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5 16절로부터 28 까지 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림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에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애굽 땅에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양식을 주며 그들에게 각기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삼백과 다섯 벌을 주고 그가 이와 같이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되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아멘.

 

구원의 역사와 하나님의 패턴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지역, 지금의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이집트 지역 전체에 대대적인 기근이 들었습니다. 기근이 2 만에 야곱은 사실상 자신들의 힘으로는 상황을 헤쳐나갈 없음을 깨닫고 항복한 듯합니다. 결국 그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게 됩니다.

 

과정에서 요셉의 형들은 여러 우여곡절과 갈등을 겪었으며, 마침내 동생 요셉과 재회하게 됩니다. 만남 속에는 용서와 망설임, 그리고 새로운 갈등들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결국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팔려왔던 동생임을 알리면서, 자신을 이곳에 보내신 이는 형들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시며, 형들,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리 보내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족을 기근에서 건져 살리셨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기근에서 건진 것이 전부인가?'라는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 요셉 이야기는 형제간의 문제, 용서, 화해 자체로 매우 드라마틱한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사건들이 단순히 형제들 간의 화해나 '요셉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머물지 않고, 성경 전체의 구원의 역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반복되는 약속의 이탈과 회복

요셉으로 인해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머물러야 곳은 애굽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실제로 앞으로 400년이 지나면 모든 가족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원래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애굽으로 부르셨을까요?

 

이것을 아담의 이야기와 연결하여 있습니다. 아담 역시 약속의 땅인 에덴에 있었으나 세상으로 나갔고, 그의 구원은 결국 에덴의 회복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아담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는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아가 이야기는 어디에서 완성되게 될까요? 우리가 아는 대로, 훗날 아들(예수 그리스도) 태어나게 되는데, 그분에 대한 수많은 핍박 때문에 그분 역시 잠시 애굽으로 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선지자의 예언대로 '애굽에서 내가 아들을 불렀다'라는 말씀에 따라 아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부르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역시 애굽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신 것입니다.

 

정도의 성경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우리는 ',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구원의 역사의 패턴과 구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사건을 단순히 하나로만 잘라서 본다면, 요셉은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세상으로 끌고 좋은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오묘하게도,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왕과 요셉의 존중

이제 야곱과 요셉,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만났습니다. 만남 속에서 용서가 일어나고 가족들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이제 가족을 부릅니다. 원래는 베냐민만 부르려 했으나, 이제는 가족 전체를 부르게 되죠. 이때 요셉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가까이 오십시오.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말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게로 오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다를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임을 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가나안으로 돌려보냅니다. 이때 형제들에게 주는 선물은 매우 흥미로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왕이 야곱이 것을 알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선물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보냅니다. 이것은 바로 왕이 야곱을 매우 중요하고 존귀하게 여겨 대접하고 있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바로의 명령과 함께, 가나안에 있는 자기 가족들을 부르는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이제 형제들이 야곱과 함께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의미심장한 선물과 요셉의 의도

그런데 요셉은 바로 왕조차 명하지 않은 명령을 형제들에게 합니다. 바로 옷을 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옷에 대한 이야기는 요셉의 형제들에게는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입니다.

 

여기에 가지를 추가합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는 삼백 냥과 다섯 벌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은과 옷이라는 소재는 무엇을 연상하게 할까요? 이것은 형들이 처음에 요셉을 팔았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셉은 지금 굉장히 의도적으로 "당신들은 일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사건을 잊어서는 되며, 스토리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줍니다.

 

"길에서 다투지 말라" 명령의 해석

그리고 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형님들, 가는 도중에 다투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릴 있습니다. 지금 형들과 화해했고, 가족들을 태우고 **수레(마차)**까지 내주어 보내는 형제들에게 "가다가 싸우지 마시오"라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가장 가까운 문맥을 통해 구절을 해석해 있습니다. 요셉은 암나귀와 수나귀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과 돌아올 먹을 음식까지 매우 많은 물건을 실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서로 나누느라고 다투지 마십시오"라고 해석할 있습니다. , 눈앞의 많은 선물을 가지고 다투지 말라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해석은 다소 빈약합니다. 형제들이 애굽으로 돌아올 터인데, 일시적인 물건을 가지고 싸우겠느냐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조금 앞으로 나아가 베냐민과의 관계 속에서 구절을 있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만 특별히 삼백과 다섯 벌을 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형들이 "아니, 여기서도 우리를 차별하는가?"라고 생각하여, 베냐민에게 물건의 분량으로 인해 다투지 말라는 경고일 있습니다. 해석은 일견 말이 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의 흐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다가 요셉에게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기 전에, 이미 베냐민에게는 다른 형제들보다 다섯 배나 많은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형들이 베냐민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구절이 베냐민의 물건 때문에 다투지 말라는 이야기와는 조금 다를 있습니다.

