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3 15절로부터 24절까지 입니다.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청지기가 요셉의 명대로 하여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니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그들이 요셉의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아멘

 

요셉 이야기의 중요성: 인격적인 구원의 여정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는 만일 전체를 다루지 않고 요셉이 형들을 만나 자리에서 "형님들, 제가 먼저 와서 이처럼 좋은 자리를 만들었으니 이제 아버님과 모두 모시고 오십시오. 제가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멋있게 마무리되었다면, 창세기가 7 정도 빨리 끝나 저희의 강해도 신속히 마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야기를 여러 장에 걸쳐 일부러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유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기계적이거나 혹은 단순히 예수 믿고 곧바로 천국에 가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극히 인격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또한 기계적이지 않고 인격적으로 다루시기에, 시작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신비롭고 놀라운 구원의 역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또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요셉을 통해 앞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떠할지를 설명해 주시므로, 구절들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죽음과 생명의 시험: 사람의 핏값

요셉이 형들을 시험합니다. 번째 시험은 명만 가나안으로 돌아가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은 죽음의 시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가는 동안 한편으로는 감옥에 갇혔던 자들이 죽고, 다른 한편으로는 굶주림으로 모두 죽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한 가정이 아닙니다. 훗날 요셉이 직접 언급하듯, 죽음의 시험을 당했던 형제들이 3 동안 갇혀 있었을 , 요셉은 "바로의 살아있음으로 내가 맹세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3 , 요셉은 와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가 이제 너희에게 이야기하겠다"라고 하며, 이제 명만 이곳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가나안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합니다. 그들이 식량을 들고 가서 가나안에 있는 모든 가족을 살리게 합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생명의 시험이 것입니다.

 

가지 시험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하나는 죽음, 하나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이 대비를 이루듯 서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생명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사건 안에서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르우벤은 이를 "핏값"이라고 표현하며 "핏값을 우리가 지불해야 되겠구나"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거나 성경을 아는 이들은 이미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시게 것입니다. 핏값을 지불하고 우리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또한 사람이 죽음을 경험해야 이스라엘 가족을 살릴 있다는 진리를 과정을 통해 배우기 시작합니다. ', 사람이 이스라엘 가족을 살리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그들보다 먼저 와서 사람으로서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떠한 일을 위해 먼저 보내셨을까?' 깨달음은 훗날 창세기 47장에서 요셉이 "형님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배경이 됩니다. 고백은 거의 2 후의 이야기로, 요셉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며,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용서의 시작과 생명의

사람으로 시므온이 남겨지고, 나머지 형제들은 그를 두고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떠나기 , 요셉의 지시를 모두 듣고 나서 그들은 갑자기 요셉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람 요셉이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그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우리가 모른 척하지 않았느냐며 과거를 회상합니다. 사람을 남겨야 하는 상황이 되자, 비로소 ' 사람'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르우벤이 핏값을 언급한 것도 때문입니다. 이때 형들의 이야기를 듣고 요셉은 웁니다. 형제들은 회개를 시작한 것이고, 요셉은 용서를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곡식 자루마다 그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지불했던 돈을 다시 넣어줍니다. 또한 돌아가야 아홉 명이 길에서 여비와 양식이 필요했으므로 그것도 따로 챙겨 넣어줍니다. 요셉이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필요가 있었을까요? 요셉이 만일 자신의 감정대로 행했다면, 처음 시험 그대로 끝까지 밀어붙여 모든 것을 정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용서를 시작했으며, 호의를 베풀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좋은 마음으로 그들의 자루에 돈과 양식을 넣어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 사는 길을 걷게 됩니다. 형제들은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용서의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시험이 있겠지만, 그들이 걷는 길은 여전히 사는 길입니다.

 

생명의 길에서 죽음을 염려하는 이유

그들이 사는 길을 출발하여 얼마 가지 않아 여관에 도착했고,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곡식 자루를 열어보니 안에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횡재냐, 감사합니다"라고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형제들이 "혼이 나가고 떨었더라"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이 극도로 무서워한 것입니다.

 

그들이 떨었을까요? "이제 돈을 구실로 찾으러 와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고, 다시 우리를 붙잡아 노예로 만들려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그렇게 떨었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호의와 좋은 뜻으로 주었지만, 형제들은 그것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생명의 길을 걷고 있는데, 정작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없습니다.

