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4 1절로부터 16절까지 입니다.

 

요셉이 그의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자루에 넣고 은잔을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양식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같은 사람이 점을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잔이 발견된 자가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아멘.

 

요셉의 계획: 형제들을 시험하다

44장의 내용은 요셉이 형제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43장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성경의 장과 구분은 중세 시대에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결정된 것입니다. , 처음부터 장과 절로 구분되어 기록된 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43장의 마지막 부분과 44장의 처음 부분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43장의 마지막에는 잔치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죠. 형제들은 처음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나라의 총리, 모든 일을 관장하는 사람이 “우리 집에 보라”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긴장되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들은 초대를 받아 갔고, 그곳에서 정말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형제들은 가는 길에 혹시 이전에 가지고 갔던 물건 때문에 불려가 감옥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 오해하며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가면서 여러 가지 변명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서 잔치가 열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베냐민을 향한 요셉의 각별한 마음

잔치를 벌이면서 요셉은 베냐민을 처음으로 만납니다. 어릴 이후로 오랜만에 재회한 것입니다. 청년이 베냐민을 보자마자 요셉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이는 형들에게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어투였습니다. 말의 어투는 사실 이미 등장한 적이 있는데, 바로 야곱이 아들들을 보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던 장면입니다. 요셉의 말은 그때 아버지 야곱의 말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사용된은혜’라는 단어입니다.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하밈(רַחֲמִים)인데, 창세기에서 번만 등장합니다. 번은 야곱이 말할 , 번은 요셉이 베냐민에게 말할 때입니다. 요셉이 의도적으로 단어를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단어의 어원이어머니의 (자궁)’ 뜻하는 단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은 흔히 'tender mercy', 아주 부드럽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점은, 요셉과 베냐민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말을 얼마나 애틋했겠습니까? 베냐민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가장 어리고 약한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과거에 당했던 일을 기억하며, 혹시 베냐민도 자신처럼 형들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베냐민을 향한 마음이 매우 각별했습니다. 잔치 자리에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에게 축복의 말을 , 요셉의 마음속에서 사랑과 그리움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긴 원수들이었던 형들을 만났을 때는 그런 감정이 없었지만, 베냐민을 보자 요셉은 참을 없는 감정에 휩싸여 울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 울었더라”고 기록합니다. 마치 오랜 세월 끝에 이산가족이 재회한 것처럼, 감격에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울음이 그친 , 요셉은 곧바로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냉정을 되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형제들을 시험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잔 사건과 요셉의 진짜 의도

요셉이 다시 한번 형들을 시험하는 계획을 살펴보면, 시험 자체는 여러모로 보아 형들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형들에게 책임을 다시 묻거나 곤경에 빠뜨려 고생시키려는 시험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시험의 내용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첫째는 잔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잔치 자체는 분위기가 좋았으나, 형제들은 앉을 모두 따로따로 앉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요셉이 형들이 아닌 베냐민에게 다섯 , 자기가 먹던 것의 다섯 분량의 음식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에게는 하나씩 주었다면 베냐민에게는 다섯 개를 셈입니다. 잔치를 통해 요셉이 베냐민을 몹시 아끼고 그에게 모든 관심이 있음을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요셉이 이번에 내는 시험의 제목과 내용은 ‘베냐민’입니다. 시험은 이렇습니다. 밤에 잔치가 끝나고 요셉이 자기 청지기를 불러 이렇게 지시합니다. “네가 지금 쓰던 은잔을 가져가서, 오늘 대로, 제일 어리고 막내인 아이의 자루 속에 넣어라. 그리고 곡식 값으로 받은 돈도 넣어라. 청지기는 지시를 그대로 수행합니다.

 

그다음 아침, 형제들은 기분 좋게 출발합니다. 아버지와의 약속도 지켰고, “우리는 훔쳐간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의 돈을 그대로 갖고 왔습니다”라며 자기 면목도 세웠습니다. 베냐민을 데려가 곡식을 사서 가져가는 모든 사명을 완수하고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친 듯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지 않아 뒤에서 요셉의 집에 있던 청지기가 달려옵니다.

 

청지기는 모두를 놀라게 하는 말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선을 악으로 갚을 있단 말입니까? 우리 주인이 쓰던 은잔—점 치는 쓰기도 하는—그 잔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집에 있던 사람은 오직 당신들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내가 달려온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악한 일을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은잔을 자루에 넣은 사람은 바로 청지기였습니다. 이것이 적반하장 아닙니까? 그러나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들어보십시오.

