 하시며, 인간의 계획을 멈추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셨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행위는 사안의 급박성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있다’는 여호와 이레를 선포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이번에도 “야곱아, 야곱아”라고 부르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은 매우 분명하게 야곱의 두려움을 해소해 주십니다.
“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불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이 불안할지 모르나, 너의 아버지 이삭 때문에 더 불안할 텐데, 염려하지 말라.”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야곱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애굽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살펴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는 기근에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고, 이삭에게는 똑같은 기근이었는데도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애굽으로 가느냐 마느냐 하는 장소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본질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우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명하시기도 하고, 야곱에게는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문제의 핵심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가느냐, 가나안에 남느냐, 혹은 다른 나라로 가느냐 하는 선택의 결과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결정을 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삶과 모습 속에서 훈련하고자 하신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기근을 만나 다른 곳으로 가서 똑같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그곳에서 혹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염려하여, 즉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고 주신 약속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 봐 하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컸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우리의 질문과 다릅니다. 우리의 질문은 대개 이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선택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항상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말의 이면에는 사실 이러한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내가 더 유익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며, 나에게 남는 것이 많을까요?’ 우리의 질문은 늘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은 일이 생깁니까? 앞으로 길이 시원하게 뚫립니까? 이렇게 하면 대로(大路)로 가는 것입니까?’ 우리는 당장의 유익과 성공만을 물어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문제도 물론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질문해 주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이를 성경의 여러 표현으로 바꾸어 본다면, “너의 우상이 무엇이냐? 너는 지금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느냐?” 하나님은 바로 그 핵심을 드러내고 그것을 훈련시키려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도 동일하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우상이 드러났고,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길로 갈까요’ 혹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를 묻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너의 우상이 무엇이냐, 주님과의 약속이 중요하냐, 아니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중요하냐?”**를 묻고 계십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야곱은 숙제가 약간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두려워할 만한 현실적인 문제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있었고 바로 왕도 그를 환영했으므로, 당장 정착해서 먹고 살 걱정은 없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우상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현실적인 걱정이 없는 상황이 야곱에게는 오히려 더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똑같은 문제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네가 사람을 두려워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의지할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문제나 사람을 의지하는 문제나, 둘 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크게 보는 같은 성격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사실 두려움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바로 사람을 의지하는 문제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의지하여 애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바로 왕의 호의를 의지하여 애굽으로 갈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그곳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고, 내가 가는 것을 예비하며 모든 것을 해결해 줄 테니 나는 아무 문제가 없어’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가는 것 역시 또 다른 우상을 세우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요셉이 아니라 그 요셉을 살린 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는 요셉이 아니라, 그 요셉을 살리시고 너를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실로 준비하고 계시며, 너를 인도하는 나를 기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6장 4절이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이것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요셉이 있는데 하나님이 멀리 계신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요셉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는데, 하나님이 가까이 가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먹을 걱정 없고, 가면 잘 살 텐데요.
우리 현실에 비추어 말한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데 가까운 가족들이 모두 있어서 직장도 잡아주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출발할 때 ‘나는 가서도 괜찮아’ 하고 안심하며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모두 너무 바빠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부터 가족 간에 원망과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아니, 내가 믿고 왔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러한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너는 무엇을 의지하며, 너의 우상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시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애굽으로 가도 좋다.”
그곳이 어디라도 상관없습니다. 눈물의 홍수 속일지라도 괜찮고, 절망에 묻혀 어쩔 수 없는 구렁텅이에 들어가더라도, 사망의 골짜기일지라도, 상처가 너무 많아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간다”**는 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며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떤 기로에 서 있든지,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 어떠한가, 내가 거기 가서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익을 받을 것인가, 그래서 앞으로 얼마나 잘살게 될 것인가’가 첫 번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내려가신다”**가 바로 첫 번째 기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기 전에, ‘내 마음은 어디에 있으며, 내 우상은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상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여러분, 우리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자주 서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질문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나에게 집이 생기는가? 이렇게 하면 내가 직장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는가? 이렇게 하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는가?” 이것이 여러분의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어떤 길 속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결정을 내리십니까?
