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4 30절로부터 45 5절까지 입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우리 아버지가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자라.

당신들이 나를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아멘.

 

용서가 시작되는 번째 눈물

요셉의 이야기에서 창세기 45장은 어쩌면 요셉이 가장 영웅적으로 부각되는 장일 것입니다. 팔려갔는데, 그것도 애굽까지. 그곳에서 죽을 뻔하고, 감옥에도 갇혔던 그가 이제 총리가 되어 자신을 찾아왔던 형들 앞에서, 우리 같으면 “어떻게 원한과 미움을 갚을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해 보일 상황에서, 너무나 멋있는 말을 합니다.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우리가 요셉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용서에 이르기까지 요셉의 눈물

그런데 요셉이 이러한 말을 하기까지, 우리가 계속 추적해 보았지만 처음부터 요셉의 마음이 형제들을 용서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서 눈물을 흘립니다.

 

번째 울었을 때가 바로 요셉이 형들을 시험했을 때였습니다. 형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고, 요셉이 형들에게 가서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무서운 말을 했죠. “이 중에 명만 있다. 그런데 사흘 후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명만 남고 너희들이 가서 너희 가족을 살려라. 말을 듣게 됩니다.

 

그때 형제들이 말을 듣고 서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처음에 “이것이 이렇게 풀릴까? 생각했던 말을 하죠.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지금 요셉을 앞에 두고 요셉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요셉은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소리에서 시작된 용서

그런데 말이 나왔는지를 우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명만 남게 되면 그중에 명만 남게 되는 겁니다. 그걸 생각하니까 지금 괴로워서 과거의 요셉을 기억하게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자기들이 팔았던 사람, 요셉. “그런데 우리도 지금 마지막으로 남아서 종이 되거나 감옥에서 죽을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을 , 이야기를 들었던 요셉이 웁니다.

 

울었는가.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서 기뻐서 울었다, 사랑스러워서 울었다고 얘기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을 범죄라고 이야기하는 형들의 회개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도 시작되었고, 용서도 시작되었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사람이 필요하구나라는 것도 드디어 조금씩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오늘 읽은 본문에 있는 것처럼 “아,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보내셔서 우리 모두를—당신들을—다 구원하게 하신다. 사람이 먼저 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그러한 신앙적인 정리,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는가’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정리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아, 사람이 필요한 것이구나.

 

그래서 저는 시간을 용서가 시작되는 눈물이라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좋은 눈물이기도 하지만 매우 슬픈 눈물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자기가 누군지를 끝까지 밝히지 않습니다. 화해하려고 하는 것하고는 다른 거죠.

 

속으로 “형들도 그때 일을 저렇게 범죄라고 생각하며 회개하는구나. 내가 용서를 시작해야지” 하며 오래 맺혔던 매듭이 조금 풀리는 같으나, 아직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도 않고 진정으로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동생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의심의 눈물

번째 눈물은 베냐민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돌아갔던 형들이 다시 돌아왔고, 약속대로 베냐민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요셉이 베냐민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을 금방 표시합니다. “하나님이 네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러한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인데, 이는 그가 베냐민에게 얼마나 특별하고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랑과 의심이 교차하는 시험

그리고 그는 사랑을 억제하지 못하여, 성경 표현 그대로 사랑을 억제하지 못하여 웁니다. 이것은 동생에 대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심의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형들을 초대하며 집에까지 데리고 왔어도 그들과 같이 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어떻게 하면 구할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랬을까요? 자기 경험이 있으니까. “나는 형들이 나에게 짓은 용서하겠다. 하지만 형들을 어떻게 믿을 있느냐. 동생한테는 어떻게 것인가. 혹시 동생도 팔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생각을 있는 마음을 그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는데, 시험의 목적이 베냐민에게 있었습니다. 베냐민을 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려고 그의 자루 속에 은잔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 은잔이 있는 자는 종이 되라” 이렇게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은잔 사건과 형들의 반응

그런 함정에 형제들이 제대로 걸려듭니다. 형제들이 이제 룰루랄라 하면서 가는 겁니다. “모든 일이 풀렸구나. 그리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요셉의 청지기가 쫓아오잖아요. “거기 서라! 그가 여기까지 왔습니까? 아니, 우리 주인이 그토록 아끼는 은잔이 사라졌다. 당신들이 혹시 가져간 것이 아니냐.