 

'다투다'라는 단어의 가지 의미

그렇다면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 가면서 다투지 말라" 이야기했을까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툰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먼저 살펴볼 있습니다. 단어는 사실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다툰다 (Dispute/Quarrel)’ 라고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두번째의 뜻은 탓한다 (Blame)’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탓이다, 저것은 탓이다"라고 서로 책망하는 것을 의미하며, 새번역 성경은 해석 방식을 따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두려워서 떤다 (Fear)’ 라는 공포에 압도되어 떠는 감정적인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책망하지 말라는 경고

이제 '다툰다' 혹은 '탓한다' 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탓한다' 말은 분명히 요셉의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아버지께 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전하고 함께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명했을 , 형들은 야곱에게 요셉이 어떻게 살아 있게 되었는지를 필연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결국 자신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이때 형제들 사이에는 "네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며 서로 탓하는 일이 생길 있습니다.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앞선 문맥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당신들 명만 남고 가라" 말했을 르우벤이 했던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나는 그때 분명히 반대하지 않았냐? 내가 그거 하지 말자고 했지만 너희들이 거다"라고 말하며, 마치 자신은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다른 형제들 탓으로 돌리려는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형제들이 르우벤처럼 서로 "당신이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팔자고 했지 않느냐", "유다, 당신이 그때 이렇게 얘기했다" 하며 서로 책임을 돌리는 일들이 생길 있음을 염려한 것입니다.

 

'나는 조금 낫다' 자기변호

하지만 르우벤의 경우를 다시 보면, 일이 처음 시작될 르우벤 역시 형제들과 함께 모의했습니다. 처음에 동생을 죽이려 잡았다가 잠시 멈추었고, 결국에는 팔아넘긴 것입니다. 르우벤은 결국 "우리 모두가 잘못했지만, 나는 마지막에 손톱 하나만큼은 뺐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다른 형제들과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라"라는 의미에서 "다투지 말라" 경고했다는 해석에 많은 학자들이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가 바로 르우벤의 사건을 통해 가능성을 엿볼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임을 잊지 말라는 교훈

이러한 형제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합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네가 죄인이다. 나는 그래도 요만큼은 손톱 하나 있다. 나는 그때 거짓말은 했다. 나는 그때 너한테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그때 그래도 조금 괜찮은 일을 했다. 나는 그때 그래도 거기에 반대했었다"라는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조금은 낫다", "네가 조금 나쁘다"라는 방식으로 도망가려 합니다. 모두 같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나는 조금 결백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심리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셉의 말은 "당신들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제발 잊지 마십시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대할 ,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들을 대할 , 우리 모두가 같은 죄인이며 어리석고, 어떤 일에도 누구도 누구보다 나은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당신도 그렇지만 내가 조금 낫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부분을 지적하는 같습니다. 르우벤은 어쩌면 이상 말을 잇지 않는 것이, 자신 역시 똑같은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지 말라는 권면

앞서 '다툰다' 말에는 '다툰다', '탓한다' 외에 '두려워서 떤다' 뜻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해석이 비중을 두어야 중요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 길을 가면서 두려워 떨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형들이 지은 때문에 이제 아버지께 가서 죄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사실 때문에 너무 두려워 떨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나는 이미 당신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의미가 가장 강력하다고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형제들은 분명히 요셉에게 용서를 받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함께 부둥켜안고 울며 화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창세기 50장에 가서 야곱이 죽자 형제들은 요셉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 그들의 마음속에는 용서받았다는 말을 들었고 실제로 용서도 받았지만, 용서가 주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완전히 누리지 못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용서의 결과를 소유하지 못하는 신자의

저는 이것이 우리 신자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결과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요셉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이 한마디만 해도 " 말이 무슨 뜻일까? 혹시 내일 우리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말이 아닌가?" 또는 "오늘 아침 요셉 눈빛이 달랐어"라며 사소한 것에도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삶이 됩니다.

