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장 46절로부터 57절 까지 입니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아멘.
요셉 이야기의 진정한 클라이맥스
오늘 여러분이 본문을 읽으며 계속 들으신 것처럼, 칠 년 풍년 후에 칠 년 흉년이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성경은 전 세계에 기근이 아주 심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요셉이라는 인물 중심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창세기 마지막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사실상 여기서 끝나도 무방합니다.
요셉은 드디어 모든 고난을 통과하여 이제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오를 자리가 없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 바로 왕을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그 나라의 제이인자입니다. 죄수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 올랐으니, 그는 분명히 성공한 사람이며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은 것은 41장입니다. 앞으로 창세기는 자그마치 아홉 장이나 더 남아 있으며, 그 내용 전부가 요셉 이야기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성경을 읽거나 간증할 때, "이렇게 어려웠으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본다면, 여러분의 간증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며, 전부를 말한 것도 아닙니다. 요셉 이야기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지금 이 시점이 아니라 오히려 뒤에 나옵니다.
요셉의 고백: 하나님이 주어가 된 인생
여러분, 요셉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오늘 나옵니다. 하나는 므낫세, 다른 하나는 에브라임입니다. '므낫세'는 "잊다" 혹은 "버리다"에서 유래하여 이름으로는 "잊어버리게 했다"는 뜻이 됩니다. 즉, 요셉 자신이 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으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주어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열매를 맺었다"는 뜻이며, 이것 역시 하나님이 나에게 열매를 맺게 해 주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 요셉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분명하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온 요셉은 처음에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철이 없는 나이였고, 실제로도 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난을 통과한 후, 지금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 드디어 총리가 되었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셨고 나와 함께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멘 아닙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볼 때, "참 우여곡절이 많았고, 이국땅에서 고생했지만, 그런데 지금 보니 다 하나님의 은혜구나"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과 요셉은 큰 차이가 없는데, 왜 요셉의 이러한 고백이 여전히 부족한 것이며, 왜 이것이 클라이맥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읽으면서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 오히려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열쇠(key)를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가 바로 그러합니다.
과거를 덮는 방식: 성공과 밑거름 화법
지금 요셉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싶고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나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잊게 하셨다. 어떻게? 내가 드디어 소위 말하는 총리가 되고 성공을 한 거예요." 저는 이것을 성공으로 과거를 덮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잘되었으니 과거의 모든 일들을 이 성공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이런 일들은 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하려고 이렇게 해 주신 것이지." 그래서 저는 이것을 성공으로 과거를 덮는 방법, 혹은 밑거름 화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나의 과거는 오늘의 내가 있게 해 준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많은 고생과 어려움도 주셨지만, 결국은 내가 오늘 잘 나가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을 약간 비트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참 복되게 하셨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잘 나가게 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은 벌써 "아, 목사님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구만" 하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진정으로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칠 년 동안 풍년이 들었을 때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요셉이고 한 집안의 열한 번째 아들인데, 어찌하다 보니 팔려왔습니다. 십사 년 동안 집에 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그리고 집에 가려는 꿈을 품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가 되었거나 너무 힘들었을 때, 드디어 그는 총리가 되고 성공을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사자성어로 금의환향이라고 합니다. 성공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칠 년 동안 그가 애굽 온 땅을 돌아다녔지만, 자기 집까지는 고작 열흘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출애굽기 때 같이 보았듯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이 사실은 열흘 정도밖에 안 되지만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은 열흘만 가면 자기 집인데,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안 갔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지금 요셉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아, 고생 끝, 행복 시작! 이제 과거는 잊고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식으로 간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과거를 버리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과거를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애굽에서는 어디서나 인정을 받았습니다. 보디발도, 간수도, 왕도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완전히 다르죠. 그곳에서는 꿈을 꾸고 욕만 먹었지만, 애굽에 왔더니 꿈을 해석해 주고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칭송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열거하지 않더라도, 요셉은 그곳에서 미움을 받았고, 형제들로부터 왕따를 당했으며, 죽음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그의 생각에 과거의 인생은 전혀 돌아가고 싶은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과거는 정말로 잊어버리고 싶은, 너무나 추하고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과거였습니다. 그저 한번 지나온 과거여서 "이제 다 해결되었으니 총리까지 됐으니까 아버지한테 가서 인사해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엄청난 실패 속에 있었다고 생각했고, 지금 성공했으며, 이제 이 땅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 이름('에브라임')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서 내가 고난을 받은 힘들었던 이 땅에서 나를 번성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나로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이 아닌 것입니다.
