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3장 8절로부터 14절 까지 입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아멘.
요셉 이야기의 반전과 하나님의 시험
지난주에 저희가 함께 읽고 살펴보았던 말씀은 43장 15절 이하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42장을 설명하는 부분이었기에 저희가 먼저 읽었고, 오늘은 순서가 바뀐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도대체 어떻게 진행되어 결말을 향해 가는지를 보기 위해 43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인생도 참 고난이 많았고 반전이 많았듯이, 야곱 역시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은 반전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요셉의 인생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해피 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동안 잊고 있었고 또 잊고 싶었던 형제들이 나타납니다. 아, 이 형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요셉이 처음에 했던 생각이나 내린 명령을 보면, 그는 복수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보복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죽음의 시험을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들 다 여기 있고 한 명이 가서 막내를 데리고 와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형제들이 다 곡식을 가져가야 하는데 다 여기에 있게 되면 결국 그 식구들은 다 굶어 죽게 되는, 말 그대로 죽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마 3일 동안의 기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3일이 지난 후에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았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던 인생이었고, 그곳에서 그가 만났던 하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이며 자기를 살리셨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 맨 처음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 그는 이제 자기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새로운 명령을 내리는데, 이 명령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생명의 시험, 은혜의 시험이었습니다. 그 은혜의 시험은 그들 모두를 보내고 한 명만 여기 남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이 요셉 이야기의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섭리
제일 처음은 물론 요셉의 인생이었고, 그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형제들이 재회했을 때, 첫 번째 시험은 "이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죽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도 같은 은혜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세 번의 시험을 주는데,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두 번째 시험은 가나안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귀향하는 동안 곡식 자루에서 돈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운 시험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께서—구원받은 우리에게—"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내가 너를 보호하며, 내가 너희의 반석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석 위에 서라고 가르쳐주어도 굳이 진흙이나 늪 위에 서는 것을 고집하는 듯합니다. 결국 그곳에 서서 계속 하나님께 "아니, 반석이시라면서요?"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건대, 하나님이 분명 은혜로 그들을 시험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형제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야곱까지도 "이것으로 혹시 나중에 죄를 묻게 되어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것이 아닌가"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이 그 큰 은혜를 베풀었으나, 야곱과 형제들에게는 그 은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길에 허기지지 않도록 곡식까지 넣어주는 배려가 있었고, 온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열 명 중 아홉 명이 가서 자루에 곡식을 가득 싣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는 그러한 배려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까지 사랑하시고 얼마나 열심을 내고 계신지—그러한 것들은 보지 못합니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나는 왜 이렇게 행복하지 못한가, 나는 왜 이 세상에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가, 나는 왜 이 사람을 만났는가, 나는 왜 저 사람과 이러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가" 하는 불평입니다. 자식 문제부터 직장 문제까지, 우리는 불평을 만들어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생 속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형제들의 소망 vs 하나님의 목적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제들과 야곱의 집안의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 이야기도 끝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끝맺음을 향해 갈 때,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저는 이 정도 상황이 되었으면 이렇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드디어 아홉 명의 형제들이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아버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모두 자루에서 돈이 나온 것을 보고 놀랐지만, 다행히 곡식은 충분히 남아 있었습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르우벤은 심지어 자기 자식들을 걸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야곱이 "절대 안 된다"라고 말했으나, 하나님께서 그 야곱과 가족의 고생을 돌아보셨고, 야곱이 축복하고 기도했더니 그 자루에 있는 곡식이 열 배, 스무 배가 되어 아무리 먹어도 사라지지 않았더라. 그래서 그들은 먹을 걱정 없이 잘 살았더라—이런 결말은 어떻겠습니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무래도 남이 배부른 것은 달갑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야곱과 형제들의 진정한 바람은 여기에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고, 가나안에서 평안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텼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유다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벌써 거기 두 번 더 갔다 왔습니다." 두 번을 더 갔다 왔다는 말은 적어도 두세 달의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간 동안 가지고 있던 곡식만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기근 끝!" 하시며 그들이 안심하고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본문은 아주 엄중하게 시작합니다. 창세기 43장 1절은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로 시작합니다. 즉, 가나안 땅에 기근이 더 심하게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의 방식이란 참으로 이상하고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이 단순히 먹고 사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만약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시려 하셨다면, 기근을 끝내시든지, 아니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기도했더니 이 곡식이 불어나든지, 어떤 방법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 방법을 쓰시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한 기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 이야기, 이 모든 상황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까?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가족이 앞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이룰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어떻게 회복될 것이며,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다시 만나 화해하고 용서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그들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 천국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 우리가 제일 먼저 드는 생각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루시고자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것 때문에 굉장한 갈등과, 때로는 억울함과, 때로는 분노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왜, 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가" 하는 의문 때문인 것입니다.