 

형제들은 말을 듣고 당연히 펄쩍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런 사람 없다. 생각해 보십시오. 실수로 넣었든 일부러 넣었든,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을 가나안까지 가져갔다가 다시 갖고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은잔 하나를 훔쳐간다는 말이 됩니까? 그다음 말에서 형제들은 자신감이 넘칩니다. “나오면 사람을 죽이라. 이는 야곱이 라헬(요셉의 어머니) 신상(드라빔) 몰래 가져간 문제로 라반과 다툴 “그게 있을 리가 없다. 있는 사람이 발각되면 사람을 죽이겠다”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약속입니다. 야곱 때도 사실 야곱이 몰랐고, 형제들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에 자신만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루를 열어보니 형들부터 차례로 확인합니다. 나오지 않자 “보라, 나올 리가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막내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형제들은 처음에 몰라서 자기 자루에 돈이 들어온 것을 가지고 갔고, 때문에 집에서 문제가 되었으며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뻔히 아는 막내, 베냐민이 그것을 가지고 리가 없습니다. 형들은 광경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옷을 찢고 짐을 다시 나귀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사건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가지입니다. 하나는 요셉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형제들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일을 꾸미는 것을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잔치에서도 그랬지만, 계획의 초점은 오직 베냐민에게 있습니다. 아까 형들이 “나오면 사람을 죽이고 우리 모두 종이 되겠다”는 말에 대해, 요셉은 “너희 말대로 하라.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를 종으로 삼겠다. 그러나 나머지는 죄가 없다. 너희 나머지에게는 건만 묻겠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청지기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요셉 앞에 섰을 때도 요셉은 같은 말을 합니다. 유다와 형제들이 모두 변명했을 요셉은 “내가 결코 그러지 않겠다. 너희 모두를 종으로 삼지 않겠다. 오직 잔이 손에서 발견된 자만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돌아가라”라고 합니다. , 형제들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을 의도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을 곤란하게 이유도, 그럴 의도도 없습니다. 사실 요셉의 의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베냐민을 붙잡아두려는 있습니다. 자루도 베냐민의 자루에 넣었고, ‘훔쳐간 사람’만 종으로 남으면 된다—즉 베냐민을 데려가고 싶어 것입니다.

 

요셉의 계획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여러분, 베냐민을 사랑하는 요셉의 마음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요셉은 베냐민이 형들에 의해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막내를 자신이 데리고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모든 일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분명 모든 것을 꾸민 것도 요셉이고, 시험의 초점도 베냐민이었는데,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베냐민에게 집중하여 그를 데려가려 하고 자기 집에 두려던 모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요셉의 계획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셨고, 정말 나중에 깜짝 놀랄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것 때문에 유다가 등장하고, 그것 때문에 요셉이 펑펑 울며, 그것 때문에 가족이 하나가 되는 일이 생깁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살리려고 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살리십니다. 요셉의 계획을 통해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방식을 우리가 가끔 놓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을 열심히 하고 그것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든 ‘이렇게 하면 잘될 것이다’ 하면서 바로 앞에 있는 일들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할까’ 하여 어떤 약이 제일 좋은가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가고, 어떤 때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버는가’ 하여 버는 방법에 관심이 가고, 어떤 때는 ‘우리가 어떻게 자녀를 키울 것인가’ 하여 자녀를 키우는 것에 모든 생각을 합니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신자에게는 우리가 계획하고 생각하며 걸어가는 길이—‘자녀를 키우기, 건강하기, 노후를 보내기, 재산을 모으기, 좋은 차를 사기, 때로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기’—이런 것들을 선한 의도에서건 혹은 약간의 욕심이 있었건, 그것들을 계산하고 계획하며 하나하나 이루어 간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삼으신 다음에는 모든 여러분의 계획조차도 어떤 안에 있게 됩니까?

