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2장 24절로부터 28절 까지 입니다.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아멘.
하나님의 구원은 계속된다: 요셉의 깨달음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만나는 이 이야기는 성경의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며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형제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회개와 마음을 살폈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과거를 잊으려 했던 요셉
오늘은 요셉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요셉은 사실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지난 20년의 세월을 이제 하나님께서 잊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총리가 되었고,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가정을 이루고 자식까지 낳았기에,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으로 하여금 가나안과 그 모든 괴로운 기억을 잊게 하셨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여기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셨고, 이제는 스스로 살 만큼 되었다'고 생각하며, 자기 구원의 여정은 끝났다고 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음을 창세기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형제들과 요셉을 다시 만나게 하셨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보자마자 절을 하였고, 요셉은 그들을 곧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절하는 형제들을 보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바로 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땅히 "보라, 드디어 꿈이 이루어졌다! 내가 바로 요셉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지 않았느냐?"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했겠으며,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형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잊어버리고 싶었던 가나안과 그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만남이 던지는 숙제
이 만남은 앞으로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과 동시에, 요셉 자신에게도 '내가 왜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나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집에 찾아가지도 않았고, 사람을 보낸 적도 없었습니다. 총리가 된 후 7년 동안의 풍년 기간에도 단 한 번도 집에 소식을 전한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철저하게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지금 형제들을 만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2장 24절부터 28절 말씀을 보면, 형제들이 곡식 값을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자루 속에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혹시 자신들이 훔친 것으로 오해받을까 무서워서 서로 돌아보며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묻습니다.
사실 그 질문은 요셉이 먼저 했을 법한 질문과 같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하나님께서 다 잊게 해 주셨잖아요. 나 과거 다시 생각하기 싫습니다. 그때 나를 누가 좋아했습니까? 형제들은 나를 죽이려 했을 뿐 아니라 팔아넘겼습니다. 그 과거의 사람들을 내가 왜 다시 만나야 합니까?' 요셉은 이러한 생각과 동시에 깨닫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 내가 성공한 것이 내 인생과 내 구원의 끝은 아니구나. 아직 갈 길이 있구나.'
구원의 서막
굳이 복수를 하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 정도는 요셉이 충분히 배웠습니다. 곡식만 주어 보내서 가나안에서 잘 살도록 하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결론을 알기에 요셉이 왜 형들을 만났는지 압니다. 물론 요셉과 형들 간의 화해도 중요하지만, 더 멀리 본다면 그들이 애굽에 들어와서 400년을 지내게 되는 역사의 서막인 것입니다.
언제 그런 말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시고 약속하시기를, "너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 있다가 다시 가나안에 돌아오게 될 텐데, 그때에 비로소 가나안을 너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야곱이 가나안에 살고 있지만, 자기 땅이 아닙니다. 이 요셉의 이야기는 이제 400년 동안 이스라엘이 한 민족을 이루어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의 서막이요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이야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형들이 기근으로 돌아오고, 요셉이 그들에게 '너희는 정탐꾼이 아니냐'라고 말한 데서부터 이스라엘이 민족을 이루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계획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구원
우리도 구원에 있어서 가끔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구원을 약속해 주셨으니, 나는 결국 구원받을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인도를 받으며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면 된다'라고 간단하게 정리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구원은 완성형이 아닌 과정
애석하게도 여러분의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이와 관계없이, 이 땅에서 사는 하루하루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를 믿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이루십니다. 어떤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의 손으로 붙들어 주님의 자녀로 삼으신 그 목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요셉도 그러했고, 그의 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에게 이 모든 사실이 다 알려지지도, 다 깨닫지도 못했으며, 명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약 30세 정도였는데, 야곱은 70세가 되도록 소위 '철이 안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고생을 시키시는지,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철이 언제 들었을까요? 돌아가시기 직전에 애굽의 바로를 만나 그를 축복합니다. 축복한다는 뜻은 복을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곧, 바로보다 야곱이 더 위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때 "내 삶이 이 120년 동안 간단치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때 비로소 야곱의 인생 속에서(물론 그전에도 하나님께서 하나씩 돌보시고 그를 세워가시는 일이 있었지만) 비로소 '그럴듯한'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100세가 되어 아들을 낳을 때까지도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과연 우리가 얼마나 보았습니까? 