유다의 등장과 메시아적 담보
이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애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랑하는 베냐민(벤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습니다. 반면, 애굽의 요셉은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요구했고, 이쪽에서는 가지 않으면 곡식이 떨어져 모두가 굶어 죽을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버티고 있던 상황에서 유다가 뜻밖에도 전면에 나섭니다. 오늘 저희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와 그들의 행적을 보고 있으며, 유다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더 깊이 다루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유다는 간략하게 아버지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지금 우리가 가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고 우리의 어린 자녀들까지도 다 죽습니다. 하지만 베냐민을 데리고 가면 우리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이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제가 저를 담보로 하여 가겠습니다."
이 '담보(擔保)'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상대방에게 담보를 맡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그 일에 걸겠다는 뜻입니다. 유다가 바로 자기 목숨을 건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과거 요셉을 팔자고 했던 사람,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자고 주장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유다였습니다. 결국 '판다'는 것은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죽이자"는 말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유다가 이제 일어나 "제가 이 베냐민을, 더 정확하게는 이 온 가족을 위해서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매우 메시아적인 언어입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말씀과 같습니다. 유다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이런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가는 이제 우리가 다음 주에 조금 더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야곱의 준비
여기에 대한 야곱의 반응을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곱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결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가 "이제 유다의 말을 들었으니 안심하고 보내야지"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그가 취한 행동은, 애굽으로 가져갈 예물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가나안에서만 나는 것들이 있지 않느냐. 이것을 가지고 가서 예물을 드려라"라고 지시합니다.
야곱이 가지고 가라고 한 예물의 목록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유향, 꿀, 향품, 몰약, 유향나무 열매, 잘 익은 복숭아를 가져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언급되는 유향, 향품, 몰약... 이 목록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지 않습니까? 아마 멀리 크리스마스 때 동방 박사들(비록 세 사람인지는 불확실하지만)이 가지고 왔던 것을 떠올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 가지 마시고, 다시 뒤로 한번 돌아가 보십시오. 이 목록은 매우 익숙합니다. 어디서 또 나왔을까요?
이것을 기억하신다면 성경을 참으로 꼼꼼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구원의 드라마'를 전개하시면서 미리 깔아 놓으신 복선과 같습니다. 드라마를 볼 때 "어, 저것은 왜 나오지?" 했다가 나중에 보면 그것이 핵심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언제 깔아 놓으셨을까요?—힌트! 요셉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힌트, 애굽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 번째 힌트,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창세기 37장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이들은 형제들입니다.) 눈을 들어 보니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지금 요셉은 구덩이에 넣어둔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낙타들이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여러분, 형제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전혀 모르는 일이지만, 야곱이 지금 그들에게 "너희 이 향품, 유향, 몰약을 가지고 애굽으로 내려가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에게 요셉을 팔았습니까? 향품, 몰약, 유향을 파는 그 상인들,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들이 그 물건을 가지고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내려가는 동안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시렸겠습니까? 그 예물을 볼 때마다 "우리가 누구를 팔았으며 지금 누구에게 가는 것인가"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인 줄 몰랐으니 망정이지, 알았더라면 감히 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뻔뻔스럽다 해도, 자기들이 팔았던 그 사건을 지금 자기들이 재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들이 그전에 회개했던 모습을 본다면, 저는 다시 돌아가는 그 길이 그들의 회개의 장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 우리가 요셉을 이렇게 팔았고, 요셉이 이 길을 갔구나. 우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건가. 그렇게 살려달라던 요셉을 우리가 어떻게 대했던고..." 그들은 바로 그 길을 다시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거절하고 아부하는 신앙
여러분, 이것을 우리의 상황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한쪽에서는 요셉이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쪽에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사람을 어떻게든 기분 좋게 만들려고 아첨하려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만난 이후로 계속 사랑을 요청하십니다. "나와 사랑 이야기를 하자. 내가 너와 함께하며 기뻐하고, 너의 모든 것 속에서 내가 만족하게 하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도 너의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사랑을 나누자고 하시는데, 여러분은 매번 만날 때마다 아첨만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부자라는데, 어떻게 하면 뭐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분 마음에 들어서 내 신분이 상승되거나 좀 더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말입니다. 아니라고 부인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배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마음속에도, 야곱이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한 생각이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정말 뵙고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와중에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왜, 우리는 억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때로는 제가 하나님께 해 드린 것이 얼만데, 제가 30년 동안 하나님께 쏟아부은 정성과 사랑을 생각하면... 아, 지금쯤 제가 아마 집 세 채는 더 샀을 겁니다. 아깝지 않습니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때, 여러분이 자신을 모두 드리는 마음으로 나오는 것은 분명히 훌륭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마음속에 "내가 하나님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나오고, 돈도 갑절로 가져가서 하나님을 좀 감동시켜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내가 저 사람만큼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더 드리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야. 