 

우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항상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후로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옛날과 다르지 않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일까요? 조금 일이 잘되면 하나님 외에는 다른 분이 없는 것처럼 여기다가도, 조금만 어렵고 힘들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하고 찾는 것이 우리의 모습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가는 역시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어쩌면 형제들보다 심하게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문제만 닥치면 힘들어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망각하기 때문에

그럴까요? 번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형제들은 지금 자기들이 걷고 있는 길을 모르거나 혹은 망각했습니다. 요셉이 분명히 "너희의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너희가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을 믿지 못했거나 잊어버렸거나 참뜻을 몰랐습니다. 만일 형제들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면, 자루 속에 돈을 발견했을 "우리 여비에 보태 쓰라고 돈을 줬구나. 어쩌면 총리가 얼굴도 잘생겼는데 마음까지 이렇게 좋을 수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들에게 끔찍할 만큼의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 돈을 구실로 우리를 노예로 삼으면 어떡하느냐?" 그들은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염려와 걱정에 훨씬 많이 빠집니까? 여러분이 가고 있는 길을 우리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처음 걸어가는 길이었기에 모를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모를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압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후에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여러분은 너무나 압니다. 성경이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형제들이 어떻게 될지 아시지 않습니까? 창세기를 읽었기에 나중에 해피엔딩이 된다는 것을 모두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약속도 지키신 것처럼 약속을 지키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는데도, 여러분이 생명의 길을 가고 있으며 어떤 것들도 흔들 없는 길을 가고 있는데도, 여러분은 근심하고 염려합니까? 이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인생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향해 가고 있으며 승리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너무나 압니다. 생명의 길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죽음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의 자녀입니다. 길을 걷다가 넘어져 무릎이 조금 까졌다고 그것 때문에 죽을 것처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닐 없습니다.

 

제가 어릴 시골 친척 누님이 저희 집에 오셨는데, 어느 맹장염이 터져서 배를 붙잡고 죽겠다고 소리치며 구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두 놀라 어쩔 몰라 하다가 결국 이웃 아저씨의 도움으로 큰길까지 누님을 업고 나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되었고, 며칠 어머님과 저는 병문안을 갔습니다. 제가 황도를 들고 병실에 들어갔을 , 스무 남짓했던 누님은 이미 자리에 앉아 링거를 맞으며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 수술 됐구나. 살았어, 살았어. 정말 죽을 뻔했다" 하시자, 누님은 곧바로 "고모, 수영복 입을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죽다가 살았는데, 그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는데,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자 형제들은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생명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질문하는 것이 " 수영복 입을 있나요?"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근심하며, 무엇으로 염려하며, 그것 때문에 어떻게 절망할 있고, 어떻게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데, 지금 수영복이나 옷가지가 문제입니까? 지금 여러분은 죽었다가 사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어도, 죽음에서 구원받았다는 영생을 가진 자에게 그것이 여러분을 흔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쁨을 잃는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저에게 벌어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부른 것이며, 우리의 인생이 우리 손에만 있지 않고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인정한 엄청난 발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했지만, 자기 마음에 들면 하나님도 틀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염려하게 되고 기쁨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가장 좋은 길인 것을 아는데도, 참된 기쁨이 계속 사라집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이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3 23절에서 요셉의 청지기(이방인입니다) 말합니다.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청지기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거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있고,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슬픔일지라도, 아픔일지라도, 눈물일지라도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일은, 우리가 걱정하고 있을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아니 기도했다며? 하나님을 믿는다며? 걱정하냐"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느냐" 말에 우리가 대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음에 드니 하나님이 주셨어도 "이건 아니에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받고 싶은 일이 선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선하신 것입니다. 선하다는 기준은 우리의 양심도, 우리가 가진 어떤 기준도 아닙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게 순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하거나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가운데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모든 ,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조차도 사실은 선한 것이며 나의 최선을 위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진실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정말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기쁨이 사그라들고 우리의 기쁨이 멈춰야 하겠습니까? 나에게 가장 좋은 일이 생기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곡식 ' 매여 은혜를 놓치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번째 중요한 이유는 형제들이 어디에 시선과 마음을 집중하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가 , 우리가 , 우리가 지불한 곡식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지불했다" 것입니다. 돈을 값으로 치렀기에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정말 요셉에게 곡식 값을 지불하고 곡식을 먹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진짜는 요셉이 용서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없었으면 아무도 살지 못했습니다. 사건은 요셉의 은혜의 사건인 것입니다. 은혜가 없었다면 아무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끊임없이 곡식 값을 이야기하며, 이것 때문에 우리가 살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만일 ", 내가 하나님께 이만큼 곡식 값을 드렸기 때문에 나에게도 이러한 복이 왔거나, 내가 이만큼 살고 있거나, 내가 그래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생각되신다면 다시 깊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과 제가 살아 있으며 죽지 않은 것은 우리가 곡식 값이 아니지 않습니까? 순종도, 내가 뜨겁게 부르던 찬양도, 기도도, 성경 지식도, 봉사도, 희생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놓치면 신자는 정말 기쁨을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살아 있는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살아나려고 노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때도 내가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찬양을 해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선교하여, 내가 곡식 값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 자체가 엄청나게 피곤해집니다. 매일 그리고 매주마다 "나는 신앙생활은 무언가 잘못됐다, 신앙생활은 어디가 문제다"라는 것만 찾다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였는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살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순서가 정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봉사하고 선교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살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고, 살았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찬양이 나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살았기 때문에 기도하며, 살았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고, 힘을 내는 아닙니까?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있고, 웃을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족한 것을 힘으로 채우는 것처럼 자꾸 살아가려고만 하니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귀한 선물을 받고도, 하나님이 그들의 자루를 채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심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신 은혜조차도, 사랑조차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즐길 없고, 그것조차도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까? 무엇을 해야 되나?" 하며 내가 도저히 채울 없는 부족을 힘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신앙생활이며,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까? 형제들의 걱정이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듯, 형제들은 "저들이 우리를 끌고 가지고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 나귀를 뺏으려고 저렇게 하는 거다"라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뭐라고 말합니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아닙니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인생을 누가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아닙니까? 여기까지 여러분의 힘으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염려합니까? 근심이 어떻게 여러분을 누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생명을 주신 분께 주목하라