이 애굽에서 그는 가나안으로 돌아갈 마음이 일도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었던 부모님이 있지만, 어릴 때 헤어졌던 아끼는 베냐민이 있지만, 그는 그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시간을 지우고 싶었다는 것이고, 지금 현재에 완전히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그런 모습들이 주로 있습니다. 과거를 그냥 덮어버리고 현재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래도 그 일들을 통과하게 하셔서 지금 이렇게 복을 주시니 이것으로 만족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느 정도 만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한 사람에 대한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과 역사에는 그런 만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요셉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문제를 내듯이 사건이 생기거든요.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요셉은 과거를 마주할 마음이 없습니다.
과거를 마주할 용기: 이루어진 꿈과 현실
그는 과거를 말은 하지만 다시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마주할 용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험이 없으십니까? 이 미국이라는 곳에 와서 가지고 있던 꿈을 잘 펼치고 계십니까? 원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갔습니까?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계획했던 인생이 마음대로 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라고 합리화하거나, 다시는 내가 했던 똑같은 실수와 일들을 생각하기조차 싫어합니다. 우리는 그 과거를 마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부모까지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는 그의 모든 꿈이 사실은 훨씬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꿈을 어떻게 꾸었습니까?
열 개의 볏짚단이 자기의 볏짚단에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밖에 나가 수레를 끌고 가면, 가는 곳마다 만나는 모든 애굽 백성들은 전부 엎드립니다. 절하는 정도를 넘어서, 수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걸어가거나 수레를 타고 가기만 하면 전부 다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열 명에게 절을 받는 것과 수십만 명에게 절을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왕인 바로가 그렇게 명령했기에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을 것이고, 그는 그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채색 옷을 입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좋아해서 사준 비싼 옷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높은 관리를 뜻하는 세마포를 입습니다. 권세를 뜻하는 옷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인정했던 야곱의 인정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애굽 왕 바로가 그에게 인장 반지를 줍니다.
그의 모든 권세를 그에게 이양하고 위임하는 자리에 그가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로얄 패밀리가 되었습니다.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고, 왕과 모든 이들이 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때 신문이 있었다면, 매일 특종은 요셉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전까지 죄수였고 아무도 알지 못했던, 요즘 말로 '듣보잡'이었던 이름 없는 한 인간이 갑자기 어느 날 총리로서 이름을 새기게 된 것입니다. 단 하루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은 토픽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옛날 일이고 왕의 권세가 세다지만,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이 상했겠으며, 얼마나 많은 애굽 관리들이 그를 욕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신문에 1면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요셉, 보디발 집에 갇혀 살던 죄수, 갑자기 총리가 되다!" 이것은 기자가 몇천 명 몰리지 않았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모든 행보는 다 이슈가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제사장, '온'에 살고 있는 제사장이란 말은, '온'이 애굽의 가장 강한 신인 '라(태양신)'를 섬기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 온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것 또한 큰 이슈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그런 모든 것을 성공으로 보지만, 사실은 따져 물을 만한 것이 많습니다. 어쨌든 그러나 요셉은 분명히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주함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성공에 도취되었거나 혹은 그렇게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과거를 다시 불러오십니다. 바로 왕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자, 너희들이 지금 곡식이 모자라서 어쩔 줄 모르고 먹을 것을 찾고 있느냐? 나한테 오지 마라. 요셉에게 가라. 그리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어느 왕이 자기가 당연히 모든 이들에게 베풀어서 자기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에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요셉이 가진 위치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위치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는 졸지에 많은 민족과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는 구원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아마 요셉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게 된 진짜 이유가 바로 그 다음 장에 나옵니다. 누구를 만날까요? 42장에서 형제들을 만납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잊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인생을 보는 관점 중에 가장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붙드셨다는 것이고, 그래서 결론은 "잊게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제들을 그 앞에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관에 따르면, 그 형제들을 누가 인도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가 그 일을 이해하게 되는 것인데, 하지만 그가 그 형제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42장이 아니라 45장에 가서야 일어납니다. 이것은 요셉이 '뒤끝이 있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가만 안 둔 것입니다. 계속 어려움을 줍니다.