저 사람은 뭘 잘했을까?" 간증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저렇게 복을 주셨나, 그것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나도 한 번 따라 해보고, 나도 그 복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방식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빈약한 신앙입니까? 제가 드라마를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꽤 옛날 일입니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이 대화하는데, 주인공이 "행복은 절대로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가 동의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은 돈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생각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정말 제가 스스로에게 무서웠던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대사를 들으면서, "그래, 그 말이 맞다" 하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생각하는 것이, "행복, 그래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지. 그런데 돈이 좀 부족한가 보지? 더 많으면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아주 많으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이 우리 신앙의 태도와 너무나 유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놀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더 정성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내가 조금 더 봉사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조금 더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조금 더 성경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받아 우리를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은 손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손해는 당연히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낭비되는 시간일 뿐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지 않고,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시간만큼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두 낭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간을 헛되이 버린 것입니다. 그 시간은 진짜 시간이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과 만났던 시간, 주님의 은혜를 기억했던 순간, 주님께 감사했던 그 시간은 남는 시간입니다. 진짜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가 악하니라"라고 하면서 시간을 아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낀다'는 말은 '구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고민하는 시간, 그 시간은 구원받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게으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자신에게 집착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안타깝지만 그 시간은 흘려보낸 시간이 되고, 살아있는 시간이 되지 못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은혜와 복을 더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받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받으려고 하고, 그 방법을 찾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가장 기본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주셨고,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누가 더 잘할까, 누가 더 순종할까, 누가 더 봉사할까?"만을 생각하며, 그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고 자기 자신을 소진하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찬송가에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면서도, 가사 속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형제들이 요셉 앞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요셉이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그 은혜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두려움이 빼앗아 간 영생의 가치
여러분,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그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내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내가 무가치한 자가 될까 하는 두려움, 인정받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내 인생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가진 것들이 점점 사라져 이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그 수많은 두려움들이 결국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게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목숨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세상이, 자기 행복이, 자기 명예가, 자기 자존심이 훨씬 더 중요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엇과 바뀌는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목숨이 중요해지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생명, 영생은 작아집니다. 내가 추구하는 나의 세상이 점점 더 중요한 자리로, 내 삶의 중심으로 다가올수록 하나님의 나라는 중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행복과 명예와 자존심이 커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안식이나 약속하신 승리,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우리가 누려야 할 그 기쁨과 안식, 평강은 내 중심에 머물지 못하고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은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내가 받고 누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찌 어느 누가 자신이 가진 이 짧고 얼마 되지 않는 인생과 영원한 생명을 바꾸려 하겠습니까?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입니까? 여러분에게 물어본다면 어느 누구도 이 대답에 잘못된 답을 내놓으실 분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짧은 이 인생, 백 년도 되지 않는 인생—아니, 죄송합니다. 백 년이 더 넘을 수도 있는 인생—요즘에 백 년이라는 시간이 별것 아니기에, 그 인생과 영원한 영생을 누가 바꾸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바꾸고 있습니다. 영생은 당장 안 받아도 좋으니, 오늘 내 입에, 내 손에, 내 마음에 좋은 것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읽을 때, '나중에 주면 좋은 것, 나중에 받으면 괜찮은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말하는 영생입니다. 영생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영생이란 여러분의 삶이 앞서 말씀드렸듯이, 단 한 순간도 낭비되는 일이 없는 선한 삶, 하나도 낭비됨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나의 시간이 하나도 낭비되지 않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에게 가득 차는, 아무것도 낭비되지 않는 진정한 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생을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영생이 무엇인지 묵상하십니까? 그저 "아, 뭐, 나 예수 믿었으니까 나도 영생을 얻어, 난 천국 간다" 이렇게만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정말 그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묵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정말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무엇이길래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고 오신 것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나의 노후를 해결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너희에게 영생을 얻게 하고, 그 영생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영생이 무엇인지 정말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거셨는지 묵상하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생의 가치를 모릅니다. 은혜의 가치를 너무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야곱의 기도