 

하나님 안에 있게 되어서 일들조차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도구로 하나님이 사용하시더라는 뜻입니다. 나는 겨우 돈을 벌려고 애를 썼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키워 나가십니다. 나는 겨우 직장에서 일하다가 힘들어서 실패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위한 백성으로 이루어 가는 일을 성취하십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내가 살아가는 것은 그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했던 생각대로 계획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오늘 교회 예배 때문에 힘들고 피곤하지만 겨우겨우 와서 앉았는데 무슨 예배가 제대로 될까’ 걱정하시는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러한 일을 하면서 ‘그래도 어떻게든 와서 앉아는 있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신 분도 있고, 어떤 분은 그냥 뛰는 가슴을 이기지 못해서 ‘주님, 내가 오늘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합니다’라는 마음을 가지신 분도 계시겠죠. 사람마다 모두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은 끝이 너무나 분명하고 모두 같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 영생

우리는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오래오래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일이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일이며, 그분과 함께 영원한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람이 되도록, 일을 감당하도록, 그렇게 거룩하도록, 그렇게 의롭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신 사람을 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길을 끝까지 이루어 가신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여러분은 식사도 하시고, 일도 하시며, 나름대로의 계획들을 어느 정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떨 때는 어리석은 계획도 하고, 어떤 때는 욕심대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들조차도 하나님이 이루어 가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그래서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제일 먼저 했을까요? ‘야, 그럼 하나님, 내가 마음대로 저질러 놓으면 하나님이 처리해 주시는 겁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이 자기 동생 베냐민 하나 데리고 살고 싶어서 일을 꾸몄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니, “지금 제가 욕심을 부려서 이거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 이것도 하나님께서 하셔서 결국은 좋은 걸로 만드실 테니 제가 이번엔 욕심대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한번 해보시라고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 그것을 다시 깨고 부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잊지 않게 하시고 목적을 향해서 가도록 만드시며 일을 이루어 가실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징계와 사용하시는 방식

여러분, 옆으로 나간 아들이 말을 끝까지 들을 , 부모가 있는 가장 좋은 일이 무엇입니까? 야단치는 것입니다. 회초리를 드는 일이고, 그래서 여러분은 유명한 징계를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다. 징계가 없다면 아들이 아니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성실하게 결정한 것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실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놓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토록 놀랍다고 말씀드린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은 나의 실수와 나의 어리석음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나가는 사용하시는가? 정말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생애에서 일어난 일이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일은 오늘 설교를 듣고 “요셉에게는 그러한 일이 있었다. 나한테도 그런 인생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하시는지 몰라서”라고 여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요셉이 알았겠습니까? 요셉이 정말 일을 통해서 자기가 그렇게 펑펑 알았겠으며, 유다가 그렇게 나올 알았겠습니까? 아무것도 몰랐지만 하나님의 일이 기가 막히게 이루어진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도 있으며, 일어나고 있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괜찮은 인생입니까?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수하기 싫어합니다. 실패하기도 싫어합니다. 우리는 성공하고 싶고, 우리는 잘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남보다 뛰어나고 싶으며, 누구보다도 뒤에 처지기를 싫어합니다. 저도 그렇기에 이해합니다. 저도 누가 “설교 못하는 목사”라는 말을 하면 제가 기뻐하겠습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설교를 못하는 목사로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지는 않을 아닙니까? 누가 빈말이라도 “목사님 설교 좋았습니다” 그러면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는 다르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의 이런 실수, 우리의 이런 어리석음, 우리가 이렇게 우리 앞일도 모르는 것—그렇지 않습니까? 앞에 있는 , ‘난 조금만 건강해졌으면, 감기나 나았으면, 돈이 조금만 생겼으면…’ 이러한 어리석음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조차도 하나님이 그저 버리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것을 귀하게 여겨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루어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은 아실 아닙니까? 제가 옛날보다 조금 그럴듯해지지 않았습니까? 아니라고요? 저는 이기적인 면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람인 같고, 여러 가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너무 약한 사람 명입니다. 저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너무 늦게,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저 잘난 맛에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면서 살아서, 저희 어머님도 저한테 어릴 “너무 차갑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제가 저를 샘플로 내놓는 것인데, 하나님 괜찮지 않으십니까? , 여전히 아직 부족합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저는 자신에게는 만족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만드시는 저에게는 만족합니다. 저는 자신은 기쁘지 않지만,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저의 인생은 기뻐합니다. 저는 자신의 인생이 거칠더라도,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힘들더라도,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로 인생을 기쁘게 걸어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요셉에게도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난 일은 우리가 다음 주에 다룰 부분입니다.

