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2  1절로부터 8 까지 입니다.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이르되 내가 들은즉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아멘.

 

요셉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

요셉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그리고 읽을수록 기적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참으로 고난을 당했으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을 이루어 인물 명이었기에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즐겨 읽고 아낍니다.

 

만약 요셉의 이야기가 41장에서 끝났다면, 우리는 그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며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우리 자녀에게도 요셉과 같은 지혜를 주시고, 요셉처럼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큰일을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는 많은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며, 제가 그러한 기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를 41장에서 멈추지 않고 50장까지, 아홉 장이나 길게 이어갑니다. 이는 요셉의 이야기가 요셉 개인의 성공 스토리나 혹은 그의 회복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이끌어 가시며 그들을 당신의 자녀답게 빚어 가시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탐구해 가면서 결코 잊지 말아야 것은, 요셉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러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야곱과 그의 자손들 모두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 전체의 구원 역사입니다. 형제와 요셉, 그리고 요셉의 동생이었던 베냐민까지 포함하여 사실은 열두 모두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모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에는 누구도 포함되어 있다고요? 요셉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단지 형제들이 찾아와 요셉에게 잘못을 빌고, 요셉이 그들을 용서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셉 역시 안에서 구원을 어떻게 받아 가는가 하는 이야기이며,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것은, 여기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요셉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는 그러한 역사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함께 조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결말은 요셉이 끝까지 형제들과 어떻게 화해하고 지냈으며, 형제들이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스토리 자체가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의 심중과 구원을 향한 추적

이제 우리가 스토리를 하나씩 살펴볼 , 사실 목회자로서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저의 경우 창세기 41장부터 45장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는 설교하기에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마치 '네버 엔딩 스토리'처럼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는 요셉의 훌륭한 모습은 45장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요셉은 "형님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미리 보내셔서 형님들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보낸 것이 아닙니까?"라는 명연설을 합니다. "어떻게 자신을 팔아넘기고 죽이려 했던 형제들 앞에서 저렇게 말할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요셉을 처음부터 그저 '훌륭한 요셉'으로만 보고 이야기를 따라가기 시작하면, 요셉은 오히려 지극히 사소한 복수를 하는 쫀쫀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형제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스파이지?"라고 몰아세워 감옥에 가두었다가, 돌아갈 때에는 돈을 도로 자루에 넣어주고, 주는 보내지만, 막내를 데려오지 않으면 다음부터는 곡식을 주지 않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막내를 데려오려고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절대 된다" 고집합니다. 과정에서 여러분, 시간적 간격이 발생합니다. 번째 방문과 번째 방문 사이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을 따져봅시다. 요셉은 서른 살에 총리가 되었고, 7년의 풍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37 흉년이 시작된 것입니다. 흉년이 시작되자마자 형제들이 왔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2 후에 모든 가족을 다시 만나는 일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1 정도는 번째 방문과 번째 방문 사이에 흘렀던 것입니다. 기간 동안 여러분, 시므온이라는 그의 형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수가 아니면 무엇이 복수이겠습니까? 물론 그가 당한 고통에 비하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요셉의 마음이 "형님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할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은 분명합니다. 제가 요셉의 마음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라는 것이 '예수 믿고 천국 가면 '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를 믿게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도대체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씩 추적해 나가는 것입니다.

 

과거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우선 형제들부터 시작합시다. 42 1절을 보십시오.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여러분, 요셉과 형제들이 만날 일이 있었습니까? 7 풍년 동안 요셉은 형들에게, 가나안에 발을 디딘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성공했음에도 가나안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가나안을 잊어버린다"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모든 , 과거를 잊고 버리겠다"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그것을 추적하십니다. 과연 과거를 버릴 있는가? 신자가 흔히 가지는 오해 하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과거의 모든 것을 치워버리고 오늘부터 출발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강조했듯이, 구원이라는 것은 여러분의 현재나 미래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과거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자 중에는 아무도 '살다 보니 여기까지 사람'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내가 게을렀다', '신앙생활을 잘못했다'라고 생각할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를 깨닫는 순간, 여러분의 모든 인생 자체가 "그때는 내가 하나님 속을 썩였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참아주시고 인내하셨구나"라는 것으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그중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게 하나님의 손길 안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으며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겠다, 나는 이제 애굽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만나게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기근이었습니다. 요셉이 계획한 것도, 야곱이 계획한 것도, 형제들이 계획한 일도 아닙니다. 기근이 일어나 그들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기 직전까지도 서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결국 구원의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우리가 겪을 때는 알지 못하지만, 겪고 나서 우리를 돌아볼 때에야 비로소 ", 여기가 바로 하나님께서 짚으셨던 곳이구나. 여기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손잡으셨던 곳이구나. 여기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셨던 곳이구나" 하고 조금씩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셨는데, 아주 조용히 시작하신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통해서 둘이 만나게 것이 아니라, 그저 기근이 와서 곡식을 얻으러 갔다가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의 얼굴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조용한 것이 아니라 폭풍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말 폭풍처럼 그의 인생 속으로 밀려들어 왔으니까요.