 

신자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 죄가 눈과 같이 희리라"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를 붙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죄의 길을 벗어나 의의 길에 들어서서 하나님이 주신 의의 길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죄의 용서를 받아, 용서받은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신 기쁨과 즐거움을 지금 누리고 계신 분은 누구입니까? "나는 죄인인데 주님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기쁨과 놀라운 신앙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약점 잡혀서 교회에 오는 것처럼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리스트를 가지고 계시다가, 혹시 우리가 잘못하면 " 옛날에 이거 기억나냐? 하는 짓이 똑같구만"이라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그분 앞에서 "내가 까불면 되지, 함부로 하면 되지"라는 마음은 어쩌면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분명히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의 잘못된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여러분이 돌이키도록 도와주시며, 죄와 싸우게 하시고, 죄의 유혹으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항상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열심히 사는 이유,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이유, 예배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아니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모습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피스메이커로 부름받은 자들

신자는 미안해서, 죄송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벌을 주실까 전전긍긍하며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감사와 사랑, 은혜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다시 한번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요셉의 말은 그래서 "형님들, 제발 두려움으로 살지 마십시오"라는 너무나 중요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셨고, 그래서 '내가 땅에 태어나 있는지', '내가 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또한 '내가 사는 이유와 목적과 종착역' 알고 있는 놀라운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만났고, 참된 형제자매들을 만나 같이 주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품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을 거하게 하셔서 무엇으로도 흔들 없는 확신으로 안과 모든 것을 감싸시고 길을 함께 걸어가고 계시는 아버지를 만난 분들입니다.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아는 분들입니다.

 

요셉이 보기에 형제들은 요셉의 마음이 변할까 전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두려움 속에서 살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가는 길에 제발 죄책으로 서로 탓하거나 두려워함으로 길을 걸어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 다시 애굽을 향해서 오게 , 모든 여정 속에서 성경은 요셉의 음성을 통하여 중요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신앙의 여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계속해서 순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길에서 다툴 있고, 서로 탓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에 길이 이렇게 거야"라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것은 여러분이 두려움으로 길을 걸을까 하는 것입니다. "서로 탓하지 말라" 말은 "너희가 서로 죄인처럼 대하지 말라" 뜻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 중에 부족해 보이거나, 없어 보이거나, 신앙적으로는 별로라고 생각할 있는 분이 있을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이만큼은 나는 한다"라는 생각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사람도 여러분이 이제 죄인처럼 대해서는 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벗겨낸다고 할지라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중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며 용서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과 화해한 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이웃들과 화해하는 사람이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피스메이커'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요셉의 말은 그래서 "당신들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라" 말이며, 신약의 표현으로 바꾸면 "너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라고 간단하게 말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일들을, 그리고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을 만나면서, 같이 생활하면서, 어떻게 여러분 마음에 드는 일들이 개나 있겠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은 누구한테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을 조금만 넓히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무슨 마음에 드는 사람이겠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 기뻐하는 , 사랑하는 "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기뻐한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때문에, 우리의 속에서 길을 걸어가면서 서로를 탓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며 길을 걸어갈 있겠습니까?

 

요셉의 옷과 그리스도의 그림자

우리는 사실을 잊어서는 되며, 동시에 요셉이 중에 반드시 알아야 가장 놀라운 하나는 처음에 이야기했던 " 옷을 주었던 사건"입니다. 사실 옷을 사건은 요셉이 자기 인생을 돌아볼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였습니다. 그가 채색 옷을 입었을 , 요셉은 옷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표현했고, 그것 때문에 시기를 받아 죽을 뻔하고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는 계속해서 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도 옷을 입고, 총리가 되었을 때는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일이 단순히 기근 중에 먹을 것을 주는 사건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형제들에게 옷을 입히시며 안에 담긴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압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벗겼고, 그리스도를 조롱했으며,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과 굉장히 오버랩되는 부분인데, 그래서 우리가 요셉을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빛을 거부했으나 빛을 나누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옷이 벗겨지고 멸시를 받으셨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빛이 땅에 비추었을 , 오히려 죄와 양심이 드러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빛을 비추신 그분을 따르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여 빛을 없애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했고, 죽음은 생명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건의 진짜 놀라운 점은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과 빛을, 빛을 죽이려 했던 자들과 함께 나누셨다는 사실입니다. 빛이신 예수가 자신의 영광만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생명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들과 함께 나누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요셉이 자기 혼자 총리가 것이 아니라, 옷을 형제들과 나누어 입혔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셨음이라.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영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이유는, 그분이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사랑 때문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이 오셨을 환영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지켜서 얻은 것도 아니며,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얻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귀하게 여겨 순종했기 때문에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죽였고, 옷을 벗겼고, 옷에 피를 묻혔고, 그분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에게 선하셨고, 우리를 아끼셨으며,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셨고, 나의 ()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여러분이 예배에 왔기 때문도 아니고, 선을 위해 애쓴 여러분의 노력 때문도 아니며,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봉사한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리에 있는 까닭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임을 알았기에, 주님 앞에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위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까?"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얻은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워한 우리를 주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우리를 끝까지 추적하여 붙잡으셨기 때문입니다. 거부감, 끝까지 버티던 우리의 마음, 예수를 믿고 나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데, 예수를 고백하고 나의 주님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죄와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여전히 남을 미워하는 일을 마치 나의 일처럼 하고 있는데, 그런 우리들을 주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반응