또 하나는, 당연히 그 영생을 주시는 분 역시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지하면서도, 집에서 기도할 때 자신만의 패턴이 있어 습관적으로 처음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공중 기도를 드릴 때 항상 일정한 패턴이 있어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전지하시고..."를 한참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줄 알았습니다. 야곱이 왜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사실상, 어쩌면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마치 다른 모든 형제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어쩌면 "하나님, 하나님" 하며 가장 하나님을 많이 부르는 곳에서 정작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 하나님을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신(神)이라는 존재, 즉 우리보다 초월하고 우리보다 힘이 있어서 우리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신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인데, 우상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오셨는지, 하나님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모른 채, 이 종교적인 신을 우리는 여전히 붙잡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는 마치 집에서 하는 대화와 똑같이 행동합니다. 아내가 불평을 쏟아내고,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또 여러 문제들이 있을 때, 한 남자가 아내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더 잘할게." 아내를 달래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하는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내가 더 잘할게"라는 말은 아내가 "뭘 잘할 건데?"라고 단 한마디만 물어보면 와르르 무너집니다. 대답을 못 하죠. 남자들은 그런 것을 질문하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만약 아내가 남편에게 "내가 앞으로 잘할게, 당신에게 더 잘해줄게"라고 하면, 남편들은 무조건 좋아하고 신이 납니다. 그 자리에서 "뭘 잘해줄 건데?"라고 묻는 남편은 정말 없습니다. 감히 아내가 한 번 물어보면, 남편은 할 말이 없어 무너집니다. 뭘 잘해줘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꼭 이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더 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더 열심히, 예배 한 번도 안 빠지고, 이제부터 열심히 뭔가 할게요"라는 형식적 태도에 머물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예배하러 오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이유, 왜 여러분에게 "예배하라,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여러분과 함께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여러분을 기뻐하기 위해서이며, 여러분이 하나님의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즐거워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형제들이 요셉을 대하는 태도와 똑같습니다. 그들은 예물을 바치고, 엎드리고,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정작 요셉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요셉을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몰라도 예배하는 것처럼 흉내 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엎드릴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매우 곤란하게 만드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보낸 그 모든 예물들, 처음에 보낸 것들을 요셉이 보았지만, 성경에는 나중에 "잘했다"거나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관심은 베냐민과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에서의 사건을 보았듯이, 이 사건에서도 야곱에게 항상 일어났던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 에서를 만나기 전 모든 것을 앞서 보낸 다음에, 야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홀로 뒤에 남아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홀로 남겨졌던 때를 재현합니다. 모든 것을 앞서 보내고 아들들까지 떠나보낸 뒤, 홀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작은 얍복강 스토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가 시작되는 첫 단어를 통해 그 유사성을 확인해 봅시다. 창세기 43장 14절의 딱 두 마디를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이 말이 왜 중요할까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부터 시작하면 계속 나옵니다. "엘 샤다이, 엘 샤다이..."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며, 얼마나 전능하신지 계속해서 나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는 몇 번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처음 나올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내가 거룩한 것처럼, 혹은 내가 완전하니 너도 완전하라"고 하실 때, 그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나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나올 때가 역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입니다.
여러분, 제가 읽어드릴 테니 누구한테 한 말인지 맞혀 보시기 바랍니다. 퀴즈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너의 허리에서 나오리라." 누구한테 하신 말씀일까요? 요셉은 아닙니다. 야곱입니다. 맞습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얍복강에서입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이 두 번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름을 야곱이 이제 처음으로 쓰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라는 말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라고 하시며 "너를 통하여 나의 백성들이, 너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지금 야곱의 기도 속에는 이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저는 지금 요셉도 잃었습니다. 베냐민까지도 잃어야 합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아들들과 베냐민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단순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얍복강의 기도를 다시 하나님 앞에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야곱이 깨달았던 것은 "나의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며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승리하게 하셨다"라는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대로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얍복강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얍복강에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혼자 남을 수밖에 없는 야곱, 이제 아들들은 다 떠났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드디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단어를 꺼냅니다. "은혜를 베푸소서." 그 말을 하기가 그토록 어려웠을까요?