어느 미국 목사님의 글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녀가 여럿 있는 부모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아내와 저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낼지, 사립학교를 보낼지, 혹은 홈스쿨링을 해야 할지를 숙고했습니다. 그 결정을 고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저와 제 아내의 마음에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실상 저와 제 아내는 학교를 선택하는 문제 때문에 씨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선택을 하든 세상적인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적 성취, 즉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가 성공할까’라는 우상과 씨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다시 쉽게 설명하면, 어떤 학교를 선택하든지 아이를 공부 잘 시켜서 좋은 직장과 좋은 미래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 사실은 내 마음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장 중요한 원리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목사님은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들이 명백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라는 오만함의 우상도 자신에게 있었고, 심지어 “바로 집 건너편에 기독교 학교가 있으니 등하교가 편하겠다”는 게으름의 우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립학교가 무료이니 재정적으로 나에게 유리하겠다”는 물질에 대한 우상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결정을 하는 동안 그들 안에 숨어 있던 우상들을 하나씩 드러내 주셨습니다. 그 결정은 단순히 ‘학교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훨씬 더 큰 계획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우상을 드러내시며 그들을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나, 자녀를 훈계할 때나, 배우자와 대화할 때나, 교회 일을 하거나 직장에서 생활할 때나, 그 일을 행하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먼저 성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있는 분들에게는 앞의 이야기가 와닿을 수 있으나, 이미 자녀를 모두 양육하신 분들에게는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으니, 더 보편적으로 와닿을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쇼핑은 어떠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충동 구매를 피해야 하고, 낭비는 옳지 않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웠고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아끼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자녀들에게도 “쓸데없는 것은 사지 마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아끼면서도 우리가 우상숭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건을 사는 데 있어서 우리의 관심은 대개 이렇습니다. 첫째, 나에게 필요한가. 둘째, 이것이 내가 가진 예산에 맞는가 안 맞는가. 돈이 많으면 사고, 돈이 없으면 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쇼핑은 이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 됩니까? 바로 돈입니다. 여러분, 물건을 사는 일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돈은 여전히 여러분의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말로는 고백하지만, 실제로 사용할 때는 다 내 것이라 여깁니다. 이러한 태도를 다시금 성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
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의 목사 안에 포함된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함께 신앙생활 했던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저에게도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이며, 저는 그 점에 대하여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 재정을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을 의논하다 보면, 자칫하면 돈이 우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재정은 항상 부족합니다. 사실 재정이 많은 것이 문제이지, 적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재정이 많으면 남은 돈을 가지고 다투느라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족하면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게 됩니다. 재정이 부족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방편이 되기에,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재정의 어려움과 연약함을 잘 아시는 장로님들, 집사님들, 제직들과 함께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하며 목회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행복한 일입니다.
이것이 제가 스스로 1%에 들어간다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함께 신앙생활 했던 많은 분들, 한국으로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함께 수고했던 많은 분들을 떠올려 보면 그 확신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여러 면에서 참으로 어리석고 연약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셨고, 지금도 이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굳건히 세우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주 게을러지고, 자주 좌절하며, 서로에게 실망하고, 상처 때문에 아파하기도 하며, 때로는 별것 아닌 일에 기뻐하며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자화자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일 속에서 이 교회를 거룩한 성전으로 세우고 계십니다. 저는 그 손길을 볼 때마다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구나.”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리라
여러분, 야곱에게 요셉은 언제든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을 의지하는 순간 우상이 될 수 있으며, 나중에는 그 요셉이 야곱의 불안과 염려의 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시간이 흐른 뒤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요셉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왕의 마음이 변하면 모든 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의지했던 모든 것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실체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이 많다고, 입을 것이 많다고, 혹은 편안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안심시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한 세상의 것들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고, 머리로는 “아니야, 하나님이야”라고 외치면서도 우리의 발걸음은 자꾸만 그 세속적인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금 야곱에게 확고하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나는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지 내가 함께 갈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형편이든지, 네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깊은 슬픔 속으로 들어가든지, 큰 기쁨 속에 있든지, 혹은 절망감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르든지, 우울함에 무기력하여 “주님,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힘들게 부르짖든지, 혹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앞길이 막막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든지, 육신적 연약함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든지, 여러분이 시도했던 모든 일들이 무너져서 혹여 “아,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인가…”라고 생각할지라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거기까지라도 너와 함께 가겠다. 나는 그곳에도 너와 함께 간다.”