얼마나 많이 흔들렸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내가 너와 만나서 지금 30년을 같이 걸었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이 보기에 '도대체 내가 30년 동안 교회 다니고 예수 믿었는데 뭘 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섭섭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땅에서 살며 허락하신 그 하루하루는, 여러분은 물론 요셉도, 형들도, 야곱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우리의 연약함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 중 단 한 명의 인생도 의미 없는 인생이 없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공허하거나 열매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정한 인생의 목적 때문에, '내가 이것을 이루었으면 괜찮은 인생이고, 내가 원하는 이런 사람 정도가 됐으면 괜찮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깊으신 지혜로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여러분 생각처럼 공장에서 벽돌을 찍어내듯이 '나는 예수 닮은 사람은 이 정도'라고 만들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아니, 도대체 언제 거기에 갈 거냐?' 싶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주님을 닮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과 우리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겸손해져야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 나는 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조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는 주님께 좀 더 가까이 간 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하는 분일수록 어떻게 고백하게 됩니까? "주님, 저는 죄인이며 주님의 은혜 없이는, 주님의 손길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본인은 철저하게 알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손을 단 한 순간도 놓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것을 우리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배워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사람이 얼마나 소위 '된 사람'이냐는 것은, 도덕적으로만 깨끗한 것, 혹은 세상에서 얼마나 능력이 있고 성공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과연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를 보내신 이유,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마지막에 이르도록 그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으며, 그래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를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가 되어가고 있는가에 달렸습니다.
연약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복
그래서 여러분 연세가 드실수록 몸에 힘도 빠지시는 것입니다. 몸에 힘이 있으면 힘이 있는 것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을 빼십시오.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무릎에 힘이 없다고 "요새는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요"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때 '아, 내 육신도 별거 아니구나. 주님을 의지해야지'라고 깨닫습니다. 어느 것이 행복하고 복된 인생입니까? '나는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아직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복된 인생입니까? 아니면 '그래, 내가 이렇게 건강도 주셨고 지혜도 주셨고 좋은 직장도 주셨지만, 하나님이 빠진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행복한 인생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인생 속에 여러분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는 '괜찮은 인간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되기 위해 애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 아래서 "주님, 나는 이 십자가 안에서만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알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을 깨달을 때, 여러분은 그것과 함께 따라오는 겸손의 열매, 오래 참는 열매, 사랑과 용서의 열매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같이 맺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여러분도 집에서 조그마한 나무나 열매를 맺는 과실수를 키우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과실수가 혼자 서서 매일 "오늘은 오른팔에 사과를 3분의 1 정도 맺혀야지"라고 생각하는 나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과 열매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과가 열매를 맺는 것은, 떨어져서 그것을 먹고 짐승이나 사람이 먹고 그 씨를 퍼뜨려주기를 원해서 열매를 맺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지가 혼자 맺은 것이 아니라, 이 나무와 뿌리로부터 양분을 받아서 맺습니다. 가지가 매일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운동하면서 "오늘은 열매를 맺어야지"라고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무에 붙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비유를 왜 자꾸 잊어버리십니까?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지,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붙어 있는지, 그리스도와 내가 어떠한 상황 속에 있는지, 내가 십자가에 어떻게 의지하고 있는가'에 더욱 있어야지,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될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나은 인간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괜찮은 사람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괜찮은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은 모두 자랑하는 자가 되고 교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맞은 사람이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겠습니까, 아니면 "역시 공부를 하면 점수가 잘 나와"라고 하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아, 내가 공부한 것에 따라서 내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있구나'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가 점수와 성적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겠습니까?