 

형제들의 자기 의와 죄악의 깨달음

하지만 하나, 여러분이 생각해 주셔야 것은 바로 형들의 이야기인데, 형들의 이야기는 조금 어렵고 어둡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모든 이야기의 처음부터 중심 단어는 ‘정직하냐’, ‘당신은 진실하냐’의 문제였습니다. “너희들이 스파이인데 지금 와서 우리에게 이러고 있는 아니냐?, “너 정직한 사람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직하냐? 우리가 너희가 실수로 넣었던 돈까지도 갖고 가나안까지 갔다가 도로 갖고 사람들이다. 우리들인데 거기서 무슨 은잔 하나를 우리가 훔쳐간다는 말이 되냐? 이렇게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처음부터 계속 등장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들이 있습니다. 신호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은’이라는 단어입니다. 스무 개로 요셉을 샀는데, 여기에 다시 은잔이 등장합니다. 똑같이 중요한 단어는 ‘노예’입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았는데, 형들이 계속 하는 말은 “우리를 노예로 삼으십시오”입니다. 그들이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이 애굽이며, 그들이 요셉을 팔았던 곳도 애굽으로 가는 노예상인이었습니다.

 

여러분, 단어들이 없이 계속 등장합니다. 정말 몰라도 모를 수가 없는 단어들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이상한데, 처음부터 계속 나와서 그들 스스로도 알았습니다. “우리가 요셉한테 잘못했다. 그걸 우리가 똑같이 당하는구나. 벌써 그들에게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깨달음이 정점을 찍습니다. 뭐라고 찍는지 보십시오. 이야기에 가장 중요한 구절인 16절입니다. 함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16) 시작.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잔이 발견된 자가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여러분, 여기서 읽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처음은 이렇게 들립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무슨 설명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당신에게 보여줄 있겠습니까? 이것은 억울하다는 말입니다. “아니, 우리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면 거기서 계속 “증거를 대라. 우리가 그런 일이 있을 없다”라고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다음에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찾아내셨나이다.

 

이건 완전 반전입니다. 그냥 “당신이 이렇게 보니까 우리 집에서 은잔이 나왔네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하는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찾아내셨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금 형들은 자신만만하고 즐거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했고 자기들의 정직함을 드러냈기 때문에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났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오는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은잔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이제까지 얘기했던 정직함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너무 억울합니다. 자기들이 일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것입니다.

 

자기들이 아까 얘기했던 대로 “우리는 그런 일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나안에서 돈을 가져와 우리가 먹어버렸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마치 이야기하고 있는 뒤에 화면이 것입니다. 화면에 노예상인과 형제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얼마나 있습니까? “은 스무 정도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얘를 데리고 가십시오. 그리고 요셉이 등장합니다.

 

여러분, 은잔을 하나 훔쳤습니다. 은잔 훔친 때문에 그들이 말은 “이거 발견되면 우리 죽여라”였습니다. “그거 죽여라. 그런데 지금 이들이 과거에 일은 무엇입니까? 인생을 훔쳤습니다. 그의 20년을 훔쳤습니다. 그의 가장 꽃다운 시절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완전 파멸로 만들었고, 인생을 모두 훔쳤습니다. 일을 자기들이 했는데, 자기들이 정직하다고 얘기했고, 자기들이 신실하다고 얘기했으며, “나는 진실을 얘기할 뿐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진짜 진실이 나온 것입니다. 계속해서 신호(시그널) 왔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지금 유다가 하는 말은 이런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우리의 들보를 찾으셨나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정말 어떤 때는 징글징글할 정도로 아주 야박합니다. 다른 사람이 죄는 어쩌면 그렇게 보이는지, 사람이 말은 어쩌면 그렇게 귀에 와서 꽂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는 반대로 한없이, 정말 무한할 정도로 관대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관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실컷 할퀴어 놓고도 “아, 내가 그럴 의도는 없었어” 하고 자기를 금방 합리화시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결백을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가 유죄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일이 어떻게 보면 형제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결백한 자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불러도 것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훔친 알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니 돌려주었습니다. 약속도 지켰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정직한 자들이며 진실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나는 교회에서 모범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 기도하는 , 모든 것에 모범생인 것입니다.