그들이 총리를 만났으니까 절을 하지만, 요셉을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물론 17살에 헤어졌으니까 못 알아볼 수도 있고, 아니면 풍채가 너무 좋았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당연히 알아보고, 그들이 절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 즉 애굽에서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 말을 합니다.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절을 하니까 그때 비로소 꿈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전에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집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게 하셨다고 했는데, 형들이 나타나니까 그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드디어 내가 꾼 꿈이 기억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공으로 덮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로 일어났다면, 지금 요셉이 생각했던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누가 맞는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무언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하게 요셉은 지금 모든 것을 잊고 싶었고, 잊으려는 이유는 그 상처와 마주하기 싫었고, 그것을 자기의 성공으로 덮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그렇게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 이거 좀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리고, 가끔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운 일을 통해서 오늘 나를 만들어내신 걸로 이해하고 싶은데," 요셉의 생애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가 앞으로 더 다룰 이유들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다룰 것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과거와 여러분이 겪은 일을 여러분이 오늘 누리고 있는 일에 밑거름으로 쓰시지 않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거 다 써 가지고 너 오늘 부자로 잘 살아라, 너 오늘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런 일로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끄집어내어서 마주하게 하십니다. 내가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내가 만나기 싫었던 일이 오히려 자기에게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사람 문제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실패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정말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도망가고 싶었던 그 일들, 또 내 인생에서 "아, 이거야말로 내가 정말 인생에 망하는 날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너무 답답했고 그 일들 때문에 여전히 내 마음속 한구석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는 나의 과거들, 그 일들을 우리는 어떻게든 구석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지금 성공을 하려고 합니다. 왜? 그것을 보상하고 싶거든요. 내가 오늘 잘 되어야 내 과거의 아픔과 내 실패와 나의 모든 것들을 합리화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봐라, 내가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꼭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성공하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게 답이 아니다."
우리들은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간증은 다 그걸로 차 있습니다. 우리는 다 "과거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주님 믿고 열심히 노력했더니, 오늘은 내가 그 과거에 이런 사람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옛날 이야기를 할 때 누가 더 심각하게 나빴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누가 더 센 고생을 했느냐 하는 경쟁 심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버렸던 과거를 그렇게 해결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실패나 고통, 억울함과 상처들, 잊어버리고 싶은 그 시간, 주님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가 그 시간도 구원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저 덮어버린 것도, 흘러간 것도,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것도 아니라, "내가 그 시간조차도 구원했다"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그 과거를 잘라내서 잊어버리게 하고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의 과거조차도 구원하여 새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덮는 것의 위험성
여러분의 과거의 일들이 저주나 죄, 혹은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했고, 그 병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그 많은 순간들이 나를 가끔 수치스럽게 하고 놀라게 하며, 다시는 생각하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나는 그것조차도 네 몸 밖으로 던지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나에게 주기를 원한다. 내가 그것을 위하여 죽었으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예수를 보냈으며, 내가 그 시간조차도 구원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실패를 그냥 성공으로 덮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앞으로 또 실패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령 마지막에 다시 성공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인생의 마지막에 실패로 끝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마지막에 망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일은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만약 인생을 잘 살다가 마지막에 병이 되었건, 사업이 되었건, 경제적인 문제가 되었건, 혹은 자녀의 문제가 되었건, 결국 내 생각에는 실패처럼 끝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변해서 뭔가 좋은 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성공으로 실패를 덮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설명해 왔다면, 그 일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바울의 마지막과 구원의 의미