 

“아니, 무슨 말이냐? 우리가 그런 탐하겠느냐? 우리가 그걸 탐했으면 가나안에 가지고 갔던 돈을 도로 가지고 와서 줬겠냐. 우리 그런 탐내는 사람 아니다. 매우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요? “만약 은잔이 있는 사람이 발견되면 사람은 죽일 것이고, 우리 모두 종이 되겠다. 정도로 자신만만했었죠. 하지만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옵니다.

 

정직함을 주장했으나 드러난

여러분, 사람들이(형제들이) 은잔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아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셉이죠. 그리고 요셉의 청지기입니다. 자기가 직접 넣었으니 사람이 가장 압니다. , 그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누가 제일 압니까? 사람이 제일 압니다.

 

그런데 유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유다도, 그리고 형제들도 그것을 절대로 가져왔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당신에게 우리의 결백을 어떻게 보여줄 있을까. 그런데 그다음 말이 놀라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찾으셨으니. 이면에는 바로 그들이 지금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우리가 범죄했습니다. 요셉을 팔았던 것이 범죄였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마음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우리는 정직한 사람들이다. 당신의 것을 가져가느냐, 우리가 그런 죄를 짓겠느냐”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22 동안 거짓말하고 22 동안 죄를 숨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찾으셨으니 우리가 모두 종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 부분에 있어서 변명하기 어려운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겨 큰소리를 쳤는데,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외쳤는데, 사실은 자기들이 거짓된 자요 무정한 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고백하게 것입니다.

 

대개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일로 인해 많이 일어나는 일이 율법주의적인 경향입니다. “나는 법을 지키고 있고 누군가는 법을 지키지 않는구나. 그것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를 은혜와 사랑으로 격려하며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우리는 서로에게 가시처럼 아픔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바울은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 편지를 “너희가 이렇게 서로 정말 사랑해야 된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문제를 항상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가지게 , 많은 경우 우리가 가지는 경향 하나입니다. 바로 형제들이 보였던 경향입니다.

 

죄를 깨닫는 은혜

우리는 거짓을, 혹은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죄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을 그들은 놀라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은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지금 보이지 않는 자들인데 스스로 보인다고 얘기하니까 너희의 죄가 그대로 있고, 너희들이 만일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라면 죄가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를 만났을 테니까, 죄가 사라졌을 테고, 용서를 받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를 몰랐기 때문에, 나의 진정한 죄의 모습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너희의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복음 9)라고 말씀하십니다. 환자가 분명히 아픈데 자기 병이 없다고 부인하니까 의사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을 수가 없게 되는 거죠.

 

요셉의 용서와 유다의 희생적 변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오늘 유다의 경우를 보면 그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유다는 뭐라고 말을 하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찾으셨습니다. 우리는 따라서 노예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에는 이런 뜻이 들어 있는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실은 형제라고 불렀던 요셉을 노예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거짓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단호한 결정: 베냐민만 남겨라

여러분, 정도 얘기가 나오면 요셉이 무슨 말을 그들이 하고 있는지 제일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금 이렇게 함정을 것이잖아요. 저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오는 것이 요셉다운 걸까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요셉이라면 어떻게 나와야 합니까?

 

“아니다” 혹은 “이제야 아셨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고 형들에게 “정말 내가 그때 얼마나 마음 상했는지 아느냐. 하지만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오니 감사하다. 하나님이 죄를 찾아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게 주신 같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하든지, 아니면 같이 붙잡고 울든지, 이런 일이 생길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굉장히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베냐민만 노예로 남기시고, 당신들은 평안히 아버지께로 가십시오.

 

샬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셉의 마음속에 형제들을 용서한 것은 분명합니다. 형제들에게 죄를 물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이 일을 그는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용서의 진정한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이제 떠나라고 말하지만 대신 뭐라고 합니까? “베냐민만 남겨라.