 

여러분, F. B. 마이어 목사님이 들었던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복음 전도자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의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이야기하며 주님의 은혜를 전했습니다. 설교를 듣던, 오늘날 한국 교회의 권사님 분이 앞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제가 이제까지 주일날 번도 빠지지 않고 정말 설교 말씀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하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정기적으로 하며, 어려운 사람을 열심히 도와주어서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입니까?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설교자가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에게는 가지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일을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을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자기의 일을 의지한다면 하나님 앞에 자기가 일을 가지고 가시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의롭습니까? 공의로운 하나님 앞에 내가 일을 가지고 가면 됩니다.

 

하나, 그러나 일은 이제까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과연 그렇게 자기의 의를 가지고, 자기가 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길은 우리가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가지고 당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권사님이 말을 듣고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괴롭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그토록 노력했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선교 여행도 가고, 봉사도 하며, 교회 청소도 열심히 하고, 길도 닦는다고 하면 열심히 참여했던 모든 일들... 이런 것들이 아무런 점수 가산이 없다는 말입니까? 정말입니까? 얼마나 자기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같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런데 그녀가 울다가 일어나며 외칩니다. “그렇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나에게 예수를, 그리스도의 옷을 주십시오.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열심의 위험성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앞서 행했던 일들을 모두 버리는 일인가? 그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그리스도를 입는 순간에 모든 것들이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그것들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죠. 예수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행한 일이니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일은 남에게 보여줄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모든 것이 같은 자에게서 이러한 일이 나왔으니,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아낄 있으며, 같은 사람이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있단 말입니까? 나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관심을 가질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체가 복음이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진짜 들보를 만났는데, 대들보는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자기의 능력으로 서려고 했던 죄였습니다. 자신도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전혀 몰랐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자기의 힘이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열심만 있을 , 사실은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붙잡으면 되는데, 그리스도는 붙잡지 않고 '열심' 점점 붙잡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누가 옆에서 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을 점점 붙잡게 되면 예수님이 점점 필요 없어집니다. 봉사가 예수님을 대신할 것이고요,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 행위가 예수님을 대신하게 됩니다. 심지어 훌륭한 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이 성경을 너무나 열심히 읽어도 모든 것이 사실은 예수를 점점 밀어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읽었느냐가 중요해집니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를 시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혼자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다른 사람하고 비교를 하게 됩니다. “나는 얼마큼 기도했고, 나는 얼마나 성경을 읽었고, 나는 얼마나 봉사를 했으며, 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교회에서 하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목사다”가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장로다, 집사다”가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반대 현상도 일어나지만, 사실은 똑같은 일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가 진짜 어디에 있는지, 대들보, 들보를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문제들만 가지고 살다가 끝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오고 오는 것인데, 그것들이 마치 우리 인생 모두를 움직이고 흔드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말한 ‘정직’ 속에는 20년의 거짓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동생을 팔았던 일을 그들은 그저 밑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들보는 정말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과연 누가 진짜 상처를 받았으며, 누가 무시를 당했습니까? 누가 진짜 파멸을 가져왔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기고 덮는 일에 아주 익숙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우리 죄를 그렇게 쉽게 들추어내겠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악한 면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방어합니다. 어느 정도 방어하느냐고요? 예수님도 들어오게 방어합니다. 주님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혼자 안에서 인생을 덮고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일어난 일은 문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참된 안전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셨다는 것은 문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것입니다. 내가 매일 말하는, 겨우 “나는 병을 고치는 , 그래서 병이 낫는 , 하나님 나를 고쳐주십시오” 했던 일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되는 것이 좋은 알았고,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 매달려 해결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나의 간증거리였는데, 어느 부딪치게 것입니다.

 

“너의 영혼이 썩어 있다는 , 너의 진짜 욕심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무엇을 향해 갔던 사람인가를.

 

여러분, 현대가 얼마나 무서운 사회가 되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아플 병원에 가고 약을 쓰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감사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어떤 분들은, 그저 하나님에게 매달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모든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병과 의사, 병원과 약국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다 보니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고, 사람이 처방해준 약을 먹어서 낫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낫는 것입니까? 아예 둘이 같이 것이지요.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노후는 소셜 시큐리티가 책임질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아, 그러니까 소셜 시큐리티가 없어도 하나님만 붙잡으면 산다”라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여러분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을 지혜를 다해 사용하고, 심지어는 적금을 하고 노후를 준비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의지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이 인생을 끌고 가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먹여 살리고, 내가 버는 돈이 나를 부하게 하며, 내가 살아가는 그것이 힘으로 내가 지금 살고 있다고 여러분이 오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의 손길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탄이 얼마나 교묘합니까? 사탄은 여러분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좋게 주신 엄청난 복을 마음껏 쓰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것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복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 얼마나 당연합니까? 좋은 의사분을 세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좋은 약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있거나 좋은 방식이 있어서 우리의 노후를 준비하도록 하는 모든 것들,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의지해야 것은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입니다. 주님이 계실 우리는 “아, 나의 인생에 진정한 힘이 어디 있는가?”를 알게 되고, 흔들리지 않을 있습니다.

