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5 4절로부터 11 까지 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의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땅에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오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에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아멘.
 
요셉의 눈물과 화해의 시작- 유다의 호소가 불러온 화해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읽었듯이, 유다가 정말 절절한 호소를 올렸습니다. “내 동생 대신 내가 노예가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요셉은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관원들이나 애굽 사람들에게 물러가라고 소리를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을 물러가게 했을까요? 무엇인가를 감추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그가 너무나 소리로 울었기 때문에 애굽 궁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 요셉이 뭔가를 감추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른 이들은 물러가게 하고 오직 형제들만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는 아마 창세기 43장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43 마지막에 요셉이 잔치를 베푼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그때 요셉이 형제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베푼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특징은 요셉은 요셉대로, 형제들은 형제대로, 애굽인들은 애굽인대로 따로따로 앉아서 식사를 했으며, 베냐민에게만 다른 형제들보다 다섯 배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사건의 특징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용서와 화해 사이의 경계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원한을 갚거나 복수하려는 마음도 없었기에, 그들에게 곡물을 주어 가나안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고, 그들과 온전히 화해하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다만 베냐민만 자기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 요셉의 계획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살펴보면 용서의 범위가 어디까지였는지 드러납니다. “내가 이상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내가 이상 실망하지 않는 선에서 용서하겠다. 결국 형들은 요셉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화해의 순간이 것입니다. 요셉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소리로 형들 앞에서 울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중심에는 유다의 사건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유다의 행동은 ‘내가 막내 대신 여기서 노예가 되겠다’고 했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안에서 유다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바로 복음이 요셉의 마음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자기 자신을 팔기 위해 음모를 꾸몄던 유다가, 이제는 동생을 위해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는 말을 했을 요셉의 마음이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때 드디어 자기의 단단한 마음을 깨뜨리고 형제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때 요셉이 느낀 것은 회개하고 있는 유다와 형제들이 드디어 열매를 맺어 가는 것을 보았다는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회개, 용서, 그리고 화해의 원리

우리는 사건을 통해 원리를 절대화할 수는 없으나, 보통 회개와 용서가 일어나는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르는 것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회개를 통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통해 용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개 용서의 완성인 화해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와 함께 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매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비슷한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는 준엄한 명령

물론 원리를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있습니다. 용서해 주어야 사람이 땅에 없을 때처럼, 회개의 열매를 보기가 어려울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많은 회개의 열매를 보고 싶으셨겠지만, 예수님 한쪽에 있었던 강도는 마지막에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이외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원리가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주님의 명령이 매우 준엄하다는 사실 또한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자신을 내어주는 유다를 보면서 요셉도 자기의 아픈 상처를 말할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해 그가 ‘아, 내가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가’라는 것을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요셉이라”

 

그는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당신들이 요셉이라. 어떻게 보면 무척 뒤끝 있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기왕이면 “내가 바로 당신들의 동생 요셉이다. 너무 반갑다” 하고 안고 울면 좋으련만, 거기서 기억나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요셉이 바로 나다.

 

뒤끝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뒤의 말을 들어보면 있습니다.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위하여 나를 먼저 보내신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팔았다고 생각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이제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배후에 계셨으며,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고백하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다

이러한 일은 진정한 회개와 화해를 이끌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서도 분명히 발견됩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가신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이라고 불릴 ,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요셉의 말과 매우 비슷합니다. 요셉이 “당신들이 애굽에 팔아먹은 요셉이다”라고 했듯이,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실 , 바울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계시하셨던 것처럼 요셉도 지금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내가 지금 당신들 앞에 있으며, 이제 형들을 위하여—그들의 생명을 위하여—하나님의 손길이 여기까지 미쳤다. 이것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이제 형들은 이상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식탁의 손님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이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닌,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처음에 요셉은 자기만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만 감옥에서 건짐을 받고, 자기만 하나님의 은혜로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그는 깨닫습니다. “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의 나는, 나만의 구원을 위해 여기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메시지가 있었구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형들과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요셉을 사용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