 

사랑과 의심이 공존하는 태도

그리고 분명하게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일단 형들과 같이 밥을 먹는데도 따로 앉습니다. 한자리에 앉지 않죠. 자기를 밝히지 않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밥을 때도 자기 몫에서 덜어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나 주고 나머지 형들에게는 그냥 주었습니다.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그의 관심이 베냐민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도 꾸민 것이었습니다. 베냐민을 남게 하려고, 혹시 형들이 자신에게 했던 일을 베냐민에게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리고 베냐민을 너무 가까이 두고 싶어서였습니다. 결국 요셉이 형들에게 말의 핵심은 **“가라”** 말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이죠. 베냐민은 두고 가라.

 

유다의 감동적인 대신 속죄 연설

그때 유다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경, 특히 구약에 나오는 가장 길고, 사람들이 가장 놀랍게 여기는 수많은 연설 중에 가장 감동적인 연설이 드디어 유다의 입을 통해서 나옵니다. 여러분, 이토록 감동적인 연설이 유다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와, 유다가 드디어 등장했구나”라고 여겨서는 된다는 뜻입니다.

 

22 요셉을 팔았던 유다

누구도 아닌 유다는 여기서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요셉을 누가 팔았습니까? 기억이 나십니까? 요셉을 누가 팔았습니까? 형제들 가운데 유다가 팔았습니다. 유다가 선동했고, 유다가 유명한 연설을 겁니다. 그때도 유다가 요셉을 팔았는데, 지금 요셉이 앞에 있는데 유다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게다가 성경은 일부러 유다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요셉의 이야기 한가운데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가족을 떠나 어떻게 이방인에게로 가서 이방인과 결혼했고, 어떤 문제 속에서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보였는지를 일부러 보여줍니다. 가장 우리가 생각하기에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의 이야기를 유다를 통해 기록해 둡니다. 그리고 유다를 통해 하나님이 다윗을, 그리고 결국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놀라운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말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일어나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22 전에 요셉을 애굽에 팔았던 바로 사람입니다. 그때 유다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어떤 분들은 유다를 두둔하면서 “그래도 유다 덕분에 죽은 아니냐? 죽이려고 했는데 유다가 말리면서 팔자고 했던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했던 말을 한번 보세요. 유다가 자기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숨긴들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여러분, 말부터 보세요.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라는 것은 ‘죽여봤자 남는 뭐가 있냐’는 아닙니까?

 

“요셉 죽여봤자 돈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이런 뜻이에요.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오라, 우리가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정말 가슴을 찌릅니다.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살붙이니라.

 

아니, 이것을 붙였습니까? 지금 팔아넘기면서 “그는 동생이고 살붙이다”? 정말, 요즘 말로 하면 이게 사이코패스 아닙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면서 동생을 있습니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진짜 소름이 끼쳤던 것은 그다음 말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오냐면,

 

“그의 형제들이 만족해 하더라.

 

, 야곱의 아들들...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이 만족해 하더라. “그래, 우리 동생이요 살붙이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고 받고 팔자. 은이 어디냐? 지금 이런 말이죠.

 

베냐민을 위한 희생을 자처하다

바로 말을 했던 유다가, 22 후에 베냐민 앞에 있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들었단 말이에요. 모르는 아닙니다. 자신이 당한 일이니까요. 그러니 유다가 일어나서 말한다고 하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저 인간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 않겠습니까? 그때도 일어나 선동해서 자기를 팔아버렸던 유다가 지금 다시 일어나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상황이 어떻습니까? 베냐민만 노예로 주고 가면 그만입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고요. 그런데 상황에서, 베냐민만 넘기면 끝나는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을 팔아 넘겼던 바로 , 같은 사람이 오늘 베냐민을 위해 이야기합니다. 애굽의 제이인자에게, 요셉인지도 모른 , 그가 설명을 시작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가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나안에 가서 아버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있는지,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아버지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베냐민을 두고는 도저히 없다는 것을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여러분, 보통 이런 경우라면 마지막에 뭐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선처해 주십시오. 봐주십시오.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나를 베냐민 대신 이곳에 노예로 두고, 베냐민은 형제들과 함께 돌아가게 해달라.

 

그대로 읽어 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제 주의 (유다)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주의 노예가 되게 하시고,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보내 주소서.

 

요셉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었습니다. ‘내가 대신하여 노예가 되겠다. 베냐민을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 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였습니다.

