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 37절로부터 45절까지 입니다.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집을 다스리라. 백성이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왕좌뿐이니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땅에서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땅을 순찰하니라.” 아멘.

 

하나님의 주권과 요셉의 깨달음

마침내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들려주었고, 요셉은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 냅니다. 바로가 같은 내용의 꿈을 번이나 겹쳐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이미 정하셨으며, 머지않아 속히 행하시리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대목에서 요셉은 내면의 깊은 울림과 깨달음을 얻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자신 또한 같은 맥락의 꿈을 꾸었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정하셨고 지금 순간에도 속히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요셉은 비로소 삶의 현장에서 깊이 체감하게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그저 우연히 흘러온 것이 아니며, 그가 견뎌온 모진 시간들 또한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은 단순히 앞날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하려 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섭리였습니다. 비록 요셉의 삶은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여정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눈물, 그리고 탄식과 아픔이 서려 있었으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었습니다.

 

과거의 요셉은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채색옷을 입고 귀하게 자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의지하던 모든 환경을 무너뜨리고 빼앗으셨으며, 결국 감옥이라는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굴곡진 인생의 순간마다 변함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다’는 진리입니다. 요셉은 시련의 현장을 통과하며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체득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의 의미

요셉이 바로 앞에서 담대히 말할 있었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꿈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꿈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리라는 소극적인 태도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을 보면, 그는 꿈의 해석을 통해 총리가 이후 실로 방대하고 치밀한 사역을 힘을 다해 감당해 냈음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입술을 통하여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받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미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온전히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지금까지는 인생의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성공과 실패 혹은 선과 악의 기준을 마음대로 정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삶의 모든 기쁨과 아픔조차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진정한 나의 주인이심을 믿고 순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은 결코 방관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의 방향으로 힘차게 나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모든 결과와 영광이 나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진정한 고백의 본질입니다. 결국 고백 안에는 지난날 내가 가졌던 삶의 관점을 철저히 수정하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바라보겠다는 깊은 영적 전환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관점의 변화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우리의 일상, 특히 자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고 학업에 정진하여 좋은 학교와 직장에 진학하는 것을 자녀 교육의 성공이자 부모의 자랑으로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녀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일을 삶의 가장 중대한 사명으로 삼게 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만 보였던 자녀가 유아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을 , 부모는 아이 또한 하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의 인생을 향한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이끌어가고 계심을 신뢰하기에, 부모는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게 됩니다. 자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인생의 행로를 함께 고민하고 찾아가는 동역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훈육의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단순히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꾸짖거나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하도록 돕는 초점을 맞춥니다. “너는 하나님의 뜻을 땅에 나타낼 고귀한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삶의 방향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아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녀의 미래를 염려하며 사랑으로 권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관점이 변화된 부모의 참된 모습입니다.

 

종교적 습관을 넘어선 진정한 신앙

이러한 변화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넘어 교회 생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공동체에 발을 들이며 신앙을 가졌다 말하면서도, 정작 교회를 일반적인 종교 단체 이상의 의미로 여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신에게 복을 빌면 신이 응답하여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기복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성경은 이를 엄격히 ‘우상’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러한 우상의 형상과 맞바꾸며,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인 오해하곤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출석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향한 마땅한 사랑이나 성도와 나누는 기쁨이 아니라, ‘이것조차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어렵다’는 의무감 때문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점차 메마른 종교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한 형식주의에 빠질 찬송의 감격도, 말씀을 대하는 태도도, 주님을 향한 마땅한 열정도 사라지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하나님보다 내가 원하는 , 내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먼저 충족시키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의 모습을 보십시오. 요셉이 일이라고는 사실상 마디의 진실을 선포한 것뿐입니다. 꿈을 해석하는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과정에 성령께서 역사하셨으나, 요셉이 스스로 고백한 핵심은 명확했습니다. 그는 바로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라는 진실을 담담히 전했을 뿐입니다.

 

세상의 중심을 흔드는 신앙의 진실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여 바로의 꿈을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닥쳐올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방책을 제시했습니다. 요셉의 지혜로운 제안에 크게 감동한 바로는 그를 극찬하며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바로는 “너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칭찬에 머물지 않고,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있으리요”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가 성령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을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하게 이유는 오직 하나, 요셉이 먼저 내뱉은 진실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선포했기에, 이방의 왕조차 모든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담백한 진실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왕을 흔들었고, 신하들을 흔들었으며, 나아가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요셉이 가졌던 진실 하나가 세상을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입술에서 진실한 고백을 이끌어 내시고 고백대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요셉의 13년이라는 세월, 아니 어쩌면 그의 30 생애 전체를 세밀하게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과 살아온 궤적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하실 있고, 때로는 감동적인 간증을 하기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생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진실은 무엇입니까? “나는 낯선 미국 땅에 건너와 이만큼 자리를 잡았고 이러한 직장과 터전을 일구었습니다”라는 것이 여러분의 진실입니까? “자녀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웠고, 이런 집에서 이런 차를 타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라는 외형적인 모습이 진정 여러분의 진실입니까? 아니면 “나의 힘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왔습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의 진실입니까? 우리가 품은 진실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는 세상을 뒤흔드는 능력 있는 삶을 수도 있고, 반대로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매몰된 무의미한 인생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성도의 참된 소망

우리는 흔히 “내가 것이 아니요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고백을 삶의 진실로 붙들고 인생을 돌아보고 계십니까? 진정으로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인생에 찾아와 함께하셨으며, 오늘의 나를 빚어오신 분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영원한 생명이시며, 유일한 구원이자 기쁨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진정한 소망이 맞습니까?