진정한 신자의 고백
제발 여러분의 신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디다가 이 돌을 쌓고 있는 것인지, 만약 여러분이 그 돌을 쌓아 여러분의 집을 만들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가르침과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매일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못하는가, 나는 정말 비참하구나, 나는 정말 죄인입니다"라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붙잡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나를 건지시고 살려주시고 붙들어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도 그런 사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을 누가 절망시킬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잘났다고 턱이 높고 눈이 위에 있으니 보기 싫은 것이지,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인격자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서부터 옵니까? 예수님을 알아야 옵니다. 내 위에 진정한 왕이 계시며, 그분이 나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고, 그분이 심지어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똑똑하시고, 또 얼마나 어려운 생활 속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누가 겸손해지겠습니까?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요셉의 시험과 하나님의 단련
우리는 이 요셉의 이야기가 그런 면에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만들어 가시는 이야기 속에 그 역시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고 말하자 요셉은 이 말을 꺼냅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원래 열두 형제였는데,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에 남아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없어졌습니다." 거기까지는 정직했습니다.
'시험'의 참된 의미
'나머지 한 명은 없어졌다.' 아마 요셉은 속으로 '형들이 팔았잖아' 이 이야기를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같이 말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이 정말 정직한지 시험해 보겠습니다." 이 시험이라는 단어가 창세기 42장의 가장 핵심 단어 중 하나입니다.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이 단어는 창세기 42장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이 '시험(試驗)'이라는 단어는 욥기에 등장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신 후에(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이 시험이라는 단어는 단련한다, 금을 재련한다는 말과 비슷한 단어입니다. 시편 11편에서 "여호와는 의인을 시험하시고"라고 할 때, 의인을 시험한다는 말은 그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단련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26편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옵소서." 이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하셨도다
그러니까 지금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다는 말은 형들을 멸망시키거나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갑자기 여기서 그런 시험이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여러분, 요셉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이제까지 20년 동안 어떤 인생이었습니까? 시편에서도 그것을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요셉의 이야기를 뭐라고 그럽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말씀을 통해 단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도 역시 형들에게 "내가 당신들을 시험하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이제껏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형들뿐 아니라 요셉도 이제 단련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 자손들을 다시 이끌어내셨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그럼 하나님, 이제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혹은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그것을 이 시험을 통해서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뀐 시험
첫 번째 시험은 '너희 말이 정말 정직하고 진실이라면, 너희는 모두 이곳에 머물고 한 명을 가나안에 보내 막내를 데려오게 하라. 그러면 너희 말이 옳다는 것을 내가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이라고 했고, 열두 형제밖에 없으며, 애굽을 정탐하러 올 이유가 없다고 얘기했으니 막내를 데려오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15절에서 선언합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두 가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는 막내아우를 꼭 데리고 오라는 것, 또 하나는 바로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요셉답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이 상당히 부정적인 이유는 그 결과를 여러분이 조금만 계산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와서 요셉을 만나는 데 최소 10일에서 15일이 걸립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가나안으로 돌아가 베냐민 막내를 데리고 오는 데 15일, 그리고 다시 증명하는 데까지 한 달이 지납니다. 그리고 다시 곡식을 가지고 가는 데 총 45일이 걸립니다. 45일이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가나안에 있던 야곱이 죽습니다. 거기 있는 가족이 다 죽는 것입니다.
요셉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일입니다. 요셉이 이것을 3일 후에 바꿉니다. 그전에는 이 시험이 어떻게 하든지 죽는 시험입니다. 이렇게 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입니다. 요셉은 지금 복수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제2인자입니다. 감옥에 가둬도 되고, 곡식을 들려 보내도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낸 시험은, 시험 문제를 그대로 풀다가는 다 죽습니다.