 

십자가의 그림자, 번째 눈물

요셉의 번째 눈물,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마지막 눈물입니다. 앞으로도 많이 울지만, 요셉의 번째 눈물은 바로 여기서 터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개 짐작할 있습니다. “아, 유다가 그렇게 나오니까 드디어 요셉의 눈물이 터졌구나. 이야기의 흐름상 그러합니다. 유다가 막내를 여기다 놔두고 없으니 막내는 데리고 가고, “내가 여기서 노예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거기에 감동을 받아서 요셉이 울었을까요? 물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요셉의 마음을 움직인 '대신 속죄' 고백

그런데 요셉의 번째 눈물을 보면, 그가 전에 어떠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조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자기가 만들었던 계획(setup) 때문에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계획한 대로 사람들이 반응하여 형제들이 드디어 회개했구나, 그것 때문에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워낙 마음이 관대해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마음은 어떻게 굳어 있었죠? 형들은 보내고, 베냐민은 건지고, 그리고 이들과는 이제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마음이 훨씬 강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놀랐던 ,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과 의지였는데, 그건 바로 이거였습니다.

 

‘내가 그를 대신하여 노예가 되겠습니다.

 

말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사건에서 등장하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사실은 모든 성경을 관통하며 가장 깊이 있게 성경의 본질을 보여주는 내용 하나입니다.

 

‘내가 대신하여 노예가 되겠습니다.

 

대신 속죄의 원형, 모세의 기도

찾아볼 수는 없지만, 모세를 한번 볼까요?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을 , 밑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야기 아시죠? (모른다면 아는 척하셔야 돼요. 진도가 나가니까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낸 여호와라” 하면서 금송아지를 섬겼거든요.

 

내려와서 난리가 났죠.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많이 죽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쭈어 말하기를,

 

“슬프도소이다.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이름을 대신 지워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우리가 대개 알고 있는 책은 생명책 아니냐고 생각되는, 주님이 기록하고 계신 책에서 이름을 지워주옵소서.

 

여러분,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모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뿐인가요? 사실 일들은 유다의 일이나 모세의 일이나 그때가 아니라, 한참 후에 대부분의 일들이 앞에 있는 것이 원본이고, 그것을 복사본으로 나와서 유다의 이야기가 처음 나왔으니까 원본이고, 그다음에 모세가 흉내 내고, 그다음에 다윗이 흉내 내고, 선지자들이 흉내 내고 이렇게 가는 건데, 그리고 마지막에 흉내 내는 사람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대입니다.

 

이야기가 생긴 이유는 진짜 원본이 마지막 날에 나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참된 대속(代贖) 복음

왜냐고요. 위대하던 신앙인들, 유다, 요셉,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 다윗, 선지자들, 이사야, 예레미야 사람들도 분명 “나를 대신 노예로 삼아달라, 이름을 지워달라, 내가 죽음 속으로 들어가겠다”라고 이야기하지만요, 그중 아무도 실제로 그렇게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에 , 실제로 그들을 대신하여 종으로 오시고, 실제로 우리를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고,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저주를 받으신 분은, 진정 죽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참으로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형제로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죠.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나의 형제, 이들이 나의 혈육이니,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의 모든 , 나의 생명까지도 주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나를 버리시고 저들을 살리시옵소서.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를 버리시고 저들을 살리시옵소서. 원본의 그림자가 지금 요셉과 형들 사이에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가 사건

요셉과 형들 사이에 있는 이야기는 단순히 형제들 사이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이에 십자가가 사건이었기 때문에, 마치 요셉과 형들이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납득하거나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진정 화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일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형들이 회개하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가진 마음, 심지어 베냐민에게 갖고 있던 사랑의 마음, 요셉의 너그럽고 사랑스러운 마음만으로도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사실, 단순히 유다가 “나, 베냐민 대신 있겠다”라고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감추어졌던 진정한 생명이 나타나고, 안에 세워진 십자가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다시 울게 겁니다. 이해하고 납득해서 “이제 알겠다, 그렇구나, 당신들이 깨달았구나. 유다, 당신이 정말 변했구나”라고 해서 것이 아니라, 그는 크게 울었다고 말합니다. 마음을 억제할 없었습니다. 그는 모두에게 물러가라고 외친 , 소리로 울었습니다. 마음에 터져 나오는 감정이 있었던 것이죠.

 

그가 드디어 극적인 그들의 마음과, 그리고 그가 감당할 없었던 감정을 조용히, 그러나 폭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내가 요셉이다.