여러분, 사실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매우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이러한 일을 통해 예수를 만나게 하셨다고 간증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래, 그때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때문에 내가 예수를 만났다”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가 끝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어떤 상황 속에서 은혜로 부르신 사건이 거기서 끝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닌, 모두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끝나지 않았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주위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주님을 처음 만날 수도 있었으며,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구원이 단지 자리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이루어지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이 처음에는 자기만 구원받는 알고 자신의 식탁에 있었으나, 결국 형제들까지도 자신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사실을 깨달으며 같은 식탁에 들어오게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과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지 “아, 나도 드디어 예수를 만났구나,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구나”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 세상이 복을 얻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선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땅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과 저는 그저 땅에서 괴롭고 힘들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 마지막에 천국 소망을 얻는 정도로만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와 함께 걸어가는 인생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부르심의 목적을 잊지 않으려면

하지만 우리는 부르심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일이 희미해졌습니다. 어떤 분은 먹고살기 바빠서, 어떤 분은 너무 많은 것이 편해져서, 어떤 분은 “내 인생 사는 동안 예수 믿은 잘했다”라고 만족하며 계시고, 어떤 분은 “드디어 인생 마지막까지 함께할 공동체와 교회를 만났구나” 기뻐하며 이제 여기에서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을 교회 공동체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편하게 예수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용서와 사랑을 배우라고 자리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에 함께 참여하라고 자리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는지 관심을 가지라고 자리에 있는 것이며,ㅠ그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것인지 생각하라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밖에 있든 안에 있든, 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선을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하며, 일을 위해 살라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손길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 있으며, 여러분이 게을러 우리 자신이—저까지 포함해서—그러한 일을 잊어버리고, 그저 하나 겨우 추스르며 때도 하나님의 손길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그토록 자기 때문에 속상해하고, 혼자 감옥 속에서 소리 지르며 “하나님, 어찌하여…” 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의 손길은 변하지 않고 그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놓치는 순간에도 일하시는 하나님

요셉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순간에 상상도 못할 일을 통해 일하셨던 것처럼, 우리 생각에는 맡은 관원이 올라가 금방 나올 같았으나 오히려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놀라운 순간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듯이, 저와 여러분도 많은 것을 놓칠 때가 있고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때에도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실을 잊지 않고 두려워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신다는 약속을 우리는 잊어버릴 있으며, 게을러질 있고, 연약해질 있으며, 어떤 때는 내가 그것을 하기 힘들어서 피하고 도망가고 싶어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길을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요셉의 과정, 요셉의 인생을 보면서, 단순히 “아, 요셉이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깨닫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순간마다, 절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다루셨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 가며, 그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여러분이 발견하고, 보고, 여러분 자신의 속에서 그것을 함께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셉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인생 속에서 바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았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이야기합니다(5). 8절은 놀랍습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내신 이는 당신들이 아니오, 하나님이십니다.

 

요셉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인생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감옥에서 어떻게 나왔습니까? 보디발의 집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공 너머의 진정한 목적

요셉의 고백 속에는 정말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단지 고통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성공했다고 느끼는 성공이 전부가 아니며,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고, 손길이 쉬지 않고 역사하여, 상상하지 못했던, 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하나님이 자신을 주셨다고 느낀 자리가 아니라, 모든 과정이 진정한 생명을 구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아마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가나안이건 다른 모든 과거를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림)라고 지은 것이죠. “나는 잊어버리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언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 길을 있으랴.

 

정말 하나님이 아십니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

저와 여러분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 심지어 여러분 생각에는 “내가 인생에 일이 뭐가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아니다, 너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다시금 여러분 모두에게 생각나게 하시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순간 알게 진실

요셉의 화해를 보십시오. 분명히 형제들의 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셉이 그들을 용서할 있었던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다스리고 계시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하나님이 이루고 계시다는 하나님에게 항복하는 순간에 그는 드디어 자기의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여기에 있는지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나를 여기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놀라운 선하신 뜻이 있었고, 하나님은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마지막 숨결까지 이어지는 사명