그곳이 어디든지,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강력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약속입니다.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하신, 제가 아끼고 또 아꼈던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의 뒷부분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 46:4)
여러분, 이 약속에는 **원조(原條)**가 있습니다. 제가 그 원조를 읽어 드릴 터이니, 이 말씀이 어디에서부터 유래한 것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 것이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3-14, 요약)
여러분,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가나안을 약속으로 주신 그 약속을 깨뜨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그 가나안 약속을 이루어 가는 섭리적인 과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내려가서 반드시 너와 함께 올라올 것이다”라고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두려워할 것은 당면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감정의 기복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싫고 좋다는 개인적인 판단의 결과도 실상은 아니었습니다.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그의 감정도 아니었고, 시시각각 바뀌는 그의 걱정과 염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염려까지라도 같이 내려갈 것이다. 네 인생에서 다른 사람에게조차 나눌 수 없는, 너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어두운 부분에도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갈 것이다. 너를 살리고 너를 완전하게 하며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반드시 내가 너와 함께 돌아오리라.”
애굽에는 보화가 있었고, 요셉이 약속을 했으며, 바로 왕은 마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야곱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오직 이 한마디로 다루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첫 독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는 동안 많은 것을 배우지만, 한 번쯤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의 첫 번째 독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 때, 누가 제일 먼저 이 말씀을 읽었겠습니까?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했을 때 가장 먼저 읽은 사람들은 애굽에서 막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창세기에는 출애굽하고 있는 그들을 위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들었던 말씀이 바로 출애굽기가 아니라 창세기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광야에 나와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도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지도자인데도 그러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한 번쯤 목회를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목사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면서 오직 구름 기둥과 불 기둥만 따라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의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주여, 주께서 말씀하시면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세나 그랬을까요? 아론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확신을 가진 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창세기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야곱에게 약속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내려가고 반드시 너희와 함께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그들이 지금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 약속을 현재 누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올라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봅시다. 성경 에베소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올라가신 이가, 그리고 그곳에서 영광을 받으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가 내려오신 적이 있어야 올라가지 않겠느냐?” 곧, 그분은 이 땅에 분명히 내려오신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려오셨을 때 무엇을 하셨습니까? 바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과 함께 그 영원한 충만함으로 올라가신 것 아닙니까?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들으며 놀라워하고 기뻐하였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올라가시는구나!” 하며 큰 힘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배고플 때 하늘이 열리고 만나가 내렸으며, 물이 없을 때 반석이 깨져 물이 나왔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가 몰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급하셨고, 그들은 그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겠습니까? 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 명백한 증거를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여러분의 눈물 속으로 내려가셨고, 여러분의 죄 속으로 내려가셨으며,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가장 어두운 곳까지도 함께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내가 올라가리라” 하신 말씀대로, 여러분을 하나님의 나라로, “내가 너와 함께 하늘에 거한다” 하신 그 나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경험하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구원의 역사의 증인이며, 그 일을 함께 겪어 나가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지점에 머물고 계십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나는 너무 무기력하고, 좋은 일도 하나도 없으며, 마음은 한없이 답답한 것 같아!’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아니면 ‘요즘은 모든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있고 성경을 읽어도 모든 말씀이 은혜가 된다!’ 라고 느끼십니까?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주님께서 함께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다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실 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함께 내려가시고 함께 올라가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이제 여러분은 주님을 부인하지 마시고, 나 자신을 부인하며 그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주께서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의 눈물과 상처 속에 같이 내려오셨으니, 이제는 눈물 대신 희락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히시는 놀라운 주의 영광의 나라로 저희를 이끄실 것도 믿습니다.
저희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 저희의 치료와 회복 또한 주께서 주관하실 것이니, 주님의 선하신 뜻대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창세기-144-가깝고 멀어진 땅 (1) | 2025.12.25 |
|---|---|
| 창세기-143-눈크 디미티스 - 이제는 족하도다 (1) | 2025.12.24 |
| 창세기-141-살아있으니 족하도다 (0) | 2025.12.24 |
| 창세기-140-사실과 진실 (0) | 2025.12.24 |
| 창세기-139-가까이 오소서 (0) | 2025.12.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