여러분, 결국 형제들은 야곱에게 도착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를 보면, 형제들은 길에서 서로 다투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고 아버지에게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같습니다. 야곱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가 떨거나 화를 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요셉을 그토록 아꼈던 아버지에게 모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은 마침내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말을 전합니다. 말을 듣고 야곱은 거의 정신을 놓았습니다. 우리말로 '어리둥절하더니'라고 번역되었지만, 이는 사실상 '정신줄을 놓았다' 의미에 가깝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요셉을 사랑했습니까?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나도 빨리 스올(음부) 내려가서 아들을 만나겠다"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말을 듣고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았고, 믿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본문에도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라고 나옵니다.

 

수레가 가리키는 표적

형제들은 요셉이 부탁한 모든 말을 야곱에게 계속해서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정말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야곱에게 말하되,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구절을 문자 그대로만 보면,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하나도 믿다가 갑자기 눈앞에 멋있는 수레가 나타나니까 그제서야 ', 그래?'라고 믿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수레'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수레는 싣는 수레가 아니라 야곱과 식구들을 태우고 가기 위해 요셉이 보낸 마차 같은 것입니다. 유목민들이 살던 가나안 땅에서는 마차를 만들어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짐승이나 나귀에 짐을 싣고 다녔습니다.

 

수레가 도착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비유로 치면, 여러분을 모셔 오기 위해 대통령 전용 비행기가 여러분의 마당에 착륙한 것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동네 전체가 난리가 만큼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엄청난 증거가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수레를 보며 '드디어 기근의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이제 이상 먹을 걱정은 해도 되는구나', '베냐민에게 어떤 일이 생길까 마음 졸이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구나'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그래서 요셉을 믿었을까요?

 

아닙니다. 야곱의 반응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야곱은 "! 드디어 해결되었구나"라거나 "이제 내려가면 되겠구나"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처음 마디는 우리 모두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어야 말입니다. 야곱이 말합니다.

 

"나는 이제 족하도다."

 

'족하도다'라는 말은 이제 앞으로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 양식이 많이 생겼기 때문도 아니고, 수레(마차) 왔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 마차, 수레를 보면서 ', 이런 어마어마한 수레가 것을 보니 요셉을 믿을 있구나' 아니라, 수레가 말하고 있는 표적, 수레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보려고 것입니다. ', 수레를 타면 내가 살겠구나', '여기에 있는 모든 음식을 내가 가지면 살겠구나' 아니라, 수레가 누구를,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수레가 아닌 요셉을 야곱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요한복음에는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물고기 마리와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었고,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치면 명에서 이만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저편으로 가셨다가 다시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쫓아다녔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따라가면 먹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여겨 왕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것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지금 야곱은 먹고 배부른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마차, 수레, 여기 있는 모든 선물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족하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족하다고 했습니까? 요셉이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음식도, 곡물도, 마차도, 어떤 것도 아니라 "요셉이 살아 있으니 나는 충분하다, 이상 필요 없다." 성경은 그가 기력을 회복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회복하고 일어난 이유는 가지, 요셉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야기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야곱이 표적은 수레였습니다. 평생 보기 어려웠던 대단한 마차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자기를 실어갈 엄청난 마차를 것이 아니라 요셉을 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기력을 회복시킬 있는 것은 음식도, 수레도, 선물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요나의 표적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표적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보일 표적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그것은 요나가 고기 뱃속에 들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을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요나이셨고, 요나의 이야기를 완성하신 주님으로 자리에 계셨습니다.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드렸던 기도를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 죄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날지라도, 나는 반드시 다시 주님의 전을 바라보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를 버리셔도 나는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무엇을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만든 천국입니까? 여러분의 성공입니까? 여러분의 부유함입니까? 여러분의 보화입니까? 혹은 여러분의 실패입니까? 여러분의 죽음과 생명입니까? 여러분의 평안입니까? 여러분이 정말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여러분이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 나에게 천국을 허락하지 않으셔도 나는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입니다.