 

자기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형들이 왔을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요셉에게 제일 처음 생각이 무엇이었을까요? 형들을 보는 순간 ", 만났다. 당해봐라" 하는 마음이 전혀 없지 않았음을 우리는 본문에서 있습니다. 그가 형제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감옥까지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전혀 없다고 없지만, 동시에 이제까지 배웠던 하나님의 섭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같습니다.

 

20년의 침묵, 어두운 가정의 그늘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 야곱과 형제들에게는 어떠했을까요? 그것이 아까 읽었던 본문의 시작입니다. 야곱의 말은 “너희들은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입니다. 이는 " 너희들은 서로 얼굴만 보고 있느냐" 뜻입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냐? 빨리 가서 곡식 가져와라" 단순한 의미를 넘어, 훨씬 다양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보고 절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꿈과 가나안을 기억했다는 , 그리고 "당신들 어디서 왔느냐?" 물었던 것은, 결국 그의 인생 속에 있던 상처와 과거가, "내가 잊어버리겠다" 스스로에게 아무리 다짐했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형제들은 어떠했을까요? 요셉이 떠난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야곱의 속에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4절을 봅시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그는 그냥 베냐민이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아우 베냐민이라고 칭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었습니까? 아니면 마음에 품고 계신 겁니까? 야곱의 마음속에 요셉이 깊이 남아 있습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감옥에 갇혀 막내를 데리고 오라는 요구를 받았을 , 그들이 제일 처음 했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요셉에게 잘못하여 일을 당하는구나” 였습니다. 20년이 지났음에도 형제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요셉이 있었습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이 감옥에 갇혀서 요셉이 막내를 데리고 오라고 하자, 제일 처음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요셉에게 잘못해 가지고 일을 당하는구나” 였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으세요? 20년이 지났어요. 그런데 형제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까? 요셉이 있습니다.

 

야곱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베냐민을 너희들과 같이 보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너희들과 같이 가다가는 재난을 당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요셉이 죽은 아는 아버지가 베냐민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은, 형들의 마음속에 다시 한번 못을 박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요셉의 아우, 너희들과 같이 가서 죽었지 않느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형들은 아마 지금 양심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아픔 속에 있을 것이고, 형들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양심의 찔림이라는 문제 속에 있었습니다. 가정 전체가 매우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가족을 이야기할 , "당신의 우리들의 열두 형제로서"라고 이야기합니다. 11명이 아닌 12명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탐꾼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우리는 가나안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하나는 없어졌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요셉이 죽지 않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했던 죄를 덮기 위해 "없어졌다" 말합니다.

 

더욱이 형제들은 요셉에게 “우리는 확실한 사람들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우 정직하다." 그래놓고 요셉 앞에서 요셉은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느냐?”는 야곱의 말은, 가정 안에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너희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고, 서로 협조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려고 하지 않느냐?" 야곱이 가정을 이끄는 아버지로서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지금 베냐민만 끼고 돌고 있고, 요셉을 잃은 다음에 나머지 아들들은 요셉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에게 이미 식어버린 사랑을 발견하고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의 모든 문제를 떠맡기려고 합니다. 형인 루우벤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하지 말랬지? 그런데 너희들이 가지고 이렇게 거야?”라고 말합니다. 루우벤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아마 전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썩어가고 있는 그들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은 문제들인 것입니다. 요셉도 과거 속에 있었고, 잊으려 했지만 과거 속에 있었습니다. 형제들도 과거 속에 있었습니다. 형들은 동생을 팔아넘긴 20 동안 어두운 그늘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전긍긍하며, 요셉이라는 인물 하나 때문에, 자기들이 했던 때문에, 그리고 죄를 인정할 수도 고백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 어둠 속에 살았습니다.