이것이 요셉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점점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모두가 알듯이 우리의 육신은 약해집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소위 말하는 꿈을 잃어버립니다. 이제 그저 마지막에 “이 남은 인생들을 그나마 실수 없이 살아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다시 한번 도전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주님을 다시 뵙는 바로 순간 전까지, 여러분의 사명은 절대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자리에 가기까지, 마지막 숨결까지, 내가 마지막 드리는 기도까지, 내가 마지막 하는 찬송까지, 주님은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이고,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복이요, 여러분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이상 의미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제 당신은 은퇴한 사람이다.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이제 시간밖에 남은 것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러분은 그저 먹고사는 일에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역사, 모든 것을 통해 이루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며,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시고, 나라를 위하여 나를 만들어 가시는 요셉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을 하나님이 쉬지 않고 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그만큼 하나님에게 너무나 가치 있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가장 놀라운 위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한다는 것은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 인생을 놓지 않으시며, 도저히 이해할 없는 일들 속에서도, 그리고 어떤 때는 내가 보기엔 너무나 아프고 힘든 순간조차도,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고 계시며, 하나님이 나를 놓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면, 정말 어떤 때는 “하나님, 다른 길은 없습니까?”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의 길을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며, 길을 같이 가고 계시다는 .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1 1 문항처럼, 그것보다 놀라운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 나의 모든 위로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손길을 베푸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룰 거라고 선지자들이 아주 담대하게 선포할 있었던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룰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일을 통해 압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간다는 ,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길을 가는 동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속에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그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 그분이 나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계시는가를 알아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가장 장성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절제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장 장성한 분량은 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와 친밀함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길을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아프면서 가고, 힘들면서 가긴 하지만 길을 갑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Fact) 진실(Truth) 차이

그러나 요셉은 단지 여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로 대담한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얘기합니까?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아, 요셉이 은혜를 받아서 이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구나”라고만 여길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사실(Fact)이라고 말할 있습니까? 형들이 요셉을 것이 사실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보낸 것이 사실입니까?

 

형들이 팔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형들의 행위가 사실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뒤에서 모든 일을 이렇게 하셨더라”라는 해석도 없습니다. 형들이 팔았고, 형들 때문에 팔려서 실제로 고생했습니다. 감옥에 가짜로 들어간 없고, 진짜로 들어가서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것을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아픕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니라고 여기고 “아니야,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아프지 않아, 괜찮아”라고 말한다 해도 사실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여러분과 제가 실패했다면, 실패는 아픕니다. 사실이니까요. 나의 자녀가 지금 굉장히 어려운 순간에 있다면, 자녀의 어려움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없죠? 사실이기에 아픕니다.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병이 들어 우리의 육신이 피곤하다면, 아픕니다. 힘듭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진실(Truth)일까요? 요셉이 팔려가는 순간에도, 우리는 흔히 “나중에 팔려갔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아우르셔서 좋게 만드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요셉이 팔려가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분명 역사하고 계셨고, 하나님이 일에 함께하셨으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일들 속에서도 함께 역사하신 것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중에 “그 모든 일이 좋은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 감옥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을 , 우리가 너무나 안타깝고 힘들어서 “형들이 나에게 이럴 있느냐?”라고 한탄하며 힘들어하고 있을 , 성경의 표현대로 그가 부르짖고 있을 , 그때도 하나님이 같이 하셨다는 것이 바로 요셉의 고백 아니겠습니까?

 

진실을 아는 기쁨

그래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믿을 있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것들을 우리는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진실일까요?

 

여러분, 재물이 없으면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진실일까요?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진실일까요? 요셉을 것은 형들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안에 역사하셔서 생명을 위하여 나를 보내신 것이 진실이었습니다.