3일이 지나서 다른 문제를 가지고 시험을 합니다.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달라진 것을 보십시오. 18절인데,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다." 완전히 달라졌죠. 아까는 바로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한다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라고 말하며, 18절 마지막에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느냐? '너희 한 명만 여기에 남고, 나머지 형제들은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가족을 살려라.' 이제야 말이 됩니다. 아까는 진짜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살린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아까는 죽는다고 했고, 이번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무슨 시험이 된 것입니까? 생명의 시험이 된 것입니다. 앞에는 죽는 것이고, 뒤에는 사는 것입니다.
죽음 뒤에 오는 삶, 복음의 구조
여러분, 이 구조를 우리가 볼 때 어떤 구조입니까? 죽음 뒤에 삶이 오는 구조, 이것은 곧 복음의 구조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음에서 삶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언약을 갱신하는 이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분은 "왜 예배 시간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느냐, 왜 사죄의 확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이는 '내가 분명히 구원을 받았고 이미 죄의 사함을 받았는데 왜 예배 시간마다 사죄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배 순서에는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배는 사실 구약의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옛 제사와는 형식이나 모양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우리에게 주신 복이 이 예배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신 것, 우리에게 죄 사함을 허락하신 것,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것, 기도를 가르치신 것, 찬양을 가르치신 것, 또한 우리에게 복 주시고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말씀하신 것, 이것이 예배를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적으로 함께 모여 예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왜 반복합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어디서부터 구원을 얻었으며, 우리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시 갱신하는 것입니다(Renew).
"주님, 주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찬양합니다"라고 우리가 공적으로 예배합니다. 그래서 공적 예배에 이러한 요소들, 즉 성경이 명하는 찬양, 기도, 말씀이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 곧 예배의 삶
그런데 이 예배는 공적인 모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매일의 삶 속에서도 살아 숨 쉬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은 매일매일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여러분은 매일매일 주께서 주시는 사죄의 확신으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주님의 말씀 앞에 반드시 가까이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 없이 그 하루를 지낸다면, 그것은 우리의 예배의 삶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매일을 예배하는 것처럼 예배의 삶을 살겠다'고 한다면 바로 그 예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과의 기도를 절대 우리가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며, 그날 하루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나의 모든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너를 오늘도 지키리라." 이 복 속에서 우리가 그 하루를 또 사는 것입니다. 그 예배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매일매일이 곧 예배의 삶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요셉의 눈물과 형제들의 깨달음
예배를 통해 우리가 죄를 고백한 후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데, 이때 무엇이 필요했기에 그 구원의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시험을 통한 형제들의 회개
요셉이 생명의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형제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42장 20절 말씀처럼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에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요셉의 제안, 즉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가족을 살리되 한 명만 여기에 남아 있어라'는 것에 형제들이 그대로 따르기로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야기가 끝난 다음, 형제들은 갑자기 요셉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합니다. 왜 뜬금없이 요셉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우리는 단순히 '요셉에게 미안했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야기는 앞에 자기들이 "그대로 하니라"라고 동의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10명 중 한 명은 반드시 남아야 하며, 그 한 명은 아직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죽는 것과 같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큰 괴로움인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왕따시키고, 홀로 구덩이 속에서, 감옥 속에서, 결국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그때 살려달라고 얼마나 애원했는지를 말입니다. 자기들도 이곳에 남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아, 요셉의 괴로움을 이제 알겠다'라고 이야기하며 회개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루우벤의 다음 이야기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루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핏값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요셉을 죽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며, 핏값을 치른다는 말은 죽음에는 죽음, 피에는 피입니다. 루우벤은 여기 한 명이 남는다는 이야기가 한 명을 죽은 자로 여기는 뜻이며, 한 사람이 죽어야 이쪽이 사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핵심,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은 요셉이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먼저 보내사 여러분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라고 했던 그 이야기를 깨닫는 과정을 지금 보고 계신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제안했던 그 시험 문제를 통해서, 오히려 자기가 왜 이곳에 와 있으며, 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죽어야 그 모두가 산다는...
우리로 말하면, 죄 속에 있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사죄를 받습니까? 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예배도, 우리 삶도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이 형제들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요셉은 그 일을 진행하면서 자기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를 깨달아 알기 시작합니다.