 

상처와 화해의 진정한 갈망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배우 김혜자 씨와 이병헌 씨가 모자(母子) 등장합니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쌓인 깊은 상처 때문에 서로를 원수처럼 미워하며 지냅니다. 말도 섞지 않고 원망과 미움 속에서 관계가 끊어진 살아가는 것이지요.

 

어머니 강옥동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됩니다. 보통 드라마라면 마지막에는 화해하고 아름답게 끝날 같지만, 드라마는 그렇게 단순하게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관계의 상처는 끝까지 쉽게 풀리지 않고, 이야기는 조금은 아프게 흘러갑니다.

 

죽음을 앞둔 강옥동에게 인물이 “저 세상은 어떤 곳일까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김혜자 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 세상은 분명히 좋은 곳인가 . 왜냐하면 거기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 얼마나 좋으면 아무도 오겠어? 장면은 목사로서 마음에 크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도 돌아올 필요가 없을 만큼 좋은 곳”이라는 메시지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들 역할의 이병헌 씨가 마지막에 나레이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 어머니 강옥동 씨는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그릇을 남겨놓고, 처음 오셨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안고 울며 그제서야 알았다. 나는 평생 어머니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화해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머니를 품에 안고 마음껏 울고 싶었던 것이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이 어머니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화해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끝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이별을 맞이합니다.

 

드라마의 제목이 ‘우리들의 블루스’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블루스(Blues) 단순히 음악 장르가 아니라, 우리의 슬픔과 상처, 미처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요셉도 자기의 상처를 끄집어내 보지 못합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이 자신의 아픔과 어려움을 끄집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형들도 자기의 아픔을 끄집어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받아주시고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과거까지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용서해 주시며, 하나님과의 화해 속에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이 무엇에 부딪히고 있으며,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화해를 원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조차 모르고, 그저 꿋꿋이 마음을 안에다 집어넣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부부가, 형제자매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썩어만 가는 모습들을 성경은 방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가 다루기를 원하실 아니라 친히 다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양심에 찔리지만 덮고 살았던 형들,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덮기로 작정했던 요셉, 둘이 만납니다. 요셉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물어봅니다. “당신들 어디서 왔느냐? 요셉을 알아봤다면 질문처럼 무서운 질문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가나안에서 왔다"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저는 요셉이었으면 자리에서 "거기서 당신들이 팔았잖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을 같습니다. 요셉은 참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정탐꾼이라고 몰아갑니다.

 

회개의 본질: 상대방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

그들이 감옥에 갇히고, 요셉은 그들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너희들 정탐꾼이라고" 번이나, "아니다" 번이나 얘기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는 요셉 앞에서,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불려 나와 이야기할 , 그들은 요셉이 히브리어를 모르는 알고(애굽 사람이니까) 자기들끼리 히브리어로 얘기를 합니다. 통역관이 앞에 있는데도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아니, 이게 웬일이냐?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그러지 않느냐. , 우리가 우리 아우를 팔아버린 때문에 아우 문제로 이렇게 문제를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데, 거기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이제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기 42 21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이어서 르우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서로 죄와 아픔을 덮고 있었는데, 성경 민수기에 모세가 " 죄가 너희를 찾아가리라" 말했듯이 정말 찾아왔습니다. 형제들에게 죄가 찾아온 것입니다. 자기들이 했던 일이 처음으로 형제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하였다. 지금 우리가 일을 겪고 있는 , 이제 범죄하였다고 시인하며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으로 나오냐면, “그가 우리에게 그토록 애걸하였는데 우리가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여서 이제는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는도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 회개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 그리고 회복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자백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진정한 회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의 시작은 내가 상대방에게 얼마큼 사과했느냐가 아니라, 상대방의 괴로움을 알고 있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잘못했다고 이야기할 우리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얘기하거나, 혹은 '내가 겨우 이것밖에 되나', '내가 잘못했지'라는 마음으로 사과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있죠. 그래서 내가 정말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는 언제 아느냐? 사과를 했는데 상대방이 사과를 듣고도 들은 하거나 계속 화를 내고 있으면, 여러분은 ', 당신이 화내는 당연하다' 아니라, "내가 사과했잖아! 사과했는데 이렇게 화를 내느냐?" 하고 반응합니다.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의 사과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도 비슷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나열합니다. "내가 이것도 잘못했습니다. 욕심이 많았습니다. 내가 교만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정말 말할 없는 죄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얼마큼 잘못했느냐가 중요한 아니라, 잘못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는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으며,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힘든 일이었는가를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던 이유,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들은 죄로 인한 것이었는데, 죄로 인한 고통이라는 말은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셨던 고통과 아픔들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 "주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지 모르지만, 여러분과 삶이 바뀌지 않는 이유, 그렇게 회개했는데도, 그렇게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얘기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없느냐?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셔서 나는 이제 자유롭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진정한 회개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너무나 어린아이 같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을 보면서 감옥에 집어넣었던 요셉이 언제 우는 아세요? 바로 이때 웁니다. "그가 얼마나 괴로웠을 것인가? 그런데 우리가 괴로움을 듣지 않았다." 그때 웁니다.