 

여러분, 미국을 많이 믿으시지만, 저도 미국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똑같은 미국인이지만, 미국이 영원하겠습니까? 미국은 기껏해야 아직 300년도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5 역사에도 일본한테 망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의 연수가 나라를 방어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그렇게 단단하다고 우리가 믿을 것이 아니라, 여러분, 시민권을 믿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때가 하나님의 은혜의 때라고 봅니다. 언제냐? 우리가 들보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아,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지, 내가 사실은 하나님, 예수님, 찬양하고 있지만, 진짜로 믿는 돈이었는지, 아니면 진짜로 믿는 의사였는지, 약이었는지, 아니면 인생과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정말 알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때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인생을 붙잡고 있는 분이 누군지, 인생이 안전한지를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는 깨지는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의지했던 것이 깨지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픈 순간을 주시고, 힘든 일들도 허락하실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깨져야 하냐고요? 바로 사람들처럼, 형제들처럼.

 

찰스 카슨이라는, 여러분도 아시는 분이 있습니다.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감옥에 갔다 왔던 분인데, 감옥에서 예수를 만나고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나와서, 유명한 제소자 선교를 시작했고, 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분입니다. 찰스 카슨은 정부 최고위직에 있던 분이 예수를 믿고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이슈가 되었는데, 이슈가 것은 그분이 신학적으로 아주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다져갔던 분이었던 것입니다.

 

들보의 발견과 참된 행복

그런데 이분이 어느 , 그분의 책에 나온 이야기지만, 이야기는 아마 여러분이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 책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발췌했기 때문에, 저는 책을 구입한 적이 없어서 찾기도 어려워요. 이제는 너무 옛날 책이라 제목은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책인데, 자서전 같은 책입니다. 책의 일부분입니다. 찰스 카슨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오늘 이제 제소자들을 위해서 간증을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간증을 하는 시간에 나가서 서면서, 자기 머릿속에는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이 준비하셨는가? 자기가 다녔던 아이비리그 학교에서 어떻게 논문을 썼는지, 논문이 어떻게 통과됐는지, 자기가 어떻게 고위직에 오르게 됐는지, 장학금을 받았던 ,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했던 , 닉슨이 도와달라고 했을 일을 결정해서 닉슨을 도왔던 , 그런 일들을 하나님이 하게 하셨기 때문에, 교도소에 들어오기도 쉬웠고 교도소에서 일도 있었다고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깜짝 놀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도소나 그와 비슷한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를 사용하신 것은 나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모든 업적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아니, 인생의 진정한 유산은 ‘전과자’라는 가장 실패였습니다. 감옥에 보내진 나의 가장 굴욕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가장 크게 사용하신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들보를 발견했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들보를 보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 목사님, 혹시 공격하는 아닙니까?”라고 생각하실 있습니다. , 맞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칼처럼 꽂혔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들보를 발견해서,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것 때문에 받게 되고 누리게 진짜 행복, 진정한 안전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세상 어떤 것도 흔들 없는, 나의 가장 밑바닥을 여러분이 알고, 밑바닥을 보았기 때문에 이상 잃을 것이 없고, 이상 가질 것도 없으며, 이상 안에 이것보다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없습니다. 바닥까지 갔는데, 나에게 어떤 바닥이 있으랴? 그곳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때문에, 바닥, 바닥의 바닥인 나를 거기서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가 무엇으로 불만족하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자비는 가끔 잔인합니다. 잔인한 자비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보는 일은 아픈 일이고,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나를 찌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내가 혼자 깨달을 때는 그래도 겸손하게 소리를 듣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나 다른 사람이 일을 지적하고 옆에서 그것을 찌를 때는 아프기만 , 자기의 상처만 돌아볼 , 나의 들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나의 바닥을 알게 하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깨닫게 하시며, 동시에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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