 

일은 예수님에게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셨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아팠을까요? 아팠습니다. 피를 흘리셨나요? 흘리셨습니다. 가시관이 쓰였을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은 우리의 나음을 위함이요. 이것이 진실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조차도, 그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진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진실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었고, 우리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를 남기는 인생

여러분, 사실 세상은 우리에게 험난하다고 알려줍니다. 쉬운 세상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속고 속이며 여기까지 왔고, 상처 주고 상처 입으면서 여기까지 왔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민자들이 아닙니까? 이민자들은 여러모로 훨씬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결정을 해야 했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겠습니까? 사실입니다. 힘든 순간들이 없었겠습니까?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로 괴로워하신 적도 있고, 눈물과 한숨이 우리의 얼굴에 기쁨만큼이나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 성자의

그런데 여러분, 모든 사실이 정말 진실일까요?

 

진실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진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삼으셨으며, 그래서 여러분을 구원하는 일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금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갈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걷는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길을 성자(Saint) 길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성자란 여러분을 거룩한 사람,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사실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과거와 현재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함께 보시기에, 여러분을 영광에서 영광으로 인도하실 순간까지도 함께 알고 계십니다. 당연히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영광을 보고 계시죠. 그래서 여러분을 향하여 “나의 영광이 되어라. 너는 나의 영광의 찬송이다. 너는 나의 기쁨이다”라고 이야기하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성자', '세인트' 길이 단지 거룩한 사람의 길만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거룩한 아들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길을 걷기 때문에 길은 고난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영광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좁은 길이라고 말하지만 생명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남기는 것들

신자의 삶의 진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겪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 여러분의 인생 목적이 단지 “이 땅에서 네가 가진 달란트를 사용해 놀라운 일들을 이만큼 하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땅에서 하는 수많은 일들이 귀중한 이유는 모든 것을 통해 여러분이 예수의 길을 걷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가치 있는 이유는 여러분이 모든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갈 것들은 사실 여러분이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사실상 대부분 지나갈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남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많은 것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것을. 무엇을 남기고 있습니까? 예수를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걸어가는 속에 그리스도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간다고 믿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렸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남기게 됩니다. 여러분이 회개하며 “주님, 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꺾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여러분은 예수를 남깁니다. “주님, 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기뻐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 기쁨을 맞이할 나도 함께 즐거워하게 주옵소서. 그때 여러분은 예수를 남깁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하늘을 남깁니다. 영원한 것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요셉도 길을 걸었습니다. 요셉의 원래 계획은 달랐을 것입니다. 아마 나중에 5 정도 곡물이 필요할 때마다 보내 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를 밝히지는 않았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모든 것을 사실상 뒤집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실 요셉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자기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곡물까지 준다는 , 그게 쉬운 일입니까? “당신들이 이거 가져가서 먹고 사십시오.

 

나와 가깝게 하소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이루시기를 원하셨고, 그들은 이상 떨어져서 같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너와 함께 있을 사람들이며, 너의 중에 살이요 중에 뼈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그것이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나를 가깝게 하소서.

 

여러분,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얼마나 비슷한지 보십시오. “저들을 안에 있게 하여 주옵소서.

 

부족함을 채우시는 주님

그리고 하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바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위에 계시고 우리에게 “야, 열심히 해서 내가 있는 곳까지 사다리 타고 올라와라. 내가 그러면 너에게 복을 주겠다”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안에 거하라. 너희가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말씀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나와 가깝게 하소서. 내가 모든 부족함을 채우겠습니다.

 

저들의 모든 부족함, 율법에 넘어지는 부족함, 욕심에 넘어지는 부족함, 죄를 여전히 이기지 못하여 죄의 관성 때문에 쓰러지는 연약함, 모든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차리려고 하고 중심으로 가려고 하는 연약함, “아버지여, 내가 저들의 부족함을 채우겠나이다.

 

바로조차도 이야기하잖아요. “온 애굽 땅에 모든 좋은 것으로 너희에게 주겠다. 요셉을 높이신 이유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신 이유 역시 우리를 살려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장막이 되시고, 우리를 안에 품으셔서 해와 달이 상치 않게 하시고, 어떠한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지 않게 하시며,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역사의 끝에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대로 이미 요한계시록 22장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계시록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줄이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어떠한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7장입니다. 22장이 아닙니다.