 

제가 바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잡고 얼마나 우셨을까요? 얼마나 괴로워했을까요? 얼마나 애걸했을까요? "죄를 짓지 마라. 길로 가지 마라.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가 죽는 길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잡고 얼마나 애걸했을까요? 제가 한국에서 전도사로 있을 중고등 학생들 때문에 경찰서를 여러 왕래했습니다. 사고를 놓고 부모님께 전화를 하니 저를 보호자라고 불러서, 전도사가 무슨 죄가 있다고 경찰서에 여러 갔습니다.

 

가벼운 경우는 제가 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돌아왔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부모님들이 결국 와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오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순경 아저씨—지금 생각하면 새파란 젊은 애들입니다—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불며 얘기해요. " 번만 봐달라고. 우리 애가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다. 우리 애가 실수한 거니까 번만 봐달라". 여러분, 부모 마음이잖아요.

 

하나님 마음이 사람 마음만 못할까요? 여러분이 속에 빠졌을 , 자기도 모르게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나라를 만들려고 그렇게 가고 있을 , 하나님이 여러분께 어떻게 하셨을까요? 여기 말대로라면 애걸하셨겠죠. "아니야. 길이 아니야"라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러분이 결국 저지르고 마는 죄를 지을 , 여러분의 그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상하셨을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말 그래서 회개하셨습니까? 아버지,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여러분, 제가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너무나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어머니나 아버지께, 특히 딸들이 많이 전화합니다. "엄마, 엄마, 어떻게 키웠어?" 키우는 너무 힘드니까요. 말을 들어먹기를 하나, 맨날 사고를 치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이를 하나 키운다는 일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전화하잖아요. 어떠세요? "아버지, 이렇게까지 오게 하느라고 마음이 어떠셨습니까?" 기도해 보신 있으십니까?

 

그저 "주님,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다음부턴 그럴게요." 여러분, 회개는 너무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공감한 적이 없어요. 진정성이 없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회개가, "주님께서는 죄로 얼마나 슬퍼하시며 아파하셨으며, 나의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인생을 사랑하셨기에 얼마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쏟고 계셨을까?"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회개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철이 때가 되지 않았나요?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아실 때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키우셨으며, 여기까지 인도하시는 동안 인내하셨던 마음이 어떤 상처였을지, 그렇게 참으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도 참을 만큼 참아봤고 상처 입을 만큼 입어봤는데 어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를 있겠어요? 아버지의 마음이 여러분을 부르셨고, 여러분을 여기까지 이끄셨고,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고, 그리고 여러분을 키우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에 감사하시겠습니까? 어디에 여러분의 기도가 있겠습니까?

 

회개의 완성: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요셉을 생각할 우리는 항상 위대한 고백을 생각하지만, 그도 역시 아무 준비 없이 형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이루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고백합니다. 말은 그의 회개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회개 중의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여러분, 회개는 단순히 ‘내가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 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번째는 잘못한 ,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사과를 하는데도 받아주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까? 진정성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내가 얼마나 속이 상했는데 너는 그렇게 한마디로 치고 마는 거냐?" 이런 생각이 들면 진정성이 없게 느껴지잖아요. 우리들의 회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정말 생각하십니까? 회개에는 시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계속해서 다루게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이 회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를 여기서 멈출 없고, 다음 주까지 이어가게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놀라는 것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셨고, 회복시키셨고, 우리 안에 선을 이루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속이 썩어가면서, 주님의 눈물로 우리를 매일 대하시면서, 그러므로 주님, 저희도 주님께 나아가며 이렇게 노래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님, 이제 기뻐해 주십시오. 나로 인해 기뻐해 주십시오. 내가 아버지 앞에 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걷겠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겠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주님, 저희를 어찌 참으셨습니까? 저희와 함께하시고 저희로부터 찬양을 받으시며, 저희의 마음이 바로 주님 때문에 활활 타오르게 주시고,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어디까지 있는가를 깨닫게 하셔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벅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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