 

나를 있게 하는 것은, 나를 다시 살게 하는 것은, 나를 회복시키는 것은 여러분이 그토록 기도했던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일들(표적) 통해 보니 ", 내가 바라는 것은 결국 주님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는 , 그것이 바로 표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고난을 이긴 신자의 고백

지난주에 저희 교회에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와 같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진오 성도님은 투석을 하신 2 반에서 3 가까이 되었습니다. 항상 투석을 하시면서도 주일이면 가장 일찍 오셔서 안내를 맡고 1 예배를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앞에 대기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음에도 이번 주에 갑자기 연락을 받고 수술을 받게 되어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신장 이식 수술을 받으신 것입니다. 앞에 계셨던 분들 중에는 기다리다가 나이가 너무 많아져서 "나는 나이에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 포기하신 분들이 생겼고, 나머지 분들 중에는 몸과 맞지 않아 이식이 불가능했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성도님의 이름이 올라가 갑자기 연락을 받고 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은 되었습니다. 저희가 병원에 가서 뵈었을 , 성도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 사실은 제가 거의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다가 주님께 가면 감사하겠다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인생을 정말 저를 위해 살았었는데, 주님을 정말 알게 되니 이제는 주님 안에서 살게 되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도 감사하고 너무 좋아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런 일이 생겼으니 본인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겠지요.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이 땅에 남겨두신 것을 보니 뭔가 일이 있으시군요."

 

여러분, 성도님이 바랐던 것은 단지 병이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콩팥을 기증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육신이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 해결할 없던 인생 속에서 "내가 왔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몰랐던 그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자신을 주었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나를 버리시더라도 나는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요나의 기도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버리시더라도 나는 이들과 함께 주님 앞에 다시 나가겠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으셨던 예수, 예수가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예수가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기도에 참여하십니까?

 

"아버지,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보화도, 성공과 실패도, 외형을 이루는 어떤 것도, 내가 그렇게 귀중히 여기는 것들도, 그리고 내가 지금 고민하는 어떤 문제도 나를 붙잡고 있으며 생각에는 이것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는 어떤 것도... 주님, 그것이 어찌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을 막을 있으며,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막을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표적입니다. 그것이 나로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찬송

여러분, 하박국의 찬송이 바로 여기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포도원에는 포도가 없으며, 외양간에는 소가 없고, 곳간에는 곡식이 없는데...

 

구절이 ", 옛날에 저런 훌륭한 사람도 있었구나. 나는 그게 될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있었던 이유는 포도나 곡식, 소가 얼마나 귀중한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에게 주는 유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지 몰라서도 아닙니다. 그보다 비교할 없는 예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어떤 것으로도 덮을 없고,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없는 예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부활하신 예수, 영광의 예수를 나는 보겠습니다. 폭풍 속에서,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내가 세웠던 것이 무너질지라도, 나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살아계신 주님을 보겠습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충분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니 나는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포기한다고 해도, 아니 빼앗긴다 해도, 주님이 계시기에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여러분, 종교개혁주일이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알고 계신 유명한 일화를 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틴 루터는 매우 용맹스럽고 뛰어난 개혁자였고, 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물론 말과 펜으로 싸운 전쟁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루터도 매우 자주 우울증에 빠졌으며, 너무나 자주 포기하고 절망했다고 합니다.

 

결혼을 어느 , 루터의 아내가 집에 보니, 그날도 루터가 책상 앞에서 실망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속이 상했겠죠.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집에 관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관에 하얀 천을 씌워두고 거기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안에서 모습을 보고 "아니, 누구 죽었소?" 하고 나옵니다.

 

그러자 아내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며 "아니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당신 정신이 있소?"라고 말하자, 그때 아내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실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아는데 어떻게 절망할 있습니까?"

 

세상이 여러분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 여러분이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잃은 것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실패한다 해도, 여러분이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야곱의 기운이 소생하였듯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주님의 손길로 새롭게 회복되게 하소서. 어려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담대히 나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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