 

만약 이것이 우리의 참된 고백이라면, 복음을 듣고 십자가를 노래하며 입술로 주를 시인하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근심하고 흔들리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아프게 하며,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계십니까? 소망 없는 사람처럼 지쳐 있으며, 마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없는 자처럼 무력감 속에 머물러 계신 것입니까?

 

혹여 지난 주간의 삶이 너무도 고단하고 지쳐서 이곳에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러 오셨다면, 바로 여기에 진정한 하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여러분을 위해 땅에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의 힘이며 우리 삶의 진실입니까? 저는 복음이 여러분의 살아있는 진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의 죄가 되어 주신 예수님, 나의 회개가 되시며 회복과 완성이 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나의 눈물이 되어 주신 그분 덕분에 비로소 눈물을 닦아낼 있다는 고백,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요셉을 마주한 바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바로는 요셉이나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의 입술을 통해서도 놀라운 신앙의 진실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요셉의 고백은 바로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도대체 사람은 무엇을 의지하며 살기에 저토록 당당한가,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입술을 빌려 요셉 너머에 계신 , 요셉을 통해 예표하시고 장차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비록 바로는 영광의 실체를 보지 못한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라도, 그가 선포한 말들은 요셉을 거쳐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을 향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 성령에 온전히 감동되어 사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다른 별명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흔히 연약함을 핑계 삼아 하나님 앞에 응석을 부리곤 합니다. “하나님, 연약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죄와 싸우며 있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모든 것을 있음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시는 동안 오로지 성령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사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자신의 신적 능력을 스스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이라서 모든 일을 한다고 생각하느냐? 내게 본래 능력이 많아 힘으로 산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성령을 의지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역사하고 병을 고치며, 생각대로 말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주시는 말씀만을 전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신 방식이었기에, 주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실 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성령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며, 그분이 결코 당신을 홀로 두지 않으심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성령으로 사신 삶의 결실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인생의 참된 행복

요셉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또한 그러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향해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조차 다니엘의 모든 행보가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지금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참된 행복에 도달할 가능성이 그만큼 희박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식을 쌓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며, 계획한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부모의 기도대로 훌륭하게 자라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 할지라도, 가지 사실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감동하게 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의 영이 갈망하는 바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는 줄은 알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된다”고 토로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실 육신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육신은 쇠하기 마련입니다. 정작 우리의 문제는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습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우리의 육신이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은 여전히 자기 욕망에 강한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약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의 갈망을 따라 누리는 즐거움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두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영이 진심으로 갈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영의 소리보다 죄의 본성이 이끄는 유혹을 자주 따르곤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기에, 여러분의 영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탄식하며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답답한 마음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인 갈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없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소설가 김훈 씨의 사례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본래 공무원 사회에서 일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소설에 대한 열정을 꽃피우며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삶과 비교해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작가로 사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합니까? 바로 자신의 영이 원하는 일을 때입니다. 주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 주님의 이름을 번이라도 부르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할 , 말씀을 펼쳐 읽으며 속에서 세밀한 깨달음을 얻을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집니다. “주님, 제가 지금까지 잘못 살았군요”라고 고백하며 돌이키는 짧은 순간이, 사실은 여러분의 영이 가장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는 복된 시간입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없는 진정한 희락이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정말로 즐겁고 기쁜 인생을 살길 원하신다면, 여러분의 영이 이끄는 대로 사십시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하며 사람은 비로소 깊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은 직업이 되고, 원치 않아도 억지로 하는 일은 생계가 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기쁨이자 즐거움입니다. 일에 몰입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영혼이 그토록 원하는 일을 잊고 사십니까? 영적인 일에 전념할 우리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생동감을 느낍니다. 혹시 속으로 “목사님, 저는 그렇지 않은 같은데요”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제발 번만 시도해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목사님 말씀을 들었지만, 이번만큼은 15분만 성경을 읽어보겠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펼쳐보십시오. 여러분의 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두 번으로 당장 변화가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 번이라도 지속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영혼을 살리는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영혼에 어떤 갈망을 주셨는지 정직하게 마주해 보십시오.