 

, 드라마틱합니다. “내가 요셉이다. 끝까지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없었는데도, 말을 하게 겁니다.

 

자기 상처, 자기 아픔 속에서 모든 것을 피하고, 안에 갇혀 있었던 요셉.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고, 말할 없었던 요셉. 그런데 요셉이, 유다를 통해 나타난 마음을 보고, 베냐민을 위해 대신하겠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역사를 보면서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왜냐고요? 유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드렸잖아요. 유다가 너무 유다답지 않다고 해서, 유다를 그렇게 변하게 하고, 일을 이끌게 것이 야곱이겠습니까? 유다가 변해서 요셉을 울도록 만든 말들이 정말 유다의 능력일까요?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안에서 보여지지 않았더라면, 어떤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화해를 이루게 있었겠습니까? “나를 버리시고 저를 살려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하셨고,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십자가가 섰던 것입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완성된 화해

그래서 저는 아마 요셉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고, 아마 많은 말들 중에 어쩌면 가장 달콤하고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놀라운 말을 요셉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가까이 오소서. 테이블에서 같이 밥을 먹는데도 따로 앉았던 형들을, 이름도 숨기고 멀리 당신들은 신하처럼 절하고 저쪽에 앉혀 놓고 자기는 이쪽에서 명령하고 말했던 요셉이 “가까이 오소서”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형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따로 앉혔던 형제들을 만납니다. 가나안으로 멀리 보내려고 했던 형제들에게 반대로 외치는 겁니다.

 

“가까이 오소서. 용서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화해가 완성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시고 먼저 다가오시다

여러분, 이야기를 보시면 누가 먼저 울었습니까? 요셉이 울었습니다. 누가 가까이 다가오라고 이야기합니까? 요셉이 이야기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울었습니까? 우리가 울었나요? 여러분, 여러분이 회개할 것이 여러분이 처음 우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보며 안타까워하시며 우셨고요. 우리 같은 죄인들이 자기의 들보도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서로 찌르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우셨고요. 그리고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들이 결국 있는 곳이 너무나 뻔한데, 그곳을 향해서 그냥 기관차처럼 전진하는 우리를 보면서 우셨습니다. 소설의 이름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을 제가 설교에서 이것을 줄은 몰랐겠지만)—그러나 전차를 타고 그냥 죽음 속으로 달려가는 우리를 보고 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요셉에게서 보는 그리스도의 모습

여러분, 요셉의 이야기 속에서도 누가 드러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놀랍게도 유다의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시듯이, 우리는 동시에 요셉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조차도 버림을 받습니다. 형제들은 그를 다시 만나고도 몰라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오셨는데도,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는데도, 그들은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처음부터 그들을 알아보았고, 주님은 그들을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괴로움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탄식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무서운 것은, 요셉은 그들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신가요? 예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비참해지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기쁨이 없는지, 행복이 없는지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죄를 깨닫도록 죄를 찾으셨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버렸지만,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때문에 가정이 완전히 비참하게 무너진 순간에 하나님의 구원을 시작하셨습니다. 요셉이 버려졌고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은 요셉을 살리셨습니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 돌이 되다

여러분, 요셉과 형제들은 도저히 가까이 없는 골짜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를 위해 애굽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들이 버렸던 돌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구원할 돌이 것입니다. 지금 요셉 없이는 그들은 먹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버렸던 돌이 모퉁이 돌이 것입니다.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기억하세요. 사도 베드로의 놀라운 말씀을,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라고요? 보배로운 산돌입니다. 그런데 어떤 보배로운 산돌입니까?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산돌입니다.

 

, 버림받으셨을까요? 그렇게 버림받고, 그렇게 애굽에 끌려가고, 그런 일들이 요셉에게 일어났습니까? 요셉이 스스로 말하잖아요.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이, 그가 일을 당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주님은 죄를 짊어지셨나요? 죄도 모르시는 분이 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죽으셨나요? 그가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당하셔야 했나요? 죽기까지 그의 삶과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야 했나요? , 어떻게 하려고요? 구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다고 말합니까?

 

제가 읽어드릴 테니까, 여러분의 마음 판에 다시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느냐? 내가 사람에게 버림받았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산돌이 되었느냐?