설마요,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제가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성은 모르고 이름만 아는데, 바로 바울이라고, 마지막에 말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물론 전설에 속하는 이야기지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 목이 일곱 번 굴렀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로마에 가면 일곱 번 구른 곳마다 교회를 세웠다는 등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설의 이야기이지만, 순교를 당한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에 잘 먹고 잘 살다가 순교를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말 그대로 추웠고, 헐벗었고, 굶주렸습니다. 전문 용어로 홈리스(homeless), 우리말로 거지라고 합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까지 그렇게 되었습니다. 실패했습니까? 그의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까요? 만약 성공이 실패를 덮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이고 신자의 삶이라면, 바울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보신 것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거나, 좌절했던 것을 고치거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통이 여러분을 흔들 수밖에 없기에, 불안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이 앞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없어서 염려하고 근심해야 하는 그 인생, 그리고 두려움과 좌절에 빠지던 그 마음을 주님께서는 건져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지, 정말 높은 자리든지 낮은 자리든지, 매일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고 아픈 자리든지, 혹은 심지어 건강해서 남보다 더 건강한 삶을 살든지, 그 어떤 일에 있든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오늘 우리가 찬양한 것처럼 예배하게 하는 것이고, 이 요셉의 이야기로 한다면 그곳에서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의 복 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인생의 열매
여러분, 요셉이 외치고 외쳐야 했던 것은, 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내가 성공했기 때문에 과거를 덮을 수 있다? 여러분,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존경하는 수많은 선교사님들 중 존경을 받아 마땅한 많은 분들은 그 인생을 너무나 험하고 실패와 같은 모습으로 마쳤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같이 유명한 사람조차도 그의 마지막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달랐습니다.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 같은 분들도 인도에서 많은 일을 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은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인생은 실패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을 건져내신 것은, 모든 이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고, 거역하고, 조롱하며, 우습게 여겨도,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며,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그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를 뜨겁게 한다는 그 사실이 그를 모든 좌절과 절망과 아픔과 구덩이 속에서 넉넉히 건졌던 것입니다. 그 복음이 여러분에게 알려진 복음이고,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이며, 여러분이 고백하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흙으로 빚어진 도자기
여러분, 우리가 도자기를 만들지 않습니까? 화려한 도자기를 좋아하시는 분은 많고, 멋있는 도자기도 많습니다. 이조 백자나 고려 청자 같은 것을 보면 "어떻게 이런 색깔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흰 백자를 만들어 냈을까" 하고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학창 시절 견학 가서 볼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더니, 미국 보스턴에서 백자와 청자가 하나씩 놓여 있는 것을 보니까, 외국에서 봐서 그런지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이야, 저런 그릇 하나가 이 큰 미국 땅에 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도자기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그 흙입니다. 그 흙을 처음부터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다 체로 걸러서 점토를 만들고, 그 점토를 주무르기 시작합니다. 주무르면 모양이 생기고, 무늬를 새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말립니다. 그쯤 되면 제가 도자기라면 "난 완성되었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전에 칼로 모양을 새기고, 무늬나 색깔을 위해 다른 흙도 집어넣고, 아주 예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리고 말립니다. 그러면 "아, 나는 이제 도자기 다 완성됐구나. 주님 부르시기만 하옵소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하고 싶은 똑같은 도자기가 드디어 됐는데, 곧바로 뜨거운 데다가 집어넣습니다.
그 처음에 집어넣는 것은 초벌이라고 해서 한 600도밖에 안 된답니다. 거기다가 집어넣습니다. 미치죠. 난리 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처음 초벌구이가 될 때 보면 다들 인생 끝난 것 같습니다. "주님이 이러실 줄은 몰랐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느냐" 모두가 같은 반응입니다. 주님이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가죠.
과거를 지우고 싶어 하는 마음
나와서 그다음에는 유액을 바릅니다. 바르고 드디어 반짝반짝 빛이 나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드디어 끝났구나! 바로 이거야!" 이렇게 내가 아름다운 도자기가 되기 위하여 그 어려운 순간을 지낸 것이지, 내 성공으로 과거의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죠. 그는 여전히 같은 흙입니다. 그 흙이 그 모든 것을 통과해 왔고, 그 흙이 그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흙이 도자기가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는 두 번째로 다시 한 번 뜨거운 데 들어갑니다. 그때는 한 1,200도 넘는 데로 들어간답니다. 그래서 도자기가 완성됩니다. 여러분, 그 도자기가 여러분 생각에 말을 할 수 있다면, 자기가 흙이었던 그 순간들을 부인할까요? "나는 흙은 아니야. 나는 그릇이야" 이렇게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흙을 잊어버리고 잘라내 버리고 도자기가 설 수 있습니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성공으로 여러분의 실패를 덮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실패한 나는 내가 아닙니까? 무너졌던 나는 내가 아닙니까?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나 변명을 갖다 대지만, 그것 때문에 흔들렸던 나는 내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그저 덮으면 그 모든 더러움이 거기서 냄새 없이 그냥 없어집니까? 썩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절대로 흙이 아닌 도자기가 아니고, 흙으로 이루어진 도자기입니다. 요셉은 그런 면에서 분명히 실수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그 같은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하실 줄이야 정말 몰랐죠. 이것이 하나님이 요셉과 다른 점이기도 하고,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는 놀라운 점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생각했던 '에브라임'이라는 그 열매는 아니었죠.