 

하루,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영의 소망을 따라 살아보십시오. 신앙생활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즐거운지 깨닫게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중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졸음을 깨우려는 의도도 있지만,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흥분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억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일이 정말 좋아서 합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에 저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여러분 또한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좋다”는 수많은 찬송의 가사들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이며 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행복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미 선한 갈망이 심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자답게, 거룩한 원함을 따라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단련의 시간

본문에서 바로는 요셉을 인정하며 자신의 손에서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에게 끼워줍니다. 또한 세마포 옷을 입히고 목에는 사슬을 걸어줍니다. 여기서 '옷을 입히는 행위' 요셉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하는 매우 상징적인 대목입니다. 요셉의 삶은 아버지의 편애가 담긴 채색옷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요셉은 주변의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즐겼으며, 타인의 인정을 끊임없이 갈망하던 소년이었습니다. 형들이 일하는 곳까지 굳이 채색옷을 입고 찾아갔을 만큼,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깊이 존경하는 청교도 신학자 오웬(John Owen) 목사님에게도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영성 깊은 저작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전기가 쓰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오웬 목사님의 가장 특징 하나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몹시 바랐다는 점이었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신학자조차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욕구와 싸우며 얼마나 치열한 내면의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존심이 상했을 발끈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입니다.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단련시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의 장으로 부르셨습니다. 그의 인생은 인간적인 자존심이 철저히 무너지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토록 아꼈던 채색옷을 강제로 벗기시고 대신 종의 , 노예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던 자가 이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타인을 섬겨야 하는 비천한 신세가 것입니다. 한때는 인간적인 욕망의 노예가 법한 상황도 있었으나, 요셉은 고통스러운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노예의 옷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의를 넘어선 하나님 나라의 대사

우리의 신앙 여정은 요셉의 삶의 구조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도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은 존재하니 그분이 원하시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겠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 말입니다. 이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려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요셉의 인생 또한 겉으로만 보면, 자신을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 겉옷을 버려두고 도망친 행위가 율법적인 의로움을 지켜낸 것처럼 보일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 하나님 앞에 선하게 보이려 했던 수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끝이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히 법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선 놀라운 사명을 위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며 동시에 나라의 대사들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래에서 그분과 함께 동역하는 통치자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선포하며 속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어갈 ,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로 확장됩니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마디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이제 그중 마디를 줄이고 대신 상대를 세워주는 말을 건네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는 넓어집니다. 곤경에 처한 이들을 무심히 지나치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 시작할 , 여러분은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목격하게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순간이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히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다음가는 존재들입니다. 비록 땅에서 부릴 있는 수하가 없어 '2인자'라는 직분이 어색하게 느껴질지라도, 여러분은 엄연히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며 주와 함께 노릇 하게 것입니다. 거룩한 신분과 사명을 잊지 말고,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 당당히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름과 옷을 입은 성도의 영광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칭호이자 위임이며, 동시에 우리의 능력이요 기쁨입니다. 이러한 섭리는 요셉이 새로이 부여받은 이름인 ‘사브낫바네아’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름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살아 계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요셉에게만 주셨겠습니까?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름이기도 합니다. 요셉의 삶을 온전하게 완성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요셉처럼 고난을 받으셨으나, 요셉이 미처 이루지 못한 구원의 역사를 십자가에서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마지막 요셉이며, 마지막 모세이자 마지막 아브라함으로서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주님께서 모진 고난을 견디며 모든 일을 이루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귀한 유익과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는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본래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일은 오직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며, 은혜를 누리는 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말씀하시며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나의 이름을 너의 이마에 쓰리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권능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에 있으며, 이름이 바로 우리의 소유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좌절과 절망, 비참함과 실패를 상징하던 낡은 죄수복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주님의 인장 반지를 손에 낍니다. 세상의 허무한 권력을 쫓는 ‘반지의 제왕(Lord of the Ring)’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반지(Ring of the Lord)’ 끼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왕의 반지를 끼워 주시며 우리를 존귀한 자녀로 맞아 주십니다.

 

장면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와 무척 닮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우며 “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맞이하던 모습처럼, 지금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통하여 요셉을 높이시는 과정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요셉이 누린 영광의 자리가 바로 여러분의 자리라고 말입니다.

 

겸손으로 걷는 왕의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부름받은 존재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 깊이 알게 되셨다면, 복과 은혜의 깊이가 어떠한지를 더욱 힘써 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여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왕이니 세상아 덤벼라” 하는 식의 오만한 태도로 살고 계신다면, 저는 단호히 말씀드립니다. 절대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해서는 됩니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마치 자신이 호랑이인 행세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등에 업고 권세를 자신의 유익이나 자랑을 위해 사용해서는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스스로를 장식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십시오. 진정한 왕이시면서도 친히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어린 양’이라 불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기꺼이 함께 서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토록 겸손하게 사셨는지, 어떻게 철저히 성령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걸어가셨는지를 묵상하며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끝없이 자신을 낮추신 주님과 함께 여러분도 낮아지십시오. 그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여러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여러분을 어떻게 높이시는지, 땅에서 여러분을 어떻게 지키시며 영광스러운 이름에 걸맞은 자로 빚어 가시는지를 기대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을 괴롭히는 눈앞의 문제나 어두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거룩한 이름의 권능으로 살아가십시오. 세상의 어떤 어둠과 비참함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도 하나님의 이름 하나를 절대 이길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같고 삶의 의미가 퇴색해 보이는 찰나일지라도, 예수의 이름은 모든 환난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바로 능력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머물고 있음을, 그리고 거룩한 이름의 권능 아래 있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요셉과 함께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진실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이 영광 받으시는 복된 자리에 굳건히 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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