 

“너희도 산돌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

우리 모두가 살아있는 돌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돌이 누구예요? 예수님입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주님께서 누리시는 기쁨을 우리가 누리도록, 주님께서 누리신 자유를 우리가 누리도록, 주님께서 가지신 놀라운 영광을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도록, 그래서 주님이 사람들에게 버린 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우리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주님의 영광과 기쁨을 우리는 어디서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도대체 어떤 것인지 관심이 있으십니까? 주님이 가지고 계신 뜨거운 사랑,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저 “예수님은 훌륭하신 분으로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라고만 생각하고, “그분 좋으신 분이니까 우리도 그래도 예수님을 따라가야지”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영광을 나의 것으로, 사랑을 나의 것으로, 기쁨을 내가 누리도록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을 생각하시나요?

 

주님이 버려지신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유다를 통해 십자가를 보게 하신 주님은, 이번에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형제들로 신령한 집을 세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신령한 집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신령한 제사

여러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우리의 죽음을 대신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가 우리의 슬픔을 자신의 가슴에 담을 줄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 누구도 아이가 우리의 찢겨진 과거를 회복시킬 줄을, 인생 자체를 다시 새롭게 줄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죄인으로 만들어 죽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죄인으로 만들어 죽이고 있는 그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아니 나에게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나를 보내신 것이다. 이제 내게 가까이 나오라. 내가 너를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게 하리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리라. 너희가 버린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었노라.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게 하리라. 너희가 버린 내가 너희를 위한 속죄 제물이요 속죄양이 되었노라. 희생 제물이 되었노라. 내가 너희를 같은 신부로, 새하얀 신부로 하나님 앞에 세우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리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리는 예배

여러분, 신령한 제사—짐승을 잡아서 태우는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리는 제사,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제사—오늘 우리가 지금 함께 드리고 있는 바로 예배, 바로 오늘입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그날, 오늘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제사장으로 여기 앉아 있고, 신령한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 세워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돌로 여기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마와 여러분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걱정해야 하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실망해야 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힘을 잃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기쁘지 않을 있으며, 무엇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황홀하지 않을 있으며, 어떤 것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갈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오늘을 위해서 주님이 버림을 받으셨고, 당신의 오늘의 찬송을 위해서 주님이 자신의 모든 눈물을 흘리셨고요. 여러분이 오늘 같이 성경 구절을 함께 읽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 아무것도 아닌 일—그저 우리가 와서 예배하고, 성경책 읽고, 찬송 부르고, 시간이 돼서 설교 듣고 집에 돌아가는 일을 위해서—주님이 그런 일을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그은 한계를 깨뜨리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이 보잘것없다고 혹시 잊어버리는 일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위해서—여러분이 “주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라고 기도 번을 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아픔 속에서도 “나에게는 주님이 계시지”라는 고백을 번이라도 하게 하기 위해서—주님은 버림을 받으셨고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들이여, 이제 그렇게 앉아 계시지 마시고 여러분의 거룩한 ,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제 뿜어주십시오. 여러분의 한계를 깨뜨려 주십시오.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여러분의 한계를 이제는 깨쳐 주십시오. 내가 그어버린 “나는 누구다”라는 한계를 이제는 깨뜨려 주십시오.

 

“나는 이것밖에는 되는 사람”처럼 한계를 그어놓고, “나는 이것 이상은 없는 사람”처럼 한계를 그어놓고, “나는 그저 이것이 나의 모습인 것처럼”—어떤 사람은 “나는 실패자”라고 그어놓고, 어떤 사람은 “나는 성공자”라고 그어놓고, 어떤 사람은 “나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그어놓고, 어떤 사람은 “나는 그래도 성경을 많이 아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그어놓고, 어떤 사람은 “나는 기도를 이만큼 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그어놓고—여러분 스스로 그어놓은 한계를 제발 깨뜨려 주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한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여러분은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할 분들입니다. 어떤 것도—그 세상의 어떤 것도, 아니 세상에서 여러분이 적이 없는 어떤 것도—이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오늘 시간을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고 채찍질을 당하셨으며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버린 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오늘은 너무나 귀합니다.

 

주님, 이제 주님 앞에 나아가오니 저희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내가 성경책을 펴게 하시기 위하여, 내가 주님께 고통의 신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주여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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