 

" 아버지의 세계라" (This Is My Father's World)

우리가 가끔 부르는 찬송 ‘참 아름다워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소풍이나 야유회, 혹은 야외 예배 때마다 찬송을 빠지지 않고 불렀습니다. 하도 많이 불러서 그때 장수(구절)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소리 가운데 음성 들리니, 하나님의 뜻을 하도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찬송가의 3절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3절은 원래 원문의 2절에서 따와서 내용을 조금 늘린 것입니다. 사실은 진짜 3절이 있습니다. 저희가 찬양할 가끔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찬송의 원래 이름은 This Is My Fathers World’입니다.

 

“나의 아버지의 세계라, 폭풍 불어도 악이 거셀지라도, 다스리신다. 아버지의 세계라, 마음이 어찌 슬플 있으리오? 주님은 나의 왕이시니, 하늘이 소리치게 하소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천하여 기뻐하라.

 

사실 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부분이 있으니,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 아버지의 세계라, 홀로 광야를 걸을 때도, 불타는 나무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네. 아버지의 세계라, 나그네처럼 떠돌지라도, 내가 어떤 처지에 있을지라도 무엇이 부족하리오. 마음 지금 본향을 거닌다네, 마음은 지금 하늘에 있다네.

 

본향이라는 Home’이라고 원문에 적혀 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살과 뼈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겠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만족

모든 것이 너무 부족해서요. 좋은 것을 아무리 주어도 좋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조금만 앉아서 쉬게 주면 누워서도 없느냐고 묻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저도 미국에 처음 왔을 , 제가 일했던 곳에서 밤에 일을 했었습니다. 밤에 소원은 라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게에 Nissin 일본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먹었죠. 그런데 달쯤 먹으니 정말 지겨워서 보기도 싫어지더군요. 그때 같이 일하시는 분이 오시더니 “전도사님, 맨날 그것만 드시고 계세요?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아, 여기 있는 이거밖에 없는데요” 했더니, “전화하면 짬뽕 옵니다. 특히 짜장면을 먹었을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군대 짜장면보다 맛있었습니다. .

 

여러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우리는 만족을 하거든요. 짜장면을 먹고 제가 만족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다음에 고기 먹고 싶더라고요. 누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지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네가 원하는 것이 지금 당장 손에 쥐어져도, 너는 계속 목마를 것이고 배고플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의 떡이 되겠다. 내가 너의 물이 되리라. 다시는 배고프지 않으며,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다시는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주님의 목마르심으로 이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주님을 마실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곳에서, 주님이 가지고 있는, 주님의 손에 있는 어떤 것을 계속 구하십니까? “주님, 나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쥐어 주십시오. 주님, 나에게 물질이라는 것을 주어 주십시오. 주님, 나에게 시간이라는 쥐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손에 갖고 계신 건강이라는 손에 쥐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이 가지고 계신 많은 것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 중에 조금만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정말 쓰겠습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마시라. 나를 알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고 느끼며 경험하라. 그분이 누구이신지로 기뻐하라. 예수로부터 길어 마시라. 내가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주님, 주님이야말로 여러분이 만족할 있는 유일하신 분인데, 여러분은 만족할 없는 것을 주님께 계속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할 있습니다. 기도하셔야죠.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시는 주님까지 가지 못하고, 그저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여러분이 만족해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금덩어리를 옆에 놓고 흙덩어리에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이아몬드를 앞에 놓고, 그저 유리 조각을 만지면서 기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조금 알수록, “주님, 차라리 나에게 돈이 얼마인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너무나 확실하게 주님의 사랑을 알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이 배운 것이 바로 주님이었고, 여러분이 알아야 것이 바로 주님입니다. “내가 너의 만족이 되리라.

 

기도합시다.

여전히 주님을 마시는 , 주님을 먹는 것이 여전히 뜬구름과 같습니다. ‘주를 힘써 알라’는 말씀을 우리는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이 가진 무엇을 내가 가져야 하나? 주님이 갖고 계신 어떤 것을 마셔야 하나? 주님이 주실 어떤 것을 내가 누려야 하나?

 

주님, 주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을 저희가 진정 듣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주를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만족을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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