요셉이 마침내 깨달은 구원
그가 생각했던 것은 애굽 땅에서 성공한 열매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가 자기의 과거와 만나서, 그곳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내고, 죽을 수밖에 없던 그들을 먼저 죽음을 맛보았던 요셉을 통해 그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셨거든요. 그것이 이 스토리였습니다. 요셉의 열매가 아니라, 진짜 에브라임은 그 형제들 속에서, 이스라엘 속에서, 출애굽 속에서, 다윗 속에서, 그리고 예수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거든요.
여러분, 그래서 그는 처음과는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듯이 얘기하고, 그의 집에 가보지도 않았으나, 그가 마지막 죽을 때 뭐라고 얘기한 줄 아세요?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겠지만,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고 당신들을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맹세하시오. 내 뼈를 잊지 않겠다고, 나를 그곳에 같이 데리고 가겠다고."
멋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요셉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 죽을 뻔했습니다.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 드디어 나의 과거를 만났고,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하시는지를 알겠습니다." 요셉이 드디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과거라는 것이 버리거나 잊거나 덮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과거조차도 주님 안에서 받으시고, 그리고 그것을 구원하셔서, 상처가 아니라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안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키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뜻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거나, 실패했거나, 답답한 인생들이 여러분에게 왜 없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시거나, 혹은 어떤 때는 그저 잊어버린 채로 이 시간을 보내 오실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과거, 세우신 시간
반대로 "나는 그래도 성공했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내가 그렇게 잘난 척하던 시간들조차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그토록 비참하며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수치스럽고 창피했던 그 순간,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여 '내 인생에 이런 때가 있구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져야지' 생각하며 덮고 싶었던 그 순간조차도, 주님께서는 나라는 사람을 그대로 받으시고 나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 시간도 하나님이 구원하신 시간이며, 나에게는 실패한 순간이 아니라 구원받은 순간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좌절한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 시간이었으며, 나에게는 모든 것이 무너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는 실패와 무너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손길을 아는 순간,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아픔도 단순한 아픔이 아닙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무너짐도, 내가 겪고 있는 실패조차도 그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난 실패, 하나님을 만난 시간,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입니다.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여러분, 그래서 요셉이 고백한 것보다 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저 므낫세, 에브라임, '이제 살았구나, 나는 그래도 성공은 했구나'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의 모든 인생을 나는 구원했으며, 너의 모든 것을 받았으며, 너의 모든 인생을 사랑한다. 그리고 너도 그 인생을 알기를 바라고, 그 인생 속에서 사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고, 그 인생 속에서 즐거워하기를 바란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이 이야기는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너무나 확실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이 넓으며 얼마나 깊고도 높은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느 누가 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랑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충만함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이 여러분이 아시지만 너무나 중요한 구절입니다.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생각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요, 훌륭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인생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곧 시작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아픔조차도 주님을 만나는 그날, 그것이 어떤 영광을 이루어 냈는지를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 그 놀라운 진리를 누려 주십시오.
보배로운 예수를 채우십시오
심지어 여러분이 만일 "아, 그렇구나. 내 과거와 내 모든 인생은 다 아름다운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하더라도 막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그토록 아름다운 인생을 주님이 이루어 가시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박물관에 진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릇이 그릇다워지려면 사용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밥도 담기고, 물도 담기고, 술도 담겨야 합니다. 그것들이 모든 이들에게 마셔지고 쓰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릇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라고 깨닫고 기뻐하는 것, 그 진열대 위에 서지 마십시오. 나를 지금도 부르셔서 다른 이들에게 먹게 하고 부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십시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정말 힘을 다하여 권합니다. 반드시 여러분의 그 아름다운 그릇에 보배로운 예수를 채우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에게는 실패한 순간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그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잘될 줄 알았는데 잘 안 되었고, 그것에 어쩌면 우리는 묶여 있거나, 어떤 때는 덮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실망한 순간, 잊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과거로부터 진정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우리는 너무 자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왕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이제 요셉이 다시 그의 형제를 만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서 나의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셨던 그 순간을 이룬 귀한 그 시간들, 하나님이 구원하신 그 시간들을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실패의 순간이 아니라 주님이 구원하신 시간, 내 망했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 인생 전체가 다르게 보이게 하시고, 앞으로의 삶이 다르게 하시고, 내가 주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살아야 할 그 길이 다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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