은혜를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이 어렵습니다. "하나님, 정말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겠습니다." 이 고백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마치 모든 것을 의지할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누릴 것이며, 나는 어떻게 해야 인생 속에서 원하는 것들을 얻을 것인가에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여러분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며, 나의 하나님이 진실하시고, 그 하나님이 내가 의뢰할 유일한 분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기도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잘 아는 그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베냐민을 대신 담보로 하고 죽겠다고 하는 유다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내 인생도, 내 모든 것도 이제는 그 손에 맡기겠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베냐민이 아니라 사실은 유다를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겠다"라는 그 그림자인 유다를 향해 이번에는 야곱이 "그러므로 이제 너에게 맡기마. 네가 말한 대로, 네가 그곳에서 베냐민을 끝까지 지켜서 데리고 올 뿐만 아니라, 너의 모든 형제도 다 돌아오기를 바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야곱에게 요셉은 장자와 다름없었고, 형제들이 절하는 꿈을 꾸었기에 야곱은 요셉이 장자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잃자, 그 기대는 라헬의 둘째 아들인 베냐민에게로 옮겨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흥미롭지 않습니까? 베냐민에게는 대사가 없습니다. 베냐민이 몇 살쯤 되었을까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물세 살입니다. 요셉이 떠난 지가 22년이 넘었으므로 그전에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때 태어났어도 스물세 살입니다. 아마 그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집안일이 흘러가면 베냐민이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나서서 "아버지,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제가 가서 그 요셉을 만나고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다섯 살, 여섯 살이면 이해가 갑니다. 열 살이라도 이해가 됩니다. 열일곱 살이라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요셉 나이만큼만 되었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20대를 훌쩍 넘고 중반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 이야기를 합니까? 유다가 이야기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방식은 신비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믿음
그래서 야곱이 "그렇다면 하나님, 내 아들을 잃으려면 내가 잃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아들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 일 속에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야곱이나 요셉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무리 짧은 성경 구절이라도, 그것이 아무리 힘이 없어 보이는 구절이라도, 심지어 "날마다 기뻐하라" 혹은 "항상 기뻐하라"든지, 혹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든지, 아니면 모두가 알고 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하는 짧은 구절이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정당하다면, 그 말씀을 이루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그러면 내가 잃겠다"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유다의 손에, 하나님의 손에, 그리스도의 손에 모든 것을 넘기는 이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성찰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습니까? "하나님, 정말 이 방식을 모르겠습니다. 기근을 또 주시는 건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 정말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야 하는데..." 야곱으로서는 방법이 없는 외통수에 몰린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그에게 이런 일을 다시 한 번 얍복강과 같은 시험으로 세우십니까? 그래서 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이 야곱을 어떻게 훈련하고 계시며, 요셉을 어떻게 빚어가고 계시며, 이 형제들을 어떻게 다 변화시키고 계시며, 이 유다를 어떻게 이 구원의 스토리 안으로 끌어들이십니까?
이 하나님의 드라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던 방법으로 전개됩니다. 유다는 이 구원의 역사에 등장하기 가장 거리가 먼 인물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미리 유다 이야기를 깔아 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고 추해 보이는 스토리였습니다. 유다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 경건하지도 않았던 사람, 가장 연약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자처럼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저를 담보로 하여 가겠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약속
하나님의 방법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생명과 행복을 원합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아첨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기 위해서 아들을 주셨고,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복과, 우리가 누려야 하는 그 기쁨을 주기 위하여, 우리가 이 땅에서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도록, 이 땅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도록, 그리고 여러분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구나"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였습니다. 이 야곱의 기도가 결국 요셉과의 만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야곱의 축복이 요셉을 만나게 할 것이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시인이자 찬송가를 많이 작곡한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는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중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라는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이 찬송은 우리가 참 많이 부르는 곡입니다. 영미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하나인 워즈워스(Wordsworth) 역시 이분에게서 가장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뛰어난 신앙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이분의 시를 제가 읽어드리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시의 제목은 "하나님은 신비 속에서 일하십니다"입니다.
하나님은 신비 속에서 일하시네. 그는 기적을 행하시려고 굳이 바다 위에 발자국을 새기시고, 참 땅도 많은데 굳이 바다에 발자국을 새기시고, 폭풍 위에서 기어이 그 폭풍을 타고 달리시는 분입니다.
두려워하는 성도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그대가 두려워하는 먹구름은 사실 먹구름이 아니라, 자비로 가득 차 있으며, 이제 당신의 머리 위로 그 자비의 비, 그 축복의 비가 내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흔들리는 마음과 연약한 감각으로 주님을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를 믿으십시오.
험악해 보이는 이 섭리 속 그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미소 짓는 얼굴을 반드시 보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험악한 섭리 뒤에서 하나님은 미소 짓는 얼굴을 숨기고 계십니다. 오 주님,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먹구름이 아니라, 사실은 그 먹구름 속에 사랑과 자비를 가득 채워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 부으시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께서, 이 시간도 그리고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창세기-139-가까이 오소서 (0) | 2025.12.23 |
|---|---|
| 창세기-138-결백한 유죄 (0) | 2025.12.23 |
| 창세기-136-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0) | 2025.12.23 |
| 창세기-135-어찌하여 이런 일이 (0) | 2025.12.21 |
| 창세기-134-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0) | 2025.12.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