용서로 이어진 요셉의 눈물
그래서 형제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했을 때 자기들이 운 것이 아니라 요셉이 울었습니다. 요셉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울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 일이 왜 일어나고 있으며, 왜 형제들이 드디어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하는지를, 그리고 자기가 왜 이제까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는지를 드디어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울게 된 것이죠. 자기를 위해서도 울고, 형제들을 위해서도 웁니다.
죽음의 문제를 냈던 그가 생명의 문제로 바뀐 후, 그 생명의 시험 이후에는 형제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기 시작합니다. 자루에 받았던 돈도 다시 넣고, 가는 동안에 필요한 양식까지 챙겨서 줍니다. 이것은 대단한 친절이며, 대단한 관용이고 긍휼, 곧 사랑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그가 왜 울었는지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드디어 형제를 용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요셉이 지금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의 인생도 바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속에 일어나게 하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라는 벽돌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긴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스바냐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받은 복을 누리지 못하는 아쉬움
여러분이 그 사실을 모르고 누리지 못하는 것만큼 손해입니다. 그만큼 여러분은 아프고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나를 알고, 주님 안에서 그 자유와 기쁨을 누리려 하며, 내가 용서받은 자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감사할 수 있는 인생일수록 복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누리지 못해 아까운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천국에 간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입니까? 여러분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복은 너무나 크고 아름다워서, 여러분이 평생을 쓰고, 주고, 베풀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호의를 두려워한 형제들
그런데 지금 요셉이 베푼 이 따뜻한 사랑과 호의를 형제들이 가다가 발견하고 어떻게 했을까요? 돈을 다 주고 사 왔는데, 가는 길에 열어보니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들은 '이게 웬 횡재인가'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 이러다가 우리 이것 때문에 잡아서 다시 붙잡아 갈 거 아닌가' 하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눈에도 요셉의 분명한 호의가 호의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길 가는 동안에 필요한 곡식까지 챙겨줬다는 것은 호의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들의 눈으로 자기의 인생을 보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바로 그 질문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을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셨습니까?"
요셉이 어찌해서 거기다가 돈을 넣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형제들을 용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을 형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의 눈에는 그것이 애물단지입니다. 속이 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좋은 것을 받고도 그렇습니다.
고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대답
남의 얘기 같죠?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조금만 풀리면 하나님께 모든 사랑을 다 바칩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만 꺾어지면 어때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느냐까지 물어봅니다. '정말 살아계신 거 맞는가?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 여기로 말하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계속 질문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그 똑같은 질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용서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너를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이 너의 인생에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심지어 여러분이 잘못하여 죄를 짓고, 그래서 그 죄 때문에 겪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 그러므로 거기 머물러 있지 말고 일어나서 회개하고 돌아오라. 내가 너를 기다린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인데, 여러분의 통장이 조금 비었다고,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아프다고, 원하는 대로 무언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이라고요?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도, 형제들도, 우리들도 아직은 모든 것을 다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배워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가 아니라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을 즐겁게 누릴 줄 아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주님, 지혜를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조차도 그 주님 안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그 자루에 담긴 돈을 보고도 속상해하며 떨며 두려워했던 자들이 아니라, 자루에 돈이 들어 있더라도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이렇게 두 다리를 건강하게 하시려고 돈을 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돈을 넣었는데도 "어찌하여 이런 일이" 하지 마시고, 그 주님께 여러분 잊지 않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곡물을 넣어주고, 그들의 돈을 자루에 다시 넣어주고, 길을 가는 동안 필요한 양식을 주었던 그 요셉의 손길처럼, 주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결국은 하나님 자신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도 부인하고, 결국은 그 사랑을 그토록 거부했습니다. 이제 주님, 저희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 자인지,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러한 인생을 허락하셨으며, 나는 평범한 인생이 아니라 정말 특별한 사람인 것을,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실 뿐 아니라 이 온 천지를 지으신 주님의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주님, 저희가 깨닫고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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