여러분은 생명의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주목해야 것은 여러분 손에 들어 있는 곡식 값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봉사하고 섬겨서 곡식 값으로 무언가를 사서 그것으로 살리라" 자세가 아닙니다. 더더구나 여러분의 문제나 상황도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생명의 길에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그분께 여러분이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구원을 빼앗을 없는 사탄은, 구원을 흔들 없는 세상은, 하나님이 그분의 손에 두신 하나님의 자녀를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사탄은 그때부터 방법을 바꿀 것입니다. 구원을 빼앗아가지 못하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구원의 열매, 사랑과 기쁨의 열매를 맛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열심히 믿고 봉사하며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지만, 기쁨은 맛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평생 번도 경험조차 없게 만듭니다.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을 그토록 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너무나 알기에, 내가 받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르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영생을 내가 갖고 있음에도 모르게 만듭니다. 영생을 갖고 있으면 삶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임을 매일 보고 들었음에도 모르게 합니다. 그러니 기쁨이 없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손에 들어 있는 곡식 값을 아주 크게 보이게 합니다. "이렇게 봉사하면 얼마나 큰일을 있을까? 이렇게 하면 얼마나 대단한 일을 있을까?"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의 유혹과 욕심이 있겠지만,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사 저는 조용기 목사님의 갑절의 영감을 갖고 백만 정도 되는 교회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손에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곡식 값으로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끝까지 붙잡으시는 열심, 우리를 위해 흘리시는 눈물, 그것을 보게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마치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네가 열심히 해야 사는 것처럼" 우리를 흔들어 댑니다. 나를 위해 지금도 탄식하며 우시는 성령님을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괴로운지를 보게 하고, 거기에 빠지게 만들며, 그것이 대단한 것처럼, 성령 하나님보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것처럼 속게 만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라, 여러분의 인생 속에 영생을,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도 끊을 없는 하나님의 열심을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라 감사하고 받으십시오. 기뻐하며 받으십시오. 내가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때문에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다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 생명을 주셨습니다. 눈물과 한숨도 여러분 때문에 흘렸습니다. 피와 물도 여러분 때문에 쏟으셨습니다. 주셨습니다. 그대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송명희 시인처럼, 우리는 고백합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 마음, 인간들을 위하여 아들을 제물로 삼으실 .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마음은 사람들 위하여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 가슴은 독생자 주셨건만 인간들 부족하다 원망할 .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심령은 자신을 주셨건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욕할 ."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셨고, 자신을 주셨고,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여러분이 그것을 부인하는 삶을 살고 있을 ,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을 , 하나님이 주신 우주의 사랑을 하나도 누리지 못할 얼마나 아프실까요?

 

그러나 시에 덧붙여 마치 댓글처럼 지어진 시도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실까 하나님 마음은 연약하고 상한 심령이 십자가를 붙들 . 얼마나 기쁘실까 하나님 마음은 피곤하고 지쳤다고 하나님 품을 찾으며 품에 안길 . 얼마나 벅차실까 하나님 가슴은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주님의 품에 내가 달려갈 . 얼마나 기쁘실까 하나님 마음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우리들과 소곤소곤 말할 . 얼마나 기쁘실까 하나님의 마음."

 

기도합시다.

 

얼마나 얼마나 기쁘실까, 주님의 마음은. 주님, 나는 아무 곡식 값이 없습니다. 주님께 가져갈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손 들고 왔사오니, 주님, 십자가를 붙들게 하여 주옵소서. 얼마나 기쁘실까,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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